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날 밤.
이진성은 혼자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계속 같은 장면이 맴돌았다. 유봄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남자,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시선들.“…하.”
짧게 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애매한 위치에 둘 생각은 없었다.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유봄을 자신의 사람으로. 그는 조용히 결심했다. 청혼하겠다고. 그리고 같은 시기.대한병원 인턴 오리엔테이션 날.
유지원은 병원 복도를 따라 걷다가,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이진성. 단정한 가운, 흐트러짐 없는 태도, 그리고 한 번 보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분위기. 유지원의 걸음이 멈췄다.“…누구지.”
짧게 중얼거린 말.
하지만 시선은 이미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유지원 역시 한눈에 빠져버렸다. 인턴 배정 희망서를 받아 든 순간, 유지원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인턴들이 과를 두고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펜은 이미 한 곳에 멈춰 있었다. 일반외과. 원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과였다. 힘들고, 거칠고, 버티기 어려운 곳. 하지만 유지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진성. 그 한 사람. 단상 위에서 내려오던 순간 스쳐 지나간 그 눈빛. 차갑게 정리된 말투, 그리고 쉽게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까지. 오히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유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체크를 마쳤다.며칠 뒤, 일반외과 첫 출근.
스테이션은 예상대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짧게 오가는 지시,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들. 그 혼잡한 흐름 속에서, 유지원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찾았다.이진성.
차트를 넘기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모습. 군더더기 없는 동작, 짧고 정확한 말. 멀리서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결이 달랐다. 유지원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조교수 자리까지 오른 이진성은, 애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병원 안에서 그의 위치는 분명했다. 실력으로 올라온 사람, 그리고 그만큼 철저하게 선을 지키는 사람. 인턴인 유지원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업무 외의 대화는 거의 허용되지 않았고, 사적인 질문은 시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가 있는 공간에는 항상 긴장감이 따라붙었고, 누구도 함부로 가볍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유지원도 그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단순한 플러팅이나 눈에 띄는 행동으로는 그의 시선조차 오래 붙잡을 수 없다는 것.스테이션은 평소보다 더 어수선했다.
호출 벨이 연달아 울리고,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간호사들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유지원은 한쪽에서 차트를 정리하며 그 흐름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시선은 주변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아, 이거 … 지금 당장 이진성교수님 연구실로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김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는 두툼한 차트 하나. 표정은 분명히 여유가 없었다.“지금 도저히 못 움직이겠네… 큰일이네 진짜…”
중얼거리듯 말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 유지원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지금이다.’
계산은 빠르게 끝났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김간호사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진짜? 괜찮아요?”
“네. 어차피 교수님께 보고 드릴 것도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사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김간호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아이고, 고마워요 진짜. 나 지금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서…”
엘리베이터 안.
조용한 공간에 혼자 서 있는 순간, 유지원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진성의 연구실 앞에 선 순간, 유지원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손에 들린 차트를 고쳐 잡으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옷매무새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머리카락은 정돈되어 있는지. 그리고 가볍게 노크를 했다.똑, 똑.
잠시 기다렸다.
“….”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노크할까 고민하던 유지원은, 이내 손잡이를 잡았다.‘잠깐 두고 나오면 되니까.’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연구실 안은 조용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없네.”
작게 중얼거린 말.
아주 미세하게, 실망이 스쳤다. 타이밍이 어긋난 것. 그녀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로 다가가 차트를 내려놓으려던 순간 시선이 멈췄다. 작은 케이스. 목걸이 케이스였다. 단정하게 놓여 있는 그 옆에는, 아직 다 쓰지 못한 듯한 카드 엽서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유지원의 손이 멈췄다. 차트를 들고 있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시선이 그쪽으로 더 기울었다. 유지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멈췄다. 무심코 지나치려 했던 카드 위에,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지는 않았지만, 가까워진 거리만으로도 글자는 충분히 읽혔다.너와 함께하고 싶다.
영원히 널 사랑할 거다.결혼하자
그리고
그 아래. 조금 더 또박또박, 힘이 들어간 글씨. 나의 사랑, 유봄.유지원의 시선이 엽서에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너와 함께하고 싶다. 영원히 너만을 사랑한다. 결혼하자. 그리고 나의 사랑, 유봄. 그 한 줄이, 마치 비수처럼 깊게 박혔다.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끓어올랐다. 열등감.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따라다니던 감정.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로비 한가운데, 익숙한 체형과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선글라스를 썼어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강민재.그를 본 순간 유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번 깜빡였다.“여기… 어떻게…”그녀의 얼굴에 피곤함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밝은 빛이 번졌다.망설임 없이 발걸음이 그를 향했다.최재성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의 표정이 자신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놓칠 리 없었다.차갑게 선을 긋던 눈빛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반가움.강민재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놀랐어?”낮게 웃는 목소리.유봄은 그의 앞에 멈춰 섰다.“당신… 제주도까지 어떻게 왔어요?”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마치 긴 하루 끝에 안식을 찾은 사람처럼.그 장면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는 두 사람—최재성과 유지원.각기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어갔다.제주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유명 횟집.통유리 밖으로 붉게 저무는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심지호는 이미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역시 제주네. 강릉도 회 맛있지만, 여긴 또 다르네.”말은 했지만, 유지원을 보며 “먹어”라는 한마디도 없었다.자신만 자연스럽게 광어를 집어 간장에 찍어 먹었다.유지원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채 물잔만 만지작거렸다.머릿속엔 아까 호텔 로비 장면이 맴돌았다.선글라스를 썼지만
그리고 서울.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 기사를 보고 있었다.휴대폰 화면 속 건배하는 두 사람의 사진.손에 들린 커피잔이 살짝 멈췄다.서울, 오전.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막 커피를 들던 순간, 휴대폰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대한병원 유봄 × 한양병원 최재성… 제주 만찬 밀월?’강민재의 시선이 멈췄다.사진.은은한 조명 아래, 와인을 들어 올린 두 사람.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장면.손에 쥔 종이컵이 미세하게 찌그러졌다.거래처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요즘 의료계도 연예계 못지않네요. 저 두 사람,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강민재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껐다.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눈빛이 완전히 식어 있었다.“오늘 일정, 전부 취소하세요.”비서가 당황했다.“대표님? 오후 이사회가”“온라인으로 돌리세요. 급한 일 있습니다.”짧고 낮은 목소리.그는 바로 차에 올랐다.김포공항.수속도 기다림도 길게 느껴졌다.탑승구 앞에서 휴대폰을 다시 열었다.기사 조회수는 이미 수십만.댓글은 더 자극적으로 변해 있었다.‘공동 연구? 그 핑계로 사귀는 거 아냐?’‘둘이 케미 미쳤다.’‘한양·대한 합치면 국내 최강.’강민재의 턱선이 단단해졌다.강민재는 유봄을 믿는다.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는지,어떤 선을 지키는지 누구
박수가 다시 터지고 유봄이 단상에서 내려왔다.사람들이 몰려들었다.질문을 던지고,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건넨다.그 중심에 선 유봄.유지원은 그 장면이 못마땅했다.“저렇게까지 떠받들 일인가…”제주 학회 마지막 날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연회장에 원탁들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학회 공식 만찬.잔잔한 클래식 연주와 은은한 조명 아래, 의료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유봄은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과하지 않게 올린 반머리, 얇은 진주 귀걸이.낮의 단정한 발표자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차분하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최재성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멈췄다.‘…역시.’실력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데, 이 여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유봄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우연처럼,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녀의 오른쪽 자리는 최재성이었다.“오늘 발표, 인상 깊었습니다.”잔을 들어 가볍게 건네며 그가 말했다.“특히 출혈 상황에서 전환 속도.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더 대단했을 것 같네요.”유봄은 미소 지었다.“과찬이에요. 교수님 세션도 잘 들었습니다. 췌담도 케이스 접근법, 많이 정교해지셨더라고요.”“정교해졌다는 말은… 예전엔 거칠었다는 뜻입니까?”장난기 어린 질문.유봄은 눈을 맞추며 담담히 답했다.“예전엔 공격적이셨죠. 지금은 계산적이시고요.”최재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대강당.로봇수술 세션의 마지막 발표자가 단상에 올랐다.“대한병원 일반외과, 유봄입니다.”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홀을 채웠다.최재성은 프로그램북에서 시선을 들었다.유봄.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직접 마주하는 건 몇 년 만이었다.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강단 위에 선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단정하게 묶은 머리, 절제된 화장, 깔끔한 화이트 수트.그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장식보다 눈에 띄었다.발표가 시작됐다.복강경 전환 없이 고난도 골반 종양을 로봇 단일공으로 집도한 케이스.영상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이 구간에서 혈관 변이가 예상되어 접근 각도를 15도 수정했습니다.”단순한 성공 사례가 아니었다.위험 요소, 판단 근거, 술기 선택 이유까지 정확했다.최재성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여전하군.’아니, 더 날카로워졌다.질의응답 시간.국외 교수가 집요하게 물었다.“그 상황에서 conversion risk는 없었습니까?”잠깐의 침묵.유봄은 눈을 들어 질문자를 바라봤다.“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거니까요.”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대답.청중석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여졌다.최재성은 그 순간 확실히 인정했다.라이벌, 그리고 아름답다.실력 있는 의사가 아름다울 때의 파괴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세션이 끝나고 로비.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질문이 쏟아졌다.
한강 위로 바람이 스쳤다.유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 파티.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참석했던 자리.유봄도 그날을 기억했다.할아버지가 드물게,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부탁했었다.“체면상 한 번만 얼굴 비춰다오.”그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결국 그 자리에 나갔다.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 계산적인 시선들.그런 자리는 늘 숨이 막혔다.그러다 갑자기 들려온 외침.“사람이 쓰러졌어요!”그 순간, 망설임은 없었다.집안의 체면도, 드레스도, 시선도 다 사라지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유봄은 한강 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저도 억지로 나갔던 자리였어요.그냥… 사람이 쓰러졌다길래 움직였을 뿐이에요.”강민재가 웃었다.“그게 당신이야.”유봄은 그를 올려다봤다.몇 년 전,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두 사람.그때 이미 시작됐던 인연이, 이제야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강민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한강 위로 번지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나… 당신 찾으려고 꽤 헤맸어.”유봄이 고개를 갸웃했다.“저를요?”“응. 파티 끝나고 나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지.근데 동유럽 출장이 겹쳐서 몇 달을 한국에 없었어.돌아왔을 땐 이미 흔적도 없더라.”그는 작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그래서 그냥… 인연이 아닌
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한정식집 현관 앞으로 나왔다.밤공기가 선선했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돌계단 아래로 수행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강두수 회장은 외투를 걸치며 유봄을 향해 몸을 돌렸다.“봄아.”이제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불렀다.“이제 편하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너라.눈치 보지 말고.”그리고 옆에 서 있는 강민재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이놈이 열받게 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며 덧붙였다.“내가 이 녀석 혼꾸녕을 제대로 내줄테니.”강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할아버지, 누구 편이세요?”강두수는 단호했다.“당연히 봄이 편이지.”유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님.”그러다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건강 조심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그러자 강두수가 껄껄 웃었다.“손주며느리가 유명한 의사인데 뭐가 걱정인가?”“이제 나는 든든해.”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만족이 어려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강두수는 타기 전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둘이 잘 어울린다.”짧은 한마디.그러고는 차에 올랐다.검은 세단이 천천히 출발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강민재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합격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