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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4 21:59:16

덕배의 시선이 강수에게 꽂혔다.

조금 전까지 삼십억이 사라진 장부를 들여다보던 얼굴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번져 있었다. ‘들소’라는 단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 건물 안에서 감히 차강수에게 저런 별명을 붙이고, 그것도 회장실 문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떠들 여자는 민사라밖에 없었다.

덕배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형님, 벌써 이쁜이 맛보셨어요?”

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괜히 눈이 마주쳤다가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강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담배 연기만 천천히 뱉었다. 그러다 서늘한 눈을 들어 덕배를 한번 바라봤다.

“뒤지고 싶냐.”

“아니, 그게 아니라 들소라잖아요.”

“닥쳐.”

덕배가 결국 큭큭 웃었다. 사라가 왜 하필 들소라는 별명을 붙였는지 혼자 별의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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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온한 정착   124화

    뒤풀이를 마치고 사라의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강수가 사라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읏.” 등이 문에 닿기도 전에 입술이 겹쳤다. 술기운보다 뜨거운 숨이 가까이 엉켰다. 강수는 하루 종일 참았던 사람처럼 사라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고, 사라도 그의 재킷 깃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오빠, 잠깐.” 대답 대신 다시 입술이 내려왔다. 사라가 웃음 섞인 숨을 흘렸다. “씻고 해.” “나중에.” “나 땀났어.” “상관없어.” 짧고 무뚝뚝한 대답이 떨어졌다. 강수의 손이 허리를 감싸자 작은 몸이 단숨에 끌려왔다. 현관 바닥으로 사라의 구두가 하나씩 벗겨졌다. 강수의 재킷도 그 옆으로 떨어졌다. 사라는 그의 입술을 겨우 밀어내며 숨을 골랐다. “진짜 안 씻어?” “못 기다려.”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오늘 왜 이래.” 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라의 뺨을 감싸 다시 입을 맞췄다. 현관 센서등이 꺼졌다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다시 환하게 켜졌다. 거칠고

  • 불온한 정착   123화

    “어.” 강수의 대답은 짧았다. 망설임도 없었다. 사라의 손가락이 그의 손안에서 가만히 멈췄다. “진짜?” “그래.” “나한테?” 강수가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몇 번을 물어.” 사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신기하니까 그렇지.” 자신은 평생 정착이라는 말을 피해 다녔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다음을 맡기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정착하고 싶다고 했다. “왜?” “너니까.” 사라의 눈썹이 바로 꿈틀했다. “또 그거야?” “뭐.” “그냥 너라서.” 며칠 전 차 안에서 들었던 대답이었다.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대충 말하면 나 또 삐진다?” “대충 아니야.” “그럼?” 강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원래 말로 제 속을 길게 풀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맞잡은 사라의 손을 조금 더 깊게 감쌌다. “계속 너한테 가잖아.”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일 끝나도.”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침에도.” 거기서 잠시 끊겼다. “안 보면 보고 싶고.”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사라는 알아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오피스텔에 놓인 칫솔과 셔츠. 퇴근하면 당연한 듯 자신의 집으로 오는 강수. 아침이면 함께 밥을 먹고, 출근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남자. 말보다 먼저 그의 생활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정착이야?” “나한텐.” 사라는 맞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떠나면?” 강수의 눈매가 단번에 굳었다. “싫지.” “잡을 거야?”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한때는 묻지도 않고 붙잡았다. 휴대전화를 빼앗고, 차에 태우고, 자신의 시간 안에 억지로 가둔 적도 있었다. 강수의 엄지가 사라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잡고 싶겠지.” “근데?” “네가 남았으면 좋겠어.” 사라가 강수를 바라봤다. “네 마음으로.” 짧은 한마디였다. 사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술잔을

  • 불온한 정착   122화

    신나는 전주가 흘러나오자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들었다. “야, 다 일어나!” “벌써?” “뒤풀이 와서 앉아 있을 거야?” 빠른 비트가 룸 안을 가득 채웠다. 사라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한 소절이 지나기도 전에 친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부도 운동화를 신은 발로 뛰어나왔다. “나 오늘 결혼했어!” “그러니까 놀아!” 사라가 신부의 손을 잡아당겼다. 둘이 마주 보고 춤을 추자 환호가 터졌다. 신랑까지 끌려 나왔고, 넓은 룸은 순식간에 작은 클럽처럼 변했다. 강수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긴 머리를 흔들며 노래하는 사라는 놀라울 만큼 노래를 잘했다. 높은 음에서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웃고, 춤추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던 사라가 강수를 발견했다. “오빠!” 마이크를 든 채 손짓했다. “왜 혼자 있어. 나와!” “싫어.” “빨리!” 결국 사라가 직접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같이 놀자.” “나 춤 안 춰.” “그럼 서 있기만 해.”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친구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사라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강수 앞에서 몸을 흔들었다. “이렇게!” “안 해.” “재미없어.” 말은 그러면서도 사라는 계속 웃었다. 강수 역시 결국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몇 곡을 내리 부르고 나서야 사람들이 하나둘 소파로 돌아왔다. 사라는 강수 옆에 털썩 앉았다. “아, 재밌다.” 강수가 물병을 건넸다. “마셔.” “술 줘.” “물부터.” “알았어.” 사라는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술잔을 들었다. 신랑과 신부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개의 잔이 부딪쳤다. “결혼 축하한다!” “잘 살아!” 웃음과 함께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사라는 안주를 집어 먹다가 맞은편을 바라봤다. 신부가 자연스럽게 신랑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한참 바라보던 사라가 불쑥

  • 불온한 정착   121화

    사라가 친구를 빤히 바라봤다. “뭐가 달라.” “다르지. 회장님이 아니라 네가.”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강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회장님, 얘 원래 남자친구한테 이러는 애 아니에요.” “야.” “어떤데.” 강수의 낮은 목소리에 관심이 묻어났다. “차강수. 듣지 마.” “난 듣고 싶은데.” 사라는 갈비찜을 입에 넣으며 손을 저었다. “마음대로 해.” “일단 얘가 남자친구 손잡고 계속 붙어 다니는 거 처음 봤고요.” “내가 언제 계속 붙어 다녔다고.” “아까부터 잡고 있었잖아.” “오빠가 먼저 잡은 거야.” 강수가 곧장 끼어들었다. “너도 잡던데.” “어?” “손가락 끼웠잖아.” “그걸 또 기억해?” “기억하지.” “그리고 얘 술 취해도 남자한테 잘 안 기대요. 혼자 잘 돌아다니고.” 강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날은 나한테 업어달라고 했는데.” 사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까지 말해?” 친구 하나가 웃으며 테이블을 툭 쳤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민사라가 남자한테 업어달라고 했다고?” 사라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날은 업히고 싶었어.” “왜 하필 회장님한테?” “남자친구니까.” 강수는 말없이 사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얘, 누가 맨날 데리러 오는 것도 싫어했어요. 전에 만났던 애가 자꾸 데리러 오니까 귀찮다고 했잖아.” 강수의 시선이 사라에게 내려왔다. “나는?” “뭐가.” “내가 데리러 가는 건.” 사라는 잠깐 생각했다. “오빠는 내가 오라고도 하잖아.” 친구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다르다니까.” 친구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보기엔 회장님이 특별해요.” 강수가 사라를 봤다. “그래?” “왜 나한테 물어.” “특별하냐고.” 사라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특별하니까 만나겠지.” 강수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그게 끝이야?” “응.” “더 없어?” 사라가 피식 웃었다. “따라 하지 마.” 사라는 갈비 한 점

  • 불온한 정착   120화

    사라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왜 대답을 못 해.” 강수는 앞을 바라본 채 맞잡은 손만 조금 고쳐 잡았다. “했어.” “뭘?” “상상.” 이번에는 사라가 조용해졌다. 놀리려고 던진 말인데 너무 쉽게 인정해버렸다. “진짜?” “어.” “나 웨딩드레스 입은 거?” “그것도.” “또?” “내 옆에 서 있는 거.”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강수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거운 의미를 얹어 사라를 압박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잠깐 떠올랐고, 떠올랐으니 그렇다고 말한 얼굴이었다. 사라는 슬쩍 앞을 봤다. 마침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모르겠는데.” “뭐가.” “결혼식. 생각해본 적 없어.” “알아.” “근데 왜 물어.” “궁금해서.” 사라가 픽 웃었다. “나 따라 하네.” “너도 나한테 물었잖아.” “나는 결혼해본 사람한테 물어본 거고.” “나는 안 해본 사람한테 물어보는 거고.” “그게 같아?” “비슷하지.” 사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빼지 않았다. 잠시 후 예식이 끝나고 단체사진 촬영이 시작됐다. 친구들과 떠들며 사진을 찍던 사라는 신부가 부케를 들고 나오자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야, 민사라!” “왜!” “너 어디 가!” “화장실.” “거짓말하지 마! 너 받아!” 사라의 얼굴이 바로 구겨졌다. “내가 왜!” “남자친구 있잖아!”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라는 멀찍이 서 있는 강수를 돌아봤다. 강수는 팔짱을 낀 채 재미있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오빠!” “왜.” “말려.” “내가 왜.” “남자친구잖아!” “그래서 받으라고 하고 싶은데.” “차강수!” 결국 친구들에게 붙잡힌 사라가 부케를 받을 자리에 세워졌다. “야, 나 진짜 못 받아.” “손만 뻗어!” “떨어뜨리면?” “그럼 주워!” 뒤돌아선 신부가 힘껏 꽃을 던졌다. 하얀 부케가 허공을 그렸다. 사라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었

  • 불온한 정착   119화

    며칠 뒤 토요일. 호텔 로비는 결혼식 하객들로 북적였다. 사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앞장섰다. 몸선을 따라 떨어지는 밝은 원피스에 긴 머리를 느슨하게 내려놓은 모습이 평소보다 제법 얌전했다. 그 뒤를 걷던 강수가 말했다. “천천히 가.” “늦었어.” “십오 분 남았어.” “신부대기실도 가야 돼.” 사라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강수는 긴 다리로 금세 따라붙었다.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작은 손을 잡은 건 그때였다. 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손을 완전히 감싼 큰 손. “왜?” “사람 많아.” “그래서?” “놓치겠다.” 사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애야?” “너 잘 없어지잖아.” “안 없어져.” “그냥 잡고 가.” 강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대로 걸었다. 사라도 굳이 빼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손을 편하게 고쳐 잡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강수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 잡힌 게 아니라, 사라가 자신도 잡고 있었다. “사라야!”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가 바로 손을 들었다. “야!” 지난번 청첩장 모임에서 만났던 친구들이었다. 사라는 강수의 손을 잡은 그대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친구들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떨어졌다. 맞잡은 손. 그리고 강수. “뭐야.” “왜.” “너희 이제 손도 잡고 다녀?” 사라가 제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 “남자친구랑 손잡는 게 이상해?” “네가 해서 이상하지.” “맞아. 민사라잖아.” 사라가 눈을 흘겼다. “시끄러워.” 강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친구 하나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회장님은 되게 좋아하시는데?” “티 나?” 강수가 묻자 친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요.” 사라가 강수를 올려다봤다. “뭐가 그렇게 좋아.” “너랑 손잡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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