LOGIN소품실 근처를 지나던 허지안은 안에서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무심코 발걸음을 멈췄다.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시아가 안나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허지안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처음엔 그저 시아가 평소처럼 안하무인으로 주변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대화의 전말을 다 듣고 나니 상황이 단번에 정리되었다.‘시아가 너무 착해서 문제지. 그동안 저런 애를 어떻게 옆에 뒀던 거야? 안나 저거 완전 악질이네. 뺨을 맞아도 싸지.’드레스 사건도 시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괜히 사람을 오해했나 싶어 허지안은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다.시아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허지안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레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이제 막 송하나를 찾아 나서려던 참인데 소품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안나가 악에 받친 표정으로 튀어나왔고 하필 고개를 든 곳에는 허지안이 서 있었다.제일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참한 밑바닥을 들켰다는 생각에 안나의 이성이 끊어졌다.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을 쏟아낼 대상을 찾았다는 듯 허지안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며 쏘아붙였다.“여기서 다 엿듣고 있었지? 내 꼴이 웃겨? 이제 속 시원해?”처음에는 엿들었다는 사실에 움츠러들었던 허지안이었지만 안나의 뻔뻔한 태도에 금세 표정을 바꿨다.그녀는 눈썹을 까딱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억지 부리지 마시죠. 누가 나쁜 짓 하라고 협박이라도 했어요? 시아 선배를 위한다는 핑계로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남 해코지하다 들킨 거잖아요. 자업자득이지 누가 누굴 탓해요?”“진짜 말 그대로네요. 생긴 건 뻔뻔하고 하는 짓은 추잡스럽고 꼴에 욕심만 많아서는!”허지안은 한 걸음 다가가 안나에게 뼈 때리는 일침을 날렸다.“정신 차려. 그렇게 속 좁고 교활한 데다 계산기만 두드려대니 우진 선배는 물론이고 누가 너 같은 애를 좋아하겠어?”허지안의 비수 같은 말들에 안나의 마지
“굳이 아니라고 발뺌할 필요 없어.”시아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다.“우리 꽤 오래 붙어 다녔어. 네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무슨 속셈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최우진이랑 어떻게든 엮이고 싶어서 내 취향이며 동선까지 그 주변 사람들한테 흘리고 다녔잖아. 아니야?”시아는 명실상부한 예술대 여신이었다. 뛰어난 외모와 독보적인 실력 덕분에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학생들은 줄을 섰다.하지만 워낙 철벽인 데다 온 신경이 학업과 피아노에만 쏠려 있어 남자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다가갈 틈을 찾지 못한 남자들은 결국 시아의 주변인인 안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안나에게 잘 보이면 시아에게 닿을 길이 열릴 거로 생각한 것이다.그간 안나가 남학생들에게 밀크티나 초콜릿을 받고 연애편지까지 대신 전해주는 것을 보면서도 시아는 일일이 관여하지 않았다.어차피 그 편지들의 종착역은 항상 쓰레기통이었으니까.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아를 짝사랑하던 남학생 하나가 마침 최우진과 꽤 친한 사이였다.안나는 최우진에게 닿고 싶다는 욕심에 그 남학생에게 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팔아넘겼다.그맘때쯤 시아는 가는 곳마다 그 남학생과 마주치고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통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시아가 딱 잘라 거절 의사를 밝히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소란은 끝이 났다.시아의 추궁에 안나는 시선을 회피하며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니, 그건... 난 그냥 그 애가 인품도 괜찮고 조건도 좋으니 네가 좋은 인연을 놓치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 거야. 다 너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고.”“내 감정을 왜 네 멋대로 결정해?”시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전엔 네가 생각이 짧아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 다 넘어갔어. 널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까 넌 처음부터 내 뒤통수를 칠 생각뿐이었네. 오늘부터 절교야. 너 같은 애랑 친구 안 해!”말을 마친 시아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그녀를 등지고 차갑게 돌아섰다.안나는 순간 사색이 되었다. 당황한 기색으로
안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찰진 귀싸대기 소리가 소품실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시아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안나의 뺨을 단호하게 후려쳤다.이에 안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고개가 꺾였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뺨 위로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뺨을 필사적으로 감쌌다.동공이 아찔거렸고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왜 때려, 시아야!”평소 시아의 곁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던 그녀였기에 이 갑작스러운 폭력으로 당황스러움과 분노, 그리고 깊은 혼란에 휩싸였다.시아는 그런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조금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고 싸늘한 목소리가 실망감을 담아 흘러나왔다.“뻔한 연기는 그만해. 하나 드레스는 왜 망가뜨린 거야?”시아가 차분하게 추궁했다.“무슨 소리야? 난 아무것도 몰라.”안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시치미를 뗐다.그녀의 완강한 부정에 시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 화면을 켰다.선명하게 녹화된 CCTV 영상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백스테이지 분장실에 CCTV가 있다는 걸 몰랐나 봐?”시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무대 올라가기 전에 사람 시켜서 영상 받아봤어. 거기에 네 모습이 아주 똑똑히 찍혀 있더라. 하나 드레스를 망가뜨린 게 바로 너였어.”자신의 행적이 발각되었음을 깨달은 안나는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아니 그게 아니라 난 그저... 다 너를 위해서였어! 정말이지 송하나 너무 별로야! 걔가 우리 학교 오고 나서부터 네 모든 걸 다 가로채잖아.”“학교 축제 때 네 무대도 빼앗았고 이번 교류회에서도 네 몫인 스포트라이트를 다 뺏어간 거 아니야? 사람들 전부 걔한테만 시선이 쏠리잖아!”“난 너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서 대신 화풀이라도 해주고 싶었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나를 위해서라고?”시아가 나직이 그 말을 되뇌었다. 모든 게 터무니없고 실망스러울 뿐이었
연주가 끝나고도 긴 여운이 공연장을 맴돌았다.전 객석이 2초간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천둥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함성은 잦아들 줄 몰랐다.송하나와 시아는 손을 맞잡고 함께 인사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었다.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감탄 섞인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와, 합주 진짜 미쳤다! 역시 우리 학교 양대 산맥이네. 실력에 비주얼까지 다 갖췄잖아!”“시아 선배야 원래 잘하는 거 알지만 송하나도 전혀 안 밀리는데?”“둘이 기 싸움 하느라 불협화음 날까 봐 걱정했거든? 웬걸, 합이 너무 좋아서 보는 내내 소름 돋았어. 나 이 조합 응원할래!”무대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두 사람이 무대 뒤로 퇴장했다.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자 송하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고개를 들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굳게 고정되었다.백스테이지 입구, 심성빈이 희미한 불빛 속에 말없이 서 있었다.말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긴 여정의 피로가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에는 어느새 더없이 부드러운 온기가 가득했다.그는 오직 송하나만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송하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감정이 그녀의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성빈 씨! 어떻게 여기에...”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과 함께 믿기 힘든 감정이 묻어났다.한편 심성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애틋했다.“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내가 어떻게 빠질 수가 있겠어.”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송하나는 곧장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그 순간, 심성빈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부드러운 그녀가 가슴팍에 와락 안기면서 등 뒤의 상처가 끔찍한 통증과 함께 다시 찢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뼛속까지 저릴 듯한 통증이었지만 품 안에서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모든 아픔을 기꺼이 감내하게 했다.그는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을 삼키며 송하나를 놓지 않고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지도 교수님이 출연자들에게 공연 의상으로 갈아입으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허지안은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나섰다.“하나야, 넌 먼저 탈의실로 가 있어. 내가 분장실에서 드레스 챙겨올게.”“고마워, 지안아.”허지안이 분장실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앗!”송하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황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왜 그래, 지안아?”허지안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떨며 공연용 드레스를 받쳐 들었다.“하나야, 이 드레스 좀 봐...”송하나가 시선을 내리자 공들여 맞춘 드레스의 허리 옆 라인이 누군가 고의로 찢어놓은 듯 길게 벌어져 있었다. 올이 풀리고 원단이 해진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다.이 드레스는 송하나가 이번 무대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옷이었다.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0분, 지금 와서 다른 드레스를 대여하거나 수선하는 건 불가능했다.그러나 망가진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은 공연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자칫하면 송하나 본인도 망신을 당하고 더 나아가 학교의 위신까지 떨어트리게 된다.허지안이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내가 직접 여기 걸어둘 때만 해도 멀쩡했어! 갑자기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 누군가 악의를 품고 망쳐놓은 게 틀림없어.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 거야? 정말 질 나쁜 인간들이네!”소란스러운 기운에 지도 교수님이 다가왔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교수님! 하나 드레스가... 누군가 고의로 찢어놨어요!”사태를 확인한 교수님이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걸 어쩌지?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데.”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공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바로 그때, 등 뒤에서 시아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실은 제가 공연용 드레스를 두 벌 준비했어요. 다른 한 벌은 완전히 새 건데 하나 너랑 사이즈가 비슷할 것 같아. 너만 괜찮다면 일단 급한 대로 내 거 입어.”허지안은 순간 경계
반복되는 연습 속에서 송하나와 시아의 호흡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어느덧 국제 예술 교류회 날이 밝았다.강현의 어느 병원.심성빈은 지난 일주일간 최선의 약물치료와 가장 앞선 치료법까지 동원했지만, 등 뒤의 상처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고작 일주일 만에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그럼에도 심성빈은 퇴원을 고집했다. 타협의 여지조차 없는 단호함이었다.방금 재검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깊게 주름진 미간 사이로 보고서를 노려보며 걱정스럽게 만류했다.“심 대표님, 등 쪽 상처는 겉만 겨우 아문 겁니다. 속은 전혀 붙지 않았어요! 이 상태로 장거리 비행이라니요. 기압 차에 기체 흔들림까지 겪다 상처가 터지기라도 하면 이차 감염은 물론이고 평생 후유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의사의 간곡한 당부에도 심성빈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망설임 없이 퇴원 서류에 서명했다.“모든 결과는 제가 책임집니다. 병원과는 무관하니 그만하시죠.”의사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가 책임 소재를 명시한 서류에 펜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곁에 서 있던 고여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들을 향한 애틋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 고여 있었다.“성빈아, 겨우 한 차례 공연일 뿐이야. 앞으로 기회는 많아. 하나도 속 깊은 아이라 네가 못 와도 이해해 줄 거야.”아픈 몸을 이끌고 그 먼 길을 떠나겠다는 아들을 붙잡고 싶어 간절히 설득했지만, 줄곧 침묵하던 심용군이 손을 내저으며 체념한 듯 말했다.“됐어, 내버려 둬.”송하나를 위해 그토록 가혹한 매질까지 견뎌낸 아들이니 이번에도 기어코 갈 테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고여진은 결국 체념한 듯 거듭 당부할 뿐이었다.“성빈아, 부디 몸조심하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무리해서 참지 마. 알았지?”심성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을 나서자마자 그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깔끔한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