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있던 고청란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그럴 리 없습니다. 만약 정말로 권세가를 찾으려 했다면, 전에 량소가 적합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그는 언니를 정말로 사랑했지 않았습니까?"림봉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량소는 승은백부의 세자이자 탐화랑이지. 하지만 그가 아내로 맞이한 것은 회왕부의 영안 군주다. 그러니 청우가 정실부인이 될 희망은 없다. 게다가 량소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정작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었느니라. 그리 애지중지하면서도 평처로조차 들이지 못했다."고청란은 순간 멈칫했다."평처요?"마차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고 림봉아는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그래, 평처여야만 정실부인이 죽으면 승격될 기회가 있는 것이다. 평처가 되지 못하고 단지 첩이라면, 정실부인이 죽는다 해도 정실로 올라갈 수 없느니라. 청우는 첩이 될 수 있지만, 평생 첩으로만 남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하더구나."고청란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언니가 첩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든 첩이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언니는 어머니를 위해 계속 이용당해 왔으니, 언니도 참 불쌍합니다."고청란의 어깨에 기댄 림봉아는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기침도 점점 거세졌다. 그러다 결국 피까지 토해냈다.고청란은 어머니의 등을 다독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찌 이리도 심하게 기침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대부를 모셔 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림봉아는 더러워진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힘없이 웃었다. "어미는 곧 나을 것이니 걱정 말거라. 어미의 말을 꼭 기억해라. 앞으로 청우가 무슨 일을 시키든 절대 받아들이지 말아라. 명심하거라, 그 어떤 것도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청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공주부도 이미 무너졌으니, 저에게 시킬 일도 없습니다. 진성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 시작하면 됩니다."고청란의 손을 잡은 림봉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엄히 경고했다."어미 말을 꼭 기
오늘 대리사에게 가장 바쁜 하루였다.대리시경이 명령을 내리자, 모든 사람들의 휴가는 취소되었다. 대리승 허평안도 부모상을 치르기 위해 본가로 돌아갔던 대리승 허평안은 관직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던 차에 반역 사건이 터졌고 왕야가 상소를 올려 그를 복직시켰다. 허평안은 즉시 환복하고 대리사로 향했다.장공주와 고부진은 대리사로 끌려왔다. 사여묵이 직접 장공주를 심문하였고 진이가 고부진을 심문하였다. 그 외 관리인, 노비, 부의, 하인들은 대리승 허평안과 대리정 노정의가 맡았다.사여묵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장공주를 심문하기에 앞서 공주부의 무기들을 모두 대리사로 옮겨 증거로 삼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심문을 시작하였다.해가 질 때까지 겨우 몇 사람 심문하였다. 사여묵은 교대로 심문하라는 명령을 내려 심문이 멈추지 않도록 하였다. 진이는 심문한 내용을 정리하여 사여묵에게 보고하였다.사여묵이 살펴보니, 정보는 매우 적었다. 그가 고부진의 자료를 꺼내 들었지만 가득한 물음에 비해 답변은 거의 없었고, 많은 것들은 "모르겠다"로 일관하고 있었다.진이는 머리가 아팠다."고부진은 모른다고만 일관하며 지하 감옥에 있던 여인들과 후원에 감시받던 여자들이 자기 첩들이라는 것만 인정했습니다. 그 무기들과 장공주의 반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더군요."사여묵은 고부진의 증언을 한쪽에 내려놓았다."아직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자백하지 않겠지." 그는 방 마마와 도준의 것을 집어 들었다."방 마마는 장공주 곁에 오래 있었던 심복이다. 그리고 도준은 공주부의 시위장이지. 이들은 뭐라 하였느냐?""방 마마는 충격이 컸는지 입버릇처럼 ‘그럴 리 없다’만 되풀이하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도준은 많은 것을 자백했지만, 대부분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장공주가 누구와 빈번하게 왕래했는지, 어떻게 첩들을 괴롭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첩들이 아이를 낳으면 물에 빠트리거나, 목 조르거나, 던지는 등 온갖 방식으로 죽였다고 합
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렸다.‘자백이 아주 상세한 것을 보니 죽음이 실로 두려웠나 보군.’고청우가 어떻게 그를 유혹하였고, 어떤 말들로 그를 궁지로 몰았는지, 어찌하여 위험을 무릅쓰면서가지 림봉아를 해치게 되었는지, 사용한 약과 병세가 언제쯤 악화되는지, 언제쯤 죽을 것인지까지 세세하게 털어놓았다.양백은 고청우가 더 이상 장공주의 통제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아 아예 자신의 생모를 독살하려 했다고 추측하였다.사여묵은 사건을 처리한 날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금방 문제점을 알아챘다. “고청우가 장공주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엔 모순이 존재한다. 장공주가 그녀를 통제한 수단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으니, 만약 고청우가 어머니의 생사에 신경 쓰지 않았다면, 승은백부 량소를 앞세워 장공주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첩이 되기 싫어 량소에게서 돈을 뜯어 멀리 도망쳤다면, 장공주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정말로 극단적이었구나, 양부의가 이미 예순 가까이 되었는데 말이다.”대리사에 오래 있어 온갖 인간을 만나봤던 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고청우는 어릴 적부터 이런 쪽으로 길러졌으니, 자신의 외모와 몸을 거래의 도구로 삼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사옵니다.”“그녀를 데려와 심문하거라.”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부진은 고청우에 대해서는 숨김없이 불었습니다. 그녀가 만가다장에 있다고 솔직히 말했지만, 애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떠난 후였습니다. 인력이 부족하여 사람을 충분히 배치하지 못했습니다.”대리사는 평소 사건을 처리하기에 인력이 충분하였으나 이번 사건은 연루된 사람이 점점 많아질 것이었다. 만약 신속히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중요한 인물들이 도망치기 쉬운 상황이었다. 장공주는 진성에서 오랜 세월 권력을 다졌으니, 분명 적지 않은 대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년 그 많은 은화를 접대에 쏟아붓지 않았을 것이다. 무기와 갑옷
송석석도 아직 잠들지 않았고, 보주는 그녀의 관복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이 관복은 본래 현갑군 부지휘사 시절의 것이었고 그저 명목상의 직책에 불과하여 실제로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4마리 야수가 박힌 관복에 별도의 무기는 하사받지 못했다. 검은 비단 모자에는 구슬이 박혀 있었으니 이제 더 이상 여자 옷차림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보주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예전에 전북망이 평처를 들이겠다며 송석석을 무시했던 것이 분했지만 이제 아가씨께서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지휘사가 무관이긴 하지만, 더 이상 군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보주는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이 모두 풀리는 듯했다."어떻게 되었습니까? 알아내셨습니까?"돌아온 사여묵에 송석석이 급히 다가갔다.하지만 사여묵은 그녀의 관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건 부지휘사의 관복이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정지휘사요.""상관없습니다. 일단 이걸 입으렵니다." 송석석은 담담하게 덧붙였다."내일 아침에 입궁해야 하고, 그 후 현갑군 위소로 가서 모든 일을 접수할 것입니다. 당신은 바빠서 자리하지 못할 테지요?"사여묵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웃었다. "나는 남강으로 간 이후로 현갑군의 일을 거의 돌보지 않았으니, 당신이 필명을 다스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오. 아니면, 조금 불안한가? 내가 함께 가야 하오?""아닙니다. 전혀 긴장되지 않습니다." 송석석은 사여묵의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답했다. 이 모습을 본 보주와 명주는 재빨리 물러났다."전장에서 적을 베고도 긴장하지 않았으니, 지휘사 직책은 손쉽게 해낼 것 같소." 사여묵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축하하오. 당신은 우리나라 개국 이래 첫 번째로 조정에 진출한 여관이 되었소."송석석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황제께서 즉흥적으로 내리신 명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유를 들어
"고청우의 행방은 아마 홍시 일행이 알 수 있겠지만 추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리도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분명 진성에 머물며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돌아온 것은 그들에게 연왕부와 회왕부를 감시하게 하기 위함이오. 비록 그들이 당분간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이 무기들의 제조와 운반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을 것이고 지하 감옥이 아직 차지 않았으니, 아마 여전히 무언가를 진행 중일 것이오. 장공주부가 무너진 후, 연왕이나 회왕이 이 일을 떠맡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우선 그들을 감시하시오.""알겠습니다. 제가 만자에게 전하겠습니다." 사여묵은 씻기 위해 하인에게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했다.환복하고 나니 반시정도는 눈을 붙일 수 있었다.염 선생은 그가 돌아온 것을 알고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 했으나, 사여묵이 곧 다시 대리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와 함께 대리사로 향할 생각이었다.염 선생은 왕부의 장사로서 대리사 소속은 아니었으나, 왕의 곁에서 조언을 제공할 수 있었다. 왕비 또한 관직을 맡았으니, 왕부는 자연스레 노 집사와 양 마마에게 넘어갔다. 다행히도 최근 심청화 선생이 왕부에 머물고 있었기에, 많은 일에 있어 자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사여묵은 긴 의자에 누웠다. 그는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는데, 이는 피곤해서라기보다는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 제대로 된 휴식은 사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언제든 잠을 잘 수 있는 능력을 익혔고, 몸을 즉시 이완시키며 회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반 시진이 지나 사여묵이 깨어났을 때, 염 선생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석석은 그에게 관복을 입혀 주며, 그의 흐트러진 머리도 빠르게 정리해 주었다. "양 마마가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가져가서 배가 고프면 몇 개씩 드세요.""알겠소." 사여묵은 미지근한 물로 입을 헹구고 나서야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이제 떠나야겠소. 아마 내일도 함께 식사를 할 수 없
시만자는 연신 감탄했다. “어머 어머, 대감께서는 어디로 가시려는 건지요? 소녀도 데려가 주시겠습니까?”송석석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응징하며 말했다. “마침, 잘 왔어. 너 없으면 안 될 일이 하나 있어.”시만자는 몸을 낮추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송석석이 아니꼽게 흘겼다.“대감께서 명하시면 소녀는 그저 따르겠습니다.”“제대로 안 할래? 한 대 더 맞아야 정신 차릴 거야?”하지만 시만자는 손수건을 휘두르며 여전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대감, 너무 거칠게 구시옵니다.”송석석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려 넘겼으나, 시만자는 몸을 돌려 두 발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잡히지 않지, 잡히지 않아.”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영씨가 말했다. “시 아가씨는 정말 재미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태비마마께서 예뻐하시는 것 같습니다.”“그야 태비마마께서 석석이보다는 절 더 좋아하시니깐요.” 시만자는 태비마마 흉내를 내며 도도한 표정을 짓자, 송석석이 다시 한번 흘겼다.“나 곧 나가야 본론을 들어갈게.”그제야 시만자는 몸가짐을 가다듬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 대감과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모두 나가거라.”모두가 떠나자, 송석석은 한 바퀴 돌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 어때?”“역시 잘난 척하려는 것이로군.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옜다! 멋있어! 아주 관직이 체질이군. 기품이 넘쳐.”송석석은 구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참 낯선 기분이야.”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시만자는 흥분한 듯 발을 구르며 말했다. “석석아, 너 정말 대단해! 여인이 관직에 오르다니, 넌 매산의 영광이야!”송석석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나도 이 자리에 오를 줄은 몰랐어. 어제 임명장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관복을 입으니, 책임감이 들고 어깨가 좀 무거워진 것 같아.”그녀의 표정
시만자는 즉시 대답했다. “알겠어. 홍작과 함께 가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송석석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자리에 앉혔다. “또 한 가지가 있어. 미리 말해 줄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갑자기 엄숙하게 군다고? 겁주는 거야? 뭔 일인데? 어서 말해 봐.”송석석은 여전히 어색해하는 듯 관모를 정리했다.“장공주부가 완전히 무너졌으니, 연왕 무리들이 장공주의 자백 여부를 캐려 할 거야. 누구를 언급했는지, 과거에 누구와 교류했는지 말이야. 과거에 조정의 어떤 관리와 접촉했든 지금은 감히 찾지 못할 거야. 하여 내 생각엔 네 그 당숙이 너를 찾아올 거야.”시만자는 목소리가 급격히 차가워졌다.“그렇다 한들 나한테서 뭘 알아내겠어? 나로부터 비밀을 캐내려고? 꿈도 꾸지 말라 그래. 걱정 마, 그 머리로 날 속이긴 글렀고 나도 절대 누설하지 않을 거야.”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혹시 그녀를 달래며 잘 지내는 척 떠보라는 거야?”송석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전처럼 대하면 돼. 특별히 다정하게 굴 필요 없어. 분명 김 측비와 함께 널 찾아올 거야. 김 측비는 신중하고 세심하니, 네가 연왕부에 의심을 품고 있다는 걸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금방 눈치챌 거야.”“그야 어렵지 않지. 그녀가 연왕에게 시집간 이후로 나는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으니, 그대로 하면 되지?”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갑자기 친절하게 굴면 오히려 수상할 테니까.”“알겠어.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출발 안 해?” 시만자가 묻자, 송석석은 미소를 지으며 머뭇거렸다.“흥분돼서 일찍 일어난 거야. 아직 날도 밝지 않았어.”“지금 출발하면 도착할 즈음엔 해가 떠 있을 거야.”“오늘은 조회가 없으니, 황제께서도 이리도 일찍 어전에 계시진 않을 거 같아.”“응? 오대반이 언제 입궁하라고 말해주지 않았어?”송석석은 수줍은 듯이 답했다.“어제 명을 전할 때 얘기해 줬고 진시 말쯤에 오라고 했어.”시만자의 눈이 휘둥그레졌
매원에서 한바탕 난리법석이더니 시만자가 욕설을 퍼붓고 몽동이는 도망쳤다. 보주와 궁녀 영 씨는 계란을 삶아 두 사람의 얼굴과 눈가의 붓기를 가라앉혔다. 효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분을 발라서 시만자의 얼굴은 보기에 많이 좋아 보였지만 왕비의 눈가는 점점 검게 변했다. 보주가 분을 발라주려고 하자 송석석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됐어. 조정의 명관이 무슨 분을 바른 다는 것이냐? 저리 가거라.” “하지만 부인의 눈이 크게 뜨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주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황제폐하도 만나러 가야 할 텐데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송석석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황제를 만나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설령 고개를 든다고 해도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송석석은 직접 마구간에 가서 그녀의 망아지 번개를 끌어내고 번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쪽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말했다. “번개야,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전쟁터로 가야 한다. 우린 함께 싸워야 된다. 알겠느냐?” 번개는 마구간에 너무 오랫동안 있었다. 가끔 두어 바퀴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송석석은 마차를 타고 나갔고 번개는 마차를 끌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개는 코에서 김을 뿜고 말발굽으로 땅을 파헤치며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마부가 와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왕비님 걱정 마십시오. 안장은 새것이고 발굽도 고쳤습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제가 가장 좋은 사료를 먹였습니다. 번개는 지금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송석석은 새 안장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사람은 옷 발이고 말은 안장 발이라더니 안장을 바꾸니 바로 위풍당당하게 느껴지는구나.’ 송석석은 채찍을 받아 들고 말했다. “돌아가서 노 집사에게 돈을 받거라. 내가 분부한 것이라고 하면 된다.” “감사합니다. 왕비님의 승진을 기원합니다.” 마부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 왕비님의 한쪽 눈이 왜 시커멓게 멍이 들었는지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송석석이 외출
왕청여는 학생들에게 용감하게 인생을 마주하고 잘못을 과감하게 승인하라고 가르쳤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요 몇 년 동안 왕청여는 거의 그를 본 적이 없었고, 그가 있을 만한 자리도 모두 피했다. 왕청여가 고집을 부렸을 때, 그의 형수는 그가 방시원에게 빚을 진 것이라며 꾸짖은 적이 있었다. 형수의 태도에 그녀는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억울할 게 하나도 없었다. 하늘이 그에게 충분히 잘해주었는데 혼자서 모두 망친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종이를 펼쳐 그에게 편지를 써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방시원의 부인과 전북망이 오해할까 봐 감히 그러지도 못했다. 비록 지금 전북망과 진정한 부부는 아니지만, 그는 이 평온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전북망이 몇 번 돌아왔는데 왕청여가 서재에 버린 종이 뭉치를 보았는지 하인에게 술을 데우고 반찬을 만들라고 하고, 왕청여에게 함께 마시자고 했다. 예전에 그가 돌아왔을 때도 함께 식사를 하긴 했지만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왕청여는 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에게도 한 잔 따랐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전북망은 술 한 잔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고는, 왕청여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이번에 돌아왔을 때 서재에서 편지 뭉치를 발견했는데, 누구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던 거요?” 왕청여는 성릉관에 와서 전북망과의 대화는 비교적 적었지만, 일이 있으면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청여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다른 뜻은 없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잘못을 한 사람들에게 사과라도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까 해서요.”그러자 그의 거무스름한 얼굴에 의심스러운 표정이 스쳤다.“그럼 진성에 있을 땐 왜 말하지 않았소?”왕청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땐… 용기가 없었습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
왕청여는 벌써 성릉관에 온 지 한 달이 되어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청여는 명의상 전북망의 부인일 뿐, 그와의 교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는 대부분 군영에서 지냈기 때문에, 가끔씩만 왕청여를 찾아왔다. 그래서 왕청여에게는 생업을 꾸릴 만한 여가 시간이 충분했다. 하지만 성릉관은 왕청여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변경 지역이라 춥고 물자가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보석이나 운단 같은 귀중품은 예외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귀한 물건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물건들은 구입 후 보관해 두었다가 서경으로 보내 권세 있는 이들에게 팔아야 했다. 성릉관 백성들은 장신구를 고를 때도 예쁜 것을 선택할 뿐, 값비싼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왕청여는 어떤 사업을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무엇을 하든 우선은 가게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인을 데리고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며 적합한 가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왕청여가 이번에 성릉관에 갔을 때 형수님께서 은화를 주셨고, 둘째 형수와 시만자도 조금 도와주었다. 게다가 저축한 금액도 어느 정도 있어서 가게 한두 채 정도는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하녀의 이름은 춘상이며, 14세의 현지 소녀이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어느 집안에 며느리로 팔려갔었는데, 그 집 아들, 즉 남편의 병이 심각해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인이 된 것이었다. 그녀도 팔자가 참 사나운 사람이었다. 왕청여는 하녀를 데리고 거리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정말로 가게를 사서 생계를 꾸려야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했다. 그렇게 살구꽃 골목을 지날 때, 그녀의 시선이 버려진 한 집에 꽂혔다. 그 집은 꽤 컸고, 적어도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곳보다는 훨씬 넓었다. 닫혀진 문 앞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문은 썩어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입구에서 보면 풀의 높이가 사람 키만큼이나
안 백작은 왕이장에게 거절당하자 결국 소민을 보내 사정하게 해 소 세자를 구해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왕이장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누군가가 고의로 조종한 일임을 알면서도 아들이 도덕적 결함으로 약점을 잡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소민은 어머니가 지아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고 참다가 결혼 후 따로 살 것을 제안했다. 그는 가족과 다투지 않았다. 상국 관원들이 품성을 평가할 때 효도를 가장 중시하므로 불효 누명을 쓰면 관직 길이 막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로 살자는 이유도 타당했다. 시험이 임박했는데 저택이 시끄러워 집중이 안 된다며, 전도를 위해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소민은 본래 효심 깊은 아들이었고, 소 부인도 이번 잘못과 왕지아의 배경을 알고는 허락했다. 그렇게 일은 조용히 처리되어 다행히 큰 파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원래 왕지아의 혼수 집에서 살려 했으나, 소 부인이 아들의 체면을 위해 자비로 작은 집을 마련해 주었다. 시만자는 그런 젊은 부부의 행복한 모습에 자신도 덩달아 기뻐했다. 소민은 반드시 성공할 인재였다. 총명하고 진지하며, 게다가 젊은 나이에 급제까지 했으니, 진사 시험에 떨어져도 다른 길로 출세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지아의 혼사는 왕청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다. 시만자는 왕청여가 최근 몇 년간 많은 비판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송석석이 “여자는 한번 잘못하면 남자보다 재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왕청여는 크게 변했다. 이제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았고, 집안을 돌보며 공방에도 나가 일을 도왔다. 공방 또한 예전의 모습과는 완전 달라져 있었다. 규모가 커졌고, 이혼 여성들을 많이 수용하였다. 왕청여는 최 씨를 따라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학문이 필요 없어도 글과 계산을 배워야 훗날 공방을 떠나도 스스로 장사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청여는 성격이 부드러워지고 예민함도 줄었지만 늘 걱정이 가득해 보
시만자는 그제야 송석석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 부인이 사람을 데리고 왕 씨 저택으로 가서 추태를 부렸으니, 당연히 사죄도 왕 씨 저택으로 가서 해야한다. 이렇게 소 세자의 일로 약점을 잡고 있으면 지아가 시집을 가더라도 감히 박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아에게는 이제 후원자도 있고 소 씨 가문의 약점도 쥔 셈이 되었다. 하시만 시만자는 오늘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일 뿐, 소 부인을 상대하러 온 것이니 쉽게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필명 등 인이 모두 떠난 후에야 소 부인에게 말했다. “안백작부가 명망가라니, 정말 뻔뻔하군요. 어느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이 양첩을 유괴하고 다른 가문으로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겠어요? 오늘 원래는 당신들의 가면을 모두 뜯어내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민이 진심으로 지아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두 아이가 민망해할까 봐 참았습니다. 하지만 지아가 당한 억울함을 계속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키운 아이가 당신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꼴을 볼 순 없습니다. 당신이 백작부를 믿고 작위가 없는 왕 씨 가문을 괴롭혔으니, 다른 이가 같은 방식으로 갚아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작 백작부 따위, 내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 소 세자가 고주의 용서를 빌든 말든 내 알바 아니지만, 지아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한다면 일을 크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까지 당신들의 보귀한 작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요.” 소 부인은 시만자의 말에 얼굴이 금새 붉어졌지만, 감히 그의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시만자는 진성에 오래 머물며 문제가 생기면 이치를 따지는 성향이었으나, 상대가 막무가내라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소 세자의 양첩 유괴는 사실이었고, 이미 경위부에 압송된 상태라 시만자가 이를 빌미로 소동을 일으킬 수 있음을 소 부인도 알았다. 그러자 소 부인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고, 안 백작만 계속 사죄하며 두 아이가 원래 천생연분이라고 말하며, 소 부인이 다른 사람의 헛소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