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제주 국제컨벤션센터 대강당.로봇수술 세션의 마지막 발표자가 단상에 올랐다.“대한병원 일반외과, 유봄입니다.”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홀을 채웠다.최재성은 프로그램북에서 시선을 들었다.유봄.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하지만 직접 마주하는 건 몇 년 만이었다.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강단 위에 선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단정하게 묶은 머리, 절제된 화장, 깔끔한 화이트 수트.그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장식보다 눈에 띄었다.발표가 시작됐다.복강경 전환 없이 고난도 골반 종양을 로봇 단일공으로 집도한 케이스.영상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이 구간에서 혈관 변이가 예상되어 접근 각도를 15도 수정했습니다.”단순한 성공 사례가 아니었다.위험 요소, 판단 근거, 술기 선택 이유까지 정확했다.최재성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여전하군.’아니, 더 날카로워졌다.질의응답 시간.국외 교수가 집요하게 물었다.“그 상황에서 conversion risk는 없었습니까?”잠깐의 침묵.유봄은 눈을 들어 질문자를 바라봤다.“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거니까요.”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대답.청중석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여졌다.최재성은 그 순간 확실히 인정했다.라이벌, 그리고 아름답다.실력 있는 의사가 아름다울 때의 파괴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세션이 끝나고 로비.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질문이 쏟아졌다.
한강 위로 바람이 스쳤다.유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 파티.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참석했던 자리.유봄도 그날을 기억했다.할아버지가 드물게,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부탁했었다.“체면상 한 번만 얼굴 비춰다오.”그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결국 그 자리에 나갔다.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 계산적인 시선들.그런 자리는 늘 숨이 막혔다.그러다 갑자기 들려온 외침.“사람이 쓰러졌어요!”그 순간, 망설임은 없었다.집안의 체면도, 드레스도, 시선도 다 사라지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유봄은 한강 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저도 억지로 나갔던 자리였어요.그냥… 사람이 쓰러졌다길래 움직였을 뿐이에요.”강민재가 웃었다.“그게 당신이야.”유봄은 그를 올려다봤다.몇 년 전,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두 사람.그때 이미 시작됐던 인연이, 이제야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강민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한강 위로 번지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나… 당신 찾으려고 꽤 헤맸어.”유봄이 고개를 갸웃했다.“저를요?”“응. 파티 끝나고 나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지.근데 동유럽 출장이 겹쳐서 몇 달을 한국에 없었어.돌아왔을 땐 이미 흔적도 없더라.”그는 작게 웃었지만, 그 안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그래서 그냥… 인연이 아닌
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한정식집 현관 앞으로 나왔다.밤공기가 선선했다.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돌계단 아래로 수행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강두수 회장은 외투를 걸치며 유봄을 향해 몸을 돌렸다.“봄아.”이제는 이름도 자연스럽게 불렀다.“이제 편하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너라.눈치 보지 말고.”그리고 옆에 서 있는 강민재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이놈이 열받게 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며 덧붙였다.“내가 이 녀석 혼꾸녕을 제대로 내줄테니.”강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할아버지, 누구 편이세요?”강두수는 단호했다.“당연히 봄이 편이지.”유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님.”그러다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건강 조심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그러자 강두수가 껄껄 웃었다.“손주며느리가 유명한 의사인데 뭐가 걱정인가?”“이제 나는 든든해.”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만족이 어려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강두수는 타기 전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둘이 잘 어울린다.”짧은 한마디.그러고는 차에 올랐다.검은 세단이 천천히 출발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강민재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합격이네.”
차창 밖으로 한정식집의 한옥 지붕이 보였다.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서 내렸다.이번에는 강민재가 먼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놓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한옥 안쪽 가장 깊은 별실.창밖으로 작은 정원이 보이고, 대청마루 너머로 은은한 조명이 비쳤다.잘 다려진 한지 메뉴판과 정갈하게 세팅된 놋그릇들.그 앞에 앉은 사람은 강두수 회장이었다.겉으로는 태연했다.지팡이를 옆에 세워두고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은 언제나처럼 묵직했다.하지만 잔을 내려놓는 손끝에 아주 미세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몇 년 전부터였다.“여자친구 있습니다.”그 한마디만 남기고 한 번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던 손주.그 고집 센 놈이 오늘에야 정식으로 인사를 시키겠다 했다.어떤 사람이기에.기업가 집안의 딸도 아니고, 정략적으로 얽힌 관계도 아니고, 손주가 저리도 단단히 마음을 준 여자라니.강두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궁금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없었다.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민재가 그렇게까지 아끼는 여자라면…’괜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손주놈은 일은 차갑게 해도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했다.자신을 닮았으니까.문밖에서 직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회장님, 손님 도착하셨습니다.”강두수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심장이 아주 조금 빨리 뛰었다.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대기업 총수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그래, 어디 한번 보자.’손주놈이 그토록 좋아한다는 여자.그 문이 열리는 순간을 조용히 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 층을 단독으로 쓰는 공간이 고요하게 펼쳐졌다.강민재의 펜트하우스는 처음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밤이 한눈에 들어왔다.한강과 도심의 불빛이 겹겹이 쌓여 마치 별이 땅으로 내려앉은 듯 반짝였다.80평이 넘는 넓은 공간, 절제된 인테리어, 그러나 차갑지 않은 온기.유봄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서울… 참 예쁘네요.”유리창에 비친 불빛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강민재는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왔다.“당신이 좋다면… 여기로 할까.”“뭘요?”유봄이 돌아보자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신혼집.”공기가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다.“당신이 싫다고 하면 다른 데 알아볼게.더 넓은 곳이든, 한강이 더 가까운 곳이든.”유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강민재는 대답 대신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함께 서울 야경을 향했다.그의 턱이 그녀의 어깨 위에 닿았다.“근데…”낮게 웃으며 속삭였다.“우리 애들 태어나면 흙 밟으면서 뛰어놀아야 하지 않겠어?”유봄의 숨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정원 있는 집이 좋겠다.잔디 깔고, 작은 그네도 놓고.”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려온 미래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그의 품 안에서 유봄의 심장이 천천히 빨라졌다.이 남자는 현재만 말하지 않는다.항상, 자신과 함
강민재는 잠시 휴대폰을 확인했다.그리고 고개를 들었다.“미안합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짧고 단정한 거절.핑계도, 애매한 여지도 없었다.이미연은 순간 아쉬움이 스쳤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아, 그러시구나. 그럼 다음에 뵈어요.”“네. 다음 주 회의 때 뵙겠습니다.”그는 정중하게 인사하고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망설임 없이.이미연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사업 이야기 외에는 단 한 발짝도 곁을 허락하지 않는 남자.함부로 웃지도 않고, 의미 없는 기대를 주지도 않는다.그래서 더 어려웠고, 그래서 더 끌렸다.‘저 사람…’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차 문을 열기 전, 강민재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이미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일할 때와 전혀 다른 톤.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했다.사업은 계산으로 따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다르다.이미연은 천천히 차에 올라타며 생각했다.‘그래요, 강민재 대표님.’사업 파트너로는 충분히 곁에 섰다.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조급하게 들이대지 않는다.대신 자연스럽게, 그의 일상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그가 쉽게 허락하지 않을수록 그의 곁은 더 가치 있어 보였다.그리고 이미연은 도전적인 것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공항을 빠져나온 차량이 올림픽대로에 올라섰다.창밖으로 한강이 스쳐 지나갔다.이미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본 장면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