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라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멈췄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사라야.”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붙잡으려는 목소리도, 강수를 만나게 해달라는 말도 아니었다. 사라가 돌아봤다. 서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강수도 걸음을 멈췄다. “왜.” 사라가 물었다. 서희는 잠시 강수를 바라봤다가 다시 사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사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혼하고 5년 동안 외국에 있었어.” 사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강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서희에게 머물렀다. 둘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여행했어.” 서희가 작게 웃었다. “여기저기.”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희가 이혼 뒤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찾아보지도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이었다. “왜?” 사라가 물었다. 서희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너처럼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사라의 표정이 굳었다. “뭘.” “네가 했던 말들.” 서희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
강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사라에게 걸어갔다. 서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시선이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왜 안 올라와.” “가려고 했지.” 강수의 눈이 사라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 화가 난 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다 아기띠 안에서 잠든 진이에게 내려갔다. “줘.”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진이?” “어.” “잘 자는데.” “알아.” 강수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사라가 아기띠를 풀어주자 커다란 손이 진이의 목과 뒤통수를 먼저 받쳤다.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빼내 제 품에 붙인 뒤 자세를 고쳐 안았다. 진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수의 손이 등을 천천히 쓸었다. “쉬.” 작은 몸이 다시 힘을 풀었다. 사라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잘 안고 있었거든?” “알아.” “근데 왜 뺏어.” “무겁잖아.” “안 무거워.” 강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비어버린 아기띠를 사라 몸에서 풀어냈다. 끈이 어깨에서 내려오자 사라가 그제야 목을 한
정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여지는 없었다. 서희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형수라고 불렀던 남자였다. 강수와 결혼해 있던 동안에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그런 정민이 지금은 정확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정민아.” “말씀하십시오.” 존댓말이었다. 서희의 입술이 굳었다. “오빠한테 내가 왔다고 말은 했어?” “안 했습니다.” “왜?” “말씀드릴 이유가 없어서요.” “내가 만나러 왔잖아.” “회장님은 만나겠다고 하신 적 없으시니까요.”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너무하네.” 정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사라 역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아기띠 안의 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어젯밤에 하셨잖습니까.” 서희의 눈이 정민에게 향했다. 정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강수에게 들은 건지 다른 경로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직접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 “형님은 없으십니다.” “왜 자꾸 오빠가 할 말 없다는 얘기만 해?”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CH건설 1층 로비는 오전의 분주함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안내데스크 직원들이 교대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정문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김서희였다. 서희는 로비 한가운데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5년 전에도 몇 번 와본 곳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부분도 있었지만 익숙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서희가 안내데스크 앞으로 다가갔다. “차강수 회장님 뵈러 왔는데요.” 직원이 정중하게 물었다. “약속 있으실까요?” “아니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서희요.” 직원이 방문자 확인을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 비서실로 인터폰이 연결됐다. “1층 안내데스크입니다. 회장님 방문객이 오셨는데요.” ― 성함이요? “김서희 님입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정민이었다. ― 약속 있습니까? “없으십니다.” 짧은 침묵 뒤 대답이 돌아왔다. ― 돌려보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직원이 서희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현재 별도 방문객을 받지 않고 계셔서요.” 서희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직접 통화할 수 있을까요?
강수는 한동안 손을 내밀고 있는 사라를 바라봤다. “꼭 해야 돼?” “응.” “왜.” “나 바꿔달라잖아.” 강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라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줘.” 몇 초 뒤에야 휴대전화가 넘어왔다. 사라는 전화기를 귀에 댔다. “나야.”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먼저 자신을 찾았으면서 서희는 막상 목소리를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바꿔달랬어?” ― 오늘 네가 한 말 때문에. “뭐.” ― 셋의 문제는 셋이서 하자고 했던 거. “응.” ― 그래서. 사라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강수는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화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갈 생각은 없는지 한 손은 사라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말해.” ― 나 강수 오빠 아직 좋아해. 사라가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건 아까 들었어.” ―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 내가 네 남편 아직 사랑한다는데. 사라는 잠깐 생각했다. “기분은 더럽지.” 강수의 시선이 돌아왔다. “내 남편 좋아한다는데
강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사라가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희랑 연락해?” 강수의 시선이 바로 사라에게 향했다. “아니.” 대답은 즉시 나왔다. “근데 전화가 와?” “지금 처음.”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질투라기보다는 의아함이 먼저였다. 백화점에서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서희와 강수가 따로 연락하는 사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강수가 휴대전화로 시선을 돌렸다. “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 그냥. 강수의 표정이 더 무심해졌다. “끊는다.” ― 잠깐만. “왜.” ― 목소리 듣고 싶었어. 사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조용한 침실이라 상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강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김서희.”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