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 폐비화

환생, 폐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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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백서린은 남편 이무진과 이복동생 백소화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폐비가 되어 죽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생만큼은 같은 운명을 반복하지 않겠다. 이무진과의 혼인을 거부한 서린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남자, 그의 동생 이현을 선택한다. “저와 혼인해 주세요.” 복수를 위해 시작한 혼인. 하지만 차갑기만 하던 이현이 그녀를 지키기 시작하고, 자신을 버렸던 이무진은 뒤늦게 서린을 되찾으려 집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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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폐후 백서린은 사약을 받으라!”

내관의 서늘한 목소리가 적막한 중궁전을 갈랐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늙은 상궁 하나가 쟁반을 받쳐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백자 주전자와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평생 황궁에서 살아온 여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듯했다. 서린에게 다가오는 동안 잔이 몇 번이나 달그락거렸고, 마침내 방 한가운데에 쟁반을 내려놓은 상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렸다.

서린은 아무 말 없이 쟁반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죄인의 목을 직접 베지 않고 마지막 체면을 남겨주고 싶을 때 내리는 것.

사약이었다.

잠시 뒤 상궁이 물러나고 문이 닫히자 중궁전에는 다시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수십 명의 궁인들이 밤낮없이 드나들었다. 황후의 처소라는 이유만으로 해가 지면 회랑마다 등불이 밝혀졌고, 문밖에는 상궁과 나인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폐위의 교지가 내려진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궁인들은 하나둘 떠났고, 황후를 상징하던 봉황 문양의 의장과 화려한 장식도 차례로 걷혀 나갔다. 밤마다 문밖을 지키던 호위군마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끊겼다.

중궁전의 현판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지만, 이곳의 주인은 더 이상 황후가 아니었다.

방 안에 남은 것은 미처 치우지 못한 가구 몇 점과 꺼져가는 촛불, 그리고 죽은 아이가 쓰던 물건들뿐이었다.

사흘 동안 퍼붓던 비도 어느새 기세가 누그러져 처마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적막한 뜰에 길게 이어졌다. 젖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열린 창틈으로 서늘한 습기가 밀려들었고, 찬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면 벽에 드리운 서린의 그림자도 가늘게 일렁였다.

서린은 죽은 아이의 요람 곁에 앉아 있었다.

황후의 예복은 이미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느슨해진 옷깃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목선이 드러났고, 비녀가 빠진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를 지나 붉은 치맛자락 위까지 흘러내렸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 탓에 짙은 눈매와 붉은 입술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한때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불리던 여자였다.

백가의 적녀 백서린이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면 귀족가의 공자들이 술잔을 들고도 마시는 것을 잊었고, 황후가 된 뒤에는 그녀가 대전에 들어서는 순간 악사들이 박자를 놓쳤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았다.

젊은 대신들은 감히 그녀를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이무진 역시 황자였던 시절에는 서린이 웃기만 해도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그때의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황위와는 멀리 떨어진 황자였고, 제 목숨 하나 지키기도 어려웠던 남자였다. 아무도 그의 편에 서려 하지 않을 때 서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황제로 만든 여자는 텅 빈 요람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서린은 요람 안에 남겨진 작은 버선을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제 손보다도 작은 버선이었다.

발등에는 금실로 조그마한 구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첫해 겨울, 유난히 발이 찬 것을 걱정한 서린이 직접 문양까지 골라 만들게 한 것이었다.

밤이면 작은 발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서린은 아이를 품에 안고 제 손으로 발을 감싸주곤 했다.

어의는 황자의 체질이 원래 그러하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서린은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가장 부드러운 천을 골라 새 버선을 만들게 했다.

그 버선이 이제 주인을 잃었다.

서린의 엄지가 천천히 금실로 수놓인 구름 위를 쓸었다. 아무리 만져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는 따뜻해질 일도 없었다.

한참 동안 버선을 바라보던 서린의 시선이 천천히 방 한가운데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조금 전 상궁이 내려놓고 간 사약이 놓여 있었다.

죽은 아이의 버선과 자신에게 내려진 사약.

황후였던 백서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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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폐후 백서린은 사약을 받으라!”내관의 서늘한 목소리가 적막한 중궁전을 갈랐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늙은 상궁 하나가 쟁반을 받쳐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백자 주전자와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평생 황궁에서 살아온 여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듯했다. 서린에게 다가오는 동안 잔이 몇 번이나 달그락거렸고, 마침내 방 한가운데에 쟁반을 내려놓은 상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렸다.서린은 아무 말 없이 쟁반을 바라보았다.황제가 죄인의 목을 직접 베지 않고 마지막 체면을 남겨주고 싶을 때 내리는 것.사약이었다.잠시 뒤 상궁이 물러나고 문이 닫히자 중궁전에는 다시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수십 명의 궁인들이 밤낮없이 드나들었다. 황후의 처소라는 이유만으로 해가 지면 회랑마다 등불이 밝혀졌고, 문밖에는 상궁과 나인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켰다.그러나 폐위의 교지가 내려진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궁인들은 하나둘 떠났고, 황후를 상징하던 봉황 문양의 의장과 화려한 장식도 차례로 걷혀 나갔다. 밤마다 문밖을 지키던 호위군마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끊겼다.중궁전의 현판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걸려 있었지만, 이곳의 주인은 더 이상 황후가 아니었다.방 안에 남은 것은 미처 치우지 못한 가구 몇 점과 꺼져가는 촛불, 그리고 죽은 아이가 쓰던 물건들뿐이었다.사흘 동안 퍼붓던 비도 어느새 기세가 누그러져 처마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적막한 뜰에 길게 이어졌다. 젖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열린 창틈으로 서늘한 습기가 밀려들었고, 찬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면 벽에 드리운 서린의 그림자도 가늘게 일렁였다.서린은 죽은 아이의 요람 곁에 앉아 있었다.황후의 예복은 이미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느슨해진 옷깃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목선이 드러났고, 비녀가 빠진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를 지나 붉은 치맛자락 위까지 흘러내렸다.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얼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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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한 나라의 황후에게 내려진 마지막 성은이었다.서린은 놀라지도, 울지도 않았다. 이미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백자 주전자와 잔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폐하께서 내리신 것이냐.”상궁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깨가 대답을 대신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고개를 들거라. 네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찌 네가 우느냐.”“마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서린은 손에 쥔 작은 버선으로 시선을 내렸다.“네가 내 아이를 죽였느냐? 내 아버지를 죽이고 오라비들을 죽였느냐. 아니면 폐하께 나를 죽여달라 청하기라도 했느냐?”상궁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마마…….”“그 어느 것도 아니라면 네가 내 앞에서 죽을죄를 빌 까닭이 없다.”상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서린에게는 그녀를 원망할 마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아이의 죽음을 들은 뒤 꼬박 사흘 동안 서린은 이 방에서 기다렸다.누군가 달려와 아이가 죽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다.그러다 문밖에서 작은 발소리라도 들리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아바마마를 만나고 오겠다며 제 품에서 내려갔던 다섯 살 아이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문을 열고 뛰어들어와 작은 팔을 벌리며 자신을 부를 것만 같았다.어마마마.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사흘을 기다린 서린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은 아이가 아니라 이무진이 보낸 사약이었다.서린은 손안의 작은 버선을 요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몸이 순간 휘청거렸지만, 요람을 짚어 균형을 잡은 뒤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마지막 순간까지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탁자로 향하는 동안 길게 풀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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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 돼요?’그때 왜 한 번 더 안아주지 않았을까.왜 싫다는 아이를 굳이 보내버렸을까.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오늘 하루쯤은 어미와 함께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하지만 그날의 서린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유모가 다시 재촉하자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 직접 품에서 내려주었다.‘아바마마께 다녀오너라.’아이는 마지못해 유모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그러고도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서린을 바라보던 다섯 살 아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명했다. 정말 가야 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한참 동안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서린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곧 돌아올 줄 알았다.그것이 서린이 살아 있는 아이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보내지 않을 텐데.황제가 직접 와서 내놓으라고 해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황후의 자리를 빼앗는다 해도, 백가를 역적으로 몰겠다 협박한다 해도 아이만큼은 내주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아이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오지 않는 문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그 생각에 서린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작은 버선 위로 스며들었다.그래도 울음은 터뜨리지 않았다.한참 동안 버선을 움켜쥐고 있던 서린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눈빛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나가거라.”“마마.”“혼자 있고 싶구나.”상궁은 그대로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서린은 재촉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황후를 모셨던 여인은 끝내 무언가 말하려다 입술만 떨었고, 세 번 절한 뒤 흐느낌을 삼키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다시 서린 혼자만 남았다.황후의 자리도, 십 년의 혼인도, 사랑했던 남편도, 자신이 낳은 아이도, 친정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 하나뿐이었고, 그것마저 이무진이 가져가려 하고 있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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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주전자를 내려놓은 서린은 아이의 버선을 품 안에 넣고 다시 요람 곁으로 돌아갔다.손바닥으로 나무 난간을 쓸자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만져졌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장난감을 들고 두드려 생긴 흔적이었다.창가에는 아이가 좋아하던 나무 말이 있었고, 벽 한쪽에는 키를 재며 먹으로 표시해둔 자국도 남아 있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방 안의 모든 것이 유품이 되어 있었다.서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때 목 안쪽에서 이상한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독한 술 때문이라 생각할 만큼 미약했지만, 곧 뜨거운 쇠붙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타들어 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을 날카로운 칼날이 긁어내리는 듯한 통증까지 번졌다.독이 퍼지고 있었다.서린은 요람을 짚었지만 손끝에서 빠르게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기울고 뒤틀리는 속에서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쿨럭!”반사적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튀면서 흰 손바닥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서린은 피 묻은 손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이것이 황제 이무진이 자신에게 내린 마지막 것이었다.십 년 동안 그를 사랑한 대가이자 그를 황제로 만든 대가였으며,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목숨까지 바친 끝에 백가의 딸이 받아든 마지막 하사품이었다.서린의 입가가 천천히 비틀렸다.“참으로…… 후한 상을 내리시는구나.”다시 기침이 터지면서 이번에는 피가 손바닥을 넘어 바닥까지 튀었다.무릎이 꺾였지만 서린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요람 기둥을 붙잡았다. 목구멍에서는 계속 피가 올라왔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독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시야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흐려지자 서린은 요람에 이마를 기대었다.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이무진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되니까.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밤바람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서린은 천천히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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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백소화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많이 아파?”걱정하는 말과 달리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서린이 대답하지 않자 백소화는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후후…….”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적막한 중궁전에 번졌다.사람이 죽어가는 방에서 나올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백소화는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서린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린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천천히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서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이상했다.자신이 죽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저토록 즐거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소화는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했다.그것도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들려주고 싶은 말이.“무엇이 그리 우습더냐.”“그냥.”백소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언니가 이렇게 되는 날을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서린의 손가락이 요람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늘 궁금했어. 그 잘난 백서린이 모든 걸 잃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소화.”“가문도 없어지고 황후 자리도 빼앗기고…….”말끝을 길게 늘이던 백소화의 시선이 빈 요람으로 향했다.그리고 웃었다.“아이까지 없어지면.”순간 서린의 눈빛이 달라졌다.“무슨 뜻이냐.”백소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찬찬히 바라보았다.“정말 모르겠어?”“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서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그제야 백소화가 다시 웃었다.“후후후…… 황자 말이야.”서린의 숨이 멎었다.백소화는 그 반응을 잠시 지켜보다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죽였어.”순간 방 안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빗물도, 바람에 흔들리는 창호도, 촛불 타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서린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뭐?”백소화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언니 아이.”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내가 죽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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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태어날 때부터 백가의 적녀였고,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전부 언니만 바라봤지. 좋은 옷도, 좋은 혼처도, 모두의 사랑도 언제나 언니 차지였어.”백소화는 천천히 옷자락을 정리하며 서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황후 자리까지 언니 것이었고.”하지만 이무진에게 시선이 향하는 순간, 독기로 서늘하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백소화가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팔에 손을 얹자, 이무진은 밀어내기는커녕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서린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멈췄다.백소화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익숙하게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이무진 역시 그런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서린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자신이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래 이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황후인 자신 앞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백소화가 그의 품에 기댄 채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폐하의 마음만큼은 달랐어.”서린은 대답하지 않고 이무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여전히 백소화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서린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팔을 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확인한 백소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언니가 아직도 모르나 봐.”그녀가 이무진의 어깨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폐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가 아니야.”잠시 뜸을 들인 뒤, 백소화가 속삭이듯 덧붙였다.“나야.”그 한마디가 서린의 가슴을 칼날처럼 파고들었다.그런데도 서린은 백소화를 보지 않았다. 오직 이무진의 얼굴만 똑바로 바라보았다.아직은 그가 부정해주기를 기다렸다.백소화가 미쳐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자신이 사랑한 지난 십 년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만 하면 됐다.하지만 이무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오히려 백소화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제 곁으로 더욱 끌어당겼다.그 행동 하나로 충분했다.서린의 얼굴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감정이 서서히 사라졌다.“그러셨군요.”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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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발밑에 고인 피가 치맛자락을 붉게 적셨지만 서린은 멈추지 않았다.“폐하께서 형제들에게 쫓겨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내 아버지가 군사를 보내 길을 열었습니다. 내 오라비들은 폐하를 위해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고, 외가의 재물로 군사를 먹였습니다.”한 걸음 더 다가서자 이무진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한때는 저 얼굴 하나만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사람들이 폐하를 믿지 않을 때 내가 믿었고, 모두가 폐하께서 황제가 될 수 없다 했을 때 나만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침내 그의 앞까지 다가간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린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나는 폐하를 사랑했습니다.”원망보다 더 깊고 오래된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났다.이무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예전이었다면 그 작은 변화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애써 헤아렸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황제로 만들었는데…….”서린의 입가를 타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당신은 황제가 되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죽였군요.”이무진이 손을 뻗었다.서린은 그 손이 닿기 전에 몸을 뒤로 물렸다.“내게 손대지 마십시오.”허공에서 멈춘 손을 잠시 내려다본 서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그 손으로 내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죽이고, 내 아이를 죽인 여자를 감싸셨으니…… 죽어서도 그 손길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서린, 나는…….”“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서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백가가 너무 강해져 어쩔 수 없었다 하시렵니까? 내 아버지가 황권을 위협했다고 하시렵니까? 아니면 내 어린아이까지 죽어야 폐하께서 편히 용상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하시렵니까?”이무진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끝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서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됐습니다. 이제 알고 싶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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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이무진의 얼굴이 굳었다.서린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백소화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너도…… 황후가 되지 못할 것이다.”“백서린!”처음으로 백소화의 얼굴에서 요염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그 모습을 본 서린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다시 산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거친 숨을 몰아쉰 서린이 다시 이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오늘 죽는 것은 황후 백서린이 아닙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센 기침과 함께 피가 쏟아졌다. 서린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가쁜 숨을 고른 뒤 힘겹게 말을 이었다.“열여덟부터 당신 하나만 바라보았던 여자, 아버지의 반대도 무릅쓰고 당신을 선택했던 여자, 당신이 황제가 되는 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던 그 어리석은 여자가 오늘 죽는 것입니다.”눈물이 피 묻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내가 죽어 황천에 가면 가장 먼저 내 아이를 찾을 것입니다. 왜 그날 붙잡지 않았느냐고, 왜 혼자 보냈느냐고 빌고 또 빌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겠습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 안에서 피가 끓어올랐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원수를 황제로 만들었다고.”“서린.”이무진이 한 걸음 다가오자 서린은 남은 힘을 짜내 뒤로 물러섰다.“그러니 폐하께서도 기억하십시오.”핏물이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면 이 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앉으신 용상 아래에도, 잠드시는 침상 곁에도 있을 것입니다.”그 순간 바깥에서 천둥이 울렸다.어두운 밤하늘을 가른 번개가 중궁전 안을 환하게 비췄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잔을 드실 때마다 오늘 내가 마신 독을 떠올리게 하고, 눈을 감을 때마다 내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얼굴을 보게 할 것입니다.”이번에는 백소화를 향했다.“그리고 언젠가 두 사람이 자식을 품에 안는 날이 오면…… 그때마다 죽어가며 어미를 찾았던 내 아이를 떠올리게 할 것입니다.”“서린, 그만하라.”이무진의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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