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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가을단풍
진씨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씨 가문의 큰부인을 초대해 차 한잔 나누기로 했다. 그 댁 아가씨도 함께 온다더구나."

신경남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침묵했다.

"그 아이는 너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 아니냐. 그 아이의 아비가 일 처리를 잘못하여 금주로 좌천되지만 않았어도, 네가 배연희같이 병약한 여식과 혼인할 일은 없었을 게다. 쯧, 청렴하고 뼈대 있는 가문이고 당시 네 장인도 앞날이 창창하여 훗날 네게 힘이 될 줄 알았건만. 도움은 고사하고 가문 전체가 화를 입더니, 배연희마저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재형이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날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러지 않았다면 배지희 저것을 집안으로 들일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진씨는 지난날의 아쉬움을 토로하며 길게 탄식했다.

신경남은 시선을 떨군 채 차를 마셨다.

복잡한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백씨 가문은 인맥이 넓어 연줄을 대기도 쉬운 집안이지. 작년에 막대한 은자를 들여 여식 하나를 입궁시키더니, 그 아이가 폐하의 총애를 입으면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웠지 않느냐."

신경남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더는 듣기 싫은 듯 말을 끊었다.

"어머니, 그만하십시오."

진씨는 슬그머니 아들의 안색을 살피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유정이가 널 못 본 지 이 년이나 되었다며 내심 그리워하더구나."

한참을 침묵하던 신경남의 차갑던 얼굴이 봄바람에 눈 녹듯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느릿한 어투로 물었다.

"백씨 일가는 언제쯤 도착합니까."

진씨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시간을 보아하니 이맘때쯤 도착할 게다. 그 아이가 오면 친누이처럼 다정히 대해주거라. 어차피 남들도 섣불리 입을 놀리진 못할 테니. 혹여나 배지희가 내막을 알고 너와 따지려 든다면 내가 알아서 입을 막을 테니 안심하렴."

신경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앞뜰로 향했다.

청심원.

난심은 미리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두었다.

깨끗한 의복과 신발, 버선은 물론 상처에 바를 약까지 모두 준비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지희가 처소로 돌아왔다. 시종들은 서둘러 병풍을 치고 젖은 옷과 신발을 벗겨주었다.

배지희는 추위에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타고난 냉한 체질인데다 찬 기운까지 스며들자 뼛속까지 시려왔다.

난심은 서둘러 어린 시녀들에게 잘게 썬 생강을 가져오게 한 뒤, 배지희의 손바닥을 힘껏 문지르며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한참을 부산스럽게 돌아친 끝에 배지희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미처 평상에 눕기도 전에 밖에서 전갈이 당도했다.

청심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나리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나가서 손님을 맞이하라 하십니다."

배지희의 머리 물기를 닦아주던 난심은 그 말을 듣고 분노로 손을 떨었다.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요. 작은 마님께서 방금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 아시면서 어찌 이럴 수가 있답니까."

전갈을 전하러 온 하인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백씨 가문의 백유정 아가씨께서 작은 마님을 뵙고자 하였으나 나리께서 만류하시며 시간을 벌어주셨습니다. 유정 아가씨는 신분이 존귀하시니, 얼른 몸단장을 하고 나가 잠시 인사를 나누고 격식만 차린 뒤 돌아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인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뻔뻔한 태도로 말을 전하고는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배지희는 창백한 고개를 들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나리께 가서 전하거라. 내 몸이 불편하여 손님을 뵐 수 없다고 말이다."

하인은 잠시 당황했으나, 단호한 배지희의 얼굴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러갔다.

청심과 난심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방금 나간 하인과 마찬가지로, 평소 유순하고 고분고분하던 배지희가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꾹 참고 손님을 맞으러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신경남이 명한 일이라면 아무리 곤란하고 성가신 일이라도 불평 없이 처리해 왔던 배지희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난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배지희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눈치 빠른 청심이 조심스레 물었다.

"작은 마님, 아직 나리께 화가 나신 겁니까."

배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지쳤을 뿐이다."

청심은 배지희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호수에 빠진 이후로 그녀가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반면 청심은 이런 변화가 내심 반가웠다.

신씨 가문에 시집온 뒤로 배지희는 너무 신경남 위주인 삶을 살았다.

애정이 깊을수록 사람은 한없이 비굴해지기 마련이다.

청심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그런 처량한 신세가 되는 것이 싫었다.

몸단장을 마친 배지희는 양털을 덧댄 넉넉한 솜옷을 걸치고 푹신한 평상에 기대어 앉았다.

담장 너머로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면 청심원은 하인들이 손님 시중을 들러 차출된 탓에 썰렁한 한기만 감돌았다.

찰나였지만 배지희는 차라리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평소 저택의 모든 이들은 배지희를 이방인 취급하며 감시하고 경계했다.

모두가 신경남의 후실로 들어온 것이 천운이자 분에 넘치는 호사라고 생각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주제넘게 나서서 배지희에게 어떻게 은혜를 갚고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치려 들었다.

정작 그녀는 한 것도 없이, 이미 신씨 가문에 큰 빚을 진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놈의 은혜란 것이 너무도 무거워 숨이 막힐 정도였다.

삼 년이었다.

노력할 만큼 했고 지칠 대로 지쳤으니,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할 때였다.

한참 후, 북정원에서 사당에 가 두 시진 동안 무릎을 꿇으라는 명이 떨어졌다.

청심이 달려가 선처를 구하려 했지만 배지희는 그런 청심을 만류했다.

그녀는 하늘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밤이 되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명을 전하러 온 어멈은 굽신거리며 선처를 부탁하지도 않고 평온한 배지희의 얼굴을 보고 내심 의아했다.

평소 같았으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웃는 얼굴로 맞이하며 뇌물을 쥐여 주었을 것이다.

오늘따라 목석같이 구는 꼴이, 호수에 빠져 머리라도 다친 게 분명하다고 어멈은 생각했다.

배지희는 옷을 갈아입고 어멈 앞으로 다가가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장서게."

어멈은 배지희가 끝내 뇌물을 건네지 않자 대놓고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돌아가서 진씨에게 단단히 고자질을 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배지희는 청심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청심원에 돌아왔다.

난심이 허둥지둥 마중을 나왔다.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배지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안채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신경남이 침상 가장자리에 단정히 앉아 서책을 들고 있었다.

밝은 촛불이 그의 수려한 옆선에 선명한 음영을 드리웠다.

푸른 장포 자락을 겹겹이 늘어뜨린 채 꼿꼿하게 앉은 자태는 마치 그림 속 선인처럼 맑고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

그는 배지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유정이를 접대하러 오라 불렀거늘 어찌 가지 않았느냐. 설마 낮에 있었던 일로 내게 앙심이라도 품은 것이냐."

수려한 그의 얼굴 이면에는 오랫동안 억눌러온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배지희는 입을 달싹였다.

습관처럼 해명을 늘어놓으려 했으나 막상 튀어나온 말은 달랐다.

"오해하셨습니다, 부군. 저는 앙심을 품은 적 없습니다."

신경남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앙심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가지 않은 것이냐. 혹여 누군가가 나와 유정이의 과거를 떠벌린 모양이구나."

배지희는 어리둥절했다.

"과거라니요."

신경남은 정말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배지희를 보고 성급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쏘아붙였다.

"진정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헷갈리는구나."

이대로 간다면 또다시 긴 말다툼으로 이어질 것이다.

배지희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숨이 막혔다.

"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신경남은 배지희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끝까지 말대꾸로구나."

그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나와 유정이는 소꿉친구이나 그저 어린 시절의 정일 뿐이다. 널 보내 그 아이를 만나게 한 것은 네 체면을 살려주기 위함이었건만, 내 깊은 뜻도 모르고 손님들 앞에서 내 체면을 구기다니. 네가 손님을 뵙지 않겠다 했을 때 유정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아느냐. 오히려 그 아이는 자신이 너무 외람된 요구를 했다며 연신 사과했다."

백유정의 상심만 상심이고 의붓아들에게 밀려 호수에 빠진 그녀의 마음은 아무렇지 않다는 식이었다.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받은 그녀의 억울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신경남의 마음속에서 배지희는 세상 그 누구보다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배지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끊었다.

"제 체면을 배려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백 소저의 얼굴조차 뵌 적 없고, 부군과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일부러 앙심을 품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손님을 맞으러 가지 못한 것은 물에 빠져 몸이 성치 않은 데다, 어머님께서 사당에 가 무릎을 꿇으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찮은 사정을 손님인 백 소저는 모른다 쳐도, 부군께서는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뭐라?"

신경남은 배지희가 자신의 말을 끊자 분노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들고 있던 서책을 내동댕이쳤다.

서책은 허공을 날아 마침 배지희의 얼굴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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