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예무부 디자이너들이 잘게 쪼개지는 발소리를 내며 서둘러 가림막 뒤로 물러섰다.중앙궁 별실의 넓은 가림막 안쪽, 세레인은 제 손에 쥐여진 고급 실크 드레스 자락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화장품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제 얼굴은 낯설었고, 허리를 조여오는 코르셋은 숨통을 턱턱 막히게 했다.“……저, 폐하.”세레인이 조심스럽게 가림막 틈새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를 불렀다. 카르안의 붉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그녀를 향했다.“응, 세레인. 사이즈가 맞지 않아?”“그게 아니라…… 제국의 귀족 영애들도 아닌 고작 시녀인 제가 이런 드레스를 입고 대공의 연회에 참석하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베르탄 공작 각하께서 아시면 기절하실 겁니다.”어떻게든 이 미친 동행을 무르고 싶어 시릴 베르탄의 이름까지 팔아보았지만, 카르안은 되려 피식 실소를 터뜨릴 뿐이었다.“시릴이 고작 그런 일로 기절할 리가. 그리고 넌 짐의 ‘개인 시녀’ 자격으로 공식 수행하는 거니 법도에 위반될 건 없지.”카르안이 일기장을 엄지로 튕겨내듯 두드리며 잔인하게 쐐기를 박았다.“아니면, 대공의 연회 대신 지금 당장 이 일기장에 적힌 ‘까만 대가리 정신이상자’라는 단어에 대해 황실 모독죄로 처벌을 받고 싶어?”“……아닙니다! 제가 끝까지 성심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세레인은 단박에 꼬리를 내리며 가림막 뒤로 머리를 처박았다. 저 얄미운 황제가 이 족쇄를 아주 야무지게 써먹을 작정임이 분명했다.그 시각, 황궁의 대연회장은 마치 제국의 영광 자체를 옮겨놓은 듯 찬란했다. 천장은 눈부신 황금빛과 보석 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회장 한편에서는 악단이 장엄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고, 무희들과 공연단이 황제의 행차를 앞두고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었다.황제의 입장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연회장 내부의 분위기가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다.연회장 입구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오브리엔 공작가의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레이나 오브리엔이었다
달빛이 창백하게 퍼진 뒷골목에서, 검은 외투를 두른 사내가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복면을 깊게 눌러쓴 그는 주변을 신중하게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디켄 오브리엔 공작이었다.복면의 사내는 망설임 없이 외투 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우편 관리인 하나 매수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디켄은 조용히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인을 뜯고 안의 편지를 꺼내자, 꼼꼼하게 눌러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받는 이: 칼데론의 베르나 마을 식료품점, 마델렌 아주머니][보내는 이: 리베르츠 가, 리나]그 아래 접힌 편지지 하단. 누군가 손에 힘주어 적은 글자가 디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레인.다음 날, 오브리엔 공작저의 비밀 회의실.테이블 위에는 뒷골목에서 가로챈 편지와 함께, 칼데론 왕국의 가계도 기록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디켄은 마침내 한 페이지에서 손가락을 멈추며 낮게 읊조렸다.“세레인 드 아르빌.”맞은편에 앉아 대조 작업을 돕던 자렐 오브리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아르빌? 저는 처음 듣는 가문입니다만.”“그럴 만도 하지. 몇 년 전에 완전히 몰락해 멸문당한 칼데론 왕국의 백작가니까.”디켄이 수년 전 칼데론과의 거래 장부를 자렐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자렐은 아버지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며, 얼마 전 전달 받은 전황 보고를 떠올렸다. 리하우와의 충돌 소식. "얼마 전 북부 국경지에서 기사단과 리하우 놈들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리하우 쪽에서 심어둔 첩자일 수도 있습니다.""그럴 수도 있다. 칼데론과 분쟁 중이니 제국의 황제 곁에 붙일 눈과 귀가 필요하겠지. 정체가 탄로나면 곤란하니 일부러 끄나풀을 접근시킨거고...... 애초에 저 아르빌 백작가가 내통하던 반역자 무리였으면 더더욱이다."자렐이 조소 어린 미소를 띠고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아버지, 만약 이 가설이 맞고, 저 천출 계집 배후가 리하우 왕국이라면......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운 시릴 베르탄과
그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세레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짓눌렀다. 붉은 입술이 그의 손가락에 밀려 힘없이 벌어지자, 카르안이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상체를 바짝 밀착해왔다. 그의 단단한 몸이 세레인의 가슴을 단단히 압박했고, 허벅지 아래로 맞물리는 열기에 세레인은 숨이 턱 막혔다.세레인이 굳어버린 틈을 타, 그의 길쭉한 팔이 다시 서랍 손잡이로 향했다.딸깍.불길한 마찰음과 함께 서랍이 당겨지는 순간, 세레인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으으응……!”세레인은 비명 대신 콧소리를 내며 카르안의 목을 왈칵 끌어안았다. 그리고 제 허벅지와 엉덩이로 열리려던 서랍을 거칠게 밀어 닫아버렸다.평소 같으면 닿는 것조차 질색하는 여자가 제 발로 가랑이 사이에 올라타 매달리는 꼴이라니. 카르안의 머릿속에 불쾌한 가설이 스쳤다.이 정도로 숨기려는 게 대체 뭐지? 설마 그 망할 기사 놈이랑 연서라도 주고받은 건가.질투로 얼룩진 카르안의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기색에 세레인이 움찔하는 찰나, 카르안이 세레인의 턱을 돌려 잡고 거칠게 입을 맞추어 왔다.“으읍……!”괘씸해서 벌을 주려는 듯 숨을 집어삼킬 듯한 진한 키스였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릴 것 같은 자극 속에서 세레인은 숨을 헐떡였다.세레인이 흥분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 카르안의 한 손이 세레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은밀하게 움직였다.스윽.그의 긴 손가락이 닫혀있던 서랍을 가볍게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노트를 낚아챘다. 입술을 살짝 뗀 카르안은 세레인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며, 훔쳐낸 노트를 세레인의 품에 슥 쥐여주었다.“이걸 그렇게 숨기고 싶었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레인이 번쩍 눈을 떴다. 품에 닿는 겉 종이 질감을 확인한 세레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뒤 재지 않고 노트를 바닥으로 확 내던져버렸다.그러나 그 짧은 찰나마저 불운했다. 세레인이 평소에 가장 자주 펼쳐 들여다보았던, 유독 손때가 탄 페이지가 활짝 펼쳐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세레
저 인간은 정말 한다면 하는 미친 놈이다. 이 시녀 숙소 복도 한복판에서 제 진짜 이름인 '세레인'을 죄수 이름 부르듯 외쳐댈 게 뻔했다. 결국 세레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잠금장치를 풀었다.딸깍.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세레인은 반사적으로 문을 꽉 눌러 닫고 잠갔다. 마찰음이 유독 선명하게 방 안을 울렸다.카르안은 제 집안 안방이라도 되는 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레인의 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와 침대에 유유히 걸터앉았다. 우월하게 긴 다리를 가볍게 꼬며 그가 세레인을 올려다보았다.“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더니. 숨바꼭질치고는 너무 싱겁게 끝난 거 아닌가, 세레인.”유려한 목소리가 세레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세레인은 문고리를 눌러닫고 재차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폐하. 여기는 시녀 숙소입니다. 시녀들 시선이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셔야죠.”"나한테 원피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그건, 그땐 폐하가 세 살배기 공자님이셨으니까 그렇죠. 지금은 제 머리보다 한참 더 위에 계시잖아요.”억울한 듯 입을 삐죽이는 세레인의 모습에 카르안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카르안이 시선을 내려 세레인의 손목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차 안에서 제 송곳니로 살짝 긁어내렸던 그 자리가 아직 미세하게 붉었다. 카르안이 침대 시트를 툭툭 치며 말했다.“이리 와.”“......안됩니다. 거리가 좁아지면 위험하다는 건 동네 꼬마들도 압니다.”“셋을 세기 전에 오는 게 네 신상에 좋을 텐데. 셋, 둘…….”'하나'가 나오기 직전, 세레인은 마지못해 쭈구리처럼 허리를 숙이고 다가와 침대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카르안은 그 꼴이 우스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세레인의 눈가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카르안이 상체를 슬쩍 일으키며 세레인과 눈을 맞췄다. 다정한 듯하지만,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이 풍겼다.“너 얼굴이 안 좋은데. 혹시 누구 만났어?
냄새? 오염? 내가 무슨 역병이라도 된다는 거야? 카르안이 했던 말보다 더 잔인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말이었다. "오브리엔 공작가요?" 숙소로 돌아온 세레인은 동료 시녀 에나의 방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속이 상해서 도저히 맨정신으로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세레인의 물음에 에나가 토끼처럼 눈을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 "리나, 설마 디켄 공작님이랑 마주친 거예요? 아니면 레이나 영애? 세상에 표정 보니까 보통 일이 아니었나 보네." 에나는 세레인의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는 지방 남작가의 영애라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사교계의 거물들에 대한 정보는 잘 알고 있었다. "조심해야 해. 오브리엔 공작가는 권세가 강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예요. 디켄 공작님은 무역국장인데 상무회 의장직을 노리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요. 오브리엔가는 제국으로 들어오는 어지간한 사치품 유통권을 다 쥐고 있어요. 그 밑에서 자란 레이나 영애는 오죽하겠어요? 아 그리고 오라버니인 자렐도 세력 키우고 있다고 하고요." 세레인은 아까 온실에서 들었던 비천한 냄새라는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멸시였다. 고작 두어 번 짧게 마주쳤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본인은 태생부터 고결한 존재고, 나는 존재 자체로 세상을 더럽히는 오물인 양 치부하던 그 눈빛.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하녀 출신이라서? 아니면 폐하의 옆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했지만 무력감이 더 컸다. 에나의 말대로 그 여자는 제국의 정점에 선 공작가 영애였고, 자신은 이름조차 가짜인 도망자일 뿐이니까. 그래. 싸우던 뭘 하던 누가 내 편을 들어주겠냐? 게다가 나는 정말 혼자인데. “에나, 저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나 같은 남작가 출신도 저들 눈엔 평민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일걸요.
황궁의 성문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마차 안에 몽글몽글한 공기가 일렁였다. 세레인의 무릎 위에서 숨을 내뱉던 카르안이 돌연 묵직한 무게감으로 변하며 그녀의 하체를 압박했다.“……아!”세레인은 숨을 들이켰다. 카르안은 긴 다리를 무릎 세워 구부린 채, 세레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카르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황제의 조막만한 손을 잡고, 레이스 셔츠가 잘 어울린다며 깔깔대던 기억이 비현실적인 꿈처럼 멀어졌다.하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세레인의 허벅지 안 쪽으로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저……폐하,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세레인이 당황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카르안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에는 입을 맞췄던 때와 같은 열기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왜 아까는 그렇게 꼭 껴안고 다니더니, 갑자기 멀어지네.”그는 세레인의 허벅지 위로 제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나른하게 읊조렸다. 아이의 모습일 때 보여주던 그 다정한 온기를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세레인은 당황해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그건, 그때는 폐하께서 작으셔서 제 품에 쏙 들어오셨으니까요.”“작다고?”카르안이 피식 웃으며 우월하게 긴 다리를 쭉 뻗어보였다.“지금은 저보다 한참 크시죠.… 그런데 폐하, 키가 정확히 몇이세요?”“글쎄, 최근엔 안 재봤는데. 191이었나.”“191이요…?”세레인이 입을 벌리고 놀라자 카르안은 그 모습이 즐거운 듯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입술 근처로 끌어당겼다.“앞으로도 아까처럼 해. 알겠지?”그는 세레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척하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여린 살갗을 살짝 긁어 내렸다. 세레인이 숨을 들이켜자 카르안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었다.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카르안은 자연스럽게 세레인을 에스코트하며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와 경호들이 절도 있게 길을 텄다.입구에는 최측근인 시릴 베르탄과 행정부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