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윤오는 천천히 화면을 꺼냈다. [도유나] 화면 위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데에는 찰나의 유예가 필요했다. 분명 익숙한 이름인데, 뇌의 회로가 인식을 거부하는 듯했다. “…….” 윤오는 무표정하게 발광하는 화면을 응시했다. 벨이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집요하게 이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계절이, 예고도 없이 눈앞으로 걸어 나온 기분. 예전 같았으면 이미 망설임 없이 정리됐을 선택이었다. 고민의 축에도 끼지 못했을 종류의 것. 하지만 지금은 그 단순함이 마모되어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수락 버튼 위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화면이 꺼졌다. [부재중 전화 1건] 곧이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ㄴ 잠깐만 볼 수 있어? 간결한 만큼 의도가 선명했다.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과거는 그림자처럼 발치에 따라붙어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표면적인 균열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결국 먼저 무너진 건 유나였다. '바람'이라는 단어로 요약됐지만, 그 안의 감정은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외로움, 확인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충동적인 선택. 윤오는 그 지리멸렬한 과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붙잡지 않았다. 끝낼 이유는 충분했고, 지속할 명분은 없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다시 시작할 마음 따위는 없다. 그 사실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윤오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했다. 약속 장소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어서오세요.” 익숙한 발걸음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예전 자리를 찾아갔다. 창가. 햇살이 가장 예쁘게 내려앉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은 유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가던 시선이 한 번쯤은 그녀에게 머물렀고, 그럼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물론 윤오도 창가 자리가 좋았다.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사랑했다. 햇살이 잘 든다는 이유로, 비 오는 날은 빗방울이 유리를 타고 흐르는 모습이 예쁘다는 이유로, 눈 오는 날은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는 이유로. “…….” 윤오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천천히 시선을 밖으로 흘렸다.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시간만은 잠깐 멈춰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문이 한번 더 열렸다. 윤오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유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유나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걸었다. 과함이 아니라, 과함을 다뤄본 자 특유의 절제였다. 윤곽이 또렷한 메이크업, 윤기가 과하지 않은 머리결, 계산된 간격으로 드러나는 피부. 눈에 띄는 게 아니라, 눈을 붙잡아 두는 방식. 유나는 매장을 훑지 않았다. 이미 익숙한 공간이라는 듯 곧장 윤오의 탁자로 다가와 시선을 맞췄다. “오랜만이다.” 윤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아직도 잘 되네." 가볍게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미소 지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잠시 윤오를 바라봤다. "오빠도." 다가온 직원이 메뉴판을 내밀기도 전에 유나의 주문에 가로막혔다. “모카 마타리로 두 잔요. 오빠는 따뜻하게, 맞지?” 말끝이 짧고 친밀했다. 윤오는 담담하게 긍정했다. 직원이 물러나고 다시 둘만 남은 테이블 위로 유나의 손끝이 컵받침을 가볍게 두드렸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지?” “조금.” 유나는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잠깐의 정적. 유나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나 헤어졌어. 한국 들어오자마자 연락한거야.” 윤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나는 그 침묵마저 예상했다는 듯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오빠 생각나서.” “…….” “만났던 사람 중에……. 오빠만큼 생각나는 사람이 없더라구.” 윤오는 여전히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침묵 위로 유나의 시선이 좀 더 짙게 내려앉았다. “근데 나만 나쁜 사람 된 거, 좀 억울하더라.” “…….” “좀 가슴이 아파야지. 오빠 생각만 해도 막…….” 그녀가 몸을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생각하면 짜증나는 남자들 많아. 근데, 오빠는 좀 달라.” “…….”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오래전 그들이 공유했던 여름의 공기처럼, 진심인지 유혹인지 모를 의도가 축축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오빠는, 아직도 똑같아?”“…….”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
“본부장님은 왜 저예요?”에단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이번에는 선우도 피하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 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남자가 만들어낸 이상할 만큼 안전한 침묵 때문인지 모르겠다.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회사에 저보다 유능한 사람 많잖아요.”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선우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루시 씨처럼 진짜 프로인 사람도 있고.”잠시 숨을 삼켰다.“그런데 왜 굳이…….”선우가 에단을 바라봤다.“저예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소리가 오두막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불꽃이 한 번 크게 일렁였다.그제야 선우는 알아차렸다.에단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그는 무릎을 세운 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주황빛 불길이 날카롭게 정돈된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나도.”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은 목소리였다.“지금의 선우 씨처럼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에단은 여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르벨라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랐어요.”짧은 웃음이 흘렀다.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비웃는 소리에 가까웠다.“해야 할 일은 넘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