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미가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통화를 마친 나희연이 다가왔다.이혜정이 말했다.“그래. 너도 나가려고? 그럼 네 새언니 좀 태워다 줘.”“잘됐네요! 어차피 나가는 길이었으니까 새언니 픽업은 저한테 맡기세요. 번거롭게 송 기사 아저씨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요.”“그래. 잘됐네.”나희연과 차우미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 본가를 떠났다.가족이기는 하지만 각자 바쁜 사람들이다 보니 평소에 만날 일이 많지 않았다. 모임 때 말 몇마디 건네본 게 전부였다.그녀와 나희연의 관계가 그러했다.두 사람은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었다. 명절 때나 만나서 안부를 나눈 게 전부였다.운전하는 중에도 나희연은 업무 전화로 바쁘게 보냈다.조수석에 탄 차우미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겼다.이혼 얘기를 친정에 꺼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양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차우미가 나상준과 결혼하게 된 계기는 할아버지 대에 쌓은 인연 덕분이었다.그녀의 할아버지는 아주 예전에 나동석 회장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뜨고 회사가 잠깐 주춤하면서 연락이 끊겼지만 이혜정은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차우미가 이혜정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할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에서였다. 마침 그녀가 일하는 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매일 시간 내서 할아버지를 돌봐주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할아버지 병실을 찾아갔는데 그때 낯선 할머니가 한분 와계셨다.그 할머니가 바로 나상준의 할머니, 이혜정 여사였다.그렇게 알고 지낸지 반년이 흐른 어느 날, 할아버지는 이혜정에게 아주 괜찮은 손자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차우미에게 물었다.그렇게 둘의 혼사가 성사되었다.사실 차우미는 결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나이도 비교적 어린 편이었고 아직은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그렇게까지 추천하니 적당한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렇게 이어진
“쿨럭!”여가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먹던 커피를 뿜었다.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연신 기침했다. 차우미는 서둘러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여가현은 정신을 차리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이혼? 갑자기 잘 나가다가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네가 상준 씨랑 이혼하겠다고?”“우미야, 나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넌 집에 가서 찬물에 샤워 좀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린 뒤에 다시 나한테 연락해.”“아… 아니지! 이혼하더라도 우리 로펌은 절대 안 돼. 난 네 법률 대리인이 될 생각 없어 난 못해! 잘가, 멀리 안 나간다!”여가현은 커피를 뿜어 엉망이 된 책상을 휴지로 닦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차우미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도 동의한 일이야.”여가현이 멈칫하더니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차우미를 노려보았다.차우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같이 지낸지 3년이야. 하지만 난 그 사람 마음을 돌리지 못했어. 이대로 시간 끌어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어. 그래서 이혼하려는 거야.”“그래서 상준 씨가 바람이라도 피웠니?”여가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우미의 표정 변화를 자세히 살폈다.차우미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아니. 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야.”“그럼 왜? 설마 갑자기 어느 날 눈을 떠봤더니 이혼이 하고 싶어졌다는 황당한 소리는 하지 마. 네 마음이 어떤 건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아니까! 사실대로 말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여가현은 차우미와 초등학교부터 함께한 20년지기 친구였다. 그녀보다 차우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차우미도 다른 로펌으로 가지 않고 이곳을 선택했다.차우미는 친구에게조차 거짓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조금 전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하루 아침에 갑자기 그에게 실망해서 떠나려는 건 아니었다.차우미가 안쓰러운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우린 3년 동안 한 번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어.”여가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
2월이 지나고 3월에 접어들자 한기는 사라지고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정원에 심은 꽃과 나무도 초록색 새옷으로 단장했다.차우미는 먼저 유치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상준이 출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이혼서류에 사인만 하고 법원에 제출하면 마침내 이 3년의 부부관계가 끝나는 것이다.그녀는 어제 허영우에게서 나상준이 오늘 돌아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나상준의 이번 출장은 장장 15일이 걸렸다.하지만 차우미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그는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았고 한달, 심지어 두달이나 밖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기에 그녀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이혼서류는 이미 이메일로 그에게 전송했으니 그도 확인했을 것이다. 그녀는 준비한 서류에 도장을 찍고 그가 돌아와서 사인하기만을 기다렸다.그녀는 그렇게 이혼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사모님, 대표님은 지금 막 공항에 도착하셨고 집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차우미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허영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아 막 비행기에서 내린 것 같았다.“알았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곁가지를 잘라낸 뒤, 비료를 뿌렸다. 그녀는 여전히 평소처럼 행동했다.집 청소가 끝난 뒤, 차우미는 위층으로 올라가 짐이 든 캐리어를 들고 내려왔다.그녀는 어제 이미 집을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가 돌아와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법원에 제출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나상준의 차가 마당으로 들어섰다.통화 중이던 차우미는 소리를 듣고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사람 도착했어. 나중에 얘기하자.”“드디어 돌아왔구나? 그럼 빨리 사인해 달라고 해. 지금 열 시니까 법원으로 지금 출발하면 서류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너도 빨리 좋은 사람 찾아야지!”그녀의 통화상대는 다름아닌 이혼서류 작성에 도움을 줬던 여가현이었다.그녀는 2주 사이에 차우미를 위해 많은 맞선 상대를 확보했다. 친구가 빨리 이 허망한 결혼생활을 마무리하고 새
나상준의 눈빛이 처음으로 잠깐 흔들렸다.그도 왜 이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캐리어에 눈길이 갔다.중간 사이즈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캐리어 하나뿐이었다.마치 잠시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올 것처럼 가벼운 짐이었다.“이혼서류는 확인했지? 이건 가현이가 따로 뽑은 서류인데 메일로 보낸 것과 똑같아.”“확인해 보고 사인하고 법원에 제출하면 돼.”차우미는 미리 준비했던 이혼서류를 담담한 표정으로 나상준에게 건넸다.나상준은 서류를 펼쳤다. 큼지막하게 쓰여진 협의 이혼 신청서라는 글자가 왠지 거슬렸다.그는 서류를 뒤로 넘겼다.차우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치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듯이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녀가 원해서 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그리고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3년을 같이 보낸 시간에 그녀는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난 사인했으니까 문제없으면 당신도 사인해.”나상준이 마지막 장을 펼치자 차우미는 준비한 볼펜을 그에게 건넸다.볼펜까지 벌써 준비해 놓았다니.평소에도 그녀는 항상 존재감이 없으면서도 그가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걸 대신 준비해 주었다.나상준은 착잡한 시선으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그가 차에서 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줄곧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어쩌면 그녀는 이 관계를 이미 진작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나상준은 호수처럼 고요한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다가 볼펜을 들고 사인란에 묵묵히 사인했다.그러자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들은 그 길로 캐리어를 차에 싣고 법원으로 향했다.이혼 수속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가현이 말했던 것처럼 법원 직원들 점심 시간 전에 그들은 모든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밖에서 대기하던 운전기사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어디로 갈 거야? 데려다줄게.”차에 오르기 전,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차우미는 그 길로 공항으로 갔다. 가는 중에 여가현에게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빨리 이혼 서류를 사진 찍어 보내라고 재촉했다.차우미는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사진을 받은 여가현은 SNS에 접속해서 중요한 신상정보를 가린 뒤, 사진과 함께 장문의 글을 게시했다.[우미야, 3년의 허울 뿐인 결혼 생활을 끝낸 걸 축하해! 평소에 우미를 짝사랑했던 친구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 알지?]편집을 마친 뒤, 여가현은 과감하게 게시 버튼을 눌렀다.학술연구회가 끝나자 온이샘은 피곤한 얼굴로 회의실에서 나왔다.이번 연구회를 준비하느라 벌써 며칠 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그였다.드디어 휴식의 시간이 찾아오자 그는 차로 가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조금만 쉬었다가 출발할 생각이었다.그가 있는 아일랜드는 자정이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별들이 밤하늘을 장식하고 초목들이 서늘한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지이잉…강한 진동음과 함께 온이샘이 눈을 떴다.그는 힘겹게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찾았다.그리고 발신자를 대충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온이샘! 축하해! 네 오랜 기다림이 드디어 응답을 받게 되었어!”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온이샘은 잠이 확 깨며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자세를 바로하며 짜증스럽게 물었다.“너 또 취했어?”피곤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었다.“안 취했거든? 나 멀쩡해.”여전히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한 목소리였다. 뭐가 그렇게 기쁘길래 이렇게까지 흥분한 걸까?온이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너 결혼하니?”그러자 잠시 정적이 일었다.온이샘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말해봐.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까지 흥분한 거야?”“너 태도를 보니까 갑자기 말하기 싫어졌어.”“하지만 친한 친구로서 너 혼자 외롭게 지내는 걸 보니까 불쌍해서 내가 봐준다. 내가 힌트 하나 줄게.”“지금 당장 여
차우미는 평소에 SNS를 거의 하지 않았다.그녀의 핸드폰은 가끔 카톡으로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SNS에 일상을 기록하거나 친구의 SNS를 탐방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여가현이 자신의 이혼 사실을 SNS에 대대적으로 광고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안평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님에게 이혼 사실을 간략해서 설명했다.그녀의 부모님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이혜정 여사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녀는 자신은 말하지 않았지만 나상준이 알아서 설명할 거라고 답했다.그녀가 친정 식구들과 상의하지 않고 이혼한 뒤에 사실을 알린 것처럼 나상준도 그렇게 처리할 거라 믿었다.그 뒤로 노부부는 더 이상 딸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너만 행복하면 된다고 위로를 해줬을 뿐이었다.사실 딸의 결혼 상대가 NS그룹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이 결혼을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 가정 환경이나 모든 면에서 그들과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집안 환경이 많이 차이가 나는 결혼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차우미는 그들이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이었다. 비록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사랑으로 딸을 훌륭하게 키워냈다.그들은 그녀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보다 진심으로 아껴줄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그래서 결혼 전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만 원하지 않으면 이 결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한 적 있었다.그때 차우미는 결혼을 원한다고 답했다.그녀는 나상준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그의 재력을 보고 한 결혼이 아니라 그를 좋아했기에 결혼을 받아들였다.그래서 오래 몸담은 직장을 버리고 고향과 멀리 떨어진 청주에 시집가서 나상준만을 위한 현모양처로 살았지만 그녀는 후회나 불만 따위는 없었다.그녀가 이혼하고 의기소침해할까 걱정한 그녀의 부모님은 해외여행이나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차우미는 담담히 거절하고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부모님도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그녀가 슬퍼하고 힘들
박물관에 진열된 조각상들은 전부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었다. 대체로는 신수나 선인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많았다.조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궁금해하는 방문객들을 위해 박물관에는 조각사가 작품을 만드는 공방도 따로 만들었다.박물관에서 주로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작품은 전부 조각사가 주문을 받아 만든 것들이었다.차우미는 공방의 조각사 중 한 명으로 취직했다.하얗고 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푸른 남방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온이샘은 아일랜드 일정을 마무리한 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택했다. 차우미가 안평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주저 없이 안평으로 와서 거처를 찾고 이곳에서 일하기로 했다.그는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그럼에도 해외 업무를 마무리하는데 20일이란 시간이 걸렸다.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고역이었다.온이샘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슴이 다시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늘이 이런 식으로 다시 기회를 내려주실 줄은 몰랐다.‘이번에는 무조건 잡아야 해.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놓치는 일은 없을 거야.’차우미는 어쩐지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남자의 잔잔한 애수를 담은 눈빛은 그녀에게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차우미가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만약 다른 사람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이 남자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차우미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옆에서 그녀와 같이 작품을 만들고 있던 조각사가 그녀의 말을 듣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러고는 그녀와 온이샘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물었다.“우미 씨 친구예요?”차우미가 결혼했을 때 결혼식에 참석했던 동료들이었기에 그녀가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차우미가 홀로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일하고 싶다 했을 때 눈치 빠른 동료들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강서흔은 여가현의 전남자친구였다. 차우미도 여가현을 통해 강서흔을 알게 되었다.온이샘은 강서흔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여가현이 데이트를 하면서 차우미를 자주 끌고 나갔기에 그녀와 온이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차우미는 조용한 성격이었기에 온이샘과 단 둘이 접촉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대학 출신이라 선배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한때는 꽤 친하게 지냈었다.나중에 여가현과 강서흔이 헤어지면서 점차 연락이 뜸해지게 되었다.강서흔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바로 온이샘을 기억해냈다.그는 매너가 온몸에 배긴,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신사였다.차우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질렀다.“이샘 선배?”차우미는 자신보다 몇 살 많은 온이샘을 오빠처럼 친근하게 생각했다.“우미 씨, 이제 퇴근하자.”옆에 있던 조각사가 공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벌써요?”차우미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섯 시 다 됐잖아. 저거 봐.”차우미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간만에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온이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차우미는 이런 초대가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예전에는 친하게 지냈지만 3년이나 연락을 안 하고 지내던 사이인데 갑자기 같이 밥을 먹으려니 어색했다.하지만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그래. 잠깐만 기다려. 정리 좀 하고.”“천천히 해.”차우미는 공구를 깔끔하게 정리해 공구함에 넣고 작업대도 깨끗하게 닦은 뒤에야 핸드폰과 핸드백을 챙겨 나왔다.온이샘은 밖에서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그는 큰 키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훈남이었다.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잘생긴 미남이 이러고 서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을 주었다가 그가 차우미에게만 시선을 주는 것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가자.”“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같이 박물관을 나왔다.복도를 지나가면서 동료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