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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만 살리라 하셨다.”
별채 문밖에서 들려온 그 말에 심연주는 침상 기둥을 움켜쥐었다. 여섯 시진째 아이를 낳지 못한 채 피를 흘리고 있었고, 산파가 몇 번이나 뜨거운 물을 갈아 왔지만 대야의 물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아랫배를 쥐어뜯는 통증이 잠시 잦아든 사이, 연주는 자신이 들은 말이 누구의 명령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옥분아, 방금 누가 아이만 살리라고 했느냐?”
젖은 수건을 짜던 옥분은 대답하지 못했다. 의원을 불러 달라며 별채 문을 두드리다가 병사에게 맞은 뺨이 벌겋게 부어 있었고, 눈가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연주가 다시 묻자 시녀는 수건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둘째 도련님께서 그리 명하셨답니다.”
강윤겸이었다.
삼 년을 함께 산 남편이자 지금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였다. 아무리 냉담한 사내라도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면 의원 한 사람쯤은 불러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만 살리라고 했고, 그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의원이 별채 문턱조차 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연주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쌌다. 다시 진통이 밀려오자 허리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고, 산파가 힘을 주라고 재촉하는 동안 그녀는 침상 기둥에 매달려 간신히 숨을 골랐다.
“의원을…… 불러 다오.”
옥분이 문으로 달려가 빗장을 흔들었다.
“우리 마님께서 위독하십니다! 의원 한 사람만 들여보내 주십시오!”
문밖에서는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옥분이 다시 문을 두드리자 병사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아이를 무사히 받으라는 명이다. 산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리 소관이 아니다.”
연주는 눈을 감았다. 며칠 전부터 윤겸은 그녀를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별채로 옮겨 놓았다. 산달이 가까워졌으니 의원이 있는 본채에 머물게 해 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형수 민소란이 조용한 곳에서 아이를 낳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며 부탁을 거절했다.
그때도 연주는 참았다.
민소란은 강씨 집안의 큰며느리였고, 윤겸은 형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옳다고 믿었다. 형수가 병이 났다 하면 한밤중에도 달려갔으며, 형수가 탐내는 물건이 있으면 아내의 혼수라도 가져다주었다.
연주가 친정에서 가져온 금비녀를 소란에게 내주지 않겠다고 했던 날에는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했다. 배가 불러 오래 앉아 있기도 힘들었지만, 윤겸은 형수에게 불경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일으켜 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만 태어나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된 남편은 적어도 자신의 아이를 낳은 아내에게 조금쯤 다정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지금 그녀를 죽이고 있었다.
***
별채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린 것은 진통이 시작된 지 일곱 시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옥분이 문으로 달려가자 병사들이 예를 올리는 소리와 함께 강윤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아이가 나오지 않았느냐?”
연주는 침상 끝을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 마지막 희망이 살아났고, 그녀는 산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부군, 저도 살아 있습니다. 아이를 살려야 하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저도 살고 싶습니다. 제발 의원을 불러 주십시오.”
윤겸은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산파에게 아이의 상태를 물었고, 옥분이 산모의 피가 멎지 않는다고 울면서 설명하는 동안에도 연주의 안부는 묻지 않았다.
“형수님께서 아이를 기다리고 계신다.”
한참 만에 들려온 남편의 대답이었다.
“무사히 낳아야 한다. 쓸데없이 움직이지 말고 산파의 말을 따르거라.”
연주는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살려 달라고 애원했는데, 남편은 형수가 아이를 기다린다는 말만 남겼다.
그가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리자 연주는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곧 밀려온 진통에 몸이 꺾였다. 산파가 그녀를 붙잡고 힘을 주라고 외쳤으며, 옥분은 울면서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새벽닭이 울기 직전,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다.
그 말에 윤겸이 고개를 들었다.“말투가 그게 무엇이냐? 형수님께서 너를 걱정하시지 않느냐.”연주는 남편을 바라보았다.그의 옷에는 소란을 안고 나오느라 묻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연주가 끼어 있던 난간을 들어 올린 사람들은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하인들이었다.“저를 구해 주신 분들께 먼저 감사드려야겠습니다.”연주는 몸을 돌려 하인 둘에게 고개를 숙였다.그들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연주는 끝까지 예를 갖추었다. 윤겸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그녀는 더 듣지 않고 마당을 떠났다.그날 저녁, 윤겸은 소란의 처소에서 밤을 지켰다.연주에게는 의원도 오지 않았다. 하녀 하나가 약초 몇 줌을 가져와 문 앞에 내려놓았을 뿐이었다.연주는 부어오른 발목을 찬물에 담갔다. 물이 상처에 닿자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옥분은 누운 자리에서 주인의 발목을 보며 울었다.“마님, 어찌 이런 일이…….”연주는 시녀의 손을 잡았다.“옥분아, 나는 이제 이 집에서 누구의 도움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옥분은 눈물을 닦았다.연주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이 난 창고에서는 아직 탄 냄새가 흘러왔고, 멀리 소란의 처소에는 밤늦도록 등불이 켜져 있었다.윤겸은 그곳에 있었다. 연주는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남편의 마음이 아니라, 이 집을 나갈 길이었다.연주는 사흘 동안 탈출을 준비했다.다친 발목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으나, 창고의 화재로 하인들의 배치가 바뀐 것은 뜻밖의 기회였다. 뒤뜰의 작은 문을 지키던 사내가 불탄 창고의 잔해를 치우는 일에 동원되면서 새벽 한때 문이 비게 되었다.그녀는 첫날부터 뒤뜰로 향하는 길을 살폈다. 그러나 소란의 하녀들이 교대로 방 앞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옥분의 약을 달이러 가는 길에만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둘째 날에는 일부러 다친 발목이 심하게 부었다고 호소해 의원을 청했다. 소란은 의원을 보내 주지 않았지만, 연주가 혼자 걷기도 어렵
그녀는 치맛자락을 걷어 쥐고 회랑으로 뛰어들었다.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연기는 눈을 찔렀고, 바닥에 떨어진 재가 신발 밑에서 바스러졌다. 연주는 소란의 치맛자락이 걸린 난간을 붙잡아 힘껏 당겼다.“형수님, 이쪽으로 나오십시오!”소란은 연주를 보자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연주의 팔을 붙잡았다.“동서, 나를 데리고 나가 줘.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연주는 난간에 걸린 비단을 찢어 냈다. 소란이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녀는 먼저 회랑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고, 연주는 뒤에서 밀어 주려 했다.그 순간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불에 약해진 들보가 갈라지고 있었다.연주는 소란을 밀쳐 냈다. 들보가 두 사람 사이로 떨어지면서 불붙은 나무 조각이 흩어졌고, 연주는 뒤로 물러나다 무너진 난간에 발목이 끼었다.뜨거운 열기가 치맛자락 가까이 밀려왔다.그녀는 몸을 숙여 발을 빼려 했지만, 나무가 깊숙이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형수님, 먼저 나가십시오!”소란은 이미 회랑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들보 때문에 길이 막히자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도련님!”윤겸이 젖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회랑으로 뛰어들었다.연주는 그를 보자 손을 뻗었다.“부군, 제 발이 끼었습니다!”윤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그는 연주의 다리가 난간 아래에 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연기가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었고, 불붙은 나무가 바로 옆에서 타고 있었다.연주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을 뻗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자신을 버린 사람에게조차 도움을 청하게 되는 모양이었다.윤겸은 한 걸음 움직였다.그때 소란이 기침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윤겸아…….”윤겸은 연주에게 향하던 몸을 돌렸다.그는 소란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고, 떨어진 들보를 피해 회랑 바깥으로 나갔다. 소란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으며, 윤겸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어 연기를 막아 주었다.연주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소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그 아이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단다.”연주는 그녀의 머리에 꽂힌 봉황 비녀를 바라보았다.“형수님께서는 언제 그 비녀를 돌려주실 생각이십니까?”소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윤겸이 곧장 끼어들었다.“또 그 이야기를 꺼내느냐?”“어머니의 유품입니다.”“형수님께서 잠시 쓰시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라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느냐?”연주는 윤겸을 바라보았다.그는 형수가 빼앗은 비녀를 돌려받으려는 아내를 나무라고 있었다. 조금 전 옥분이 매를 맞은 까닭도, 연주가 무릎을 꿇은 까닭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소란은 윤겸의 소매를 가볍게 당겼다.“도련님, 그만하세요. 동서가 오늘 많이 지쳤잖아요.”그러고는 연주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비녀는 나중에 돌려줄게. 지금은 네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먼저겠구나.”연주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녀는 돌아서서 옥분이 누운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는 윤겸이 형수에게 춥지 않으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고, 소란은 그의 걱정이 지나치다며 웃었다.연주는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옥분은 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다. 의원은 며칠 동안 열이 오를 수 있으며,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깨끗한 물과 약재를 아끼지 말라고 당부했다.연주는 약값을 치르려고 혼수 장신구를 찾았지만, 궤짝 안에 남아 있는 것은 값싼 은비녀 몇 개뿐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귀한 물건은 대부분 소란의 처소로 옮겨져 있었다.연주는 남은 은비녀 하나를 의원에게 건넸다.의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았고, 약을 더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연주는 옥분의 곁에 앉아 밤을 지켰다. 시녀가 잠결에 몸을 움츠릴 때마다 젖은 수건을 갈아 주었고, 열이 오르면 물을 조금씩 먹였다.그러다 창밖에서 바람이 거세지는 소리를 들으며 전생을 떠올렸다.그때는 자신이 죽어 가는 동안 옥분이 문밖에서 울었다. 이번에는 옥분이 죽어 가는데 자신
“네가 내 명예를 더럽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니?”연주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무릎 아래로 통증이 밀려왔고, 바닥에 묻은 피가 치맛자락을 적셨다.“형수님의 명예를 더럽힌 일을 사죄드립니다.”소란은 그제야 만족한 듯 웃었다.“그래.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구나.”그녀가 허리를 숙여 연주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왔다.“다음에는 저 아이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연주의 손가락이 마루 틈을 파고들었다.소란은 다시 몸을 일으켜 윤겸을 돌아보았다.“도련님, 동서가 이렇게까지 뉘우치니 이제 옥분이를 의원에게 보내 주세요. 더 벌하면 제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윤겸은 하인에게 의원을 부르라고 명했다.연주는 곧장 옥분에게 다가갔다. 시녀의 등은 피에 젖어 있었고, 옷을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달라붙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연주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옥분에게 덮어 주었다.“조금만 참아라. 의원이 오면 나아질 것이다.”옥분은 흐린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연주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시녀는 힘겹게 속삭였다.“마님께서 맡기신…… 그 종이…….”연주는 옥분의 손을 꼭 잡았다.“내가 네게 준 기록 말이냐?”옥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중 일부를…… 뒤뜰 물동이 밑에…….”연주는 옥분의 손을 더 단단히 감쌌다.“잘했다. 나머지는 내가 찾으마.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쉬어라.”“마님께서…… 살아 나가셔야…….”말을 끝내지 못한 옥분이 눈을 감았다.연주는 시녀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의원이 도착하고 옥분이 들것에 실려 나갈 때까지 연주는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녀들이 대청의 피를 닦아 내는 동안에도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물이 여러 번 갈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날 자신이 지킨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옥분의 목숨 하나였으며, 그것마저 온전히 지켜 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옥분이 알려 준 물동이는 뒤뜰의
“저 계집은 벌을 받아야 한다. 네가 감싼다고 달라질 일은 없다.”“부군, 옥분은 제 시녀입니다.”“그러니 네가 보는 앞에서 벌하는 것이다.”연주는 그 말에 숨이 막혔다.윤겸은 시녀의 잘못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옥분이 매를 맞는 모습을 아내에게 끝까지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하인들이 옥분을 마당의 형틀 앞에 엎드리게 했다. 연주는 몸부림쳤지만 윤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고, 첫 번째 매가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옥분의 비명이 터졌다.시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두 번째 매가 떨어지자 옷감 위로 붉은 줄이 번졌고, 세 번째에는 옥분이 마루 끝을 붙잡은 손을 놓쳤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에서 고통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연주는 윤겸의 손등을 할퀴었다.“그만두십시오! 제발 그만두십시오!”윤겸은 손등에서 피가 나는데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형수님께서 억울하게 모함당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면 멈추겠다.”연주는 남편을 올려다보았다.그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옥분의 비명이 울리는 동안에도 윤겸은 아내가 언제 굴복할지만 기다리는 얼굴이었다.“제가 인정하면 정말 멈추시겠습니까?”“네 입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말해라. 그리고 형수님께 사죄해라.”연주는 대청 아래에 앉은 소란을 보았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르면서도 하인에게 매질을 멈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다시 매가 올라갔다.연주는 온 힘을 다해 윤겸의 팔을 밀어내고 옥분에게 달려갔다. 하인이 미처 멈추지 못한 매가 그녀의 등에 내리꽂혔고, 순간 숨이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러나 연주는 물러나지 않았다.옥분의 몸 위로 엎드려 시녀의 머리를 품에 감쌌다.“옥분아, 나를 보아라. 정신을 놓지 마라.”시녀의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옥분은 주인을 알아보자 고개를 저었고, 떨리는 손으로 연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마님……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내가 알고
하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연주는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과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을 보았다. 어제까지 작은마님이라 부르며 인사하던 이들이 이제는 마치 죄인을 보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소란은 그 광경을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옥분을 가리켰다.“그런데 어머니, 동서가 쓴 글을 저 시녀가 숨기고 있었습니다. 제 주인의 망상을 믿고 집안의 추문을 퍼뜨리려 했다면 그냥 넘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연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옥분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소란의 눈길이 연주에게 닿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노부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하인 하나를 바로잡지 못하면 집안의 법도가 무너지겠지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분이 대청 앞으로 끌려 나왔다.옥분은 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었다.소매가 잡아 뜯기는 바람에 팔목이 드러났고, 뜨거운 죽이 튄 발등에는 붉은 물집이 올라와 있었다. 연주는 시녀의 상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뒤에 선 하인이 어깨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노부인이 종이를 흔들었다.“네가 이것을 숨긴 까닭이 무엇이냐?”옥분은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대답했다.“작은마님께서 제게 맡기신 글입니다.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주인이 무슨 글을 쓰든 종은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네가 주인의 잘못까지 감추었으니 한통속이 아니고 무엇이냐?”옥분은 고개를 들었다. 시녀의 시선이 연주를 지나 윤겸과 소란에게 향했다.“저도 그날 밤 두 분께서 별당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연주는 눈을 감았다.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이 집안에서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그 사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훨씬 큰 힘을 쥐고 있었다.윤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네게 형수님의 처소를 엿보라 시켰느냐?”“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작은마님께서 밤늦게 돌아오시지 않아 걱정되어 따라갔을 뿐입니다.”“그렇다면 네 눈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 보아라.”옥분은 손을 꼭 쥐었다.“도련님께서 큰마님의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