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폐후로 생을 마친 서리, 스무 살 연택례로 돌아오다. 전생의 남편이었던 태자 이헌 대신, 북방에서 돌아온 뒤 석 달째 깨어나지 못하는 영안공 이겸을 낭군으로 선택한다. 전생과 다른 선택으로 시작한 두 번째 삶. 하지만 혼인 후 이겸이 눈을 뜨면서, 잠들어 있던 서리의 운명과 왕실·서가를 둘러싼 오래된 음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Lihat lebih banyak문서에는 이미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후사를 두지 못한 죄. 왕실의 신망을 잃은 죄.
그리고 서리가 끝내 알지 못한 한 여인의 죽음과 얽힌 의혹이, 다른 죄목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서리는 그 줄 위에 눈길을 잠깐 두었다가, 옮겼다. 지금 와서 캐물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붓을 들었다.
서 리.
이름 두 글자를 적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붓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까지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이것으로 끝이오."
왕의 명을 받든 내관이 문서를 말아 거두었다. 그 손짓 하나로, 서리는 더는 왕후가 아니었다.
왕후의 인장도, 궁에 머물 자격도 함께 거두어졌다.
내관은 이미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서리에게 남은 것은 폐후라는 두 글자와, 오늘 안으로 궁을 나서라는 명뿐이었다.
정전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 바람이 뺨을 스쳤다. 서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십 년이었다. 이 계단을 처음 올랐을 때는 붉은 비단신이었는데, 지금은 무명옷 자락이 발끝에 닿고 있었다.
왕후의 자리도, 이헌의 마음도, 되찾고 싶었던 서가의 이름도, 결국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계단 아래에는 가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왕후가 타던 것이 아니라, 장식을 모두 걷어낸 소박한 것이었다.
폐출된 여인을 조용히 실어 보내기에 딱 맞는 격이었다. 가마 곁에 선 자들 중 누구도 서리 쪽을 보지 않았다.
서리는 가마에 오르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리 없었다.
—
행선지는 도성 밖, 서가의 옛 별저였다. 부친과 오라비들이 죽은 뒤 오래 주인을 잃었던 집이었다.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대문이 썩지 않도록, 하인 몇이 최소한으로만 손을 대며 지켜온 곳.
왕실은 체면치레로 시종과 호위 몇을 함께 붙여주었다. 서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서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리를 지켜보기 위해 붙은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성문을 나서고 얼마쯤 지났을 때, 서리는 창의 발을 살짝 들쳤다.
해가 기운 자리가 어긋나 있었다. 별저로 가는 길이라면 진작 갈라졌어야 할 갈림목을, 행렬은 그냥 지나쳐 있었다.
"이 길이 아니다."
앞쪽에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물었을 때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가마를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잦아졌다. 인적이 끊긴 산길이었다.
이윽고 가마가 내려졌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서리는 자신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먼저였다.
그다음에, 손 하나가 어깨를 향해 뻗어 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리는 그 손을 쳐내고 비탈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무명옷 자락이 마른 덤불에 걸려 찢겼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고, 밟는 자리마다 흙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디딘 곳에, 땅이 없었다.
몸이 붕 뜨는 감각.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손끝이 잡을 것을 찾아 허공을 긁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고를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그것이 서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낯선 문양이었다. 용이 아니라 매화.
서리는 잠시 그 무늬를 올려다보았다. 서씨 가문 저택, 어릴 적 자신이 쓰던 침소의 서까래였다.
방 안에는 말린 국화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옅게 섞여 있었다.
몸을 덮은 이불의 결이 뺨에 닿았다. 손끝으로 가만히 이불자락을 쥐어보았다.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기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서리는 그대로 굳었다.
빗과 세숫물을 든 감씨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옷차림도, 이마의 잔주름도 서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오 년 전 장례를 치렀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아기씨?"
감씨가 걸음을 멈추고 서리를 살폈다.
서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손목을 붙잡았다.
따뜻했다.
장례 날 마지막으로 잡았던, 얼음장 같던 손이 아니었다.
"……따뜻해."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씨."
감씨가 당황한 얼굴로 다른 손을 서리의 이마에 얹었다.
서리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 온기가 손을 놓는 순간 사라져버릴까 봐.
"안색이 왜 이러세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한참 만에야 서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몽을 꿨어."
그 악몽이 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감씨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물이라도 새로 떠 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서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서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감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빗을 들었다.
익숙한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를 오갔다. 그 감촉조차 낯설도록 생생했다.
이것이 죽기 직전 꾸는 마지막 꿈인지, 혼이 떠돌며 지난 삶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인지, 서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아 있는 감씨와, 어릴 적 이 방과, 지나치게 선명한 온기와 감촉만이 분명했다.
"오늘이……"
"연택례 날이잖아요. 잊으셨어요?"
감씨가 웃으며 손을 놀렸다.
"궁에서 사람이 벌써 다녀갔어요. 오시까지 별궁으로 오라고요."
서리는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겪지 않은 스무 살의 얼굴 안에, 십 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꿈이든, 정말 돌아온 삶이든,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서리가 장부의 겉장을 들어 보였다."아버지는 본장부를 서가에 두고, 셈만 옮긴 사본을 따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밖에 들고 다니며 볼 것이지요. 날짜와 물건과 수량, 늦은 날수까지는 여기 다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넘겼는지, 도중에 누구 손을 거쳤는지, 길이 바뀐 까닭이 무엇인지는 없습니다.""본장부에는 있고요.""담당하던 사람이 비고를 달았을 겁니다. 받아 간 사람 이름도요."서리가 첫 줄의 인계 칸을 짚었다. 인계처 자리에는 도성 창고라고만 적혀 있었다."이 물건이 서가에 닿기 전에 누구 창고에 있었는지, 그걸 봐야 합니다."이겸이 대장을 덮었다."부인.""예.""여기까지 맞으면, 이건 이제 서가와 동가가 저자에서 다투는 일이 아닙니다."이겸이 말했다."지금 창고에서 섞은 곡식은 북계로 가는 군량입니다. 삼 년 전 군수 이상은 무령후의 군에도 닿아 있었고, 출진 전부터 시작돼 한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둘 다 군량과 군수품입니다. 사실로 드러나면 궁에 올라가야 합니다.""압니다.""그래서 더 틀리면 안 됩니다.""예."서리가 답했다."불을 누가 냈는지, 일부러 늦춘 것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때 저 물건들이 동가 손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 잡아도, 나머지는 따라옵니다."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본장부는 어디 있습니까.""서가 서고에 있을 겁니다. 어느 궤에 두었는지는 백종길 어른이 아실 테고요.""그럼 그것부터 챙기시지요."이겸이 대장을 서리 쪽에 두고 먼저 일어섰다.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오늘은 그만 주무시고요.""조금만 더 보고요."처음 들어왔을 때 들은 대답과 같았다. 이겸은 더 말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닫히기 직전, 그 손이 제 볼께를 한 번 스치는 것이 보였다.서리는 삼 년 전 사본을 덮지 않았다. 등잔 심지가 한 번 더 타들어 갈 때까지 날짜를 옮겨 적었다.—이튿날 아침, 준연이 대문 쪽에서 서리를 불렀다."그 아이들이 왔습니다."대문께에 셋이 서 있었다. 이번에도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
삼 년 전 장부를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 서재 문이 열렸다.이겸이었다. 겉옷을 벗어 팔에 건 채 문턱에 서서 서안 위를 보았다."아직 안 주무셨습니까.""조금만 더 보려고요."이겸이 들어와 서안 맞은편에 앉았다.펼쳐진 장부 귀퉁이에 적힌 해를 보고, 그 옆에 밀어 둔 사 년 전 것을 보았다.무엇을 보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요즘은 왜 안 해주십니까."서리가 장부에서 눈을 들었다."어떤 걸 말입니까?""부르시는 거요."이겸이 말했다."창고 일 아뢰실 때도 영안공, 낮에 백우한테 저를 찾으실 때도 영안공이라 하셨다더군요. 다시 영안공이 되었습니다."서리가 잠시 이겸을 보았다.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마당에 볕이 남아 있던 날, 한 번 불렀던 말.그때 이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걸 여태 기억하고, 셈까지 하고 있었다.서리의 입가가 조금 풀렸다."알겠습니다, 서방님."이겸이 굳었다.앞에 두고 들을 말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이었다.청해 놓고 막상 들으니 어디에 둘지 모르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서리는 그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그러고는 몸을 서안 너머로 조금 기울여, 이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이겸이 숨을 멈췄다.서리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장부를 끌어당기고, 넘기던 장을 찾아 손가락을 짚었다."팔월 스무날."서리가 장부를 읽기 시작했다."약재 서른 짐. 열나흘에 넘겨받기로 한 것이 엿새 늦어 이날 인계됐습니다."이겸은 아직 볼에 닿았던 자리를 그대로 두고 앉아 있었다."……예."한 박자 늦은 대답이었다."듣고 계십니까.""듣고 있습니다."이겸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서안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서리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입가만 조금 늦게 제자리로 돌아왔다.서리가 장부를 이겸 쪽으로 돌려놓았다."여기부터 보시면 됩니다."창고에 불이 나고 서가 수레 여섯 대가 동가로 간 것은 그 뒤, 시월의 일이었다.서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보다 앞서
이헌은 한참 말이 없었다.지난번에 말하지 않은 것은 목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물건이 무엇이 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것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주인은 이미 죽었습니다."목연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임가의 딸, 아연입니다."목연도 아는 이름이었다. 반년 전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집안.얼마 전 그 식구들이 산에서 주검으로 나왔다는 말도 들었다.목연이 알고 있던 것은 오래된 귀한 손수건이었다.죽은 사람의 물건이었다."이번에는 제가 여쭙겠습니다."이헌이 말했다."그것을 어디서 얻으셨습니까."지난번에는 우연히 손에 들어왔다고만 했다.목연은 잠시 이헌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사실대로 말했다."저희 집 먼 방계의 사람이 떨어뜨린 것을 주웠습니다. 아버지 방 앞 회랑에서요."이헌의 얼굴이 굳었다."목가 방계.""예.""그 사람이 지금 그것을 찾고 있고요.""오늘도 그 자리에서 바닥을 보고 있었습니다."이헌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아연의 손수건이 어째서 목가 사람의 손에 있었는가.목연은 목연대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죽은 사람의 물건을 어째서 집안사람이 품고 다녔는가.아버지는 그날 무엇을 태우라 한 것인가.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이 일은 당분간 둘만 아는 것으로 하지요."이헌이 말했다."그리하겠습니다.""목 소저께서 곤란해지실 수도 있습니다.""압니다."목연이 답했다."그래도 모르고 있는 편이 더 곤란할 것 같습니다."이헌이 목연을 다시 보았다. 목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돌아가는 가마 안에서 목연은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앉아 있었다.집에 닿으면 먼저 그 사람이 언제부터 아버지를 찾아왔는지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아버지께 여쭙는 것은 그다음이었다.—영안궁 서재에서는 서리가 등잔을 두 개 켜 두고 있었다. 밤이 꽤 깊은 뒤였다.서안 위에 종이가 네 겹으로 펼쳐져 있었다.맨 위는 창고에서 거둔 쪽지들이었다. 판 밑에서 나온 것들이라
불은 병사 하나가 마른 솔가지를 묶어 만들었다.부싯돌을 두어 번 치자 가지에 불이 옮겨 붙었다. 군관이 그 불을 받아 들고 먼저 입구로 들어섰다."조심해라. 발밑부터 봐."이겸이 그 뒤를 따랐다.입구에서 몇 걸음은 사람 둘이 나란히 설 만했다.거기서 길이 한 번 왼쪽으로 꺾였고, 꺾인 자리 너머로 공간이 넓어졌다.불빛이 천장까지 닿았다. 서서 팔을 뻗어도 손끝이 닿지 않을 높이였다.바닥은 마른 흙과 모래였다. 벽 한쪽에 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희게 말라붙어 있었다."생각보다 넓습니다."군관이 불을 이리저리 비추며 안쪽까지 걸어 들어갔다."열 명은 비를 피하겠습니다. 밖에서는 안이 전혀 안 보이고요.""숨어들기에는 좋겠군.""예. 여기서 불만 안 피우면, 길 위에서는 누가 있는지 모릅니다."병사들이 벽을 두드려 보고, 바닥을 살피고, 안쪽 끝까지 불을 들이밀었다.막다른 곳이었다. 다른 데로 이어지는 구멍은 없었다."사람 든 흔적은 없습니다."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넓어진 공간의 안쪽 벽 가까이에 서 있었다. 벽 아래에 허리께 높이로 바위가 턱처럼 튀어나와 있었다.이겸의 걸음이 거기서 멎었다.거친 바위였다. 누군가 앉았던 자리라면 닳아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모서리가 날카로웠고, 위에는 흙먼지가 고르게 앉아 있었다.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누군가 거기 자주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서서 그 사람을 내려다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누구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였는지도.이겸은 바위 턱을 보고 서 있었다."영안공."군관이 불러서야 고개를 돌렸다."다 보았습니다. 나가시겠습니까.""나가지."동굴 밖으로 나오자 해가 눈을 찔렀다. 이겸은 입구를 한 번 돌아보고 군관에게 일렀다."이 자리를 지도에 적어라. 길에서 몇 걸음, 어느 바위 뒤인지까지.""예.""순찰 길에 넣고, 돌 때마다 안까지 들여다봐라. 불 피운 자국이든 발자국이든, 사람이 든 흔적이 보이면 그날로 올려라."
Ulasan-ula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