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출장이 끝났다.
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천천히 밀려들었다. 하이랜드에서 맡았던 알싸한 탄취같은 낯선 이국의 향취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 소파 가죽 냄새와 오래된 책 냄새 같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공기가 선우를 감싸 안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던 선우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어, 권윤오다. “윤오야?” 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생을 봐와서 이제는 풍경처럼 당연해진 얼굴이었다. “왔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음절이었지만 선우의 눈동자는 아주 미세한 진동을 그리며 흔들렸다. “너 왜 여기 있어?” “출장이었다며. 어머님한테 들었어.” “……아.” 거기까지였다.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이 그대로 꺾여 접혔다. 선우는 생략된 뉘앙스를 단번에 읽어냈다. 출장 내내 그녀는 윤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에단이 만든 혼란에 휩쓸려 다니느라, 혹은 윤오가 남긴 상처를 외면하느라. “어머니가 반찬 해주셨어. 냉장고에 정리해놨는데. 꺼내줄까?” 윤오는 제 집인 양 냉장고를 열고 반찬들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접시에 옮기고,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일련의 과정들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동선이었다. “…….” 선우는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 그 뒷모습을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쉼 없는 대화가 공간을 채웠을 시간이었다. 비행기는 어땠는지, 뭘 먹고 누굴 만났는지. 쓸데없는 감상까지 모조리 섞어 이어졌을 말들. 그런데 오늘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위잉ㅡ.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대신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찬들이 식탁 위에 놓였다. 윤오는 선우에게 수저를 밀어준 뒤에야 자리 맞은편에 앉았다. “먹어.” “응, 고마워.” 그게 끝이었다. 젓가락이 그릇을 스치는 작은 소리만이 식탁을 맴돌았다. “출장은, 괜찮았어?” 결국 그가 먼저 침묵의 벽을 허물었다. “응.” 단답형의 긍정.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윤오의 젓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긴 침묵 끝에 윤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김선우.” 선우의 손이 그제야 멈췄다.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 화. 내가 권윤오에게 화가 났나. 선우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하아.” 윤오의 입에서 탄식이 짧게 새어 나왔다. 그는 제 몫의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다. 짧게 흐르던 물소리가 멎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참 못났다, 김선우. 작게 중얼거린 선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기억 속으로 침잠했다. *** 선우와 윤오는 언제나 한 문장 안에 있었다. 다닌 학교는 달랐고, 교실도, 복도의 길이도 달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하루의 끝은 늘 서로에게 닿아 있었다. 윤오는 언제나 먼저였다. 먼저 달렸고. 먼저 합격했고. 먼저 인정받았다. 선우는 늘 그 뒤를 따라갔다. 숨이 차도, 다리가 아파도, 한 번도 그 등을 놓친 적은 없었다. 그게 사랑인 줄은, 아주 오랫동안 몰랐다. 스물두 살의 여름. 윤오가 미국 대학병원 리서치 파견을 결정한 날이었다. "금방 다녀올게." 고작 1년이었다. 겨우 사계절 한 번 지나가는 시간. 그런데 비행기가 활주로 끝에서 천천히 떠오르던 순간 선우의 세상도 함께 비어 버렸다. 그제야 알았다. 늘 뒤를 돌아보면 있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재난이라는 걸. 그 이후의 기억은 희미했다. 창밖의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하루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혼자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새벽 두 시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깨어서도. 문득 권윤오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감정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단순하고도 명확한 물리적 결핍이 매일 밤 선우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때 알았다. 이건 익숙함이라는 예쁜 포장지로 싸인, 지독한 갈망이라는걸. 그런데도 선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구'라는 자리는 너무나 달콤한 마약이었으니까. 윤오가 없는 1년 동안 선우는 위스키를 배웠다. 향을 구별하는 법. 시간을 기다리는 법. 그리고 숙성이라는 것이 단지 오래 두는 일이 아니라, 매일 아주 조금씩 변해 가는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사람도 그랬다. 윤오가 없는 시간은 선우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윤오가 돌아왔을 때 선우는 예전처럼 웃어 보였지만, 오크통 속의 위스키처럼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말하지 못한 진심들이 어둠 속에서 홀로 숙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건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원망. 익숙함이라는 마취가 풀린 자리에는 오래전부터 곪아 터진 상처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열두 번의 봄. 열두 번의 여름. 열두 번의 겨울. 사랑은 계절마다 조금씩 깊어졌는데, 관계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 원망은 이제 형태를 바꿔 결심이 된다. 너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 친구라는 이름의 방패 뒤에 숨어서 네 인생의 주인공 자리를 가로채고 있었던 나의 이기적인 배려를, 이제는 끝내야 했다. *** 윤오는 선우의 집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선우의 집은 ㄷ자로 건물을 감싼 중정형 타운하우스였다. 작은 정원 한가운데에는 빗물을 머금은 잔디가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 적막 속에서 윤오의 머릿속은 폭우라도 쏟아지는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저의 무엇이 선우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무엇을 놓쳤지. 무엇을. “……하아.” 가슴이 턱 막힌 기분. 길게 내쉰 숨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윤오는 천천히 화면을 꺼냈다.“…….”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
“본부장님은 왜 저예요?”에단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이번에는 선우도 피하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 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남자가 만들어낸 이상할 만큼 안전한 침묵 때문인지 모르겠다.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회사에 저보다 유능한 사람 많잖아요.”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선우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루시 씨처럼 진짜 프로인 사람도 있고.”잠시 숨을 삼켰다.“그런데 왜 굳이…….”선우가 에단을 바라봤다.“저예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소리가 오두막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불꽃이 한 번 크게 일렁였다.그제야 선우는 알아차렸다.에단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그는 무릎을 세운 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주황빛 불길이 날카롭게 정돈된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나도.”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은 목소리였다.“지금의 선우 씨처럼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에단은 여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르벨라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랐어요.”짧은 웃음이 흘렀다.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비웃는 소리에 가까웠다.“해야 할 일은 넘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