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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가을단풍
곁에 있던 청심이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배지희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다.

"나리, 고정하십시오!"

자신이 내던진 서책이 배지희에게 날아간 줄도 몰랐던 신경남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서책에 맞아 흘러내린 머리가 배지희의 얼굴 반쪽을 가렸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을 하고 무덤덤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모습마저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세상을 떠난 친언니 배연희도 그녀의 미모에는 비할 수 없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그림처럼 단아한 이목구비는 여전했으나, 평소 그를 좇던 눈망울에는 더 이상 애틋함이 아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신경남은 입을 달싹였다.

약간의 후회가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백유정에 대해 해명하려다가 내심 켕기는 구석이 생겨 난생처음 손을 대고 만 것이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으나 결국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신경남은 음침한 얼굴을 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지금처럼 속이 좁고 질투나 일삼는 네 모습을 본다면, 나뿐만 아니라 구천에 있는 네 언니조차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배지희는 신경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는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경성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우아하고 바른 세가의 공자였다.

하지만 기억 속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다정한 모습을 속삭이던 신경남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신경남은 그저 원래 이런 사람이고, 그의 다정함과 애정은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라 기분 좋을 때 하사하는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신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는 그저 배지희가 그의 부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정성을 쏟아 신재형을 훌륭히 키워내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체면이나 서러움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이 한 번 편견을 품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혼미하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으며,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지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는 신경남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섰다.

"부군의 가르침은 명심하겠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저는 방으로 돌아가 쉬겠습니다. 부군께서도 일찍 쉬시지요."

그녀는 청심의 부축을 받으며 평소 머물던 서쪽 별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경남은 멀어지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배지희는 갈수록 다루기 껄끄러워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배지희는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녀는 한쌍의 원앙이 다정하게 물장구를 치며 노는 모습이 수놓인 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에 삼 년 전의 해묵은 일들이 꿈에 나왔다.

오 년 전, 그녀의 아버지 배진수는 폐위된 태자를 변호하다 선황의 노여움을 사 하옥되었다.

할아버지가 태자의 스승으로 지냈던 얄팍한 정이 아니었다면, 배씨 가문 전체가 연좌되어 멸문지화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는 결국 온 가족을 이끌고 살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듬해, 신씨 가문으로 시집간 친언니 배연희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배연희는 병상에 누운 채 이제 막 성년례를 올린 배지희를 신경남의 후실로 들이라고 부탁했다.

배지희는 언니가 세 살도 안 된 어린 핏덩이와 홀로 남겨질 부군 신경남을 돌봐줄 이가 없을까 걱정하여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피골이 상접한 언니의 얼굴을 보며 차마 응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주저하는 배지희를 방에 가두고 며칠 동안 매질하며 애원했다.

그래도 배지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경남이 직접 배지희를 찾아왔다.

눈처럼 하얀 배꽃 나무 아래 선 푸른 장포 차림의 그는 선인처럼 수려하고 우아한 모습이었지만, 얼굴에는 옅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경성 제일 세가인 신씨 가문 둘째 집안의 적장자였다.

단정하고 고아한 인품에 학식까지 뛰어나, 경성의 수많은 규수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신씨 가문에 시집가고자 하는 여인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오직 배씨 가문만을 고집했고, 혼인 후에는 배연희와 좋은 금슬을 자랑하며 경성의 미담이 되었다.

그는 봄날의 호수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배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혼사가 널 무척 곤란하게 할 거란 건 안다. 하지만 재형이가 아직 어리고 네 언니가 목숨처럼 아끼는 아이니, 나도 그 아이를 다른 여인의 손에 맡길 수는 없구나. 내게 남은 사람은 너뿐이다, 지희야. 억지로 강요하진 않으마. 정 내키지 않는다면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하자. 그저 가엾은 재형이가 걱정될 따름이지."

친언니의 애원, 어머니의 눈물 섞인 호소, 그리고 어린 조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게다가 눈앞의 사내도 절절하고 진실한 태도로 애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배지희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때 그녀는 이런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형부, 제가 후실로 시집을 간다면 언니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다정히 대해주실 건가요."

신경남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하지."

"저를 믿고 아껴주시며, 평생 첩을 들이지 않으실 건가요."

신경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그래."

지금에야 돌이켜보면, 신경남의 그 웃음 속에 수많은 계산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사내의 가벼운 약속에 속아 넘어가 스스로 악명을 뒤집어쓰고 신씨 가문이라는 호랑이 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속절없이 흘러내렸고, 저택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자신의 몫이 아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이곳에서 그녀는 삼 년을 고통스럽게 버텨왔다.

세상이 무너질 만큼 대단한 억울함을 겪은 건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쌓인 실망감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라, 한순간 자신이 견뎌온 세월이 참으로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제는 홧김에 치민 충동이었다면, 간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깊이 고민한 끝에 그녀의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신경남은 결코 그녀의 배필이 아니며, 이대로 신씨 가문에 머문다면 그녀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말라 죽을 것이다.

"작은 마님, 일어나셨습니까. 나리께서 기침하셨습니다."

청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깨웠다.

배지희는 묵묵히 일어나 씻을 준비를 시작했다.

청심은 서두르지 않는 배지희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레 권했다.

"나리께서 간밤에 크게 노하셨는데, 잠시 후 작은 마님께서 건너가 해명이라도 하시면 나리께서도 마님께 그런 의도가 없었음을 아실 텐데요."

배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 나리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전하거라."

청심은 손을 뻗어 배지희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청심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갔다.

여느 때처럼 침상에서 일어난 신경남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평소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평소라면 눈을 뜨자마자 다정하게 웃는 배지희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여야 했다.

그녀는 늘 그보다 반 시진 일찍 일어나 단정히 몸단장을 마치고 그가 쓸 세면도구와 입을 옷가지들을 준비해 두었다.

배지희는 무척이나 꼼꼼하고 세심한 여인이었다.

심지어 친언니인 배연희가 살아 있을 때도 이토록 극진한 대접은 받아보지 못했다.

배지희는 늘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딱 알맞은 세숫물을 대령했고 얼굴을 닦는 수건도 훈향을 섞은 더운물에 푹 삶아서 말린 것으로 준비했으며 의복은 구김살 한 점 없이 반듯한데다 늘 은은한 단향이 났다.

그녀는 늘 조용히 그의 곁을 맴돌며 정성껏 그를 보살폈다.

신경남은 시종인 청서를 불렀다.

"작은 마님은 왜 안 보이느냐."

청서 역시 일찌감치 방문 앞을 지키며 배지희가 평소처럼 주인을 시중들러 오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어젯밤 나리가 홧김에 던진 서책에 작은 마님이 맞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작은 마님이 평소 나리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것을 생각하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억울해서 울음을 터뜨렸더라도 다툰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안채로 건너와 시중을 들고는 하던 배지희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엔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서쪽 별채에서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청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 가서 여쭈어볼까요."

신경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되었다. 아직 분이 덜 풀려서 일부러 나를 애태우려는 속셈이겠지."

청서가 웃으며 말했다.

"나리, 오해하셨습니다. 작은 마님께서는 나리를 지극히 아끼실 뿐더러, 매사에 사리 분별이 밝아 괜한 고집을 피우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 말을 들은 신경남은 배지희가 제멋대로 굴거나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리 심한 꾸지람과 가혹한 벌을 받아도 기껏해야 처소에 틀어박혀 이틀 정도 앓아눕는 게 전부였다.

그러고도 며칠 지나면 창백한 안색을 한 채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켰다.

사소한 일로 투덜거리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법도 없었다.

청서가 말했다.

"작은 마님께서 이제 일어나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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