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른 낭군

다시 고른 낭군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10-29
Oleh:  진유의 서랍Baru saja diperbarui
Bahas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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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후로 생을 마친 서리, 스무 살 연택례로 돌아오다. 전생의 남편이었던 태자 이헌 대신, 북방에서 돌아온 뒤 석 달째 깨어나지 못하는 영안공 이겸을 낭군으로 선택한다. 전생과 다른 선택으로 시작한 두 번째 삶. 하지만 혼인 후 이겸이 눈을 뜨면서, 잠들어 있던 서리의 운명과 왕실·서가를 둘러싼 오래된 음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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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제 1화 [두 번째 연택례] - 1 -

문서에는 이미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후사를 두지 못한 죄. 왕실의 신망을 잃은 죄.

그리고 서리가 끝내 알지 못한 한 여인의 죽음과 얽힌 의혹이, 다른 죄목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서리는 그 줄 위에 눈길을 잠깐 두었다가, 옮겼다. 지금 와서 캐물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붓을 들었다.

서 리.

이름 두 글자를 적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붓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까지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이것으로 끝이오."

왕의 명을 받든 내관이 문서를 말아 거두었다. 그 손짓 하나로, 서리는 더는 왕후가 아니었다.

왕후의 인장도, 궁에 머물 자격도 함께 거두어졌다.

내관은 이미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서리에게 남은 것은 폐후라는 두 글자와, 오늘 안으로 궁을 나서라는 명뿐이었다.

정전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 바람이 뺨을 스쳤다. 서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십 년이었다. 이 계단을 처음 올랐을 때는 붉은 비단신이었는데, 지금은 무명옷 자락이 발끝에 닿고 있었다.

왕후의 자리도, 이헌의 마음도, 되찾고 싶었던 서가의 이름도, 결국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계단 아래에는 가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왕후가 타던 것이 아니라, 장식을 모두 걷어낸 소박한 것이었다.

폐출된 여인을 조용히 실어 보내기에 딱 맞는 격이었다. 가마 곁에 선 자들 중 누구도 서리 쪽을 보지 않았다.

서리는 가마에 오르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리 없었다.

—

행선지는 도성 밖, 서가의 옛 별저였다. 부친과 오라비들이 죽은 뒤 오래 주인을 잃었던 집이었다.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대문이 썩지 않도록, 하인 몇이 최소한으로만 손을 대며 지켜온 곳.

왕실은 체면치레로 시종과 호위 몇을 함께 붙여주었다. 서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서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리를 지켜보기 위해 붙은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성문을 나서고 얼마쯤 지났을 때, 서리는 창의 발을 살짝 들쳤다.

해가 기운 자리가 어긋나 있었다. 별저로 가는 길이라면 진작 갈라졌어야 할 갈림목을, 행렬은 그냥 지나쳐 있었다.

"이 길이 아니다."

앞쪽에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물었을 때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가마를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잦아졌다. 인적이 끊긴 산길이었다.

이윽고 가마가 내려졌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서리는 자신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먼저였다.

그다음에, 손 하나가 어깨를 향해 뻗어 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리는 그 손을 쳐내고 비탈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무명옷 자락이 마른 덤불에 걸려 찢겼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고, 밟는 자리마다 흙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디딘 곳에, 땅이 없었다.

몸이 붕 뜨는 감각.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손끝이 잡을 것을 찾아 허공을 긁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고를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그것이 서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낯선 문양이었다. 용이 아니라 매화.

서리는 잠시 그 무늬를 올려다보았다. 서씨 가문 저택, 어릴 적 자신이 쓰던 침소의 서까래였다.

방 안에는 말린 국화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옅게 섞여 있었다.

몸을 덮은 이불의 결이 뺨에 닿았다. 손끝으로 가만히 이불자락을 쥐어보았다.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기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서리는 그대로 굳었다.

빗과 세숫물을 든 감씨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옷차림도, 이마의 잔주름도 서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오 년 전 장례를 치렀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아기씨?"

감씨가 걸음을 멈추고 서리를 살폈다.

서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손목을 붙잡았다.

따뜻했다.

장례 날 마지막으로 잡았던, 얼음장 같던 손이 아니었다.

"……따뜻해."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씨."

감씨가 당황한 얼굴로 다른 손을 서리의 이마에 얹었다.

서리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 온기가 손을 놓는 순간 사라져버릴까 봐.

"안색이 왜 이러세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한참 만에야 서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몽을 꿨어."

그 악몽이 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감씨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물이라도 새로 떠 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서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서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감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빗을 들었다.

익숙한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를 오갔다. 그 감촉조차 낯설도록 생생했다.

이것이 죽기 직전 꾸는 마지막 꿈인지, 혼이 떠돌며 지난 삶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인지, 서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아 있는 감씨와, 어릴 적 이 방과, 지나치게 선명한 온기와 감촉만이 분명했다.

"오늘이……"

"연택례 날이잖아요. 잊으셨어요?"

감씨가 웃으며 손을 놀렸다.

"궁에서 사람이 벌써 다녀갔어요. 오시까지 별궁으로 오라고요."

서리는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겪지 않은 스무 살의 얼굴 안에, 십 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꿈이든, 정말 돌아온 삶이든,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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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asan-ulasan

ㅇㄹㄴㅍㄴㄷ
ㅇㄹㄴㅍㄴㄷ
꼭 계속 써 주세요! 앞으로도 이 작품을 쭉 응원할게요!
2026-10-29 17: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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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화 [두 번째 연택례] - 2 -
감씨가 옷장에서 꺼낸 겉옷에는 왕실의 용이 아니라 서가의 매화가 수놓여 있었다."서가에 남은 분은 이제 아기씨뿐이에요."옷깃을 여며주며 감씨가 나직이 말했다."오늘만큼은 누구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마세요."연택례.공신가의 여성 후계자가 혼인 뒤에도 자기 가문의 이름과 재산, 제사를 이어갈 권리를 보장받으며 낭군을 직접 고르는 오래된 의식.다만 낭군의 신분에 따라 혼례의 방식도, 부부가 지낼 곳도 달라졌다.전생의 서리는 이헌을 고르는 것이 사랑과 가문을 함께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태자의 곁에 서면 서가의 이름을 다시 높이 세우고, 부친과 오라비들의 죽음도 언젠가는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 믿음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지금의 서리는 알고 있었다.—별궁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사람이 나와 있었다.연택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 서로 헤아려보는 노인들이 있었고,서가의 아가씨가 어느 이름을 부를지 이미 정해놓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다른 이름이 나올 거라 여기는 사람은, 그 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별궁의 문을 넘어서자 그 소리가 뚝 끊겼다. 안쪽에는 향 냄새와,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별궁의 정전에 들어서는 순간, 서리는 곧장 이헌의 시선과 마주쳤다.높은 단 위, 왕과 왕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아래 한 단, 태자석에는 이헌이 앉아 있었다.느긋한 자세였다. 마치 오늘 이 자리가 이미 정해진 결과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는 듯이.예관이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늘 서가의 후계자는 가문의 이름과 권리를 잇기 위해, 스스로 낭군을 정할 것입니다.연택이 선포되고 폐하께서 이를 허하시면, 그 뜻은 되돌리지 못합니다."서리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등을 곧게 폈다. 시선을 들어 늘어선 명패들을 하나씩 훑었다.태자 이헌의 이름이 가장 앞에 걸려 있었다.그 이름을 명패에 올릴 수 있는 가문은 도성에 몇 되지 않았다.그의 눈이 서리를 향했고, 그 안에는 의심이라고는 없었다. 오직 기다림뿐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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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화 [두 번째 연택례] - 3 -
정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이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슬픔도 서운함도 아니었다.놀람,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불쾌함이었다.예관이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영안공께서는 아직 혼백이 돌아오지 않으신 상태로, 앞날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십니다. 다시 한번 숙고하심이—""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하는 것입니다."전생에 수없이 듣고 흘려보냈던 대신들의 화법이, 이제는 서리의 무기가 되어 혀끝에 올랐다."나라를 위해 피 흘린 이를 병들었다 하여 외면한다면, 누가 다시 고려를 위해 칼을 들겠습니까. 제가 서가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지키겠습니다."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태자의 외가와 가까운 대신 몇이 굳은 얼굴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한 관료는 무릎 위에 포갠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왕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시선이 서리와 이겸의 명패를 지나 이헌에게 머물렀다가, 옆으로— 왕후에게로 옮겨갔다.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리를 향한 눈빛에서, 조금 전까지 있던 온기가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영안공이 끝내 눈을 뜨지 못해도, 그 뜻을 거두지 않겠느냐.""거두지 않겠습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서가의 후계자가 가문의 이름을 걸었다. 그 선택을 받아들이겠다. 연택을 허한다."첫 번째 인연을 끊는 데는, 십 년과 한 장의 폐출 문서가 필요했다.이번에는, 한 이름을 고르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서리가 정전을 나선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열린 문 너머로 매화 문양이 수놓인 옷자락이 회랑 끝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짧은 정적이 흘렀다.왕후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영안궁도 결국 왕실의 궁이다."—서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나와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얼떨떨했다.감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서리를 부축하면서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늙은 집사와 몇 안 되는 하인들도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연택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소문이 저택까지 앞질러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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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눈을 감은 사람] - 1 -
문서를 확인한 뒤로도 한동안은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왕실이 관여하는 혼사인 만큼, 며칠로 끝날 채비가 아니라는 것쯤은 서리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이르게 날짜가 잡혔다는 통보가 왔고, 저택 마당에 하나둘 들어서는 채비를 보며 서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병상의 낭군을 맞는 혼례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대했다.혼례는 서가의 정당에서 치러졌다.이겸은 당연히 그 자리에 없었다.대신 그의 검과 예복이 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검집에 새겨진 문양이 아침 햇살에 옅게 빛났다.왕실에서 보낸 사자가 왕의 승인문과 예물을 전했고, 서리는 조상의 위패 앞에서 부모와 오라비들에게 혼인을 고했다."아버지, 오라버니."서리는 낮게 중얼거렸다."제가 고른 사람이에요. 부디 지켜봐 주세요."절을 올리는 동안 마당을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서리의 등을 스쳤다.동정 어린 눈빛도, 궁금해하는 눈빛도 있었을 것이다.서리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세지 않았다.자신이 고른 결과였다. 감당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의식이 끝난 뒤, 서리는 영안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랐다.영안궁은 크고 조용했다.폐궁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인이 병상에 누운 지 석 달째라는 사실이 공기 속에 그대로 스며 있었다.회랑을 오가는 시비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웃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관리자로 보이는 늙은 시종이 서리를 맞았다."영안공부인."그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이곳이 바로, 영안공을 모시는 영안궁입니다."인사는 격식에 맞았지만, 그 뒤에 서 있는 시비와 하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새 안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얼굴들이었다.서리는 그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누구는 오래 이곳에 있었던 듯 익숙한 몸짓이었고, 누구는 최근에 배치된 듯 아직 서툴렀다.왕실에서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겸을 오래 모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섞여 있을 것이었다.전생의 서리는 이런 것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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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화 [눈을 감은 사람] - 2 -
인기척이 가까워질 때 숨소리가 아주 잠깐 달라지는 것도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며칠 밤을 설친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서리는 그 생각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이겸이 깨어 있기를 바라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복잡했다.작은 문제 하나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영안궁의 곳간 장부에 며칠 전부터 이상한 수량이 적혀 있었다. 서리는 담당 시종을 불러 조용히 확인했고, 단순한 착오였음이 밝혀졌다.별일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영안궁 사람들 사이에서 서리를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 안주인이 그저 자리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들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혼례로부터 열흘쯤 지난 밤이었다.그날따라 침전을 지키던 시비들의 교대가 어긋나 있었다.서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등불 하나가 평소보다 일찍 꺼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사소한 일이었지만, 사소해서 더 마음에 걸렸다.서리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침전에 남아 있었다.탕약 그릇을 정리하는 척하며, 방 안의 낌새를 살폈다.문밖에서 인기척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낯선 사내였다.서리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곧바로 탁자 곁에 세워둔 청동 촛대를 손에 쥐었다. 팔 길이만 한 것이었다. 검을 쥐듯 한쪽 끝을 잡아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어릴 적 배운 자세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손목, 목, 무릎— 급소를 가늠하며 상대의 다음 움직임을 살폈다."누구냐."서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사내는 대답 없이 다가왔다. 목적이 이겸인지 서리인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서리는 뒷걸음질 치며 침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소리를 지르는 것보단, 시간을 버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그때였다.침상 위에서 미동도 없던 이겸의 손이, 사내의 발목을 붙잡았다.사내가 놀라 몸을 틀기도 전에, 이겸은 이미 몸을 일으켜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동작은 빨랐지만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몸을 일으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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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화 [계획에 없던 사람] - 1 -
이겸은 잠깐 말을 골랐다."방금 사람들이 그리 부르는 걸 들은 것도 같소. 다른 건…… 아직 흐릿하오."그럴듯한 핑계였다. 실제로 백우와 시비들이 소란 속에서 그 호칭을 몇 번이나 입에 올렸으니까. 그러나 서리의 눈에 남은 의문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채였다."괜찮습니다." 서리가 짧게 답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보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방금 그건, 도저히 석 달을 누워 계셨던 분의 움직임 같지 않았습니다."날카로운 물음이었다. 이겸은 잠깐 침묵했다."급하면, 몸이 먼저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이겸이 답했다.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서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그 눈에 남은 의문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는 걸 이겸은 알 수 있었다.시비들이 붙잡힌 사내를 결박하는 사이, 이겸이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였다. "저자를…… 묶어서……"말이 채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백우가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듯 어깨를 짚으며 말을 받았다."주군께서는 쉬셔야 합니다. 나머지는 소인이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다른 시종들을 향해 낮고 빠르게 명했다. "오늘 밤 이 방을 지켰던 자들을 전부 불러들여라. 교대가 왜 어긋났는지 낱낱이 알아내.""예."백우가 사내를 끌어 넘기며 이겸과 짧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나눌 수 없는 종류의 눈빛이었다.—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침전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리도 시종들과 함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 뒤였다. 홀로 남은 이겸은 다시 침상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감을 이유가 없었다. 더는.본래대로였다면, 오늘 밤도 그저 눈을 감은 채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조금씩 조각을 맞춰가야 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문서가 있었다. 아직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그런데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이겸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 사실을 곱씹었다. 굳이 이유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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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화 [계획에 없던 사람] - 2 -
이겸이 서리를 처음 본 것은 오 년 전, 북방에서였다.당시 이겸은 스물둘, 서리는 열다섯이었다. 서 장군을 따라 국경에 머물던 시기였다. 이겸의 기억 속 서리는 화려한 무예를 뽐내는 소녀가 아니었다. 부상병들 사이를 오가며 상태를 살피고,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필요한 것을 빠르게 알아듣던, 침착한 아이였다. 위험한 소식이 전해질 때조차 물러서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켰다.그 이상의 기억은 없었다. 길게 대화를 나눈 적도, 특별히 마음에 담아둔 적도 없었다. 그저 '서 장군의 딸'이라는 짧은 인상과, 또래답지 않은 침착함이 남았을 뿐이었다.지금 돌이켜보면— 오늘 밤, 촛대를 쥐고 물러서지 않던 서리의 모습에는 그때의 소녀가 겹쳐 있었다.서 장군은 젊은 시절부터 삼십 년 가까이 북방을 오갔고, 삼 년 전 마지막으로 나선 바람목 전투에서는 북계병마사로 군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지원이 늦어진 대가를 가장 먼저 치렀다. 서 장군도, 두 아들도 모두 그 전투에서 죽었다. 남은 것은 서리 하나뿐이었다.그리고 그 서가의 마지막 사람이, 스스로 걸어 들어와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연택례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겸은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다.태자와 왕후를 피하려는 정치적 선택인가. 서가의 죽음을 조사할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인가. 혹은— 이겸이 실제로 깨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그 위에서 계산한 선택인가.어느 쪽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지난 열흘, 서리가 영안궁에서 보인 행동들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다.혼인 문서를 한 줄 한 줄 확인했다는 보고. 영안궁 사람들을 함부로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살폈다는 것. 탕약과 처방 기록을 매일 대조했다는 것. 곳간의 사소한 착오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바로잡았다는 것. 그리고— 병상의 자신에게 불필요한 속내를 털어놓지도, 동정하지도, 영웅으로 떠받들지도 않았다는 것.이겸은 그 보고들을 들으며 한 가지는 확신할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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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화 [깨어난 뒤] - 1 -
혼례가 끝난 지 일주일 남짓 지난 밤, 태자궁.이헌은 정전에서의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자신의 명패 앞을 지나, 서리의 시선이 맨 끝자리로 향하던 짧은 순간.그럴 이유가 없었다.서리가 언젠가 제 정비가 되리라는 것을 이헌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의심할 이유조차 없었다.그런데 서리는 제 앞을 지나쳤다.그리고 맨 끝자리의 이겸을 골랐다. 눈을 뜨지 못하고 누워 있는 사람을.'곧 후회하겠지.'이헌은 그렇게 정리하며 붓을 다시 들었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짧은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같은 줄을 세 번째 읽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헌은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 들었다.몸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소의 얕은 잠과는 달랐다.그 끝에서, 짧은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보던 어떤 여인의 눈빛. 원망도 애원도 아닌, 다 타버린 재 같은 지친 눈이었다.이헌은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제멋대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무슨 꿈이지.'며칠 잠을 설친 탓이라 여기고, 더 붙잡지 않았다. 다만 이유 모를 불안이 가슴 한구석에 옅게 남았다.이헌은 당장이라도 이 선택을 되돌리고 싶었다.그러나 왕이 이미 윤허한 공식 연택이었다. 태자가 나서서 뒤집으려 든다면, 왕실이 공신가에 허락한 권리를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모양이 될 뿐이었다.—그로부터 얼마간 지난 아침, 이헌은 문안 인사차 왕후의 처소에 들러 있었다."영안궁에서 급보가 왔습니다."내관이 고했다."영안공께서 혼백을 되찾으셨다 합니다. 간밤에 침전에 침입자가 들었는데, 직접 제압하셨다고……"찻잔을 든 왕후의 손이 멈췄다.석 달을 누워 있던 사람이었다.의관들도 올해를 넘기기 어렵다 했고, 궁 안에서 그 이름은 이미 지난 이야기처럼 오갔다.이헌의 얼굴에는 놀람보다 먼저 다른 것이 스쳤다.죽어가는 남자를 골랐다고 여겼다. 곧 후회하리라 여겼다.그런데 그 남자가 스스로 침입자를 제압하며 눈을 떴다."직접 가서—"이헌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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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화 [깨어난 뒤] - 2 -
의관이 다녀간 뒤, 이겸이 서리를 청했다.침전 앞에서 백우가 문을 열어주었다. 어제까지 이 문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이겸은 침상에 반쯤 기대앉아 있었다. 어젯밤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몸을 고쳐 앉을 때 숨이 한 박자 끊겼다."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연택례와 혼례가 모두 끝났더군요."이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나를 골랐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나라를 위해 싸운 분을 병들었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서리가 답했다."서가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지키겠다고 말씀드렸지요."정전에서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그게 전부입니까."서리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전부입니다."이겸은 그 대답을 오래 바라보았다. 더 캐묻지 않았다."어젯밤 일도 묻고 싶습니다."서리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석 달을 누워 계셨던 분치고, 움직임이 지나치게 정확했습니다.""급하면, 몸이 먼저 움직이는 모양입니다."처음과 같은 답이었다. 서리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이겸이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혼인을 무를 생각입니까. 내가 깨어났으니."서리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조건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영안공부인이라는 자리는 이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였다. 서가의 것을 지키려면 딛고 설 곳이 필요했다."거둘 뜻은 없습니다.""이유를 물어도.""영안공부인이 된 이상,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서리가 무릎 위의 옷감을 가볍게 눌렀다가 놓았다."서가의 것을 탐낼 생각은 없습니다."이겸이 말했다."그 권리는 온전히 부인의 것으로 남을 겁니다."서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이겸을 보았다."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이겸의 눈매가 좁아졌다."믿지 않으시는군요.""믿을 이유가 아직 없으니까요."이겸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돌렸다."어젯밤 그자는 침상보다 먼저 부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제가 표적이었다는 뜻이군요.""단정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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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화 [매듭] - 1 -
백우가 명부를 든 채 이겸의 처소로 들어선 건, 해가 채 다 뜨기도 전이었다."확인했습니다, 주군." 백우가 명부를 내려놓았다. "그날 밤 교대 명단에 '차복'이라는 이름이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 영안궁 어디에도 그런 자는 없습니다.""어떻게 끼어들었나.""본래 교대였던 자는 위에서 하루 쉬라는 전갈을 받고 빠졌습니다. 그 빈자리에 차복이라는 이름이 들어갔고요."이겸이 명부를 내려다봤다."누구 명으로 쉬게 했지.""그건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차복이라는 자는 영안궁 어디에도 없습니다."이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설픈 수는 아니었다. 안에서 손을 쓴 자가, 적어도 명부의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포로는.""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어젯밤 눈을 뜬 뒤로는 얌전합니다.""이 일 이후로 별채에 드나드는 자와, 포로에게 오가는 물과 끼니는 전부 따로 명부에 적어두어라." 이겸이 덧붙였다."예.""심문을 준비하라. 그 전에 명부를 고친 자부터 부르고."명부를 맡은 자는 곧 들어왔다. 겁먹은 기색은 있었으나 감추는 것은 없어 보였다."차복이라는 자를 자네가 올렸나.""예.""어디서 왔나.""제가 뽑은 자가 아닙니다."그가 명부를 내려다봤다."원래 명부는 사흘 전에 짰습니다. 그때는 다른 자가 올라가 있었고요. 그날 낮에 교대가 바뀌었다는 전갈이 와서, 빠진 자리에 차복이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누가 전했나.""사람을 거쳐 온 것이라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전갈이 한둘이 아니라서요."이겸은 그 말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교대가 바뀌는 일은 흔했고, 바뀐 대로 적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물러가라."명부를 맡은 자가 나가자, 그날 밤 차복에게 자리를 넘긴 근무자가 들어왔다."차복이라는 이름을 전에 들어본 적이 있나.""없습니다.""얼굴은.""처음 보는 자였습니다.""교대할 때 무엇을 확인했지.""명부와 호위패를 봤습니다." 그가 답했다. "제 다음 자리에 차복이라 적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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