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지원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갔다.
“또… 유봄이야.”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
어릴 때부터 그랬다. 비교의 대상은 언제나 유봄이었고, 결과는 늘 같았다. 더 인정받는 사람, 더 사랑받는 사람. 그리고 결국 선택받는 사람.“없었으면…”
아주 작게, 스쳐 지나가듯 흘러나온 말.
유봄만 아니었다면 이 병원도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진성. 그 남자 역시.차트를 내려놓는 순간, 유지원의 시선이 다시 엽서에 꽂혔다.
나의 사랑, 유봄. 짧은 한 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입술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그래.”
아주 작게 흘린 말.
전부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유봄이 다 가져가고 있다면 하나쯤은, 자신이 가져와도 되지 않을까. 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식었다. 그리고 또렷해졌다. 이진성. 그 남자만이라도 유봄에게서 뺏고 싶다는 욕망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 잡았다.유지원의 손이 잠깐 멈췄다.
방금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지시를 쏟아내던 선배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이거 빨리 처리해.”
“그건 왜 아직도 안 끝났어?”
당연하다는 듯 내리꽂는 말투.
설명도, 배려도 없이 쏟아지는 지시들.입술이 천천히 굳어졌다.
지금까지는 참고 넘겼다. 인턴이니까, 당연한 과정이라고. 하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웃기네.”
작게 흘러나온 말.
‘내가 누군데.’
지금 이곳에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인턴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건 ‘모르고 있어서’일 뿐이었다.
유지원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대한병원장의 큰딸이라는 사실을 밝혀,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다 같이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길, 유지원은 그날도 선배 레지던트의 잔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저 앞에서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병원 원장 유재원. 그리고 내과 과장 김순철 교수.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유지원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눈빛이 바뀌었다.‘지금이다.’
다음 순간, 유지원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버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유재원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유지원이 보였다. 순간 표정이 굳었다. 병원 한가운데서, 그것도 수많은 시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부르는 호칭. 당황스러움이 먼저 스쳤고, 곧바로 불편함이 뒤따랐다.“…여긴 병원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꾸짖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선이 담겨 있었다.유재원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방금 전, 아무렇지 않게 울려 퍼진 “아버지”라는 호칭. 하지만 그 울림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유봄이었더라면…’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펠로우 자리까지 올라선 아이.
얼마 전 발표한 논문 하나로, 미국 세인트 존 메디컬센터에서조차 탐을 낼 만큼 인정받는 아이. 그런 딸이 자신을 향해 “아버지”라 불렀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을 것이다. 당황이 아니라 자부심이었고, 불편함이 아니라 당당함이었을 것이다.누구라도 부러워할 딸.
그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저절로 올라갔을 테니까. 유봄이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사장 유철중이 늘 "우리 손녀딸”이라며 자랑처럼 떠들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정작 유봄 본인은 단 한 번도 병원 안에서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다. 스쳐 지나가도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만 숙일 뿐, 먼저 다가오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원장님… 딸이었어?”
“처음 알았는데…?”
옆에 있던 내과 과장 김순철 교수마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유지원을 바라봤다.
놀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유재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하.”
아주 짧게 숨을 내쉰 그는 이내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훑어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담담하게 던진 한마디.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놀람, 궁금함, 그리고 미묘한 눈치까지. 하지만 유재원의 얼굴은 이미 원장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 한순간의 흔들림도 남기지 않은 채,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유지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도, 유재원의 난감한 반응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이미 충분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병원에서 어떤 위치인지 모두에게 각인시켰으니까.그날 이후.
병원 안에는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유지원이 대한병원장 유재원의 딸이라는 사실. 전보다 부드러워진 말투, 한 박자 늦춰진 지시, 눈치 보듯 살피는 시선들.유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변화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천천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외과 첫 회식 날.
인턴부터 교수들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였지만 유봄만은 가지 못했다.“다들 먼저 가세요. 저는 금방 따라갈게요.”
응급 환자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후배들이 망설였지만, 유봄은 담담하게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회식 장소는 시끌벅적한 고깃집이었다.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자, 한 잔 더!”
“부어라, 부어!”
교수들과 전공의들이 어울려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진성의 시선은 계속 한 곳을 찾고 있었다.
유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이진성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유봄이 그의 셔츠를 살짝 움켜쥐었다.그 작은 움직임에 강민재의 눈빛이 짙어졌다.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마를 맞댄 채 낮게 말했다.“안 되겠어.”“뭐가요…”숨이 가쁜 채로 묻는 그녀.그는 짧게 웃었다.“빨리 결혼하자.”그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이렇게 당신이 내 품 안에 있는 게 당연해지고 싶어. 기사 하나에 제주까지 날아오는 남자 말고,합법적으로 당신 옆에 있는 남자로.”유봄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장난기와 진심이 뒤섞인 눈빛.“청혼이 너무 즉흥적인 거 아닌가요?”“몇 년을 돌아서 온 거야.충분히 숙고했어.”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두었다.“여기, 매번 당신 때문에 이렇게 뛰는데 이제 평생 책임줘.”유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당신, 정말 못 말려…”강민재는 다시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못 말리면, 그냥 나랑 결혼해.”그날 밤, 강민재는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오래, 깊게 끌어안았다.급하지도, 거칠지도 않았다.대신 집요할 만큼 단단했다.마치 그녀의 온기를 몸에 새기듯.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 또 확인하듯.유봄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그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천천히, 숨결이 고르게 맞춰질 때까지.입맞춤은 여러 번 이어졌지만 하나하나가 달랐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로비 한가운데, 익숙한 체형과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선글라스를 썼어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강민재.그를 본 순간 유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번 깜빡였다.“여기… 어떻게…”그녀의 얼굴에 피곤함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밝은 빛이 번졌다.망설임 없이 발걸음이 그를 향했다.최재성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그녀의 표정이 자신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놓칠 리 없었다.차갑게 선을 긋던 눈빛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반가움.강민재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놀랐어?”낮게 웃는 목소리.유봄은 그의 앞에 멈춰 섰다.“당신… 제주도까지 어떻게 왔어요?”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마치 긴 하루 끝에 안식을 찾은 사람처럼.그 장면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는 두 사람—최재성과 유지원.각기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어갔다.제주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유명 횟집.통유리 밖으로 붉게 저무는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심지호는 이미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역시 제주네. 강릉도 회 맛있지만, 여긴 또 다르네.”말은 했지만, 유지원을 보며 “먹어”라는 한마디도 없었다.자신만 자연스럽게 광어를 집어 간장에 찍어 먹었다.유지원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채 물잔만 만지작거렸다.머릿속엔 아까 호텔 로비 장면이 맴돌았다.선글라스를 썼지만
그리고 서울.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 기사를 보고 있었다.휴대폰 화면 속 건배하는 두 사람의 사진.손에 들린 커피잔이 살짝 멈췄다.서울, 오전.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막 커피를 들던 순간, 휴대폰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대한병원 유봄 × 한양병원 최재성… 제주 만찬 밀월?’강민재의 시선이 멈췄다.사진.은은한 조명 아래, 와인을 들어 올린 두 사람.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장면.손에 쥔 종이컵이 미세하게 찌그러졌다.거래처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요즘 의료계도 연예계 못지않네요. 저 두 사람,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강민재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껐다.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눈빛이 완전히 식어 있었다.“오늘 일정, 전부 취소하세요.”비서가 당황했다.“대표님? 오후 이사회가”“온라인으로 돌리세요. 급한 일 있습니다.”짧고 낮은 목소리.그는 바로 차에 올랐다.김포공항.수속도 기다림도 길게 느껴졌다.탑승구 앞에서 휴대폰을 다시 열었다.기사 조회수는 이미 수십만.댓글은 더 자극적으로 변해 있었다.‘공동 연구? 그 핑계로 사귀는 거 아냐?’‘둘이 케미 미쳤다.’‘한양·대한 합치면 국내 최강.’강민재의 턱선이 단단해졌다.강민재는 유봄을 믿는다.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는지,어떤 선을 지키는지 누구
박수가 다시 터지고 유봄이 단상에서 내려왔다.사람들이 몰려들었다.질문을 던지고,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건넨다.그 중심에 선 유봄.유지원은 그 장면이 못마땅했다.“저렇게까지 떠받들 일인가…”제주 학회 마지막 날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 연회장에 원탁들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학회 공식 만찬.잔잔한 클래식 연주와 은은한 조명 아래, 의료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유봄은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과하지 않게 올린 반머리, 얇은 진주 귀걸이.낮의 단정한 발표자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차분하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감.최재성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멈췄다.‘…역시.’실력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데, 이 여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유봄이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우연처럼,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녀의 오른쪽 자리는 최재성이었다.“오늘 발표, 인상 깊었습니다.”잔을 들어 가볍게 건네며 그가 말했다.“특히 출혈 상황에서 전환 속도.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현장에서 더 대단했을 것 같네요.”유봄은 미소 지었다.“과찬이에요. 교수님 세션도 잘 들었습니다. 췌담도 케이스 접근법, 많이 정교해지셨더라고요.”“정교해졌다는 말은… 예전엔 거칠었다는 뜻입니까?”장난기 어린 질문.유봄은 눈을 맞추며 담담히 답했다.“예전엔 공격적이셨죠. 지금은 계산적이시고요.”최재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대강당.로봇수술 세션의 마지막 발표자가 단상에 올랐다.“대한병원 일반외과, 유봄입니다.”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홀을 채웠다.최재성은 프로그램북에서 시선을 들었다.유봄.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직접 마주하는 건 몇 년 만이었다.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강단 위에 선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단정하게 묶은 머리, 절제된 화장, 깔끔한 화이트 수트.그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장식보다 눈에 띄었다.발표가 시작됐다.복강경 전환 없이 고난도 골반 종양을 로봇 단일공으로 집도한 케이스.영상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이 구간에서 혈관 변이가 예상되어 접근 각도를 15도 수정했습니다.”단순한 성공 사례가 아니었다.위험 요소, 판단 근거, 술기 선택 이유까지 정확했다.최재성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여전하군.’아니, 더 날카로워졌다.질의응답 시간.국외 교수가 집요하게 물었다.“그 상황에서 conversion risk는 없었습니까?”잠깐의 침묵.유봄은 눈을 들어 질문자를 바라봤다.“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거니까요.”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대답.청중석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여졌다.최재성은 그 순간 확실히 인정했다.라이벌, 그리고 아름답다.실력 있는 의사가 아름다울 때의 파괴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세션이 끝나고 로비.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질문이 쏟아졌다.
한강 위로 바람이 스쳤다.유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 파티.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참석했던 자리.유봄도 그날을 기억했다.할아버지가 드물게,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부탁했었다.“체면상 한 번만 얼굴 비춰다오.”그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결국 그 자리에 나갔다.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 계산적인 시선들.그런 자리는 늘 숨이 막혔다.그러다 갑자기 들려온 외침.“사람이 쓰러졌어요!”그 순간, 망설임은 없었다.집안의 체면도, 드레스도, 시선도 다 사라지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유봄은 한강 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저도 억지로 나갔던 자리였어요.그냥… 사람이 쓰러졌다길래 움직였을 뿐이에요.”강민재가 웃었다.“그게 당신이야.”유봄은 그를 올려다봤다.몇 년 전,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두 사람.그때 이미 시작됐던 인연이, 이제야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강민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한강 위로 번지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나… 당신 찾으려고 꽤 헤맸어.”유봄이 고개를 갸웃했다.“저를요?”“응. 파티 끝나고 나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지.근데 동유럽 출장이 겹쳐서 몇 달을 한국에 없었어.돌아왔을 땐 이미 흔적도 없더라.”그는 작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그래서 그냥… 인연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