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때 단서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런데 아까 내가 주용화한테 그런 부탁까지 했잖아. 주용화가 좀 기분 나빠 보이던데. 혹시 뭔가 의심한 건 아닐까?”그러자 연정미가 대답했다.“내가 가지고 있는 증표는 하지율의 방에서 가져온 거야. 그건 절대 문제없어. 주용화가 의심할 가능성도 없지. 그리고 내가 왜 아까 네 말을 막지 않았냐면...”연정미가 살짝 웃었다.“사실 나도 주용화가 정말 기억을 잃은 건지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 기억을 잃지 않은 거라면 우리를 안 도와주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잖아.”“주용화가 하지율을 도왔던 건 그 곡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하지율을 좋아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가주급의 인물을 상대해 주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어?”단서현도 감탄하듯 대답했다.“역시 너는 머리가 빨라.”그러다가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주용화가 우리를 너무 독하고 악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연정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주용화가 하지율을 좋아했던 건 착하고 나쁜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하지율이 착하다고 갑자기 좋아한 것도 아니고 하지율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해서 마음이 식을 사람도 아니야.”“주용화한테 선하거나 악한 건 가장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단서현은 금세 연정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주용화가 너를 좋아하기만 하면 네가 착하든 나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 하지율은 이혼까지 했고 아들도 있는데도 그렇게 좋아했잖아.”“그걸 보면 상대의 과거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주용화의 성격이라면 마음에 들기만 하면 상대에게 남편이 있는지도 신경 안 쓸걸?”“마음먹으면 그냥 빼앗아 올 수도 있겠지.”단서현은 연정미를 바라보며 웃었다.“좋아. 그럼 조금만 더 참아 보자. 예전에 하지율이 우리한테서 빼앗아 갔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똑같이 되찾아 오는 거야.”...주용화가 연정미를 그때의 연주자로
주용화는 그렇게 말한 뒤 연정미와 단서현을 바라보며 물었다.“두 분도 이해하시겠죠?”연정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이해해요. 용화 씨가 곤란해할 필요는 없어요.”주용화는 시간을 한번 확인한 뒤 연정미에게 말했다.“이번에 연정미 씨를 찾아온 건 그때 들었던 바이올린 연주를 다시 한번 듣고 싶어서였어요. 시간 괜찮을 때 언제든 연락 주세요.”“물론 많이 바쁘시면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연정미는 주용화를 붙잡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제가 배웅할게요.”하지만 주용화가 제지했다.“괜찮아요. 연정미 씨는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으니 괜히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죠.”주용화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연정미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저도 바이올린을 안 잡은 지 오래돼서 실력이 많이 녹슬었을 거예요. 조만간 시간 내서 다시 연습해 볼게요. 어느 정도 감을 찾으면 연락할게요.”주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리고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그 말을 끝으로 주용화는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주용화가 나가자 단서현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단서현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주용화 씨는 대체 무슨 뜻이야? 예전에는 하지율을 도와서 손형원도 상대하고 단보현도 상대하고 너희 연씨 가문까지 건드렸잖아.”“그런데 왜 네가 도움을 청하니까 이것저것 핑계만 대는 건데?”하지만 연정미는 딱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주용화도 처음부터 하지율을 적극적으로 도운 건 아니야. 처음에는 하지율의 옆에서 보디가드로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지.”“본격적으로 하지율을 돕기 시작한 것도 하지율이 M국으로 돌아온 뒤부터였어.”“우리는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야. 그런데 처음부터 가주급 인물을 상대해 달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겠어?”단서현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그래도 예전에 임채아를 하지율로 착각했
단서현도 아무리 눈치가 느리다고 해도 주용화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들었다.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단서현은 몇 번이나 반박하려 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주용화는 더 이상 단서현을 상대하지 않고 연정미를 바라봤다.“연정미 씨, 저는 그 바이올린 연주자가 마음에 들어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한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무 부탁이나 다 들어주는 호구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고요.”“도덕적 강요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우연히 지나가다 곡 하나 들은 것까지 이렇게 이용당할 줄은 몰랐네요. 두 분의 부탁은 너무 지나쳐요. 죄송하지만 들어드릴 수 없어요.”주용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연정미 씨도 제가 찾아온 일은 없었던 걸로 하시죠.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주용화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연정미와 단서현의 얼굴빛이 동시에 변했다.정말 주용화가 이렇게 바로 가 버릴 줄은 몰랐다.연정미가 황급히 일어나 주용화의 앞을 막았다.“용화 씨,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서현이가 그냥 농담한 거예요. 원래 장난치는 걸 좋아하거든요.”단서현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곧바로 맞장구쳤다.“주용화 씨, 설마 진짜로 믿은 거예요? 방금 한 말은 전부 농담이었어요.”그러자 주용화가 걸음을 멈췄다.“그래요? 그런데 단서현 씨의 연기가 너무 진짜 같던데요.”단서현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사실 제 꿈이 배우였거든요. 그런데 집에서 방송에 얼굴을 내미는 걸 반대해서 일단 포기했어요.”그러고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사람만 만나면 괜히 한 번씩 연기를 해 봐요. 상대가 제 연기에 속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냥 연기하고 싶은 마음을 푸는 거죠.”“주용화 씨가 싫다면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을 치지 않을게요.”두 사람의 해명을 들은 주용화는 그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러더니 감탄하듯 말했다.“단서현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뻔뻔하고 억지스러우면서 악의까지 가득한 여자를 어쩜 그렇게 실감 나게 연기하시는지..
단서현은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단서현과 연정미의 관계는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친구나 다름없었다.물론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지금 그저 목적이 같아 잠시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둘이 힘을 합쳐도 하지율을 상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하물며 혼자서는 하지율에게 제대로 위협조차 되기 힘들었다.단서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저와 정미 사이를 돈이나 물질 같은 걸로 판단할 수는 없어요. 정미도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요.”“주용화 씨, 여기서 저와 연정미의 관계를 따질 시간에 하지율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주용화의 눈빛이 미묘하게 움직였다.“하지율 씨를 상대한다고요? 두 분께서 저한테 하지율 씨를 상대해 달라는 겁니까?”그러자 단서현이 말했다.“하지율이 정미를 괴롭히고 원래 정미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빼앗았잖아요.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게 뭐가 이상해요?”주용화는 단서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단서현 씨, 지금의 하지율 씨는 사실상 한 가문의 가주와 맞먹는 인물입니다.”단서현은 주용화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맞아요. 지금 하지율이 쥔 실권은 웬만한 가주 못지않죠. 그러니까 저희가 주용화 씨한테 도움을 청하는 거고요.”“하지율이 조성희 정도였다면 우리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어요. 하지율이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주용화 씨 정도의 능력과 수완이면 하지율 하나 상대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주용화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단서현 씨의 말은 바이올린곡 하나 들었다는 이유로 제가 가문의 이익까지 희생하면서 실권을 쥐고 있는 가주급의 인물과 싸워 같이 피해를 보라는 겁니까?”“설마 그 곡에 사람을 홀리는 힘이라도 있어서 제가 목숨까지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건가요?”그러자 단서현이 말했다.“정미는 주용화 씨 생명의 은인 아니에요? 생명의 은인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
그때 주용화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누가 계속 연정미 씨를 못살게 구는 겁니까?”단서현의 눈에 차갑고 독한 빛이 스쳤다.“바로 연정미의 이복동생인 하지율이에요!”그 말에 주용화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조금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무리 그래도 하지율 씨는 그래도 연정미 씨의 가족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연정미 씨를 괴롭히는 거죠?”단서현이 코웃음을 쳤다.“엄마도 다른데 무슨 가족이에요? 원수가 안 된 것만 해도 다행이죠.”그러자 주용화가 되물었다.“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연정미 씨와 연씨 가문의 형제들도 어머니가 다르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연정미 씨는 세 사람과 사이가 아주 좋지 않은가요?”단서현이 그건 다 겉으로만 그런 거라고 말하려던 순간, 주용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연정미 씨도 사실은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주용화의 물음에 연정미가 다급히 말했다.“아니에요. 그건 서현이가 오해해서 그래요. 저랑 지율이 사이에는 그저 약간의 오해가 있을 뿐이에요.”단서현도 아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곧바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할 뻔했는지 깨달았다.연정미가 3명의 오빠에게 품은 감정까지 가짜라고 해 버리면 연정미가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예전에 주용화가 하지율을 좋아했던 이유도 하지율이 지나치게 남을 챙기고 희생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그때 단서현이 얼른 말을 바꿨다.“연정미는 연씨 가문의 3형제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 당연히 정이 남다르죠. 하지율 씨는 나중에 연씨 가문으로 들어왔고요. 하지율 씨는 정미가 자기 대신 재벌가 아가씨로 살아왔다고 생각해서 원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건건 정미를 괴롭히는 거죠.”단서현은 경멸 어린 말투로 덧붙였다.“정미도 당연히 연씨 가문의 친딸이에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도 아닌데 하지율 씨가 무슨 자격으로 연씨 가문의 모든 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그러자 주용화가 다시 물었
결국 연정미가 한발 물러섰다.“아이를 낳는 건 동의할게요. 대신 조성희 씨가 낳는 아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제 밑에서 키워야 해요.”“조성희 씨가 수현 씨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아이만 낳으면 되잖아요. 출산한 뒤에는 그 아이와 아무 관계도 없는 걸로 하고요.”연정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물론 저도 친자식처럼 키울 거예요.”심수현이 연정미에게 잘해 주고 있긴 했지만 연정미가 가장 먼저 따진 건 여전히 득실이었다.연정미는 하이현과 달랐다.연정미는 심수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게다가 아이를 자기 손에서 키우면 그만큼 쓸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다.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어떤 사람으로 만들지도 결국 연정미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옛날로 치면 본처가 첩의 자식을 거두어 기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연정미는 늘 하이현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아이 하나 때문에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집까지 나가 버리다니...아이를 자기 손안에 두고 키웠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심수현의 어머니는 연정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성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성희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평소 제멋대로이고 충동적이던 조성희는 뜻밖에도 순순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어차피 저는 수현 오빠한테 보상하려고 이러는 거니까요.”심수현의 어머니는 조성희를 한 번 더 유심히 바라봤다.조성희도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지금은 순순히 동의해도 나중에 마음을 바꾼다면 누구도 억지로 막을 수 없었다.물론 연정미도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조성희가 연정미를 이기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다만 이번에 시험관으로 임신하겠다는 생각은 대체 누가 조성희에게 알려 준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어쨌든 조성희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렇게 여러 사람 사이의 합의는 일단 마무리됐다.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그때 연정미가 심수현에게 말했다.“수현 씨, 서현이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