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세레인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야생동물이 나올까 봐 쫄깃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이제는 눈앞에 펼쳐질 기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 정신 차려! 일단 배부터 채우고… 그다음엔 일자리를 알아봐야지.”
그녀는 바구니 속 마델렌이 싸준 빵 덩어리를 꺼내들었다.
“음, 제국은 부유하니까 하녀 월급도 훨씬 셀 거야. 운 좋으면 귀족가 대저택에 취직할 수도 있고!”
세레인은 머릿속으로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큰 저택의 하녀가 되어 따뜻한 방에서 잠들고 남는 시간에는 맛있는 제국 음식을 사 먹는 상상.
“그래! 거기다 제국은 넓으니까 칼데론의 그 지긋지긋한 얼굴들을 마주칠 일도 없을 거고. 나만 잘하면 여긴 정말 낙원일지도 몰라!”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세레인은 강가의 항구 마을에서 배를 탔다. 유려한 곡선의 발테리움 제국의 여객선은 마치 귀족의 마차처럼 우아했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에 마음을 뺏긴 세레인은 알지 못했다. 방금 전 누군가의 삶을 가볍게 짓이겨버리고 온 남자가 바로 그녀가 살아야 할 이 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도착한 곳은 루메데스, 발테리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황궁의 외부 연회가 열리는 지역이었다.
정교한 첨탑과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과 화려한 풍경. 넓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여관의 안주인은 그녀에게 제국 연회 하녀 모집 공고를 알려주었고 세레인은 기대를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
듣기로는 무려 숙식에 옷까지 제공해준다고. 타국에서 하는 일이라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살벌한 귀족가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거기다 베르나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해왔다.
입구엔 많은 여성들이 줄을 서 있었고 모두 긴장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인은 자신을 아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놓이는 것을 느꼈다.
“이름이 뭐죠?”
“리나입니다.”
“나이는요?”
“스물둘입니다.”
“출신은 어디인가요?”
“칼데론 왕국 베르나입니다.”
면접관들의 시선이 낯선 그녀를 낱낱이 훑어내리는 듯했다.
낡은 옷차림에 발테리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억양, 하지만 눈빛은 맑아보였다.
“하루 10실바르, 연회 삼일 이후 나흘 근무로 70실바르 지급됩니다.”
세상에 10실바르? 잘 못 들은건가?
세레인은 떡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며 속으로 계산했다.
저 정도면 따뜻한 여관에서 넉넉히 머물 수 있다! 새 옷도 몇 벌 살 수 있고!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사히 면접을 마쳤다.
***
어떻게 또 붙었다? 후, 진짜 다행이다! 바로 외부 연회장 준비라니 벌써부터 다리가 아플 것 같은 기분인데.
“안녕. 난 마사야.”
“난 리나야. 스물둘이고 잘 부탁해.”
"하녀로 일 해본 적 있어?"
“하녀 일은 처음인데 난 시골에서 왔거든. 시골에선 별의별 일 다 했지.”
마사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왔다.
그녀는 남작가에서 하녀로 오래 일했다고 했다. 그녀는 곱슬한 갈색 머리에 재치 있는 입담의 소유자였고 손놀림도 빨라 하녀장의 예쁨을 받았다.
며칠 후 북소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문 앞은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갑옷을 갖춰 입은 근위병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 정적의 중심에는 발테리움의 황제 카르안이 서 있었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자신의 소매 끝에 달린 커프스 버튼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천장까지 높게 솟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연회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폐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차분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안은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검은 망토가 바닥을 스치며 곡선을 그렸다.
"가자."
그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발테리움 제국 귀족들이 입장했다. 귀족 여성들은 각자의 호위자나 동반한 귀족 남성과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알릭스 듀란트 후작이 단정한 걸음으로 들어섰고 이어서 로델 무르젠 후작과 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이 차례로 뒤따랐다. 그들의 발걸음이 붉은 융단을 차례로 채웠지만 어쩐지 정적은 더욱 깊어졌다.
누구도 먼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모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텅.
긴 장검의 날이 바닥을 울리는 신호음.
의식용 입장 신호였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십니다!”
그 한 마디에 공기 자체가 바뀌었다.
모든 이들이 일제히 멈췄고 미세한 긴장감이 공간 전체를 휘감았다.
연회장의 장막 안.
하녀들은 입장 직전의 귀족 손님을 위한 잔이나 접시, 간단한 음식을 담은 트레이를 들고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세레인 역시 가느다란 유리잔 몇 개가 놓인 트레이를 조심스레 들고 서 있었다.
누구도 크게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안에서도 그 긴장감이 전해졌다.
장막 안쪽의 하녀들 사이에서도 흠칫 놀라며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레인은 본능처럼 고개를 들어 장막 너머 붉은 융단 위를 걷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방금 전 입장한 귀족들을 단숨에 잊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 순간 마치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크고 곧은 체격 위로 황금 자수가 놓인 검은 망토가 어깨 위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밤처럼 짙은 제복은 날렵하고 절제된 장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그 어둠 안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얼굴. 높고 반듯한 콧날,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매끄럽고 차가운 듯한 피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조각상, 아니 그보다 더 이질적인 무언가 같았다.
세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하고 삼켰다.
…미쳤다. 저게 진짜 사람이야?
잠시, 눈과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지? 나 보고 있는 거 아니지?
그의 시선은 짧았지만 분명 장막 안에 서있는 자신을 향해 닿아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을 다물 수도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툭.
세레인의 손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졌고 트레이가 살짝 기우뚱하며 유리잔 하나가 기울어졌다.
쨍그랑!
잔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장막 안을 가르며 퍼졌다. 조각 일부는 근처 장식 천을 건드렸고 뒤에 있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황제의 걸음이 딱 멈췄다.세레인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매우 이례적이긴 합니다.”시릴이 손을 떼어내자, 위험도, 국가적 재난, 집착 따위 같은 단어들이 즐비하게 칠판에 적혀있었다.“폐하와 이 기사는 나이대가 비슷한 거 외에는 신분부터 기질, 성격 뭐 하나 비슷한 점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녀 또한 그에게 상당히 의지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그래. 차라리 저쪽이 황제보다야 가능성이 높지. 리베르츠 남작은 뒤집어지겠지만.“카르안은 아쉔 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응수했다.”아니. 국경 넘어올 때부터 제국 소속이니 내 것이다. 원래부터 내 시녀인 걸 저자가 뺏어간 거지. 시릴, 계속 말해.”시릴은 고개를 왼쪽으로 젖히며 판서를 훑기 시작했다.“흠흠, 문제는 저렇게 다쳐와서 시녀에게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서적 안정감 이런 것이 다비안 경이 가진 것들이고요. 아, 눈웃음도 있네요.“”기사가 실실 눈웃음이나 치고 다니는 건 정신이 해이한 거지. 폐하, 자고로 남자의 매력은 내 여자를 지키는 듬직함에서……”“나한테 없는 게 죄다 저 놈한테 있다고?”카르안이 반듯한 이마를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시릴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이내 결론을 적어내렸다.[폐하께서 다비안 경의 행동을 모방]신입 기사의 행동 모방이라니. 하지만 헛소리라 일축해 버리기엔, 머릿속에서 세레인이 저를 앞에 두고 그 기사를 바라보던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무엇에 흔들리고, 무엇에 약한지 명확했다. 카르안은 한참 내용을 바라보다가 시릴에게 질문했다."시릴, 지금 내가 무섭게 생겼나?""음…… 무섭다기보다는요, 폐하. 아니 무서운 게 사실입니다. 워낙 용모가 출중하고 키가 크시니, 보통의 시녀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맹수 앞에 놓인 토끼처럼 겁을 먹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더 다정하게 다가가시는 건 어떻습니까?"다정함.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부드러운 언사를 골라 쓴다라. 자신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면 그것은 곧 목을 쥐기 위함이었는데 말이지.스스로의 입꼬리를 비틀어 올
다비안의 시야에서 황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그는 세레인을 내려다보았다."팔……!"세레인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팔을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치료실로 달려가야 할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채 옮기지 못한 채, 카르안이 사라진 복도 저편을 불안한 눈빛으로 힐끔거렸다.통로 멀리에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있던 아쉔 대공과 시릴 베르탄이 서 있었다. 아쉔은 시릴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공작, 따라와라."아쉔이 발걸음을 옮기고, 시릴은 그 뒤를 따랐다.세레인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고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다비안을 부축하듯 이끌기 시작했다. 기사단 치료실로 향하는 길, 다비안은 여전히 제 팔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레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너……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다음부터는 그러지마.""……제가 좀 심했으려나요?"세레인은 그제야 이곳이 황궁 안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것도 황제의 친위대와 아쉔 대공, 시릴 베르탄 공작까지 지켜보는 앞에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으니."공자님이야말로…….""응."오늘 자신이 없었다면 다비안 공자님이 어떤 끔찍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내가 그분 성정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난 회복되는 대로 다시 북부로 갈 거고, 넌 또다시 혼자 남는 걸. 네가 제일 걱정 돼.""저는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리고 아마도 저를 해하시진 않을 거예요. 공자님, 이리로."다비안의 겉옷을 벗기기 위해 세레인은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아픈 팔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였다.그리고 그녀는 두터운 붕대를 풀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공자님, 아프면 바로 말해주세요."세레인은 다비안의 팔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감겨 있던 붕대를 한 겹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원래 며칠 전 입었던 화살 상처가 아물어 가던 중이었으나, 아까 카르안이 뿜어낸 마력 압박 때
카르안이 다가올수록, 길게 뻗은 복도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열기 힘든 압박감이 서리기 시작했다.그는 그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세레인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폐하아...! 잠시 얘기를 나눈 것 뿐인데 벌레라니요.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제 생각보다 대담하게 맞서는 세레인의 모습에 다비안이 그녀를 숨기려는 듯 자신의 몸을 틀어 그녀를 가렸다.그리고 그 행동은 같은 남자가 보기에 명백히 보호 행위로 느껴졌다.카르안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다비안을 내려다봤다."다비안 경, 세레인과 무슨 관계지?"다비안은 잠시 침묵했다. 황제가 세레인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별다른 명분 없이 남작가의 하녀를 갑작스럽게 이관시켰을테고. 머릿속에 여러 계산이 스쳐 지나갔지만, 작고 여린 여자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생각을 잠재워버렸다."저희 가문에 있던 아이입니다."그 한마디는 카르안의 인내심을 조용히 바닥냈다. 과거형임에도 다비안이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치 카르안 자신과 리베르츠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것처럼."그 이상으로 보고 있는게 아닌가?"다비안은 다시 한번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세레인에게 시선을 던졌다.자신을 위해 울먹이는 맑은 눈동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리나.접경지에서도, 훈련장에서도 몇 번이고 떠올랐던 해사한 얼굴.그래, 나는 어쩌면 너를 처음부터 가문의 아이로 보고 있던게 아닐거다. 그리고 그걸 이 이상 숨기는 게 의미가 있을까?"제가 좋아했습니다."그 한마디에 세레인의 눈이 벙찐 듯이 커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비안의 연한 푸른색 눈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다비안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같습니다.”“......네?”세레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공자님.”예상했던 상대의 마음이었지만, 그로 인해 둘 사이에서 애틋한 연인의 기류가
겉으로 보면 고요해보이는 호숫가. 다비안은 청력에 집중했다.긴 수풀이 옷에 스치는 소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다비안은 바위 뒤에 몸을 밀착한 채, 거친 숨을 억지로 삼켰다.대략 열명 안팍.통신도 끊긴 채 고립된 곳에서 그의 결정은 명확했다. 살아 돌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묻힌 것의 정체를 제국에 전달하는 것.다비안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검이 그의 뺨을 스쳤다. 카앙!마찰음이 울리자마자 다비안은 상대의 팔을 세게 가격했다. 중심이 무너진 적의 급소에 단검을 박아넣었다.시체가 바닥에 닿기도 전, 등 뒤에서 창이 찔러 들어왔다. 다비안은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리고 장검을 뽑아 등을 베었다.두 번째."놈이다!"숨어있던 나머지 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 두 발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다비안은 바닥을 구르며 피했지만, 한 발이 그의 오른쪽 팔뚝에 깊게 꽂혔다.푹!선명한 핏줄기가 옷을 적셨다. 다비안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냈다.나무가 많은 숲에서는 숫자가 오히려 독이었다. 그는 아군과 뒤엉키게 만들어 적들의 시야를 가리는 전략을 택했다.하지만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팔이 저릿해지며 시야가 조금씩 흔들렸다.아직 둘 남았다.다비안은 비틀거리며 검을 쳐내고, 몸을 회전시키며 적의 옆구리를 베었다. 콱!거대한 대검이 적의 상체를 동강 냈다. 부단장 칼릭스였다. 그를 뒤이어 기사단이 몰려왔다.칼릭스는 피투성이가 된 다비안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다비안! 괜찮냐?"다비안은 이미 자신의 옷을 찢어 팔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지혈을 마친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했다."괜찮습니다. 부단장님, 땅 속을 보십시오."다비안은 땅 속을 가리켰다. "넌 아프지도 않냐? 일단 한 명 와서 부축해라."칼릭스는 흙을 파헤치고 파편을 집어 들었다."스읍...... 이건 에레브노스의 흔적인데."젊은 축에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어 침실 안은 희뿌연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세레인은 카르안의 몸에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카르안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세레인의 허리를 감싸 쥐고, 제 안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폐하아...! 너무 버겁다니까요......!" 부피감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레인이 그의 아랫배를 꾹 밀어냈지만, 카르안은 오히려 엉덩이를 더 단단하게 붙잡았다. "하아,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 세레인은 그의 탄탄한 배를 찰싹찰싹 때리며 투정을 부렸다.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데 뭘 어떻게 적응해요?! 폐하, 이러다 우리 밤 새겠어요. 이제 그만 쉬어요......!" 카르안은 그 대답이 귀엽다는 듯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세레인은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기댄 채, 카르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제국의 고귀한 공녀도 아닌 타국 출신인 자신을 향한 이상할 정도로 과한 집착. 그의 의중을 읽어보려 눈을 맞추던 세레인이 잠시 고민하다 카르안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카르안은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동그란 뺨을 혀로 훑어내렸다. 세레인이 간지러워서 '꺄악'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카르안의 입가도 호선을 그렸지만, 이내 레이나가 그녀의 뺨을 때렸던 일이 떠오르며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별난 귀족 영애들 틈에서 얕보이지 않으려면 무엇부터 가르쳐 줘야 할까? 카르안은 품 안에 얌전히 안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햇살이 좀 더 길게 드리워지고, 먼저 눈을 뜬 카르안은 한동안 말없이 세레인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속눈썹 아래 고른 숨결과 베개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함께 잠든 어젯밤 내내 이상하리만치 불안했다. 그녀를 안고 있고, 온기를 느끼고 있어도 그랬다. 더 가까이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은 이미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정말 이것뿐인가? 사람 하나에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다비안 경이, 다비안 경이 아직 복귀하지 않았습니다!"히아트가 땀에 젖은 채 내달려 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부단장 칼릭스는 지휘봉을 책상에 툭툭 치며, 시계를 확인했다. 해가 저물어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시간이 몇 신데 아직 복귀를 안 해?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곳이 어디야?"히아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북쪽 자레니 호숫가입니다. 다비안 포함 여섯 명이서 인근을 순찰하고 저희는 돌아왔는데, 그는 지형을 더 살피겠다며 자리를 옮겼습니다. 분명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했는데……."칼릭스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호숫가는 고요했다. 다비안은 짧은 단검을 꽉 쥐고 숨을 죽였다.며칠 전부터 새벽에 간혹 보이던 작은 인영. 지난 번의 선제 도발은 물론이고, 접경지의 분위기로는 호의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호수 근처, 흙이 뒤집힌 자리에 다가서자 주머니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전령구가 지직 소리를 내며 연결이 끊겼다."함정인가?"다비안의 연한 푸른 눈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는 아카데미 시절 익혔던 마력 반응을 떠올리며 지면 쪽에 코를 가까이 댔다. 흙냄새. 폭발물 특유의 화학적인 향이 아주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검으로 땅을 파헤쳤다. 한참을 파내니 깊은 구덩이에서 그을린 금속 파편이 드러났다. 다비안이 반듯한 미간을 구기며, 천천히 파편을 살펴봤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형체. 그 찰나였다. 슉-!등 뒤에서 날아든 화살이 그의 옆을 스쳤다. 다비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큰 바위 뒤로 숨었다. 긍지 높은 기사로서, 적의 기습에 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적의 동태를 살폈다. 설령 기습으로 제 몸이 이번에 죽는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이 침략의 증거는 제국에 알려야만 했다.*** 세레인의 숙소.세레인은 카르안의 눈치를 보며 빨래감 속에 제 속옷과 옷가지들을 재빨리 숨겨버렸다."폐하, 왜 자꾸 이곳으로……. 폐하의 궁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나 좀 부르지 말라고……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바람이 옅게 감돌던 루메데스의 밤.은은하게 깔린 조명 아래에서 값비싼 가면을 쓴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세레인은 손에 트레이를 든 채 구석에서 몸을 반 쯤 숨기듯 서 있었다.정원 구석 나무 그림자 사이. 시선은 아래로, 숨소리는 얇게, 이제는 익숙해진 하녀의 자세였다.그 순간.귀족 몇몇이 허리를 숙이며 한 인물을 향해 길을 비켰고 그 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 검은 천 위에 금빛 자수가 반짝이는 제국의 문장이 선명했다.황제였다. 아무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를
“우와... 너무 예쁘다.”세레인은 연회장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벽의 눈부신 장식들은 베르나의 조용한 돌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이었다.천장이 어찌나 높고 반짝이는지 마법 조명도 너무 신기해 한참이나 바라봤다.여러 계절이 뒤섞인 듯한 공기와 자연의 향기가 섞여 숨이 막힐 정도로 화려했다. 연회 전후로 이곳을 통과하는 인원들이 많아 하녀들은 대부분 이곳에 배치되었다.세레인은 홀 바깥, 연회장을 드나드는 입구 쪽에서 하녀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금빛 천을 정리하고, 식기를 옮기며 바삐 움직이던 와중이었
얼었던 땅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봄이 가까워지자 작은 마을 베르나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도 이전보다 분주해지고 있었다.“성문 근처에서 검문이 시작됐다더라.” “진작부터 불안했지. 국경지대에 병사 늘린 것도 그렇고…” "제러드, 당신도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요. 저번에 필리도 가게에서 불시검문 당해서 그 다음날에야 겨우 집에 왔다고 했잖아요." "아니, 내가 또 뭘 언제 늦게 돌아다녔다고 그래!?" "우리 동네는 조용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사람들 틈을 지나며 물건을 사던 세레인은 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