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편의점 오전 알바와 방구석 웹소설 연재를 오가며 온갖 인생의 억까를 버텨온 29살 최가민. 어느 날잘생기고 예의바른 청년을 보며 차기 소설 소재감이 번뜩하며 퇴근 만 기다렸는데 그 순간,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겪지 않을 사고로 눈을 떠보니――. 하필이면 자신조차 생각지 못할,퓨전 사극 느낌의 설정도 복잡한 '청연국'의 귀족이었다. 게다가 빙의된 몸은 그 복잡한 세계관 속에서 유부녀 신분이라니? 심지어 집안의 남첩까지 들여야 하는 기가 막힌 상황. 4대귀족 탑티어 '연가(連家)'의 차기 가주로서 다정한 남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몽글몽글하고 유쾌한 순간들만큼은 나쁘지 않다. 전생의 억까 경험을 활용해여전히 개썅마이웨이로 신드롬을 일으키는 여주! 이세계 인생 2회차의 힐링 로맨스 라이프!
View More제1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은 무슨?억까 당해도 절대 안 들키는 표정 관리다. 옘병.”
올해 29살 최가민은 바코드 스캐너를 고사리만한 손으로 꽉 쥔 채 속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155센티미터에 45킬로그램. 편의점 카운터 아래에 서 있으면 간신히 머리통만 내밀고 있는 것 같은 이 작은 체구의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방어기제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민은 눈앞의 인간을 향해 영혼을 완벽히 소거한 동태눈과 투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손님, 증정품은 교환이 불가능하십니다.” -최가민(주)
“아니, 씨 아니 ,이사람아 내가 2플러스1 상품을 너한테 샀잖아! 근데 난 딸기맛은 존나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이 증정품 딸기우유를 저기 있는 바나나우유로 바꿔 달라는 게 왜 안 된다는 거야? 진짜 일머리가 없네 …그러니까 여기서 알바나 하지! 답답하니까 너말고 대신 사장 나오라그래!”
오전 9시 52분. 출근길의 전쟁터가 한 차례 휩쓸고 간 편의점 내부에는 이른 아침부터 당 수치가 한계치까지 떨어진 게 분명한 ‘증정품 빌런’이 불결한 침을 튀기고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쉰 고개를 훌쩍 넘긴 배만 불쑥 나온 지저분한 잠옷차림,남자는 가민의 작은 체구를 만만하게 본 것이 분명했다. 목청을 돋우며 카운터를 탁탁 두드리는 손가락에는 손톱에 때가 거뭇하게 껴 있었다.
극단적인 내향인(I)인 가민은 타인과 대치하는 매 순간마다 수명이 5분씩 단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고, 당장이라도 카운터 아래로 기어 들어가 갈등을 어떻게든 숨고 싶다는 회피형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의 가민이었다면 그저 입술을 깨물며 타인의 화난 표정에 멘탈이 털려 눈시울을 붉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가민은 2026년을 살아가는 어엿한 자린고비 프로페셔널이자, 플랫폼 단독 계약으로 데뷔작을 연재하기 시작한 신인 웹소설 작가였다.
가민은 남자의 이목구비, 짓이겨진 운동화 뒤축, 억지를 부릴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왼쪽 눈썹의 움직임을 뇌내 메모장에 정밀하게 박제했다.
‘입체감 없는 전형적인 소인배 빌런 타입. 대사 톤은 징징거림 40%에 분노 조절 장애 60%.
지보다 약해보이는 사람만 골라 화풀이시전하는 1회용 단역감.
다음 주 화요일 연재분에 등장할 타락한 마을 문지기 캐릭터 스킨으로 딱이네. 개이득.감사요 ’
상황을 ‘인물 탐색’과 ‘웹소설 소재 수집’으로 치환하는 순간, 눈앞의 진상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무료로 제공되는 고품질의 캐릭터 소스일 뿐이었다.
“규정상 포스기에서 인식이 되지 않아 결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손님. 정 원하시면 본사에 민원을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까지 기계처럼 차분하고 건조한 톤을 유지하자, 남자는 혼자 죽일듯이 째려보며 씩씩대다가
“에이, 씨! 됐어!! 더러워서 안 먹어!” 하고 딸기우유를 카운터에 내팽개치듯 던지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딸랑-.
“좋은 하루 되세요, 손님.”
남자가 나간 빈자리를 향해 기계적인 인사를 건넨 가민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지만 급발진 어깨빵 안맞은 게 다행이니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가민은 카운터 구석에 숨겨둔 스마트폰을 켜 연재 사이트의 작가룸을 확인했다.
[조회수 1,205], [추천 45]. 아직은 바닥 위에 갓 올라온 신인 작가의 비루한 지표였지만, 가민은 이 작은 숫자를 보며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머리를 쥐어짜며 매일 밤 모니터 앞에서 하얗게 밤을 지새워야 하고, 시놉시스는 다 설계하고 연재하지만 당장 다음 화의 전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피가 마르는 고통이 따랐지만,
나 혼자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지어 매달 받는 정산은 나름 짭짤했다.
그리고…… 전 직장에서 겪었던 그 지옥 같은 집단 생활에 비하면 이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가민이 인간관계에 완벽하게 학을 떼고, 그 방어기제로 인해 지금은 연락하는 친구조차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아웃사이더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불과 4년 전, 학습지 센터 선생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은 전형적인 여초 조직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남편 이야기,자식이야기를 주요 주제삼아 커피를 마시고 치킨을 시켜 먹을 때까지만 해도 가민은 그저 평범한 직장 생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실상은 거대한 일진이 못된 이진들의 서열 전쟁터였다. 교사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파벌과 라인이 존재했고, 그들은 시시각각 편을 가르고 정치질을 일삼았다. 가민의 성격은 태생적으로 중립이었다. 나 살기도 바쁜와중에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고, 그저 내게 주어진 아이들을 성실히 가르치고 내 몫의 일만 깔끔하게 끝내고 퇴근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이란 사악하게도, 말을 아끼거나 중립을 지키려는 자를 가장 먼저 회유하고 뜻대로 안되면 적으로 규정하곤 했다.
“가민쌤, 이번에 새로 온 은정선생 있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오른다더니 하는 거 보면 은근히 얄밉더라. 국장님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뒤에서는 학부모들 엄청 꼬시나봐 …들어보니 미혼이였을 때 일잘해서 사업국에서 눈도장찍었다던데 여기 센터 메인해준다고 불렀대잖아.참나..가민 쌤은 어떻게 생각해 ?여긴 우리가 더 오래있었는데 불공평하지않아?”
센터의 실세였던 고참 교사가 가민을 구석으로 불러내 슬쩍 미끼를 던졌던 그날, 가민이 보기에 새로 온 김 선생님은 그저 본성이 착하고 성실할 뿐인, 열심히 사시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지들의 시꺼먼 속내와 밥그릇 싸움 때문에, 다수가 모여 교묘히 한 사람을 철저하게 조져버리려는 전형적인 ‘갈라치기’이자 ‘억까’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던 가민은 선을 그었다.
“글쎄요, 저는 관심없는데요.”
그 정중한 선긋기가 화근이었다. 그날 이후 센터 내부의 공기는 소름 끼치도록 싸하게 가라앉았다. 대놓고 딜을 넣거나 앞담화를 하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 가민이 대화에 끼어들면 은근히 말을 끊거나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를 피하는 전형적인 은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가민은 묵묵히 참았다. 어차피 가정방문 교사였기에 하루에 센터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1~2시간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버티고 내 회원들 수업이나 가자’라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던 어느 날, 가민의 담당 동네(바운더리)에 살던 한 학부모로부터 수학교재 문의가 접수되었다.
신규 입회를 위한 무료 테스트 겸, 일명 ‘영업’을 하러 학부모의 집으로 찾아간 날이었다.
학습지 교사들에게 학부모는 곧 법이자 매출이었기에, 가민은 최대한 친절한 태도로 아이의 테스트를 마치고 입회신청서를 작성했다. 문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계약을 성사시키고 난 뒤, 주간 방문 시간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터졌다.
아이 엄마는 거실 소파에 거만하게 등을 기대앉은 채, 다짜고짜 가민의 얼굴에 명령조로 말을 뱉어냈다.
“선생님, 우리는 목요일 저녁 6시만 돼요. 무조건 그때로 시간 잡아 줘요.”
목요일 저녁 6시. 가민의 머릿속 캘린더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 시간은 이미 기존 회원들의 수업이 빽빽하게 차 있는 황금 시간대였다. 게다가 동선 상 그 집으로 가려면 뛰어가도 이동 시간만20분이 넘게 걸려 전체 스케줄이 완전히 꼬여버리는 상황이었다. 가민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어머님, 정말 죄송하지만 목요일 저녁 6시는 이미 기존 아이들 수업이 있어서요. 한 시간 뒤로 미루시거나, 다른 요일로 조율은 어려우실까요?”
“내가 왜요? 난 그때밖에 시간 안 나는데? 선생님이 기존 애들 시간을 바꾸던가 해서 맞춰와야지, 내 자식 스케줄을 왜 남한테 맞춰요? 그냥 해주세요 1과목10분이라면서요,선생님이 젊어서 그런지 유도리없으시네.”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식만 중요하다고 억지를 부려댔다. 가민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갔다.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지만, 철저히 사무적인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기존 회원분들께 조율이 가능한지 여쭤는 보겠지만, 확답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기대는 하지 말아 주세요.”
차갑고도 건조한 끝인사를 남기고 돌아선 다음 날 오전. 가민은 여느 때처럼 센터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가민의 발걸음이 멈춰 선 것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국장의 낭창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예 , 지호 어머님! 예예, 어제 최가민 선생님이 방문하셨죠? 아, 예? 선생님이 너무 사무적이고 친절하지가 않으셨다고요? 본인은 시간 조율을 맞춰 주려고 생각 했는데 선생님이 먼저 귀찮다는 듯이 굴어서 기분이 상하셨다…….”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국장의 난감 플러스 아부 섞인 통화 내용. 어제 그 진상 엄마가 센터에 전화를 걸어 가민을 ‘불친절한 교사’로 낙인찍으며 허위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마침 교무실 안에는 평소 가민을 은근히 따돌리던 고참 교사들과 파벌 무리들이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그 통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가민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인내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심하고 회피형이었던 가민의 깊은 내면에 쌓여있던 억압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가민은 문을 부서질 듯 쾅 열고 들어가 국장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국장이 깜짝 놀라 폰을 쥔 채 가민을 바라보았지만, 가민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가민은 국장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향해, 수화기 너머의 진상 엄마가 듣든 말든 악에 받친 목소리로 급발진을 해버렸다.
“어머님! 자기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은 안 귀합니까?! 지호 어머님 자식만 중요해요? 나한테는 이미 기존 회원 자식만 20명이 넘게 있어요! 그 어머니들은 바보 멍청이라서 제 동선 맞춰서 시간 조율해 주는 줄 아십니까?! 내가 안 가면 그만인데, 왜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친절 타령에 요구질을 하고 자빠졌어요?! 정 억울하면 교재만 집으로 우편함으로 받던가, 싫으면 지호 데리고 직접 센터 오셔서 여기 담당 쌤한테 수업 받으시던가요!!”
가민의 벼락같은 고함에 센터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전화를 끊지도 못한 국장은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고, 마침 출근하며 가민을 투명인간 취급하려던 정치질 교사 세 명은 서류 뭉치를 든 채 조각상처럼 멈춰 섰다. 그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 저 가민쌤은 얌전하고 소심한 게 아니라, 건드리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친 또라이였구나.’
인간들의 서열 사회란 참으로 기묘해서, 만만해 보이면 떼로 몰려와 물어뜯지만 예상 불가능한 미친년같이 할 말하며 쪼대로 살면 알아서 ‘별종'이라 치부하며 피해버린다.
그 가공할 만한 급발진 사건 이후, 센터 내에서 가민을 은근히 따돌리던 무리들은 더 이상 가민을 건드리지 못했다.
가민은 다시 스캐너를 쥐고 담배를 결제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 바닥은 실적에 대한 압박과 학부모가 곧 법인 더러운 세상이었지.’
조직 사회와 인간관계의 그 지독한 위선에 정이 완전히 떨어진 가민에게 있어, 지금 혼자 책임지고 아무 참견없이 혼자 자신만의 상상적 설계로 글을 쓰는 이 웹소설 작가라는 직업은 그야말로 고독하지만 안전한 요새였다.
비록 오늘도 오전 편의점 알바를 하며 잔잔바리 별 볼일없는 진상들과 입씨름하고 있었지만, 최소한 소속감의 유대를 강조하면서 뒤에서 칼을 꽂는 인간들의 갈라치기 뒷담화는 없으니까.
가민은 작은 체구의 어깨를 으쓱이며 다음 진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중요한 건 절대 꺾이지 않는 마음, 그리고 혼자서 존버정신으로 감당해 내겠다는
수많은 억까를 당하고 눈물로 맞바꿔 겨우 얻어낸 독기였다.
제 36화 비파 덕후 가주를 위한 두 무사의 선물연가의 집무실, 오늘도 어김없이 괴이한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뚱땅, 뚱땅, 콰광!비파의 선율이라기보다는 전장에서 방패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었다. 월린은 비파 위에 밥주걱을 세워 쥔 채, 온몸으로 락 스피릿을 불태우며 비파의 현을 사정없이 뜯고 있었다.하지만 가주의 독특한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악보까지 구상했던 예음조차 눈가에 미세한 실룩거림이 일었다.'그래... 내가 가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맹세했거늘... 저것 또한 저분만의 깊은 뜻이 있겠지...'머리로는 이해하려 애썼지만, 귓가를 강타하는 이색적인 타격음 앞에서 도저히 성자의 경지에 오르기는 힘들었다.그녀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이 웅장한(?) 연주가 끝나기만을 경건하게 기도할 뿐이었다.연가 집무실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고요하고 우아한 비파의 선율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연무장에서 땀을 식히며 지나가던 연호와 유현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창호지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흡사 징을 치거나 전장에서 방패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소리였다. 두 무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가주께서 즐거워하시는 그 '음악'이, 비록 세간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두 사람의 눈에는 그저 눈부신 광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월린의 기행을 깎아내리려는 연가의 외부 세력이나 시기하는 눈초리들이 언제 어디서 혀를 찰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형님."유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무뚝뚝한 그의 말투에는 가주를 향한 맹목적이고도 처절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가주님께서는 가주님만의 세계를 구현하시는 중입니다. 허나, 저 밥주걱이 월린님의 고귀한 손을 더럽히고,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가주의 체통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손끝은 이미 검집을 꽉 쥐고 있었다."옳은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가주님의 그 열정을 가장 완벽하게 뒷
제 35화 현의 선율과 검의 궤적 정자 위에 자리를 잡은 월린은 그 광경을 보며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사실 월린의 머릿속은 현재 연가의 훈련장이 아니라, 과거 웹소설 작가 시절 밤을 지새우며 써 내려갔던 무협지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그래, 바로 저거야. 연호가 왼쪽에서 공격을 흘리면 유현이가 오른쪽 빈틈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들어오는 저 흐름! 저건 단순히 검술이 아니야. 두 무사 간의 관계성이 쌓인 서사지, 서사! 서로를 믿지 않는 척, 무심한 척하면서도 실상은 위기의 순간에 등을 맞대고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저 묵묵한 브로맨스! 이게 바로 무협의 낭만 아니겠어? 현실에서 직관하는 맛은 차원이 다르구나!'월린의 눈동자가 오타쿠 광기로 번뜩였다. 뇌내에서는 이미 연호와 유현이 겪을 험난한 고난과, 그 과정에서 피어날 끈끈한 유대, 그리고 비극적인 서사까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월린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망상을 이어갔다."캬, 좋다! 저 찰나의 눈빛 교환! 저게 바로 '쌍벽'의 진수지. 연호의 검이 호랑이라면 유현의 검은 용이라. 둘이 합쳐지면 가히 천하무적일 것이야. 저 조합이라면 독자들 반응은 무조건 폭발인데... 하필 이 세계엔 웹소설 플랫폼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월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무장 아래에서 두 무사는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유현은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예리한 눈빛으로 연호의 등 뒤를 살폈다."형님, 셋을 셀 때 공중으로 도약하십시오. 제가 하단을 휩쓸겠습니다.""알았다."단 세 마디의 대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호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내리찍자 유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회전하며 상대의 하단을 쓸어버렸다. 연호의 검이 회전할 때 유현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빈틈을 채웠다. 둘의 검이 맞물리며 발생하는 금속음은 규칙적이고도 위협적이었다. 제 형님의 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었다. 월린은
제 34화 ‘어머니’라는 어두운 그늘 연가의 정문 앞, 평화롭던 공기가 소란에 휩싸였다. 정문 수문장들이 문 앞의 여인과 사내들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서 연가를 올려다보던 은교는 비단옷을 걸치고도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내가 연호의 어미다! 왜 가주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 거냐!"연호가 연가에 들어간 뒤로 은교의 삶은 통째로 변했다. 연호가 매달 부치는 돈으로 집안은 살만해졌고, '연호의 본가'라는 소문 덕분에 침선가는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은교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녀에게 연호는 가문을 일으킬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훈련 중 소란을 듣고 달려온 연호는 정문 앞의 은교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꺼이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악몽이 현재의 평온을 침범하고 있었다."연호야!"은교는 아들을 보자마자 계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대박이 났다. 이제는 옷감뿐만 아니라 상단들도 우리를 찾더구나. 연호야, 이젠 엄연히 차기 가주의 남첩 아니냐? 대상단이라던 정실 남편 분은 육촌까지 특혜가 있다던데, 우리가 연가의 인맥을 빌려 무역권을 따내면 우리도 금방 대상단이 될 거다. 당장 가주에게 말해라!"연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흉터가 남은 손바닥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곁에서 유현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은 연호를 걱정하면서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어머니,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일 수 없습니다.""허락? 내가 네 어미다! 네가 내 덕에 사람 구실하고 사는 거 아니냐? 그까짓 가주가 뭐 대단하다고 유세냐!"분을 못 이긴 은교가 연호의 뺨을 치려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그 찰나, 유현이 움직였다."악!"은교의 손목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다가온 유현이 은교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의 눈빛은 서늘했다."어머니라고 하셨습니까."유현의 말투는 건조하고 딱딱했다. 그는 은교를 보지도 않은 채 손목을
제 33화 흉터를 들여다보는 시선연가의 식사 자리는 늘 북적였다. 가문의 세력만큼이나 식탁 위는 풍성했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온기를 채워주는 것은 차기 가주인 월린과 좌우에 나란히 앉은 연호와유현이었다. 그들은 월린의 가장 든든한 방패이자, 차가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였다.월린은 양옆에 앉은 두 사내의 커다란 손을 하나씩 덥석 잡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자, 오늘 반찬은 태원 씨가 특별히 보내준 고기 요리야! 우리 대장님들, 이 넓은 저택과 나를 지키려면 덩치 유지하는 데 이 정도는 당연히 먹어줘야지."월린의 엉뚱하면서도 다정한 행동에 연호와 유현은 익숙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녀의 밝은 표정 이면에 문득 멈춰 선 시선을 눈치채곤 눈빛을 가라앉혔다.월린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연호의 왼쪽 손바닥이었다. 젓가락을 쥔 손바닥 한가운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얗게 뒤틀린 흉터가 유독 도드라져 있었다. 훈련 중 스치듯 생긴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아주 깊고 무자비한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렸던 처절한 흔적이었다.유현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지켜보았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말없는 아픔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밤이 깊어가고, 월린은 결국 연호를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달빛이 창호지 문을 비추는 고요한 방 안. 월린은 달콤한 설탕 과자가 담긴 접시를 연호에게 밀어주었다. 연호가 긴장한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자 하나를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연호, 이거 먹어봐. 오늘 시장에서 가장 달콤한 걸로 구해온 거야."자연스럽게 과자를 먹여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커다란 왼쪽 손을 펼쳤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바닥,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흉터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월린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났다."이거... 옛날에 엄청 아프지 않았어? 무사 훈련 중 생긴 흔한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