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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作者: 사월
아침 안개가 이슬방울로 맺힐 무렵, 은별은 굳어버린 몸을 간신히 움직였다.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준서는 끝내 받지 않았다. 은별의 입가에 비꼬는 듯한 미소가 스쳤다.

만약 준서가 자신이 전화를 건 이유가 이혼을 위해서라는 걸 안다면, 지금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은별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자, 왕순영이 앞치마를 꼭 쥐고 부엌에서 뛰어나오며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사모님, 이건...”

“순영 아주머니, 저도 이제 일자리를 구해볼까 해요. 아마... 다시는 안 돌아올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은별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작은 상자를 왕순영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안에는 7년 전, 은별이 디자인 대회에 출품하려고 준비했던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은별은 뜻밖에 임신을 하게 되자, 준서가 그 목걸이를 부숴 버렸다.

왕순영이 밤늦도록 잠도 자지 않고 보석을 하나하나 주워 붙여서 다시 은별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은별의 꿈은 그 순간 멈춰 버렸다.

지난 세월 동안, 왕순영은 은별에게 관심을 가져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끝까지 ‘사모님’이라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추억으로 남겨두려고 했지만 이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지난 일들은 그냥 과거에 남겨 두기로 했다.

“아주머니, 몸조심하세요. 다음에 만나면, 그냥 은별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 말을 듣자 왕순영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음은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끊어졌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애가 탄 왕순영은 고개를 들고 은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뒷목에 있는 흉터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건 3년 전 섣달 그믐날, 서하가 끓는 냄비를 엎었을 때 은별이 대신 막아내며 생긴 상처였다

결국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왕순영은 천천히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은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30분 후, 은별은 한 작은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순간,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밀려들었다.

깔끔한 인테리어와 자신이 좋아하는 배치와 색상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공기 중에 감돌았다.

창가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몬드리안 구성 해석’이라는 책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은별이 대학 시절 오랫동안 돈을 모아 겨우 마련한 꿈의 공간이었다. 모든 배치와 인테리어는 은별이 직접 정성스럽게 디자인한 곳이었다.

그런데 준서와 결혼한 후로는 디자인 스케치를 하러 오는 것 외에는 거의 이곳을 찾지 않게 되었다.

은별은 짐을 내려놓고 이젤 곁으로 다가가서 작품을 쓰다듬었다. 19살, 꿈을 품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자신은 왜 그 꿈을 포기해 버렸던 걸까?

찬장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어서 이남주만의 특별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시즌 초안, 열 시까지 보내!]

전화를 받자마자 은별이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남주. 준서의 여동생이었다.

보석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정작 실력은 없었다. 그래서 매번 은별에게 디자인 도안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예의도 바르게, 간곡히 부탁하는 태도였다. 준서의 동생이라는 점을 감안해 은별은 늘 마지못해 동의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주의 부탁은 명령조로 바뀌었다. 수량도 늘어났고, 요구 사항도 점점 까다로워졌다.

고객 요구에서부터 공모전 출품작까지. 게다가 준서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고, 순위권 안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었다.

은별은 집안일을 챙기면서도 남주가 시간 가리지 않고 요구하는 작품들을 감당해야 했다. 바쁠 때는 밥 먹고 잘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정말 고통스러웠다.

이번 교통사고도, 원래는 남주의 디자인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서둘러 가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전화 너머에서는 여전히 불만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정말, 매번 내가 꼭 재촉해야 돼? 먼저 좀 알아서 도안을 가져와도 되잖아.]

“나 교통사고 났어!”

더 이상 남주의 불평을 듣고 있지 않겠다는 듯, 은별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3초도 채 지나지 않아 남주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나도 들었어. 너 그 일로 오빠랑 리연 언니 데이트 망쳐 놨다며. 심은별, 너 왜 이렇게 철면피야? 게다가 교통사고라고? 너 어차피 안 죽었잖아?]

[말해두는데, 나는 오빠랑 달라. 너 그런 연기는 안 통하니까 당장 디자인 도안 보내. 제대로 입상하면 오빠한테 네 얘기 좀 해줄 수도 있어. 안 그러면...]

미리 예상은 했지만, 남주가 자신에게 이렇게 독한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차라리 리연 언니한테 그려 달라 그래. 나는 더 이상 못 해주겠으니까!”

은별은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남주에게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

은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음속에는 분노와 함께 무언가에서 해방된 듯한 시원함도 느껴졌다.

그동안 은별은 준서를 위해, 이 가족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런데 그에 합당한 존중과 보답은 고사하고 오히려 상처만 받았다.

그동안 준서를 사랑하기에 헌신을 해온 것이라며 자신을 세뇌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실망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바라보던 은별은 그것을 단번에 집어 들었다.

준서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가져가면 되는 일이었다.

LX그룹 빌딩의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위에 설치된 지문 인식기를 바라보며, 은별은 문득 한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 2년 차, 준서가 할아버지가 특별히 배려해 준 방문 권한을 일반 방문객 수준으로 낮춰 버렸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이 사모님에게는 이런 것 따위 필요 없어.”

그 이후로 은별은 이 회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회사 내 다른 곳의 지문 인식 권한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래서 오늘도 아무런 제약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심은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에서 남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별은 남주를 무시한 채 들어가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남주는 곧 비웃으며 거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은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뭘 모르는 척하는 거야? 내 공모전 출품작 디자인 도안 말이야...”

남주가 말하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안 가져온 거 아니지?”

은별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아니, 안 가져온 게 아니라 아예 안 그렸어.”

“뭐라고?”

“넌 강리연이 올케가 되는 걸 더 원했잖아. 그럼 강리연한테 부탁하지, 나 같은 외부인은 왜 찾는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은별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갔다.

남주는 막 욕을 하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최상층에 와 있다는 사실을.

‘설마 오빠한테 고자질하러 온 건가? 그동안 디자인 도안이 모두 내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켜선 안 돼.’

그런 생각만으로도 남주는 가슴이 불안했고, 서둘러 뒤쫓아갔다.

“심은별! 거기 서!”

“은별 씨, 죄송합니다만 대표님께서 정말 사무실에 안 계십니다...”

임산하가 대표실 문 앞을 가로막으며 은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은별은 산하의 뻔한 거짓말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서류 봉투를 건넸다.

“그럼 임 비서님, 이걸 준서 씨한테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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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로 그들이 또 무슨 말을 늘어놓는지, 은별은 더 이상 들을 생각도 없었다. 준서가 확고하게 리연을 선택한 순간, 그동안 자신이 품었던 모든 기대와 바람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강리연의 이름을 들었을 때,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이준서가 돌아서서 자신을 한 번쯤 돌아봐 주길 바란 걸까, 아니면 하서가 엄마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바꿔 주길 원했던 걸까?’은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쓰라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심은별, 넌 정말 한심하구나. 저 사람들이 널 이토록 무시하고 외면하는데도, 대체 뭘 더 바라겠다는 거야?”하지만...7년이 훌쩍 넘는 감정이란, 어찌 하루아침에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비록 은별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습관을 지우려 애쓰고 있었지만, 몸과 마음이 일상의 구석구석에 배어든 7년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법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은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헛된 기대를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그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준서의 무시도, 하서의 냉담도 없는 이런 날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은별은 마치 인형이 미소 짓는 표정을 따라 하는 사람처럼, 다소 굳은 미소를 입가에 살짝 띠웠다. 삶이 이미 충분히 고단하니, 이제는 스스로를 즐겁게 만드는 법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문 여는 소리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준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별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두 사람 눈빛에 담긴 냉기 또한 선명해졌다.은별이 준서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해방감 넘치는 일이었다. 은별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준서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차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은별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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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엄마는 그림 그릴 줄 모르실 텐데...”하서는 은별이가 디자인 원고를 그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하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문 주얼리 디자이너인 남주가 왜 은별한테 원고를 그려달라고 하는지, 게다가 들킨 뒤에는 엄마와 그림 그리기로 약속한 척까지 하고 말이다.“우리 엄마는 식탁 닦고 밥 하고 동화 읽어주는 것밖에 못 해요. 고모가 정말 도움이 급하면 리연 이모한테 부탁해 보는 게 어때요?”리연의 이름이 나오자 하서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모, 리연 이모 아세요? 이름은 강리연인데, 진짜 대단한 디자이너예요.” “지난번에 아빠랑 놀러 갔을 때 이모가 디자인한 목걸이 봤는데, 진짜 예뻤어요. 저도 커서 꼭 리연 이모처럼 될 거예요. 절대 엄마처럼 되진 않을...”하서는 자랑하느라 신이 난 나머지, 은별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작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천진난만하고 맑은 하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고요한 복도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남주는 은별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눈빛 속의 분노가 거의 넘쳐흐를 듯이 은별을 탓하고 있었다.“그래, 두고 봐. 내가 엄마한테 말할 테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준서에게 인사할 새도 없이 화가 난 채 계단으로 내려갔다. 급하고 무거운 발소리는 가슴속 불 같은 화를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했다.은별은 남주의 협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오든 간에, 돕지 않겠다고 한 그녀의 결정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이씨 가문 식구들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이참에 더 밉보인들 잃을 것도 없었다.자신의 등장에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준서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수년간 반복된 일과에 은별은 이미 무뎌져 있었다.은별은 볼을 툭 내민 하서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서운한 기색은 애써 외면한 채 덤덤하게 말했다. “하서야, 시간이 늦었어.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근데 엄마가 동화 안 읽어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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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택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준서 어릴 적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더니, 은별과 준서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거듭 강조했다. 은별은 끝까지 참을성 있게 들으며, 때때로 다정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주고 조용히 위로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내내 담담하기만 했다.이준택 역시 그 미묘한 거리감을 눈치챘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이쯤 되면 하서도 엄마 찾겠다고 난리 피울 시간이겠지. 이만 가 보거라.”시계를 확인한 은별은 이준택도 쉬어야 할 시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섰다.서재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은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 마치 그림자처럼 복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주와 마주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주의 눈빛에는 은별을 향한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별은 남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계단으로 향했다.부부의 침실은 3층에 있었다. 복도에 들어서고 이준택의 귀에 닿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어지자, 남주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은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거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췄지만, 오만한 말투는 여전했다.“심은별, 내가 한 말 다 까먹은 거야? 디자인 원고는 도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지?”인내심이 바닥난 남주의 모습을 보며 은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은별은 반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며, 물 흐르듯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이미 말했잖아. 시간 없어서 안 된다고. 다른 사람 찾아봐.”“아니, 너 제정신이야? 내가 대체 어디서 사람을 구해 와?” 남주가 화가 치밀어 발을 동동 굴렀다.그런 인맥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설령 사람을 구한다 해도 이 일이 무슨 자랑할 일이겠는가? 게다가 몇 년째 은별의 디자인 원고를 가로채 자신의 작품인 양 내놓아 온 터였다. 갑자기 작가를 바꾸면 디자인 스타일이 달라져 발각될 수도 있었다. 대리 작가를 썼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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