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보통이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실력이 더 늘었으면 늘었지 오히려 떨어질 이유는 없지 않아요?”연정미는 남자와 단둘이 만날 때마다 늘 칭찬과 추켜세움을 받는 쪽이었다.이렇게 대놓고 실력을 지적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주용화가 표현을 꽤 완곡하게 하긴 했지만 연정미는 여전히 체면이 상했다.어릴 때부터 연정미는 줄곧 뭐든 잘하는 천재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연정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원래 관심사가 좀 다양한 편이에요. 사실 바이올린을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니고요. 나중에 손까지 다친 뒤로는 거의 손을 놓았어요.”주용화는 조금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그럼 바이올린 말고는 어떤 걸 좋아하시죠?”연정미가 대답했다.“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레이싱도 좋아해요. 조만간 개인전을 하나 열 예정인데 관심이 있으시면 한번 보러 오세요.”그러자 주용화가 흔쾌히 답했다.“좋죠.”하지율은 바로 앞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점점 속이 뒤틀렸다.하지율은 두 사람이 보기도 싫었고 더는 참기도 싫었다.하지율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무조건 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간 심술이 치밀었다.하지율은 휴대전화를 꺼내 주용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주용화 씨, 오늘 시간 괜찮아요?]만약 주용화가 답장을 안 하면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전화까지 받지 않으면 더 간단했다.그냥 연정미에게 직접 전화하면 됐다.휴대전화 진동을 느꼈는지 주용화가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주용화는 문자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숙여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오늘 친구와 약속이 있습니다.]그러자 하지율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10분도 시간 못 내세요?][죄송합니다.]하지율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주용화 씨, 저 지금 바로 뒤에 있어요.][그래도 시간 없어요?]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앞줄에 앉아 있던 주용화의 손이 멈췄다.곧이어 주용화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하지율은 선글라스
그때 주용화가 대답했다.“미안하지만 사업 파트너와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 기밀이라 하지율 씨가 오시는 건 좀 곤란합니다. 이렇게 하죠. 며칠 뒤 시간이 나면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하지율은 주용화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주용화가 정말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너무 늦을 게 뻔했다.하지율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붙잡아 보려 했다.“주용화 씨...”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용화가 먼저 말을 끊었다.“저도 지금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나중에 시간 될 때 다시 이야기하죠.”그 말을 끝으로 주용화는 하지율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하지율은 끊어진 통화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주용화가 찾아오는 건 곤란하다고 선을 그은 이상, 정말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나 괜히 반감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하지율은 그렇게 사흘을 기다렸다.하지만 주용화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대신 주용화가 연정미와 함께 밥을 먹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하지율은 더 이상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주용화가 연정미와 함께 콘서트에 갔다는 사실까지 알아낸 하지율은 곧바로 비서에게 표 한 장을 구해 달라고 했다.하지율이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공연이 절반쯤 진행된 뒤였고 관객들은 모두 무대에 집중해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하지율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주용화와 연정미였다.두 사람은 공연에 꽤 집중하고 있었는지 뒤쪽에 누가 앉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하지율은 무대를 바라보다가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지금 공연 중인 사람은 바로 전에 주용화가 자신에게 함께 보러 가자고 했던 그 음악가였다.‘내가 거절해서... 이번에는 연정미를 데리고 온 걸까?’그때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목소리가 워낙 낮은 데다가 공연 음악까지 크게 울리고 있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두 사람의 표정도 볼
그때 단서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런데 아까 내가 주용화한테 그런 부탁까지 했잖아. 주용화가 좀 기분 나빠 보이던데. 혹시 뭔가 의심한 건 아닐까?”그러자 연정미가 대답했다.“내가 가지고 있는 증표는 하지율의 방에서 가져온 거야. 그건 절대 문제없어. 주용화가 의심할 가능성도 없지. 그리고 내가 왜 아까 네 말을 막지 않았냐면...”연정미가 살짝 웃었다.“사실 나도 주용화가 정말 기억을 잃은 건지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기억을 잃지 않은 거라면 우리를 안 도와주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잖아.”“주용화가 하지율을 도왔던 건 그 곡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하지율을 좋아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가주급의 인물을 상대해 주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어?”단서현도 감탄하듯 대답했다.“역시 너는 머리가 빨라.”그러다가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주용화가 우리를 너무 독하고 악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연정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주용화가 하지율을 좋아했던 건 착하고 나쁜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하지율이 착하다고 갑자기 좋아한 것도 아니고 하지율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해서 마음이 식을 사람도 아니야.”“주용화한테 선하거나 악한 건 가장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단서현은 금세 연정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주용화가 너를 좋아하기만 하면 네가 착하든 나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 하지율은 이혼까지 했고 아들도 있는데도 그렇게 좋아했잖아.”“그걸 보면 상대의 과거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주용화의 성격이라면 마음에 들기만 하면 상대에게 남편이 있는지도 신경 안 쓸걸?”“마음먹으면 그냥 빼앗아 올 수도 있겠지.”단서현은 연정미를 바라보며 웃었다.“좋아. 그럼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예전에 하지율이 우리한테서 빼앗아 갔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똑같이 되찾아 오는 거야.”...주용화가 연정미를 그때의 연주자로
주용화는 그렇게 말한 뒤 연정미와 단서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두 분도 이해하시겠죠?”연정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이해해요. 용화 씨가 곤란해할 필요는 없어요.”주용화는 시간을 한번 확인한 뒤 연정미에게 말했다.“이번에 연정미 씨를 찾아온 건 그때 들었던 바이올린 연주를 다시 한번 듣고 싶어서였어요. 시간 괜찮을 때 언제든 연락 주세요.”“물론 많이 바쁘시면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연정미는 주용화를 붙잡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제가 배웅할게요.”하지만 주용화가 제지했다.“괜찮아요. 연정미 씨는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으니 괜히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죠.”주용화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연정미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저도 바이올린을 안 잡은 지 오래돼서 실력이 많이 녹슬었을 거예요. 조만간 시간 내서 다시 연습해 볼게요. 어느 정도 감을 찾으면 연락할게요.”주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리고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그 말을 끝으로 주용화는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주용화가 나가자 단서현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단서현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주용화 씨는 대체 무슨 뜻이야? 예전에는 하지율을 도와서 손형원도 상대하고 단보현도 상대하고 너희 연씨 가문까지 건드렸잖아.”“그런데 왜 네가 도움을 청하니까 이것저것 핑계만 대는 건데?”하지만 연정미는 딱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주용화도 처음부터 하지율을 적극적으로 도운 건 아니야. 처음에는 하지율의 옆에서 보디가드로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지.”“본격적으로 하지율을 돕기 시작한 것도 하지율이 M국으로 돌아온 뒤부터였어.”“우리는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야. 그런데 처음부터 가주급 인물을 상대해 달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겠어?”단서현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그래도 예전에 임채아를 하지율로 착각했
단서현도 아무리 눈치가 느리다고 해도 주용화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들었다.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단서현은 몇 번이나 반박하려 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주용화는 더 이상 단서현을 상대하지 않고 연정미를 바라봤다.“연정미 씨, 저는 그 바이올린 연주자가 마음에 들어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한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무 부탁이나 다 들어주는 호구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고요.”“도덕적 강요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우연히 지나가다 곡 하나 들은 것까지 이렇게 이용당할 줄은 몰랐네요. 두 분의 부탁은 너무 지나쳐요. 죄송하지만 들어드릴 수 없어요.”주용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연정미 씨도 제가 찾아온 일은 없었던 걸로 하시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주용화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연정미와 단서현의 얼굴빛이 동시에 변했다.정말 주용화가 이렇게 바로 가 버릴 줄은 몰랐다.연정미가 황급히 일어나 주용화의 앞을 막았다.“용화 씨,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서현이가 그냥 농담한 거예요.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하거든요.”단서현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곧바로 맞장구쳤다.“주용화 씨, 설마 진짜로 믿은 거예요? 방금 한 말은 전부 농담이었어요.”그러자 주용화가 걸음을 멈췄다.“그래요? 그런데 단서현 씨의 연기가 너무 진짜 같던데요.”단서현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사실 제 꿈이 배우였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방송에 얼굴을 내미는 걸 반대해서 일단 포기했어요.”그러고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사람만 만나면 괜히 한 번씩 연기를 해 봐요. 상대가 제 연기에 속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냥 연기하고 싶은 마음을 푸는 거죠.”“주용화 씨가 싫다면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을 치지 않을게요.”두 사람의 해명을 들은 주용화는 그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러더니 감탄하듯 말했다.“단서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뻔뻔하고 억지스러우면서 악의까지 가득한 여자를 어쩜 그렇게 실감 나게 연기하시는지..
단서현은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단서현과 연정미의 관계는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친구나 다름없었다.물론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지금 그저 목적이 같아 잠시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둘이 힘을 합쳐도 하지율을 상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하물며 혼자서는 하지율에게 제대로 위협조차 되기 힘들었다.단서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저와 정미 사이를 돈이나 물질 같은 걸로 판단할 수는 없어요. 정미도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요.”“주용화 씨, 여기서 저와 연정미의 관계를 따질 시간에 하지율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주용화의 눈빛이 미묘하게 움직였다.“하지율 씨를 상대한다고요? 두 분께서 저한테 하지율 씨를 상대해 달라는 겁니까?”그러자 단서현이 말했다.“하지율이 정미를 괴롭히고 원래 정미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빼앗았잖아요.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게 뭐가 이상해요?”주용화는 단서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단서현 씨, 지금의 하지율 씨는 사실상 한 가문의 가주와 맞먹는 인물입니다.”단서현은 주용화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맞아요. 지금 하지율이 쥔 실권은 웬만한 가주 못지않죠. 그러니까 저희가 주용화 씨한테 도움을 청하는 거고요.”“하지율이 조성희 정도였다면 우리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어요. 하지율이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주용화 씨 정도의 능력과 수완이면 하지율 하나 상대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주용화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단서현 씨의 말은 바이올린곡 하나 들었다는 이유로 제가 가문의 이익까지 희생하면서 실권을 쥐고 있는 가주급의 인물과 싸워 같이 피해를 보라는 겁니까?”“설마 그 곡에 사람을 홀리는 힘이라도 있어서 제가 목숨까지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건가요?”그러자 단서현이 말했다.“정미는 주용화 씨 생명의 은인 아니에요? 생명의 은인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