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뒤로 그들이 또 무슨 말을 늘어놓는지, 은별은 더 이상 들을 생각도 없었다. 준서가 확고하게 리연을 선택한 순간, 그동안 자신이 품었던 모든 기대와 바람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강리연의 이름을 들었을 때,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이준서가 돌아서서 자신을 한 번쯤 돌아봐 주길 바란 걸까, 아니면 하서가 엄마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바꿔 주길 원했던 걸까?’은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쓰라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심은별, 넌 정말 한심하구나. 저 사람들이 널 이토록 무시하고 외면하는데도, 대체 뭘 더 바라겠다는 거야?”하지만...7년이 훌쩍 넘는 감정이란, 어찌 하루아침에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비록 은별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습관을 지우려 애쓰고 있었지만, 몸과 마음이 일상의 구석구석에 배어든 7년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법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은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헛된 기대를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그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준서의 무시도, 하서의 냉담도 없는 이런 날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은별은 마치 인형이 미소 짓는 표정을 따라 하는 사람처럼, 다소 굳은 미소를 입가에 살짝 띠웠다. 삶이 이미 충분히 고단하니, 이제는 스스로를 즐겁게 만드는 법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문 여는 소리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준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별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두 사람 눈빛에 담긴 냉기 또한 선명해졌다.은별이 준서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해방감 넘치는 일이었다. 은별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준서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차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은별은 아
“우리 이씨 가문 돈으로 먹고 살면서, 감히 나한테 버릇없이 굴어? 이번에 제대로 혼내 주지 않으면, 내일 당장 엄마한테 기어오를지도 몰라요.”남주는 영리했다. 단순히 자신의 불만만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미선까지 슬쩍 끌어들였다.이 말에 안미선의 부드러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동생이 하는 소리, 다 들었니?”남자는 소파 한구석에 기대앉아 있었다. 거실의 따뜻한 조명과 준서가 내뿜는 냉기 어린 그림자가 묘하게 뒤섞여, 윤곽이 흐릿하게 일그러진 듯했다.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듯했다.그림자 속에서도 유독 선명한 눈동자는, 은별을 혼내 주겠다는 모녀의 말에 미동조차 없었다. 시종일관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었다.“알겠어.” 준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 정지시켜 놓을게.”어차피 집에만 있는 은별은 먹고 마시는 데 부족함이 없으니, 돈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정작 준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년간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은별이 도맡아 왔다는 사실을. 신선한 식자재와 몸에 좋은 음료, 좋은 옷들. 이런 것들 중에 돈이 안 드는 게 어디 있을까?오늘 카드를 정지시킨다면, 내일 당장 두 사람은 낡거나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하서의 알레르기를 유발할지도 모를 음식을 입에 넣게 될 터였다.물론,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하서의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 음식도 있긴 하다. 하지만 과연 하서의 입에 맞을까?단지 그 한 그릇의 죽에도, 은별의 심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그냥 물에 불려서 끓인 하얀 죽이 그렇게 맛있을 리가 있나?이 모든 것을 2층 난간 너머로 듣고 있던 은별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남자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녀의 요구를 받아들인 그 순간, 현기증이 일면서 난간을 꽉 쥐지 않았다면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몰랐다.이혼을 결심한 마당이었지만, 7년간 쏟은 정성은 결코 거짓이
하서가 죽을 먹겠다고 보채던 날, 은별은 팔뚝에 뜨거운 죽을 쏟고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서둘러 그릇을 내밀었다.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정성껏 먹여준 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이 생겼다. 그 탓에 화상 자국은 피부에 깊게 패어 영원한 흉터로 남았다. 아무리 값비싼 흉터 제거 크림을 발라 봤자 색만 옅어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지금, 하서는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은별의 가슴은 예전처럼 아프지도, 죄책감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서를 달래줄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SNS에는 매일같이 ‘새엄마’가 등장했다. 10마디 중 8마디는 리연에 관한 이야기였다. 반면 ‘친엄마’는 필요할 때만 간신히 생각나는 존재일 뿐이었다.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은별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하서를 비켜서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준서는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테니, 드디어 홀로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계획은 완벽해 보였지만, 하서의 고집은 은별의 거절에 불붙은 듯 더 거세졌다.“싫어요! 동화 읽어달라고요! 엄마, 동화 읽어주세요!”하서는 동화책을 쥔 채 침대까지 달려가 은별의 팔을 마구 흔들었다. 날카로운 아이 목소리가 귀를 찌를 듯했다. “싫어요, 싫어요. 동화 꼭 들을 거예요!”“하서야.”은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서를 불렀다. 목소리가 쉬면서 말투까지 무거워진 탓인지, 하서는 잠시 멈칫했다.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쳤다. “엄마 싫어요!”“다시는 엄마라고 안 부를 거예요! 난 리연 이모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어요!”이 말에 은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창백해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문자에는 말투가 담겨 있지 않아서, 하서의 SNS에서 본 ‘새엄마’에 대한 글들은 은별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듣는 말 한마디는 훨씬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근데 엄마는 그림 그릴 줄 모르실 텐데...”하서는 은별이가 디자인 원고를 그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하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문 주얼리 디자이너인 남주가 왜 은별한테 원고를 그려달라고 하는지, 게다가 들킨 뒤에는 엄마와 그림 그리기로 약속한 척까지 하고 말이다.“우리 엄마는 식탁 닦고 밥 하고 동화 읽어주는 것밖에 못 해요. 고모가 정말 도움이 급하면 리연 이모한테 부탁해 보는 게 어때요?”리연의 이름이 나오자 하서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모, 리연 이모 아세요? 이름은 강리연인데, 진짜 대단한 디자이너예요.” “지난번에 아빠랑 놀러 갔을 때 이모가 디자인한 목걸이 봤는데, 진짜 예뻤어요. 저도 커서 꼭 리연 이모처럼 될 거예요. 절대 엄마처럼 되진 않을...”하서는 자랑하느라 신이 난 나머지, 은별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작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천진난만하고 맑은 하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고요한 복도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남주는 은별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눈빛 속의 분노가 거의 넘쳐흐를 듯이 은별을 탓하고 있었다.“그래, 두고 봐. 내가 엄마한테 말할 테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준서에게 인사할 새도 없이 화가 난 채 계단으로 내려갔다. 급하고 무거운 발소리는 가슴속 불 같은 화를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했다.은별은 남주의 협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오든 간에, 돕지 않겠다고 한 그녀의 결정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이씨 가문 식구들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이참에 더 밉보인들 잃을 것도 없었다.자신의 등장에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준서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수년간 반복된 일과에 은별은 이미 무뎌져 있었다.은별은 볼을 툭 내민 하서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서운한 기색은 애써 외면한 채 덤덤하게 말했다. “하서야, 시간이 늦었어.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근데 엄마가 동화 안 읽어줬잖아요
이준택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준서 어릴 적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더니, 은별과 준서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거듭 강조했다. 은별은 끝까지 참을성 있게 들으며, 때때로 다정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주고 조용히 위로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내내 담담하기만 했다.이준택 역시 그 미묘한 거리감을 눈치챘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이쯤 되면 하서도 엄마 찾겠다고 난리 피울 시간이겠지. 이만 가 보거라.”시계를 확인한 은별은 이준택도 쉬어야 할 시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섰다.서재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은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 마치 그림자처럼 복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주와 마주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주의 눈빛에는 은별을 향한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별은 남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계단으로 향했다.부부의 침실은 3층에 있었다. 복도에 들어서고 이준택의 귀에 닿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어지자, 남주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은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거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췄지만, 오만한 말투는 여전했다.“심은별, 내가 한 말 다 까먹은 거야? 디자인 원고는 도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지?”인내심이 바닥난 남주의 모습을 보며 은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은별은 반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며, 물 흐르듯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이미 말했잖아. 시간 없어서 안 된다고. 다른 사람 찾아봐.”“아니, 너 제정신이야? 내가 대체 어디서 사람을 구해 와?” 남주가 화가 치밀어 발을 동동 굴렀다.그런 인맥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설령 사람을 구한다 해도 이 일이 무슨 자랑할 일이겠는가? 게다가 몇 년째 은별의 디자인 원고를 가로채 자신의 작품인 양 내놓아 온 터였다. 갑자기 작가를 바꾸면 디자인 스타일이 달라져 발각될 수도 있었다. 대리 작가를 썼다는 사실
은별과 준서의 결혼 역시 이준택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준택은 진심으로 은별에게 든든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했다. 은별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곁에 선 남자에게로 향했다.단정하게 맞춰 입은 정장 위로 소나무처럼 꼿꼿한 자태였지만, 온몸에 감도는 냉랭한 기운은 마치 얼음 장막을 친 듯해 저절로 시선을 피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은별은 자신의 온기로 그 차가운 벽을 녹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오히려 자신까지 그 얼음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결혼한 지 7년. 처음의 예의 바른 부부에서 이제는 남남처럼 지내는 사이가 될 때까지, 이준택이 꿈꾸던 평안은 날마다 쌓이는 냉담 속에서 이미 닳아 없어져 버렸다.“할아버지, 너무 걱정 마세요. 건강이 제일 중요하잖아요.”은별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이준택의 손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슨 맹세나 약속은 하지는 않았다.이준택은 은별을 응시하더니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준서 쪽으로 손을 저었다.“됐으니까 너는 먼저 나가 봐라. 은별이만 남고. 이 할애비랑 함께할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구나.”준서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서재 문이 닫히자마자 복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왜 혼자 나왔어? 할아버지가 또 저 여자만 따로 남겨두신 거야...”남주였다.뒤이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갑자기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더니 왠지 모르게 말투가 바뀌었다.“난 진짜 할아버지 생각이 이해가 안 가. 왜 남의 집 딸을 보물처럼 감싸시는 거야? 우리가 친손자 친손녀 아니야?”준서의 목소리는 워낙 낮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남주의 불평은 점점 커져만 갔다.“그렇잖아.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억지로 저 여자를 집안에 들이지 않으셨으면, 우리 집에 이런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리도 없었을 텐데...”발소리와 투덜거림이 점점 멀어졌다. 서재 안, 은별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오그라들었다.그 말들은 날카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