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4년 전, 중병에 든 친언니는 임종 직전 배지희에게 자신을 대신해 아들과 지아비를 보살펴달라며 애원했다. 그렇게 배지희는 수년 간, 정성을 다해 신씨 가문을 보필했다. 부군과 평생 다정한 부부로 살기를 꿈꿨지만 그녀가 그토록 연모했던 부군은 그녀를 경계하며 곁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배지희를 아이나 돌보는 유모로만 취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군의 소꿉친구 백유정이 경성으로 돌아오자,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옛 정에 불을 지폈다. 위로는 표독스러운 시어머니가, 아래로는 주인을 업신여기는 시종들이 득실거렸고, 부군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청렴하고 고귀한 명문 세가였으나, 화려한 담장 안에서 배지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허황된 꿈에서 깬 배지희는 이혼을 결심했다. 어느 비 오는 밤, 벼랑 끝에 몰린 그녀는 기어이 가문의 적장자이자 후계자인 신주헌의 대문을 두드렸다. "나리,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혼하고 싶습니다." 사내는 서늘하고도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각오는 된 것이냐." 거센 빗줄기 속, 흠뻑 젖은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리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권세를 쥔 자, 신씨 가문 본가의 적장자 신주헌. 그는 액운을 타고나 약혼녀들이 줄줄이 횡사했다는 흉흉한 소문과 함께 일찌감치 혼인에 뜻을 접은 사내였다. 본디 성정이 냉혹하고 고독을 즐겼으며, 황제의 검으로서 황제의 뜻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고 정적들을 도륙한 탓에 주변에 수많은 적을 둔 사람이기도 했다. 평생 권력만을 곁에 둔 채 홀로 늙어갈 줄 알았건만, 핍박과 암투에 시달리는 가엷은 여인이 자꾸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무심코 내민 한 번의 도움. 그날로 그녀의 처연한 모습은 그의 가슴 깊이 자리를 잡았다. 벼랑 끝에 몰린 그녀가 기어이 그의 방문 앞까지 찾아와 애원하던 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낚아채듯 품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운 숨결이 배지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게 온 이상,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View More배지희는 정성스레 약재를 다듬고 탕약을 달일 시간을 일러둔 뒤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그녀의 품에는 세 통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이 서신들에 그녀의 앞날이 걸려 있었다.부디 뜻대로 풀리기를 간절히 바랐다.배지희는 나고 자라며 단 한 번도 온전히 자신의 뜻을 주장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병약한 언니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라 가르쳤고, 성년례를 치르자마자 죽은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겼다.하지만 이제 더는 그 짐을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이건 그녀의 삶이 아니었고, 그녀가 감내해야 할 책임도 아니었다.배지희는 난심을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난심은 서신을 가슴 깊숙이 품고 비장하게 말했다."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말을 마친 난심은 잰걸음으로 사라졌다.저 멀리 우뚝 솟은 회랑 위, 칠흑처럼 짙은 두 눈동자가 작은 불당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시녀가 서신을 품고 황급히 빠져나가는 모습에 이어, 뒷마당에 놓인 탕약기에서 검은 약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광경까지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었다.수수한 소복 차림의 여인이 허리를 숙여 탕약을 젓고 있었다. 흘러내린 옷자락 사이로 버들가지처럼 가녀린 허리선이 언뜻 비쳤다. 여인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를 탕약에 털어 넣었다.사내의 짙은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어스름이 깔리는 밤의 장막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다음 날 아침, 배지희가 소박한 아침 요기를 마치기 무섭게 백유정이 찾아왔다. 그 뒤로는 굳은 얼굴의 신경남이 따라 들어왔다.배지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신경남의 의중을 알 길이 없으니, 지금 당장 백유정이 보는 앞에서 이혼을 들먹이며 판을 키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 판단했다.우선은 며칠 무탈하게 넘기는 것이 상책이었다.오늘 백유정은 한층 더 눈부셨다. 봄을 닮은 초록빛 주름치마에 옅은 살구빛 덧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정교하게 수놓은 허리띠를
가련한 척 울먹이던 백유정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신경남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배지희를 감싸주며 변명까지 해준 걸까?항간의 소문으로 배지희가 신씨 가문에 시집온 뒤 시어머니 진씨에게 온갖 구박을 당해도 신경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한다고 했다.그 모든 소문이 헛소문이었던 걸까?자신만만했던 백유정의 마음 한구석에 미세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오라버니, 빈말이라도 절 위로해 주실 필요 없어요. 필시 제가 언니의 귀한 명화를 망쳐버린 탓에 노여움이 안 풀리신 걸 테죠. 차라리 제가 그림 한 폭을 새로 구해 배상해 드리는 게 어떨까요?"신경남은 딴생각에 빠져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거라. 그 사람이 무척이나 아끼던 그림이니 잃고 나서 꽤 상심이 컸을 거다. 네가 이리 세심히 배려해 주니, 그 사람도 틀림없이 네 진심을 알아줄 게다."백유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신경남은 싸늘하게 굳은 백유정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무언가 좋은 핑곗거리가 떠오른 듯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그는 백유정을 남겨둔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백유정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송풍원 안방.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가 창가에 놓인 평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짙은 청색 이불이 가슴 아래를 덮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다.그는 미간을 좁힌 채 손에 든 서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흑옥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흰 비단 옷자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차가운 분위기에 귀티를 더했다.그 모습을 바라본 진무는 크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나리, 둘째 집안 도련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무슨 일이라더냐."신주헌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책장을 넘겼다.진무가 답했다."그림을 구하러 왔답니다."신주헌은 묵묵부답이었다.진무가 다시 말을 이었다."나리의 서재에
한편, 배지희는 인적이 드문 외진 불당에서 불청객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신경남이 백유정을 이끌고 이 으슥한 곳까지 우연히 걸음을 한 것이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갓 써내려간 서신 몇 통을 서둘러 품에 갈무리하고 밖으로 나섰다.백유정은 연두색 바탕에 배꽃을 수놓은 치마를 입고, 그 위로 옅은 진주색 덧저고리를 걸쳤다. 목에는 하얀 여우 털 목도리를 둘렀는데,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털 장식이 어우러져 봄꽃처럼 화사하고 앳된 얼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그녀는 배지희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이런, 지희 언니께서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배지희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신경남에게 시선을 돌렸다."부군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신경남은 착잡한 눈빛으로 배지희를 훑어보았다.그녀는 철 지난 붉은빛 주름치마에, 역시 유행이 지난 연노란색 긴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는 같은 색의 매듭띠로 단단히 동여맸다.치장이라곤 풍성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소박한 은비녀 한 개가 전부였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으로 빼입은 백유정에 비하면, 배지희의 차림새는 낡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처럼 희고 고운 자태 덕분에 아무리 수수하게 입어도 명문가 안주인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신경남은 그제야 지난 삼 년 동안 배지희에게 번듯한 장신구 하나 선물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반면 백유정이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어제 바로 거리로 나가, 값이 꽤 나가는 비취 장신구들을 안겨주었다.죄책감도 잠시,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신씨 가문은 곳간이 차고 넘치는 부자였다. 배지희의 생활 역시 궁핍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조른 적이 없으니, 필시 그런 사소한 물건에는 연연하지 않는 성정이라 넘겨짚었다.백유정은 달랐다. 지난 몇 년간 금주에서 숱한 고생을 겪었을 테니, 그녀를 각별히 보살피고 보상해 주더라도 배지희가 속 좁게 질투하지는 않을 터였다.신경남의 대답이 늦어지자, 배지
신경운은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강설각이면 아주 좋지요. 이번에는 유정 언니한테 며칠 푹 쉬어 가라 할 겁니다."며칠간 이어진 봄비가 그치면 즐거운 명절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었다.아직 성년례도 치르지 않은 신경운의 머릿속은 온통 놀 궁리뿐이었다. 백유정만 곁에 있으면, 신경남을 졸라 사방으로 유람을 다닐 구실이 생겨서 좋았다.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시종이 다가와 신경남이 귀가했다는 소식을 알렸다.진씨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국자감에서 서책을 편찬하느라 한창 바쁘다 하지 않았느냐."시종이 고했다."나리를 모시는 자의 말로는, 나리께서 휴가를 내셨다 합니다."신경운이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틀림없이 우리 오라버니가 유정 언니를 빨리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서 공무마저 내팽개친 거네요."진씨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남은 공무를 등한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리 갑작스레 일찍 귀가한 걸까?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신경남의 곁에는 역시나 백유정이 함께였다.신경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백유정의 손을 맞잡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진씨 역시 시종들에게 서둘러 손님맞이를 명하고, 자신의 심복 시녀 둘을 따로 붙여 시중을 들게 했다.그때 신경남이 불쑥 말했다."어머니, 저는 당분간 청심원에 머물까 합니다."진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청심원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썰렁한데, 굳이 그곳으로 갈 이유가 있느냐."신경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오라버니, 서재에서 잘 지내시더니 왜 갑자기 안채로 돌아가시려 합니까."청심원이 공간은 넉넉할지 몰라도 안채의 깊숙한 곳에 자리해 드나들기 번거로웠다. 반면 바깥채의 큰 서재는 백유정이 머물 강설각과 훨씬 가까웠다.신경남은 동생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백유정에게 다정히 말했다."내가 강설각까지 안내해 주마. 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고 한꺼번에 채워 넣자꾸나."백유정은 수줍게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예, 오라버니."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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