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9.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20:24:07

오전부터 신제품 런칭 회의가 잡혀 있었다.

선우는 누구보다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회의 자료를 띄우고, 메모장을 열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는 손끝도,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문제는 머리였다.

몸은 멀쩡히 출근했는데, 정신은 아직 어제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의식이 자꾸만 제멋대로 탈선을 반복했다.

‘상관없어?’

‘어. 상관없어.’

대체 어제 우리는 왜 그렇게 날을 세웠을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 앞에 얌전히 세워져 있던 자신의 차.

“…….”

너 왜 그랬냐고, 김선우 이 똥멍청아.

왜 그랬긴요. 똥멍청이니깐요.

“아으, 술이 문제지.”

아니, 내가 문제다. 그냥.

선우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일하자, 일.

잡념을 털어내려 고개를 한 번 휘휘 저은 순간, 회의실 문이 열렸다.

“다들 모이셨네요.”

아르벨라 코리아의 새로운 본부장, 에단 로웰.

어젯밤 바에서 마주한 남자와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한 신제품 출시가 아닙니다.”

단정했고, 정확했고, 빈틈이 없었다. 사적인 웃음은커녕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조차 흔적이 없었다.

“…….”

선우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일할 때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프로페셔널하게.

스크린에 프로젝트 타이틀이 떠올랐다.

ㅡ

하이엔드 시장 타겟 싱글몰트 위스키 런칭

ㅡ

“아시아 프리미엄 싱글몰트 시장의 기준을 우리가 새로 쓰는 겁니다.”

웅성거리던 회의실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단순히 가격이나 패키지를 바꾸는 수준으로는 부족합니다. 껍데기는 본질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에단의 말은 면도날처럼 짧고 명확했다.

팀원들이 아시아 시장의 두터운 블렌디드 소비층과 싱글몰트의 한계를 언급하며 난색을 표하자, 에단이 그 흐름을 날카롭게 끊어냈다.

“우리가 파는 건 단순한 액체가 아닙니다. 왜 이걸 마셔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야 합니다.”

선우도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였다. 에단의 시선이 자석처럼 선우를 향해 미끄러졌다.

“김 과장님 의견은요?”

순간, 선우의 심장이 작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 표정을 단도리했다. 윤오와의 일로 속은 엉망이었지만, 일에서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타겟을 좁혀야 합니다. 대중적인 입문층이 아니라, 이미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해질 대로 확고해진 사람들로요.”

에단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

“구체적으로요.”

“향의 선을 더 선명하게 그어야 합니다.”

선우가 화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기억에 남는 쪽으로요.”

“이유는요.”

“남는 게 있어야……. 다시 찾으니까요.”

선우의 말끝에 아주 짧은 침묵이 매달렸다.

“…….”

“…….”

꿀꺽.

정적 속에서 선우의 목울대가 작게 꿀렁였다.

“…….”

에단의 시선이 선우의 입술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찰나였다. 에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리모컨을 눌렀다.

스크린이 넘어갔다. 새로운 프로젝트 코드명이 화면 중앙을 가득 채웠다.

ㅡ

HEARTBEAT

ㅡ

에단이 천천히 단어를 굴렸다.

“Heartbeat.”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으로 퍼졌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억양이 묻은 발음이었다.

“위스키는 세 가지를 남깁니다.”

에단이 펜을 손끝에서 가볍게 굴렸다.

“감각. 기억. 그리고 감정.”

회의실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감각은 첫 모금입니다.”

손에 잔을 쥔 듯한 동작.

“향. 질감. 피니시.”

펜을 내려놓은 그가 말을 이었다.

“기억은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죠.”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희고 매끈한 피부 위로 미소가 번지자, 조각처럼 반듯한 이목구비가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아, 그때 마셨던 그 위스키.’ 하고요.”

곳곳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에단은 웃음에 휩쓸리지 않았다.

회의실을 천천히 훑던 감청색 눈동자가 한 사람 앞에서 멈췄다.

“감정은 다릅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의실의 소음을 단숨에 잠재웠다.

“좋은 위스키는 입안에만 남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사람 안에 남습니다.”

왜, 또.

왜 나를 보는데.

위화감이 선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정리할 것도, 결정해야 할 것도 산더미였다.

마지막 슬라이드가 넘어가고, 에단의 짧은 갈무리가 이어졌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서류를 정리하는 마찰음과 노트북이 닫히는 둔탁한 소음이 회의실을 채웠다.

선우 역시 기계적으로 파일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손은 평소처럼 정확하게 움직였지만, 속은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파도에 휘말려 어지러웠다.

“언니.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요?”

“오늘은 딱히 생각이 없네. 민지 씨 먼저 먹어.”

민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간 뒤, 선우는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특별한 병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온몸의 진을 다 빼앗긴 듯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조금 전 에단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

사람 안에 남는다는 말.

그리고 어젯밤.

‘상관없어?’

“아이고, 머리야.”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로 뜨거웠다.

조금 전까지의 열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간 공간. 텅 빈 회의실 안에 홀로 남은 선우의 시선이 책상 위 휴대폰으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온 신경이 그 작은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휴대용 바보상자.

허공에서 한참을 머뭇대던 손이 결국 자석에 이끌리듯 휴대폰을 낚아챘다.

화면이 켜졌다.

익숙한 화면과 익숙한 이름들.

그리고.

그 사이에 윤오.

“…….”

손가락이 그 이름 위에서 멈췄다.

누르기만 하면 됐다.

정말 그게 전부인데.

[윤오]

진짜 심장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손바닥으로 괜히 왼쪽 가슴께를 툭툭 쳤다.

권윤오는 어제 이후로 연락 한 통이 없었다. 평소의 너라면 별것도 아닌 시답잖은 말을 하나 던졌을 텐데.

선우의 엄지가 다시 화면 위로 움직이려는 순간.

철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아, 과장님. 마우스를 두고 가서요.”

“아.”

선우가 재빨리 화면을 껐다.

“네.”

팀원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

“먼저 가세요.”

“네.”

선우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몇 걸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걸음이었다.

등은 곧게 펴고,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어지러운 머릿속과 달리 표정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런데 코너를 돌기 직전.

벽 너머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봤어? 김선우 과장님.”

쫑긋.

선우의 발끝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과장님이 왜?”

“새로 온 본부장님이랑 말이야. 압구정에 그 바 알지.”

“어디, 누아르 오크?”

“어, 거기. 둘이 같이 나갔어. 어제.”

아뿔싸.

선우의 몸이 하마터면 크게 휘청일 뻔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부정맥 메이커   105.

    선우가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세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ㅡ “선우 씨?”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이 느슨해졌다. “……네.” ㅡ “아버님은 뵙고 왔어요?” 인사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 목소리.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낮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선우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네. 방금 뵙고 나왔어요. 본부장님 말씀대로 손도 꼭 잡아 드렸고요.” ㅡ “잘했네.” 짧은 대답 뒤에 부드러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ㅡ “많이 걱정했을 텐데, 조금은 마음이 놓이겠어요.” “……네. 검사 결과도 괜찮대요.” ㅡ “다행입니다.” 말을 마치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선우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울음을 참으려는 순간, 수화기 너머로 에단의 낮은 웃음이 들렸다. ㅡ “연락 기다렸습니까?” 잠깐의 여유가 흘렀다. 그 사이로 어딘가 낯선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 에단은 분명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우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연락 안 하셨어요?’ ……너무 따지는 것 같았다. ‘저 문자 기다렸는데.’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이유로 전화를 걸었는지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병실에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는지, 윤오의 다정함 앞에서

  • 부정맥 메이커   104.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 부정맥 메이커   102.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 부정맥 메이커   101.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 부정맥 메이커   100.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 부정맥 메이커   99.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