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배지희는 정성스레 약재를 다듬고 탕약을 달일 시간을 일러둔 뒤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그녀의 품에는 세 통의 서신이 들어 있었다. 이 서신들에 그녀의 앞날이 걸려 있었다.부디 뜻대로 풀리기를 간절히 바랐다.배지희는 나고 자라며 단 한 번도 온전히 자신의 뜻을 주장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병약한 언니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라 가르쳤고, 성년례를 치르자마자 죽은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겼다.하지만 이제 더는 그 짐을 짊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이건 그녀의 삶이 아니었고, 그녀가 감내해야 할 책임도 아니었다.배지희는 난심을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난심은 서신을 가슴 깊숙이 품고 비장하게 말했다."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말을 마친 난심은 잰걸음으로 사라졌다.저 멀리 우뚝 솟은 회랑 위, 칠흑처럼 짙은 두 눈동자가 작은 불당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시녀가 서신을 품고 황급히 빠져나가는 모습에 이어, 뒷마당에 놓인 탕약기에서 검은 약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광경까지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었다.수수한 소복 차림의 여인이 허리를 숙여 탕약을 젓고 있었다. 흘러내린 옷자락 사이로 버들가지처럼 가녀린 허리선이 언뜻 비쳤다. 여인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를 탕약에 털어 넣었다.사내의 짙은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어스름이 깔리는 밤의 장막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다음 날 아침, 배지희가 소박한 아침 요기를 마치기 무섭게 백유정이 찾아왔다. 그 뒤로는 굳은 얼굴의 신경남이 따라 들어왔다.배지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신경남의 의중을 알 길이 없으니, 지금 당장 백유정이 보는 앞에서 이혼을 들먹이며 판을 키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 판단했다.우선은 며칠 무탈하게 넘기는 것이 상책이었다.오늘 백유정은 한층 더 눈부셨다. 봄을 닮은 초록빛 주름치마에 옅은 살구빛 덧저고리를 입고, 허리에는 정교하게 수놓은 허리띠를
가련한 척 울먹이던 백유정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신경남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배지희를 감싸주며 변명까지 해준 걸까?항간의 소문으로 배지희가 신씨 가문에 시집온 뒤 시어머니 진씨에게 온갖 구박을 당해도 신경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한다고 했다.그 모든 소문이 헛소문이었던 걸까?자신만만했던 백유정의 마음 한구석에 미세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오라버니, 빈말이라도 절 위로해 주실 필요 없어요. 필시 제가 언니의 귀한 명화를 망쳐버린 탓에 노여움이 안 풀리신 걸 테죠. 차라리 제가 그림 한 폭을 새로 구해 배상해 드리는 게 어떨까요?"신경남은 딴생각에 빠져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거라. 그 사람이 무척이나 아끼던 그림이니 잃고 나서 꽤 상심이 컸을 거다. 네가 이리 세심히 배려해 주니, 그 사람도 틀림없이 네 진심을 알아줄 게다."백유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신경남은 싸늘하게 굳은 백유정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했다. 무언가 좋은 핑곗거리가 떠오른 듯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그는 백유정을 남겨둔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백유정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송풍원 안방.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가 창가에 놓인 평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짙은 청색 이불이 가슴 아래를 덮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다.그는 미간을 좁힌 채 손에 든 서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흑옥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흰 비단 옷자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차가운 분위기에 귀티를 더했다.그 모습을 바라본 진무는 크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나리, 둘째 집안 도련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무슨 일이라더냐."신주헌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책장을 넘겼다.진무가 답했다."그림을 구하러 왔답니다."신주헌은 묵묵부답이었다.진무가 다시 말을 이었다."나리의 서재에
한편, 배지희는 인적이 드문 외진 불당에서 불청객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신경남이 백유정을 이끌고 이 으슥한 곳까지 우연히 걸음을 한 것이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갓 써내려간 서신 몇 통을 서둘러 품에 갈무리하고 밖으로 나섰다.백유정은 연두색 바탕에 배꽃을 수놓은 치마를 입고, 그 위로 옅은 진주색 덧저고리를 걸쳤다. 목에는 하얀 여우 털 목도리를 둘렀는데,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털 장식이 어우러져 봄꽃처럼 화사하고 앳된 얼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그녀는 배지희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이런, 지희 언니께서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배지희는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뒤 신경남에게 시선을 돌렸다."부군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신경남은 착잡한 눈빛으로 배지희를 훑어보았다.그녀는 철 지난 붉은빛 주름치마에, 역시 유행이 지난 연노란색 긴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는 같은 색의 매듭띠로 단단히 동여맸다.치장이라곤 풍성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소박한 은비녀 한 개가 전부였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으로 빼입은 백유정에 비하면, 배지희의 차림새는 낡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처럼 희고 고운 자태 덕분에 아무리 수수하게 입어도 명문가 안주인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신경남은 그제야 지난 삼 년 동안 배지희에게 번듯한 장신구 하나 선물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반면 백유정이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어제 바로 거리로 나가, 값이 꽤 나가는 비취 장신구들을 안겨주었다.죄책감도 잠시,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신씨 가문은 곳간이 차고 넘치는 부자였다. 배지희의 생활 역시 궁핍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조른 적이 없으니, 필시 그런 사소한 물건에는 연연하지 않는 성정이라 넘겨짚었다.백유정은 달랐다. 지난 몇 년간 금주에서 숱한 고생을 겪었을 테니, 그녀를 각별히 보살피고 보상해 주더라도 배지희가 속 좁게 질투하지는 않을 터였다.신경남의 대답이 늦어지자, 배지
신경운은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강설각이면 아주 좋지요. 이번에는 유정 언니한테 며칠 푹 쉬어 가라 할 겁니다."며칠간 이어진 봄비가 그치면 즐거운 명절이 연달아 기다리고 있었다.아직 성년례도 치르지 않은 신경운의 머릿속은 온통 놀 궁리뿐이었다. 백유정만 곁에 있으면, 신경남을 졸라 사방으로 유람을 다닐 구실이 생겨서 좋았다.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시종이 다가와 신경남이 귀가했다는 소식을 알렸다.진씨가 의아해하며 물었다."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국자감에서 서책을 편찬하느라 한창 바쁘다 하지 않았느냐."시종이 고했다."나리를 모시는 자의 말로는, 나리께서 휴가를 내셨다 합니다."신경운이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틀림없이 우리 오라버니가 유정 언니를 빨리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서 공무마저 내팽개친 거네요."진씨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남은 공무를 등한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리 갑작스레 일찍 귀가한 걸까?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신경남의 곁에는 역시나 백유정이 함께였다.신경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백유정의 손을 맞잡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진씨 역시 시종들에게 서둘러 손님맞이를 명하고, 자신의 심복 시녀 둘을 따로 붙여 시중을 들게 했다.그때 신경남이 불쑥 말했다."어머니, 저는 당분간 청심원에 머물까 합니다."진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청심원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썰렁한데, 굳이 그곳으로 갈 이유가 있느냐."신경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오라버니, 서재에서 잘 지내시더니 왜 갑자기 안채로 돌아가시려 합니까."청심원이 공간은 넉넉할지 몰라도 안채의 깊숙한 곳에 자리해 드나들기 번거로웠다. 반면 바깥채의 큰 서재는 백유정이 머물 강설각과 훨씬 가까웠다.신경남은 동생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백유정에게 다정히 말했다."내가 강설각까지 안내해 주마. 더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고 한꺼번에 채워 넣자꾸나."백유정은 수줍게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예, 오라버니."두
배지희는 가문의 불당에 도착했다.불당은 꽤 넓었지만 사방이 문과 창문으로 뚫려 있어 밤이면 매서운 외풍이 스며들었다. 불당 옆에 딸린 쪽방은 낡은 침상 하나와 조그만 책상 하나만 둘 수 있을 만큼 협소했다.방 안에는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청심은 익숙한 솜씨로 방을 치우고 챙겨 온 이불을 깔았다.배지희는 불당 한편의 창문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불경을 필사하기 시작했다.오후 즈음 돌아온 난심은 신경남이 노발대발하며 찻잔을 깨뜨렸다는 소식을 전했다.붓을 쥐고 있던 배지희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알았다."난심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마님,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나리께서 단단히 노하셨으니, 저희는 언제쯤 청심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예전에 신경남은 시어머니 진씨가 틈만 나면 트집을 잡아 배지희를 벌하려 들 때 모른 척 방관했다.그런데 이제는 신경남의 분노마저 샀으니 불당에서 벗어날 길은 더욱 아득해 보였다.배지희는 차분히 말했다."걱정 말거라. 다 방도가 있으니."난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인의 이혼 결심이 그저 홧김에 내뱉은 일탈일 뿐이며, 머지않아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거라 생각했다.배지희가 아침 내내 불경을 필사하는 동안, 뜻밖에도 북정원에서 두 번이나 심부름꾼을 보냈다.한 번은 북정원 장씨 어멈이 두툼한 이불과 양털 무릎 담요를 건네주었다. 두 번째로 온 시녀는 신재형이 배지희가 손수 만들어주던 달걀찜을 찾는다며 전갈을 가져왔다.처음 찾아온 장씨 어멈의 물건은 청심을 시켜 받아 두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전갈에 배지희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재형이는 체하기 쉬운 체질이다.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났으니 며칠간은 달걀찜을 먹여서는 안 된다고 부인께 여쭈어라."시녀는 무안한 얼굴로 물러가 진씨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마침 진씨 곁에 앉아 있던 신경운은 그 말을 엿듣고 입을 비죽거렸다."어머니, 굳이 그 여자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
신경남은 청서를 방으로 불렀다."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우냐."청서는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작은 마님께서 아침 일찍 불당으로 떠나셨습니다. 짐을 옮기는 소리에 잠을 깨신 겁니까?"신경남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무심하게 물었다."여우털 망토는 전해주었느냐.""전해드리기는 했습니다만……."청서는 등 뒤에 숨겼던 망토를 조심스레 꺼냈다."작은 마님께서는 한사코 사양하셨습니다. 봄추위가 한풀 꺾였으니 이런 두꺼운 옷은 필요 없다고, 나리께서 입으시라고 하셨습니다."눈을 비비던 신경남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망토를 받쳐 든 청서의 표정은 몹시 민망해 보였다. 배지희의 거절은 꽤나 정중했지만, 청서는 그녀가 나리의 호의에 아무런 감흥이 없음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는 거절의 말을 전할 때 망토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하지만 이 민망한 상황을 감히 나리에게 곧이곧대로 고할 수도 없었다.신경남이 미간을 찌푸렸다."달리 덧붙인 말은 없었느냐."청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없다고 답했다가, 신경남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살피고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다만 재형 도련님을 각별히 보살펴 달라는 당부를 남기셨습니다."그 말에 신경남의 싸늘했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음, 재형이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군. 불당에서 돌아오면 그때 다시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겠다."청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밖에서 난심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이미 세수를 마친 신경남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일렀다."들여보내라."난심은 배지희가 시집올 때 데려온 시녀였다. 그녀가 찾아왔다는 것은 곧 배지희의 뜻을 전하러 왔다는 의미였다.불당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가 입고 신을 것들이 부족할까 염려되어 챙겨 보낸 게 틀림없었다.혼인한 이래로 신경남이 입는 옷과 신발은 모조리 배지희가 치수를 재어 특별히 주문하거나 손수 바느질해 지은 것들이었다.바느질은 촘촘하고 튼튼했으며, 수놓은 문양도 밖에서 파는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모두 그녀가 직접 도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