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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차엘

Author: r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3 21:30:31

결국 도착했다.

그 어마무시한 마을로 내 두 발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들에게 내가 눈엣가시가 되었다는 것은 라임 장군에게 이미 들었으니. 친절이나 환영 따위는 바라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는 커녕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다.

네로도 저 모양이니 힘을 쓸 수도 없을테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단검이 전부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쪽문을 밀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왕궁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위압감이 나를 압도했다. 왕궁은 온 건물들이 전부 하얗고, 화려하고, 반짝였다.

그러나 문 밖에 나선 마을 ‘루’는 전부 어두칙칙하고 검했다. 게다가 저 멀리 간간히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들도 검은색 망토를 휘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라임 장군이 말해준대로 확실히 이 곳에선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다녀야 하는 듯 했다.

나도 안전하게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움직이고 싶었는데…. 그런걸 누군가에게 부탁하다간 로하 공주나 라임 장군 귀에 들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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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6. 로하와 메아리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시간을 끌 필요도, 이렇게 복잡하게 행동할 이유도 없었다. 내 목숨이나 내 세상 따윈 휘파람 한 번이면 충분히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내가 바라는 건 언제나 변함없이 오롯이 너의 행복이지.” 거짓말. 거짓말이다. 정말 나의 행복을 바랬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거면서. 말도 안되는 모순이다.게다가 내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확실히 이번엔 무언가 매듭을 짓겠다는 소리겠지. “인간을 배우더니 삐딱한 거까지 배워버렸네. 뭐…. 그래도 괜찮아. 난 널 사랑하니까. 네가 너의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흘려보내.” “그건 힘들어. 슬라브와도 아사베와도 약속한게 있거든. 그리고 아르나와도 말이야.“ 아르나라는 말에 몸이 움찔거렸다. “아르나가… 당신에게 어떠한 걸 부탁했지?” 내 질문에 그녀는 짧은 침묵을 유지하다 아르나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비밀이야. 아르나가 간곡하게 부탁했거든. 너한테만은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오랜만에 들은 딸의 목소리. 무언가 묵직한 것이 얼굴 전체를 뭉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한테 부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심지어 나한텐 무조건 비밀이라니. “많이 답답하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면 넌 알 수 없으니까.” ”왜 내게 그런 건 허락해주지 않은거야? 왜… 왜 전부 너만 가능한거야?” “정말 인간다운 질문을 하는구나. 정말 인간이 된 것 같아!” 그녀의 웃음소리가 두 귀를 강타했다. 소름끼치도록 유쾌하고 섬뜩한 웃음소리다. 그녀의 웃음은 마치 나를 심해 저 아래로 짓누르는 것 같았다. 더 무서운 것은, 그녀의 말에 완벽히 동의를 한다는 점이다.나 또한 인간들에게 질리게 들은 말이었다. 수천년 동안. 인간의 가장 언어 중 하나였다. 인간은 죽는 순간 마저도 원망을 품곤 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 많은 것을 가졌어도 다른 것을 갈구하는 탐욕. 자신의 딸 아르나마저 비센 알프의 사랑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5. 해와 달

    도르비가 돌팔매질을 맞아 죽어갈 때, 머리에 피를 흘리며 몸이 고꾸라지는 그 순간 마주쳤던 도르비의 눈과 그 때 느꼈던 감정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소위 말하는 ‘죄책감’ 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것을 잃은 ‘상실감’ 인가? 애당초 사랑이란 감정은 어느 것에 해당되는가? 나는 어째서 도르비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감정을 배웠는가? 이 쳇바퀴같은 질문들은 천 여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그 수수께끼는 아르나와 자손들을 통해 정확히 정의하고 싶었으나 점점 더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아, 나… 나는 지금 슬프구나.” 메아리는 낮게 읊조렸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새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라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 동공이 커다랗게 변했다. 지금껏 느꼈던 슬픔과는 또 다른 슬픔이었다. 그리곤 그렇게 말한 이유를 생각했다.이건 또 어떠한 슬픔이지? 다르다, 도르비가 죽던 순간 느꼈던 감정들과는.고뇌에 찬 순간, 무언가가 그에게 느껴졌다.또 하나의 작고 소중한 제느가 자신의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아사베의 완전하고 완벽한 죽음’ 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사베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을 명한 적 없다. 물론, 다시 돌아오란 것도 명한 적 없었다.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신이 허락한 일이다. 나를 만들어낸, 차원을 창조하는 신이. 그 존재는 예전과 달리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사베를 환생시키지 않았고, 다시 이 곳에 흘러오게 했고, 심지어 이젠 마음대로 아사베를 죽였다. 아아- 어쩌면 ‘제느’ 의 마지막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존재‘ 가 어느 순간 부터 자신의 세상에 개입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을 때, 그 때 부터 메아리는 머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사랑스러운 도르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죽음이 떠올랐다. 그 때와 같은 감정을 느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4. 각자의 다짐

    “정말 이 곳 사람이 다 되었네요. 어울리지도 않는 대장질까지.” 라임 장군은 완벽히 고양이가 된 네로를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똥을 서너개는 씹고 있는 표정이었다. 뭐, 이해한다. 내 행동으로 인해 앞으로 시작될 제느와 반제느의 전쟁이 그녀의 입장에선 영 달갑지 않을 것이다. 나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거나 다름없었다. 만일 이들에게 내가 없었다면 반제느는 영원히 ‘음지’에서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고, 반제느 단체이자 제느 왕궁의 고위급 장군인 그녀가 머리를 싸매며 전쟁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본질적인 것을 잊고 있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 그 ‘안전하게‘ 를 언제까지 할 생각이었는지.“당신도 이제 결정해야 할텐데요. 눈가리고 아웅다웅하는 시간은 이제 끝나가니까요.” “그래야겠죠. 누구 덕분에. 당신이 오기 전엔 나름 평온한 시간들이였는데.” 그녀는 네로를 내려놓고 팔과 다리에 보호구를 차고 자신의 허리춤에 차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반제는 자리가 아닌 제느의 자리에서 싸우겠다는. 이유는 분명 비센 때문이겠지. 이 곳에 있던 약 세 달 동안 라임과 꽤 많은 시간들을 보내며 많은 대화룰 나눴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한다거나 관계를 진전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 속엔 이미 다른 남자가 있고, 그 뿌리는 꽤나 단단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끝이 헤어짐인 이상 욕심내지 말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아서 간혹 못난 욕심이 모습을 비쭉 내밀곤 한다. “거기로 돌아가도 괜찮겠어요?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 지금처럼…. 나는 그녀가 반제느에 남아 나와 같은 곳에 서서 함께 하길 바라고 있었는지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차, 하고 자각했을 땐 이미 말을 내뱉은 후 였다. 라임은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 ”로하 공주는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3. 천박한 여왕식

    “예쁘게 자네.” 로하는 곤히 잠들어 있는 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조금 푸석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길 때 마다 복잡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카락 향기와 함께 새어나왔다. 그가 자신의 안에 들어올 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그 목소리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격렬한 몸부림이 계속될수록 목소리를 더욱 또렷해졌고, 나중엔 절규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메아리’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계획에 없던, 원하지 않던 여왕식을 남자와 몸을 섞을 때 자신의 의사따윈 상관없이 치뤄진 것이다. 이 얼마나 천박한 여왕식인가? 어떤 예언도,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가장 헐거워진 상태에서 치뤄지는 여왕식이라니.제느 여왕이 탄생한 이후로 자신과 같은 여왕식을 치룬 인물은 없을 것이다.스스로가 더럽고 비참해 목구멍 속이 울렁거렸지만, 지금은 자기연민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머니가 죽었다. 끝난 것이다. 이젠 정말 완벽하게. 아사베의 죽음으로 본인에게 넘어온 설명할 수 없는 기운들이 혈관 하나하나를 빛내며 꿀렁였다. 넘쳐흐르는 이 불쾌감. 걷잡을 수 없는 수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 지금 당장이라도 눈 앞에 있는 첸을 죽이고, 왕긍 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이고, 메아리가 만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불태우고 싶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알 수 없는 이 욕망. “역시 난 제느와 걸맞지 않아.” 그녀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은 ‘제느‘ 가 아닌, 오로지 ‘로하’ 로써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이었다. * 반제느 단체를 지휘할만한 권력을 쥐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능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충성심을 사기엔 충분했고, 차엘과 처음 만나게 된 건 행운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생각보다 그녀가 가진 지위는 대단했다. 처음 차엘과 구상한 계획을 장로들에게 말했을 땐 대부분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2. 로하와 첸

    첸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라임 장군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 왕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라임 장군의 감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첸은 로하가 원한다면, 혹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라임의 목을 베어 심장을 도려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실 예전부터 그러고 싶었다. 라임이 로하에게 건방진 태도를 보일 때 마다, 반제느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도. 단지 로하 때문에 참아 왔던 것이다. 로하가 라임을 아끼니까.“아, 맞아. 당신은 이렇게 차가운 남자였지. 가끔 잊는다니까.”이런 상황에서 장난스레 싱긋 미소 짓는 로하를 보니 첸은 속이 뒤집혔다. “지금 왕궁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첸. 칼 내려놔.” “싫습니다.” 이 상황에서까지 왜 ‘루’를 습격하지 않는 것인지. 반제느 단체따윈 제느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기껏해봐야 정치싸움 정도. 그 마저도 그들이 외치는 ‘진정한 혁명’ 따위가 아니라, 가문들끼리의 지저분한 기싸움일 뿐. 로하가, 혹은 그 선대 여왕들이 반제느를 전멸시키지 않고 왕궁 내에서 주제넘게 활보하는 것을 봐주는 이유는 숲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렸을 적 로하가 그렇게 말했었다. 자연 속에는 해충도 있고, 짐승도 있는 법이라고. 눈에 거슬린다고 그것들을 전부 없애면 그건 더 이상 숲도, 자연도 아니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이 생긴다. 정말 그것이 다일까? 지금 없앤다고 해도 해충과 짐승은 언제든 생겨난다. 언제 없애든 그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지금만큼 확실한 타이밍도 없었다. 이현오에게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힘을 가지고 반제느에게 붙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이 토벌할 최적의 타이밍인 셈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타이밍일지도 모르고. “이현오가 라임장군과 붙어 지낼 때 부터 어느 정도 감안했던 부분이야. 시기가 빠르긴 했지만, 문제될 건 없어.”

  • 붉은 달 속에 울리는   31. 명백한 근거

    얼마나 안쓰러운 존재들인지. 죽어서도 편해지지 못하고, 살아서도 놓을 수 없는. 이름 없는 신이 왜 기웃거리는지 이해가 갔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고… 확실한 건 차엘은 그저 ‘복수’ 가 하고 싶을 뿐, 왕좌엔 욕심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내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어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 이야긴 여기서 끝이야. 그래서 원하는 답은 찾았나?” ”예. 충분합니다. 돌려 말할 것 없이 저의 제안을 바로 말씀드리죠. 저는 제느 왕권이 사라지면 라임 장군이 왕좌에 앉았으면 합니다.” 차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저 작은 손바닥에 숨어진 입가엔 분명 미소가 지어져 있으리라. 차엘에게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다. 그녀에게 명예라는 건 허물 좋은 껍데기를 뒤집고 귀찮은 일을 도맡아하는 것 뿐, 자신의 조카가 왕좌에 앉는다면 복수는 물론이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 놓기에 충분했다.신의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의 쪽에 서다니! 처음 계획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 물거품 속에 반짝이는 진주가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차엘 본인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조상이 굽어살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지?“ 차엘의 질문에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는 이유를 정확하게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차마 그녀에게 ‘라임 장군이 예쁘게 웃길 바래서요.’ 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현오의 침묵에 차엘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죠?” 라임 장군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세모낳게 치켜세운 채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와, 우리 오랜만에 보네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내 모습에 약이 바짝 올랐는지, 일부러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오랜만? 그러시겠죠. 당신이 왕궁에 돌아오질 않았으니. 대체 뭐하자는거야? 지금 왕궁이 얼마나 뒤집어 졌는지 알아요? 한 달 넘게 이 곳에 짱박혀 있으면 어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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