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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2 00:18:22

강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희와 함께한 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것처럼 따뜻했던 여자였다. 피 냄새와 욕설이 익숙했던 삶에 서희가 들어왔고, 강수는 처음으로 그 옆에서 평범하게 살아도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결혼이었다.

“아니.”

낮고 짧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서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거짓말 아니었어.”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건 강수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서희의 얼굴은 더 무너졌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면 차라리 지난 시간을 전부 거짓으로 만들어 미워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랑했다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갔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럼 뭐야…….”

서희가 떨리는 숨을 삼켰다.

“나 사랑했는데 사라도 만난 거야?”

강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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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온한 정착   201화

    사라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서희가 말하는 ‘자리’가 무엇인지는 알았다.아내라는 자리.오랫동안 강수를 사랑했고, 결혼했고, 함께 살았던 사람의 자리. 그걸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거였다.그런데 사라는 이상하게도 그 질문에 바로 그렇다거나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음…….”사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뭐라고 설명해야 되지.”서희의 얼굴이 굳었다.“설명할 게 있어?”“아니, 그게 아니라.”사라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평소에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서희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그래도 묻는다면 대답하고 싶었다.사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가 오빠한테 느끼는 감정이랑 내가 오빠한테 느끼는 감정이랑 같아?”서희가 눈을 깜빡였다.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뭐?”“똑같냐고.”“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나한텐 상관있어.”사라가 말했다.강수는 두 여자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용히 듣고 있었다.“물론 둘 다 사랑이라고 묶을 수는 있겠지.”사라가 손가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근데 사람 감정이 그렇게 간단하게 묶여져?”서희의 눈썹이 조금씩 좁아졌다.사라는 말을 고르며 이어갔다.“너는 오빠랑 오래 만났잖아. 좋아했고, 결혼했고. 같이 보낸 시간도 있고.”그 시간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강수가 서희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그게 너랑 오빠가 만든 거잖아.”서희가 가만히 사라를 바라봤다.“근데 나는 달라.”“뭐가 다른데.”“그냥 달라.”사라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나는 너처럼 오빠를 만난 것도 아니고, 너처럼 좋아하게 된 것도 아니야. 같이 있을 때 느끼는 것도 아마 다를 거고.”“그래서?”서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다르면 내 자리가 아니야?”사라가 잠시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난 네 자리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 불온한 정착   200화

    사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사랑하느냐는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단어를 자신에게 가져다 붙여본 적이 별로 없어서였다.좋으면 좋았고, 싫으면 싫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났고, 떠나고 싶어지면 떠났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끌린다고 해서 그 감정을 굳이 거창한 이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그래서 사라는 잠깐 생각했다.“사랑……?”서희의 눈이 흔들렸다.사라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그게 뭔데.”“뭐?”“나 그런 거 잘 몰라.”서희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 굳었지만 사라는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생각하고 있었다.강수도 말없이 사라를 내려다봤다.“근데 그냥.”사라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옆에 있으면 설레고 좋아.”강수의 시선이 멈췄다.“같이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어. 별거 안 해도 그래. 밥 먹고, 놀고, 그냥 소파에 같이 누워 있어도 좋아.”사라는 잠깐 강수를 올려다봤다.그 눈에는 평소처럼 장난기가 없었다.“그리고 오빠 앞에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별거가 별거 아니게 돼.”강수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서희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사라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말이야.”사라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말로 설명하려니 생각보다 어려웠다.자신에게는 언제나 별것 아닌 척했던 것들이 있었다. 돌아갈 곳 없이 자란 것도,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것도, 서후를 잃은 것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라를 옮겨 다니고, 웃고, 놀고, 사람을 만나면 그만이었다.그런데 강수 앞에서는 굳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다.“다들 나 이상하다고 하거든.”사라가 작게 웃었다.평소처럼 밝은 웃음은 아니었다.“너도 알잖아. 나 어릴 때부터 뜬금없는 짓 많이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갑자기 어디 가버리고.”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너무 잘 알았다.“사람들은 처음에는 재밌어해. 근데 오래 보면 꼭 그래. 왜 그렇게 사냐고. 좀

  • 불온한 정착   199화

    서희는 한동안 사라를 바라보기만 했다.화내라고 말하는 얼굴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화가 났다. 울면서 빌지도 않았고, 몰랐다고 발뺌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뻔뻔하게 턱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피하지 않고 서 있었다.“언제부터야?”사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작년.”이미 강수에게 들었던 대답이었다.그런데 사라의 입으로 다시 확인하자 느낌이 전혀 달랐다.“내가 결혼한 거 알았잖아.”“알았어.”“강수 오빠가 내 남편인 것도.”“응.”짧은 대답이 이어질수록 서희의 숨이 거칠어졌다.사라는 변명할 말을 찾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강수가 누구인지도, 서희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았다.그래서 모른 척할 수 없었다.“그런데도 만났어?”사라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응.”서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눈물이 맺힌 얼굴로 웃으니 표정이 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어떻게 그래?”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그래, 사라야.”그제야 사라의 시선이 내려갔다.욕을 들었을 때보다 그 말이 더 아팠다.서희는 친구였다.아주 오래 떨어져 있어도 한국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찾아갈 수 있었던 친구. 자신이 어디를 떠돌든 돌아오면 웃으면서 받아주던 사람이었다.그런 서희의 남편을 만났다.그 사실에 무슨 말을 붙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미안해.”“미안하다는 말 말고.”서희가 사라의 말을 잘랐다.“왜 그랬냐고.”사라는 입술을 다물었다.처음에는 좋아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강수가 자신을 원했고, 자신도 그에게 끌렸다. 결혼한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선을 넘었고, 그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그러다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됐다.하지만 그걸 지금 서희에게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좋아했다는 말은 서희에게 이유가 아니라 또 다른 칼이 될 뿐이었다.“할 말 없어.”서희의 눈썹이 떨렸다.“없어?”“내가 잘못한 거 맞으니까.”사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변명 안 할게.”강수의 시선이

  • 불온한 정착   198화

    사라의 얼굴이 굳었다.아까까지 초코볼을 먹으며 웃고 있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희가 화를 낼 거라는 건 알았다. 언젠가 알게 된다면 자신 역시 그 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도 막상 서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했던 것보다 날카롭게 박혔다.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수의 등 뒤에 선 채 입술만 꾹 다물었다.그 순간 2302호 안에서 쪼꼬가 다시 짖었다.멍멍.조용했던 복도에 강아지 짖는 소리가 울리자 강수의 시선이 옆집으로 향했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여자가 바로 옆에 살고 있었다. 이대로 서희가 목소리를 높이면 문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였다.강수는 다시 서희를 봤다.“들어와.”서희의 눈썹이 움직였다.조금 전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막던 남자가 먼저 몸을 비켰다.“대신 조용히 해.”“내가 왜—”“들어와.”같은 말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강수는 현관문을 조금 더 열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서희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막상 들어오라는 말을 듣자 발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문 하나를 넘는 것뿐인데 그 안은 자신이 지난 일 년 동안 전혀 몰랐던 강수의 생활이었다.그때 사라가 보였다.사라는 여전히 현관 안쪽에 서 있었다. 조금 전 강수가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끼어들지도 않았다.서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서희는 결국 안으로 들어섰다.현관문이 닫혔다.찰칵.복도의 소리가 끊겼다.그리고 처음으로 집 안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넓었다.밖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거실은 높은 층답게 시야가 탁 트여 있었고, 통창 너머로 청담동의 야경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가구는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좋은 것이라는 건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서희의 눈을 붙잡은 건 집의 크기가 아니었다.사람이 사는 흔적이었다.두 사람이.현관 한쪽에는 사라의 작은 운동화와 강수의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옷걸이에는 강수의 재킷이 있었

  • 불온한 정착   197화

    서희의 시선은 사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현관 안쪽으로 보이는 풍경도 이제는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 놓인 우유와 초코볼, 아무렇게나 걸쳐진 강수의 재킷, 맨발로 서 있는 사라까지. 아래에서 옆집 주민이 두 사람을 신혼부부라고 부른 이유를 굳이 설명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들어갈게.”서희가 말했다.강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내려가.”“싫어.”“서희야.”“나도 들어가서 얘기할 거야.”서희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강수는 비켜서지 않았다. 문을 절반도 열어주지 않은 채 현관 한가운데 서 있는 큰 몸이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내려가.”낮고 짧은 목소리였다.서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왜 내가 내려가야 하는데?”사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상황을 전부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서희가 무엇을 알고 찾아왔는지는 조금 전 한마디로 충분했다.자신과 강수.결국 알았다.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너무 갑작스럽게 집 앞까지 와 있었다.서희가 다시 말했다.“비켜. 나 사라랑 얘기할 거야.”“오늘은 안 돼.”“왜?”강수는 답하지 않았다.사라가 그때 강수 옆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서희야.”강수의 시선이 곧바로 내려갔다.사라는 서희의 붉어진 눈을 보며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지만 강수가 혼자 모든 걸 뒤집어쓰는 것도 싫었다.“오빠 잘못 없어.”서희의 눈이 커졌다.강수의 미간도 동시에 좁아졌다.사라는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이게 오빠 혼자—”“민사라.”낮게 떨어진 목소리에 사라의 입이 멈췄다.강수가 사라를 내려다봤다.조금 전까지 집 안에서 초코볼을 두고 실랑이하던 남자의 얼굴은 없었다.“지금 아니야.”“근데 오빠.”“방에 가 있어.”사라가 그대로 굳었다.강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화를 내지도 않았다.그런데 더 말하면 안 된다는 건 알 수 있었다.사라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닫았다.평소라면 왜냐고 물었을 것이다. 자신

  • 불온한 정착   196화

    “쪼꼬네야?”사라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강수는 현관문을 반쯤 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밖에는 서희가 서 있었고, 등 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라가 다가오고 있었다.“쪼꼬 간식 다 먹었대?”“들어가 있어.”“왜?”사라의 발이 멈췄다.조금 전부터 이상했다. 할 말이 있다며 평소보다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던 것도 그렇고, 벨이 울리자 자신보다 먼저 현관으로 나간 것도 그랬다.무엇보다 지금 강수는 누가 왔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사라는 강수의 등을 빤히 바라봤다.“쪼꼬네 아니야?”“어.”“그럼 누구야?”대답이 없었다.사라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오빠.”강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어차피 말하려고 했다.서희가 모든 걸 알았다는 것도, 오늘 자신이 서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사라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다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서희가 뒤따라와 두 사람이 사는 집 앞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강수의 시선이 문밖의 서희에게 향했다.“내려가.”짧고 낮았다.서희는 움직이지 않았다.“싫어.”강수의 턱이 굳었다.“서희야.”“나 사라 만나러 왔어.”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사라의 표정이 멎었다.현관 안쪽이 조용해졌다.사라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서희.분명 서희라고 했다.아까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친구. 다시 전화했을 때는 갑자기 통화가 끊겼고 그 뒤로 휴대전화까지 꺼져 있던 서희였다.사라는 강수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서희야?”강수의 시선이 돌아왔다.사라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맞았다.“비켜봐.”“사라야.”“서희잖아.”강수는 비키지 않았다.사라는 그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했다. 하지만 체격 차이가 워낙 컸고, 강수가 문 앞을 막고 있으니 밖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왜 서희가 여기 있어?”강수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이상했다.사라는 이번에는 강수의 팔을 잡았다.“오빠, 비켜봐.”강수의 눈이 내려갔다.작은 손이 자신의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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