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5월의 정원은 막 겨울의 흔적을 털어낸 사람처럼 싱그러웠다. 비에 젖은 잔디 위로 연둣빛 잎들이 바람도 없이 살랑였고, 작은 꽃들이 담장 아래에서 제멋대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출장이 끝났다. 제 집의 정원으로 들어선 선우의 머릿속에는 스코틀랜드의 풍경 대신 자꾸만 한 장면이 떠올랐다. “…….” 꿀꺽. 잔을 기울이던 목이 움직이던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 진짜.” 선우가 양손으로 제 볼을 꾹 눌렀다. ‘내 목울대가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누가 마음에 든다고 했어!” 정원 한가운데서 억울함을 호소한 선우가 주변을 휙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있었으면 진짜 이민 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I’d say it was mutual.’ “아니야.” 선우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야.” 역시 해외파라 그런가. 한국 정서와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It was mutual.’ 대체 어디까지 서로였는데. 선우가 괜히 발끝으로 잔디를 툭 건드렸다. 작은 물방울이 운동화 끝에 튀었다. “아, 몰라.” 더 생각하면 또 목울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선우가 얼른 고개를 털고 현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천천히 밀려들었다. 하이랜드에서 맡았던 알싸한 탄취 같은 낯선 이국의 향취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 소파 가죽 냄새와 오래된 책 냄새 같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공기가 선우를 감싸 안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던 선우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어?”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윤오야?” 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생을 봐와서 이제는 풍경처럼 당연해진 얼굴이었다. “왔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음절이었지만 선우의 눈동자는 아주 미세한 진동을 그리며 흔들렸다. “너 왜 여기 있어?” “출장이었다며. 어머님한테 들었어.” “……아.” 거기까지였다.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이 그대로 꺾여 접혔다. 선우는 생략된 뉘앙스를 단번에 읽어냈다. 출장 내내 윤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에단이 만든 혼란에 휩쓸려 다니느라, 혹은 윤오가 남긴 상처를 외면하느라. “어머니가 반찬 해주셨어. 냉장고에 정리해놨는데. 꺼내줄까?” 윤오는 제 집인 양 냉장고를 열고 반찬들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접시에 옮기고,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일련의 과정들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동선이었다. 선우는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 그 뒷모습을 보았다. “…….” “…….” 평소 같았으면 벌써 쉼 없는 대화가 공간을 채웠을 시간이었다. 비행기는 어땠는지, 뭘 먹고 누굴 만났는지. 쓸데없는 감상까지 모조리 섞어 이어졌을 말들. 그런데 오늘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위잉ㅡ.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대신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찬들이 식탁 위에 놓였다. 윤오는 선우에게 수저를 밀어준 뒤에야 자리 맞은편에 앉았다. “먹어.” “응, 고마워.” 그게 끝이었다. 젓가락이 그릇을 스치는 작은 소리만이 식탁을 맴돌았다. “출장은, 괜찮았어?” 결국 윤오가 먼저 침묵의 벽을 허물었다. “응.” 단답형의 긍정.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 윤오의 젓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긴 침묵 끝에 윤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김선우.” 선우의 손이 그제야 멈췄다.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 화. 내가 권윤오에게 화가 났나. 선우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지난 열두 해를 전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선우는 끝내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 작은 회피 하나로 충분했는지. 윤오의 표정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 “……하아.” 낮게 새어 나온 숨이 식탁 위로 가라앉았다. 더 묻지 않았다. 윤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먹던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져갔다. 달그락.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수도꼭지를 틀자 물줄기가 쏟아졌다. “갈게. 밥 마저 먹어.” 현관문이 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거실 안으로 한 줄기 스며들었다. 문이 닫혔다. 찰칵. “…….” 그제야 선우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참 못났다, 김선우.” 제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작게 중얼거린 선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선우의 머릿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 선우와 윤오는 언제나 한 문장 안에 있었다. 윤오는 언제나 먼저였다. 선우는 늘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숨이 차도, 다리가 아파도, 한 번도 그 등을 놓친 적은 없었다. 그게 사랑인 줄은, 아주 오랫동안 몰랐다. 스물두 살의 여름. 윤오가 미국 대학병원 리서치 파견을 결정한 날이었다. “금방 다녀올게.” 고작 1년이었다. 겨우 사계절 한 번 지나가는 시간. 그런데 비행기가 활주로 끝에서 천천히 떠오르던 순간 선우의 세상도 함께 비어 버렸다. 그제야 알았다. 늘 뒤를 돌아보면 있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재난이라는 걸. 그 이후의 기억은 희미했다. 창밖의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하루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새벽 두 시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깨어서도. 권윤오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감정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네가 손 닿는 곳에 없다는 것. 이 단순하고 명확한 물리적 결핍이 매일 밤 선우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때 알았다. 이건 익숙함이라는 예쁜 포장지로 싸인, 지독한 갈망이라는 걸. 그런데도 선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라는 자리는 너무나 달콤한 마약이었으니까. 윤오가 없는 1년 동안 선우는 위스키를 배웠다. 향을 구별하는 법. 시간을 기다리는 법. 그리고 숙성이라는 것이 단지 오래 두는 일이 아니라, 매일 아주 조금씩 변해 가는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사람도 그랬다. 윤오가 없는 시간은 선우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윤오가 돌아왔을 때 선우는 예전처럼 웃어 보였지만, 오크통 속의 위스키처럼 선우의 마음은 이미 다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말하지 못한 진심들이 어둠 속에서 홀로 숙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건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원망. 익숙함이라는 마취가 풀린 자리에는 오래전부터 곪아 터진 상처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열두 번의 봄. 열두 번의 여름. 열두 번의 겨울. 사랑은 계절마다 조금씩 깊어졌는데, 관계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 원망은 이제 형태를 바꿔 결심이 된다. 너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 친구라는 이름의 방패 뒤에 숨어서 네 인생의 주인공 자리를 가로채고 있었던 나의 이기적인 배려를, 이제는 끝내야 했다. *** 윤오는 선우의 집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선우의 집은 ㄷ자로 건물을 감싼 중정형 타운하우스였다. 작은 정원 한가운데에는 빗물을 머금은 잔디가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 속에서 윤오의 머릿속은 폭우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저의 무엇이 선우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무엇을 놓쳤지. 무엇을. “……하아.” 가슴이 턱 막힌 기분. 길게 내쉰 숨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윤오가 천천히 화면을 꺼냈다. “…….” 화면 위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데에는 찰나의 유예가 필요했다. 분명 익숙한 이름인데, 뇌의 회로가 인식을 거부하는 듯했다.선우가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세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ㅡ “선우 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느슨해졌다. “……네.” ㅡ “아버님은 뵙고 왔어요?” 인사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 목소리.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선우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네. 방금 뵙고 나왔어요. 본부장님 말씀대로 손도 꼭 잡아 드렸고요.” ㅡ “잘했네.” 짧은 대답 뒤에 부드러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ㅡ “많이 걱정했을 텐데, 조금은 마음이 놓이겠어요.” “……네. 검사 결과도 괜찮대요.” ㅡ “다행입니다.” 말을 마치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우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울음을 참으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에단의 낮은 웃음이 들렸다. ㅡ “연락 기다렸습니까?” 잠깐의 여유가 흘렀다. 그 사이로 어딘가 낯선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 에단은 분명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우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연락 안 하셨어요?’ ……너무 따지는 것 같았다. ‘저 문자 기다렸는데.’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이유로 전화를 걸었는지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병실에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는지, 윤오의 다정함 앞에서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