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빠는, 아직도 똑같아?”
유나는 그 질문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답을 재촉하지도,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카페 안은 마감 시간을 앞둔 기계음만 낮게 깔려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눅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나가 식어버린 커피잔을 밀어내며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한 잔 더 할래? 이번엔 제대로 된 걸로.” 망설임이었을까, 혹은 체념이었을까. 윤오는 끝내 별다른 대꾸 없이 유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 “추천으로 주세요. 최대한 무거운 걸로.” 그녀는 메뉴판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바텐더는 잠시 선반을 훑더니 병 하나를 꺼냈다. Glen Virel 30. 두꺼운 병목 위로 황금빛 라벨이 조명 아래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랜드 계열의 싱글몰트입니다. 셰리 캐스크에서 오래 숙성되어 건과일 향이 짙게 올라오실 겁니다.” 바텐더가 잔을 채우자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짙은 호박색 액체가 차올랐다. 유나는 짧게 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잔을 바로 내려놓지 않았다. 입 안에서 한 번 더 머물고, 삼키고 나서야 천천히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음미했다. “좋네.” 잔을 바라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웃었다. “미국에서도 자주 보이더라. 아르벨라(Arbella).” 박제되어 있던 이름 하나가 유나의 입술 사이를 미끄러져 나왔다. “선우언니 회사 거잖아.” 윤오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유나는 그런 윤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굴렸다. “오빠는 아직도…….”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 언니 생각하면서 마시는 거지?” 정곡이었다. 아니, 굳이 피해 가지 않고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러 넣은 한마디였다. 그 틈을 타 유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나한테 프로포즈했어.” 유나는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래서 끝냈어.” “이상하게 그 순간에 딱 질리더라. 웃기지?” 씁쓸한 웃음기가 그녀의 입꼬리에 스쳤다. “오빠랑도 그렇고……. 난 맨날 결혼 준비만 하나 봐.” 윤오의 입가에서 짧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왜 웃어?” “달리 해줄 말이 없네.” 유나는 못마땅한 듯 눈을 흘겼다. 그러다 이내 바텐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벨라 피트 라인 있죠?”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병 이름을 정확히 짚었다. “아일라 바레트(Isla Vareth).” “네, 있습니다.” “그걸로 두 잔 주세요.” 유나는 다시 윤오를 바라봤다. 입꼬리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자주 마셨어.” 아주 잠깐의 침묵. “그 사람이랑.” 추억 회상이나 하자고 꺼내는 말이 아니었다. 선우를 꺼냈다가, 다른 남자를 꺼내고, 다시 윤오를 바라본다. 그녀는 윤오를 도발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서 흔들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바텐더가 병을 꺼내 들자, 조명을 등진 어둠 속에서 라벨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Isla Vareth 12 Years Peated Single Malt. 조명을 등진 병의 라벨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코르크가 열리는 찰나, 향이 먼저 공간을 점령했다. 꼭 불을 끄고 난 자리에 남겨진 잔향같았다. 완전히 사그라지지 못한 열기, 젖은 나무가 타다 멈춘 듯한 눅눅한 그을음. 그리고 그 끝에 바다를 오래 머금은 공기처럼 얇고 비릿한 짠 기운이 스쳤다. “오빠는 피트 안 좋아하잖아.” 윤오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올렸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한 모금을 삼켰다. 위스키의 거친 질감이 식도를 긁고 지나가자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굴이랑 피트 위스키 잘 어울리는 거 알아? 미국 케이프 코드에서 자주 그렇게 마셨어.” 유나가 잔을 내려다봤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유나가 잔을 천천히 돌렸다. 잔 속 호박빛 액체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 사람은 기억이 안 나.” 찰랑. 얼음이 잔 안에서 작게 부딪혔다. “이 술만 기억 나.” 잔 속에 남아 있던 피트 향이 바닥으로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윤오가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뗐다. “그럼 넌.“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곧게. 유나의 눈동자를 붙잡았다. “나에 대해선 뭐가 기억나는데?” 얽힌 시선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지난 2년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
“본부장님은 왜 저예요?”에단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이번에는 선우도 피하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 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남자가 만들어낸 이상할 만큼 안전한 침묵 때문인지 모르겠다.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회사에 저보다 유능한 사람 많잖아요.”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선우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루시 씨처럼 진짜 프로인 사람도 있고.”잠시 숨을 삼켰다.“그런데 왜 굳이…….”선우가 에단을 바라봤다.“저예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소리가 오두막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불꽃이 한 번 크게 일렁였다.그제야 선우는 알아차렸다.에단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그는 무릎을 세운 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주황빛 불길이 날카롭게 정돈된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나도.”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은 목소리였다.“지금의 선우 씨처럼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에단은 여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르벨라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랐어요.”짧은 웃음이 흘렀다.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비웃는 소리에 가까웠다.“해야 할 일은 넘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