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재벌가 며느리 채경은 3년째 ‘불임’이라는 낙인과 수상한 탕약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전담 한의사 백도현이 그녀의 맥을 짚고 뜻밖의 진실을 알아낸다. 무너진 삶을 되찾으려는 채경과,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는 도현. 위험한 구원과 사랑이 시작된다.
Ver más서울 성북동, 백 년 된 아름드리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태강그룹 본가 한옥 별채 ‘연우재(然雨齋)’.
신채경은 옻칠이 벗겨진 낡은 찻상 앞에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놋그릇에 담긴 시커먼 한방 탕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진하고 퀴퀴한 한약재의 탄내와 역겨운 비린내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지난 3년 동안 시어머니 민 여사의 강요로 아침저녁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야 했던 정체불명의 ‘회임 보약’이었다.
약사발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뒤틀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원샷 하라니까, 뭐 하고 멍하니 넋 놓고 있어? 네가 그따위로 굼뜨고 매사에 게으르니까 애가 안 들어서는 거야.”
방문 턱에 거만하게 비스듬히 기댄 남편 강시우가 혀를 차며 독한 시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태강그룹 상무. 돈과 집안 이름이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고 믿는 재벌 3세였다.
어젯밤에도 강남의 술집에서 여자들과 밤을 새우고 들어온 남자의 셔츠 깃에는 낯선 붉은 립스틱 자국이 번져 있었고, 싸구려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시우 씨…… 이 탕약만 마시면 매일 밤 속이 타는 것처럼 뒤틀리고 열이 올라요. 병원에서 처방받은 영양제도 아니고, 대체 무슨 약재가 들어간 건지…….”
“닥치고 마셔, 이 빌어먹을 년아!”
강시우가 성큼 다가와 놋그릇을 거칠게 낚아채더니 채경의 턱을 쥐어짜며 입술 사이로 약탕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쓰디쓴 검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식도를 불로 지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을 일으켰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토해내며 바닥에 엎드린 채경의 여린 뺨을 시우가 구둣발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비열하게 짓씹었다.
“살결에 온기 하나 없는 목석같은 년. 대를 못 잇는 씨 없는 암탉 주제에 시어머니가 가문의 후계를 위해 특별히 지어주신 비싼 보약이면 넙죽 절을 하고 처먹어야지, 어디서 건방지게 토를 달아?”
남편은 채경의 머리채를 거칠게 틀어쥐었다가 바닥으로 내팽개치고는 조롱하듯 방을 빠져나갔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쏟아진 검은 약탕이 손끝에 닿았다. 채경은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눈물 한 방울이 검은 물 위로 떨어졌다.
명진그룹의 장녀로 태어나 가문의 정략을 위해 태강가의 며느리로 시집온 지 3년.
‘불임’이라는 두 글자는 지난 3년 동안 채경의 이름보다 먼저 불렸다. 너무 오래 듣다 보니 정말 제 잘못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되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겁이 난 건지, 분한 건지, 이제는 제 감정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때, 저택 안채에서 시어머니 민 여사의 카랑카랑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오늘부터 별채에 대대로 왕실 어의를 배출한 명문 혜민당의 종손, 백도현 박사를 상주시키기로 했다. 종가의 맥을 짚는 당대 최고의 명의이니, 이번엔 토하지 말고 얌전히 제 몸을 맡겨라.”
바깥에는 추적추적 서늘한 늦가을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창호지 문 너머로, 조용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연우재 복도를 따라 다가왔다.
대나무 숲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 사이로 남자의 묵직한 기척이 번져나갔다.
스르륵—.
창호문이 열리며, 짙은 비안개를 가르고 한 남자가 다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옥빛 한복 두루마기를 기품 있게 걸친 188cm의 훤칠하고 단단한 체격.
단정한 흑발 아래 서늘하게 번뜩이는 은빛 무테안경, 그리고 그 너머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칠흑 같은 흑안.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퀴퀴했던 탕약 냄새가 순식간에 씻겨 나가며 알싸한 야생 쑥향과 쌉싸름한 박하 향이 다실 안을 가득 메웠다.
“태강그룹 전담 주치의, 혜민당 백도현(白燾賢)입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상하게도 채경은 그 목소리보다, 남자가 제 얼굴보다 먼저 멍든 손목과 바닥에 쏟아진 탕약을 살피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남자의 깊은 시선이 바닥에 쏟아진 시커먼 약탕과, 먼지 바닥에 주저앉아 떨고 있는 채경의 붉게 물든 턱끝에 못 박혔다.
도현의 시선이 잠시 굳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얼굴이었지만, 안경 너머 눈빛에 짧고 선명한 분노가 스쳤다.
성북동 한옥 별채 연우재(然雨齋)의 고요하고 찬란한 가을 아침. 대나무 숲 사이로 맑은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리며 창호지 문을 눈부신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방 안에는 2년 전 첫 만남의 그날처럼, 은은하고 깊은 야생 쑥향과 청량한 박하 향이 향기롭게 감돌고 있었다. 옻칠 찻상 앞에 신채경과 백도현이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창밖에서는 가을바람에 서걱거리는 대나무 잎 소리가 맑은 서정을 노래하고 있었다.처음 도현을 만났던 날, 남편 강시우에게 턱을 잡힌 채 차가운 놋그릇의 검은 탕약을 강제로 삼키던 바로 그 자리였다. 모욕과 학대로 영혼이 찢겨나가던 지옥 같던 방. 하지만 지금 찻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차가운 독약이 아니었다. 백두산 천종산삼과 녹용, 당귀를 오랜 시간 선별하고 정성껏 달여낸 황금빛 약선 보약이 투명한 백자 찻잔 안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달콤하고 그윽한 보약의 향기가 채경의 가슴을 포근하게 적셨다.“사모님, 손목을 내어주시겠습니까.”2년 전 처음 들었을 때는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던 목소리였다. 지금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채경의 어깨에서 힘이 빠질 만큼 익숙했다. 도현의 눈빛도 오래된 집의 아침처럼 편안했다.손목의 멍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대신 아이를 안다가 생긴 작은 긁힌 자국 하나가 남아 있었다.도현이 천천히 손을 뻗어, 길고 단단한 세 손가락으로 채경의 촌관척(寸關尺) 맥문을 지그시 짚었다.화악—.2년 전 힘없이 뛰던 맥은 이제 고르고 단단했다. 특별한 기적이라기보다, 먹고 자고 웃고 화내며 살아온 시간의 결과에 가까웠다.도현의 입가에 눈부신 미소가 번졌다.“사모님의 맥은 이제 고르고 따뜻합니다. 정기검진 결과도 안정적이고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도현 씨가 옆에 있어준 건 고마워요. 그런데 이제 알아요. 나를 살린 건 결국 나였다는 거.”도현이 잠시 말이 없다가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한 건 옆에서 맥 좀 본 것뿐이죠.” “좀 많이 봤죠.” 채경도 웃었다.
서울 종로구 북촌 혜민당(惠民堂) 본가 대종택,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둘러싼 대청마루와 사당 앞마당.이날 행사는 혜민당 재단의 새로운 공동주재 체계를 문중에 알리고, 채경이 의료재단 운영에 정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집례관의 장엄하고 우렁찬 창홀(唱呼)이 북촌 하늘을 갈랐다.“대종부 신채경 입실!”채경은 긴장한 표정으로 인장을 받을 순서를 확인했다. 곁에 선 도현이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웃었다.채경의 곁에는 짙은 감청색 단령에 사모관대를 갖춰 입은 백도현이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사당 제단 앞에서 함께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렸다. 절을 마치고 일어선 도현이 채경과 눈을 맞췄다. 오래 돌아온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안도감이 그 눈에 있었다.혜민당 문중 최고 어른인 백경호 종친회장이 백발을 숙이며 떨리는 손으로 황금 보자기함을 높이 받들어 올렸다. 함 안에는 혜민당 300년 역사와 함께 전해 내려온 문중 보물 ‘비취 금보인(金寶印)’과 종가 재단의 주요 의사결정을 상징하는 인장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혜민당 재단의 주요 의사결정에 함께 책임질 공동주재자 신채경 이사께 이 인장을 전합니다.”종친회장이 무릎을 꿇고 보인을 바치자, 채경이 두 손으로 묵직한 옥새를 정중히 받아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옥빛 보인이 손에 닿는 순간, 3년간 겪었던 모든 설움과 피눈물이 씻은 듯 녹아내리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벅찬 전율이 솟구쳐 올랐다.백도현이 돌아서서 마당의 문중 종친들과 전 세계 외신들을 향해 엄숙하게 선언했다.“오늘부로 종가 의료재단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종부 신채경이 공동 주재권을 갖습니다. 그리고 제 삶의 반려자는 앞으로도 오직 채경 한 사람뿐입니다.”박수가 이어졌다. 채경은 인장을 내려다보다 도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거 진짜 무겁네요.” “책임이 원래 좀 무겁습니다.” 둘 다 웃었다.행사 뒤 첫 재단 회의에서 채경은 곧바로 한 가지를 제안했다. 종손이나 종부라는 신분과 재단 경영권을 자동으로 연결하지 말고, 이사회와
서울의 일정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이 쉬기 위해 마련한 집이었다.이곳에서 채경은 오전 회의를 하루 두 시간으로 줄였다. 남은 시간에는 아이들과 산책하고, 낮잠을 자고, 도현과 장을 봤다. 처음 마트에 갔을 때 도현이 유기농 제품의 성분표를 지나치게 오래 읽는 바람에 채경이 카트를 밀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도현 씨, 애들 과자 하나 사는데 논문 심사해요?”“당 함량이 높습니다.”“오늘 하루만 세상이 망하게 둬요.”결국 두 사람은 가장 작은 봉지를 하나 샀고, 도진과 서아보다 부모가 먼저 두 개씩 집어 먹었다. 그런 사소한 하루들이 채경에게는 어떤 해외 행사보다 더 귀했다.넓고 푸른 잔디밭 정원 위로 청량한 솔향과 알프스 고원 야생화의 달콤한 향기가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향기롭게 번져나갔다. 정원 한구석에는 채경이 아끼는 조선 백자와 전통 약초 화단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서는 돌을 갓 지난 쌍둥이 남매, 도진이와 서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나비를 쫓아 통통한 다리로 뛰어가던 도진이가 엉덩방아를 찧자, 서아가 다가가 오빠의 손을 잡고 방긋 미소를 지었다.“넘어질라 조심해야지, 우리 예쁜 도진이와 서아.”상처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끔 검은 탕약 냄새와 비슷한 향만 맡아도 가슴이 철렁했다. 다만 이제 그런 날에도 돌아올 사람이 있었다.사각, 사각.정원 오솔길을 따라 갓 우려낸 탕약 주전자를 든 백도현이 걸어왔다. 편안한 리넨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남자의 다부진 팔뚝과 훤칠한 피지컬이 가을 햇살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 도현은 아이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 뒤, 채경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차 식어요. 오늘은 약재 세 개밖에 안 넣었습니다.”도현이 백자 찻잔을 건네며 채경의 차가워진 가느다란 손가락을 제 크고 뜨거운 손바닥으로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남자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가 채경의 온몸을 노곤하게 감쌌다.“고마워요, 도현 씨…… 가끔
쌍둥이 남매의 백일잔치가 끝난 뒤, 성북동 연우재 서고에 보관돼 온 조선 왕실 어의 비전 의서가 다시 연구실로 옮겨졌다.혜민당 연구진이 수년간 축적해 온 천연물 연구에 성운글로벌 R&D가 합류해 완성 단계에 들어간 면역질환 후보물질 ‘보생단(保生丹)’. 전통 처방에서 착안한 천연물 유래 성분을 현대적인 공정으로 표준화한 신경계 희귀질환 치료 후보물질이었다. 스위스 바젤과 서울의 임상기관이 참여한 다국가 3상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 효과와 안전성 지표가 확인되자, 미국 FDA와 유럽 EMA의 우선심사 절차도 본격화됐다.“총괄대표님! 글로벌 제약사 여러 곳에서 선급금과 단계별 마일스톤을 포함해 최대 60조 원 규모의 공동개발·라이선스 제안서를 보내왔습니다!”제안 규모는 컸다. 하지만 계약 구조와 접근성 조항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약의 가격과 연구 지속 가능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무조건 무료로 풀면 다음 연구가 멈출 수도 있습니다. 돈만 보고 독점시키는 것도 답은 아니고요. 지속 가능한 구조를 같이 찾죠.”도현의 서늘하고 묵직한 한마디에 채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재란에 서명했다.“독점 매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여러 지역에 비독점 라이선스를 열고, 저소득국과 희귀질환 아동 지원 프로그램에는 무상 실시권을 제공하겠습니다.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구조와 접근성을 함께 잡겠습니다.”채경의 선택은 수익을 포기하는 선언이 아니라, 연구비와 접근성을 함께 확보하려는 조건부 개방 전략이었다.***일주일 뒤, 스위스 제네바 UN(국제연합) 본부 국제보건·치료 접근성 고위급 포럼. 회원국 대표들과 WHO(세계보건기구) 관계자, 각국 외교 사절단과 보건 전문가들이 회의장을 메우고 있었다.“대한민국 성운글로벌 신채경 총괄대표님과 혜민당 종손 백도현 회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웅장한 취주악과 함께 총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단아한 짙은 감청색 실크 당의 한복 정장에 비취 옥비녀를 단정하게 꽂은 신채경이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로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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