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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eur: 어우야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4-04 11:11:06

양성훈, 그는 ‘이루어지리’ 비뇨기과 원장인 박형민의 의과대학 동기동창이었다. 본과 때부터 가깝게 지내기 시작해서 전문의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한 사이인지라,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다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형민이 비뇨기과를 선택한 데에 반해, 성훈은 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기 위해 피부과를 선택했다. 거기서 두 사람의 인연이 갈라지는가 싶었지만, 성훈 아버지의 ‘눈부셔’ 피부과 건물 맞은편에서 형민이 비뇨기과를 개업하게 되면서 지겹게도 붙어있게 된 것이었다.

올 때마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성훈은 틈만 나면 비뇨기과를 드나들었다. 형민을 만난다는 핑계로 성아에게 얼굴 도장을 찍으러 온다는 것은 형민도, 성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아에게 치근거리거나 집적거려서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라서 못 오게 할 명분이 없었다. 그가 성아에게 하는 작업이래야 고작 점심 함께 하자던지, 영구제모나 필링 따위를 무료로 해 줄 테니 자기네 병원에 한 번 놀러오라는 게 다였다. 그때마다 성아는 웃는 얼굴이지만 단호한 어조로 거부 의사를 밝혀왔고.

한 번은 점을 빼주겠다 한 적이 있었다. 딱히 빼야 할 점이 없다고 생각해왔던 성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성훈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빗장뼈 아래 3cm 정도에 위치한 작은 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 본인도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성훈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형민이 에라이 하며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평소 성훈의 시선이 어디 즈음에 주로 머물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아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가슴을 가렸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었다.

****

아무 것도 없는 하얀 공간 안에 붉은 융단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요염한 자태로 누워있는 나체의 여인.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하얗고 얇은 천 하나 뿐이다. 여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곳에 대 여섯 개의 조명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 하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 한 명이 옷가지를 팔에 걸치고는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효민씨, 상체를 살짝 비틀어 볼래요? 그렇죠, 그 자세에서 스톱.”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남자가 잠시 내렸던 카메라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셔터음. 플래시가 팡팡 터지며 고혹적인 표정의 여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겼다. 남자는 카메라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메이크업 좀 고치고 갈게요.”

남자의 말에 옷가지를 들고 있던 여자가 효민에게 달려가 몸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친 남자가 건네준 음료를 받아 마시며 여자가 화장을 고치는 동안, 용규는 노트북 앞으로 가서 방금 찍은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페이지를 찬찬히 넘겨보는 용규의 미간에 굵게 주름이 잡혀있었다.

“왜 그래,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어느 새 다가온 효민이 용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자는 효민을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남자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는 남자, 멋있긴 한데 좀 웃어주고 그럼 안 돼? 당신 분위기가 살벌하니까 다들 주눅들어버린다고.”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가 기대감에 가득한 눈으로 생긋 웃었지만 용규는 그 손을 내려버렸다.

“사진 좀 봐요. 예쁘긴 한데, 싸구려 달력에 실려 있는 여자들 사진이랑 다른 게 뭐냐고. 당신 배우 맞아? 왜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인 겁니까.”

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싸구려 달력 운운하며 자신을 모욕하는 눈앞의 남자를 당장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네깟 놈이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아, 내가? 내 앞으로 오는 영화 시나리오가 몇 개고 드라마 시놉이 몇 개인 줄 알아? 들어오는 광고는 몇 개인 줄 아냐고!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여자를 보며 용규는 웃었다.

“누드라고 꼭 섹시한 표정으로 찍어야 한다는 법 없으니 좀 다양한 표정으로 가자구요. 효민씨가 가진 표정을 다 이끌어 내 보자구요. 자, 다시 가볼까요?”

남자의 웃음에 여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자리로 돌아갔다.

시작하겠다는 용규의 외침에 분주히 오가던 사람들이 줄지어 밖으로 나갔다. 잠시 꺼두었던 조명이 켜지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섹시 일변도이던 효민의 표정이 다양해지고, 셔터를 눌러대는 용규의 표정도 점점 만족에 가까워졌다.

“오케이, 여기까지 합시다. 수고했어요, 효민씨.”

감정에 취해 눈동자 가득 눈물을 담고 있던 여자가 눈을 깜빡여 물기를 흘려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대기하고 있던 코디가 걸쳐주는 옷을 여미며 효민이 용규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마음에 드나봐, 용규씨? 표정이 좋네?”

“한 번 볼래요?”

용규는 사진을 띄워놓은 모니터를 여자 쪽으로 돌려주었다. 여자가 상체를 기울여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주었고, 사진이 바뀔 때마다 효민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 용규씨가 아까 내게 했던 말, 이제야 이해가 돼. 어쩜, 누드사진인데 야하지가 않고 아름다울 수가 있니?”

자기 사진을 보며 아름답다는 망발을 하는 여자를 보며 용규가 피식 웃었다. 모델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어쨌건 쓸 만한 사진은 몇 장 건진 것 같았으니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작업이었다.

찬찬히 돌려보라고 하고는 카메라를 정리하는데, 여자가 다가와 어깨를 쓸어내렸다.

“정리하고 한 잔 할까? 나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글쎄요.”

“그러지 말고 가요, 내가 쏠게.”

여자의 은근한 유혹에 용규는 결국 그러마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가슴근육을 슬며시 쓸어오는 여자의 손길에 몸이 동한 것이 제일 컸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여자의 목덜미를 이빨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여자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남자의 팔을 잡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문이 닫히고 힐을 벗으려 몸을 숙인 여자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밀어붙였다.

“잠깐만, 좀 천천히…….”

“두 시간 내내 날 건드려 댈 때, 이만한 각오도 안 했던 거야? 내가 참을성이 많은 걸 다행으로 여겨. 다른 놈들 같았으면 테이블 위에 깔고 덮쳤을 거라고.”

다급한 손길로 여자의 옷을 벗겨내며 한 용규의 말에 효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스캔들 걱정만 없다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래?”

브리프와 스타킹만 남기고 모두 벗겨버린 남자가 여자를 번쩍 들어 안았다. 여자의 늘씬한 다리가 용규의 허리를 감아왔다. 코앞에 와 닿은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하면서 부드러운, 언젠가 한 번 맡아본 것 같은 향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침실 어디야?”

“제일 안쪽에.”

급해 죽겠는데 왜 하필! 여자가 가리킨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거실 한 복판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 갈 필요 있나? 어디든 푹신하기만 하면 되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혀를 놀려대던 여자는 갑자기 방향이 바뀌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안돼, 소파 비싼 거란 말야.”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조금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효민을 소파 위에 던졌다. 그리고 자기 옷을 벗어던졌다. 궁시렁거리던 여자의 시선이 용규의 벗은 몸에 가 닿자, 여자의 얼굴에 탐욕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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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5

    차시트에 몸을 기대고 차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성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서울을 떠나 맑은 공기 속에서 내려놓았던 긴장이 다시 올라온 느낌이랄까. 민영이 제시하고 모두가 받아들인 '대놓고 양다리'는 성아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편하지가 않았다. 형민을 만날 때면 용규를 생각해 몸을 사리고, 용규와 있을 때는 형민 때문에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두 사람과의 데이트는 즐거웠지만,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성아 씨, 이제 그만 일어나요."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용규의 손짓에 성아는 눈을 떴다. 어느 새 어둑해진 차창 밖으로 눈에 익은 골목이 보였다. 출발할 때 그녀가 알려 준 그녀의 동네 어귀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저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시각을 훨씬 지난 시간이라 성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용규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잠든 모습이 좀 예뻐야 말이죠. 도대체 뭘 믿고 코 고는 소리까지 예쁜 겁니까, 성아 씨는?"누가 선수 아니랄까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멀쩡한 낯빛으로 잘도 뱉어낸다 싶어 성아는 푸스스 웃었다. "어제 오늘 이래저래 고마웠으니까 그런 실없는 소리는 용서해 줄게요. 안녕히 가세요."용규는 팔을 뻗어 발치에 내려놨던 가방을 챙겨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굿바이 키스는 없어요?""오늘 제 입술이 좀 피곤하다네요. 며칠은 쉬게 해주고 싶어서요."부기도 다 빠졌구만.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용규가 마지 못해 성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사진 뽑아서 월요일에 병원으로 갈게요.""네."본인은 아쉬워 죽겠는데, 조금의 미련도 없이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드는 성아의 모습을 보니 약이 올랐다. 차에서 내려 그녀를 잡고 밀어붙여 강제로 키스를 진하게……. 용규는 피식 웃었다. 강제로 뭘 해볼 생각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4

    늦은 아침을 먹고 용규는 성아와 함께 콘도 뒤쪽의 산책로를 걸었다. 당장이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 같이 신난 표정의 용규와는 달리, 묵묵히 뒤를 따르는 성아의 표정은 뚱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앞서가는 용규의 뒤통수를 노려보기도 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어 입안으로 구시렁거리기도 하는 모양이 뭔가 불만스러운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용규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길이 험해 힘들거나 그렇진 않죠?"표정을 정돈하거나 가다듬는 기색 없이 힐끔 쳐다보는 성아 때문에 용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성아 씨, 힘들어요?""네! 힘들어 죽겠네요!"불퉁스런 그녀의 목소리에 용규가 손을 내밀었다."그럼 얘길 하지 그랬어요. 출발할 때 손 잡자는 거 굳이 뿌리치더니. 좀 쉬었다 갈까요?""아뇨. 지금 힘든 건 다리가 아니라서요."성아의 대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몸을 한 차례 훑어본 용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말 뜻을 이해한 것이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유난히 붉은 색을 띤 입술, 그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그가 이로 물어 생긴 작은 상처도 있을 터였다. 키스 외에 아무 것도 못 하게 한 성아에 대한 심술로 아침부터 키스를 좀, 아니 과하게 했었다. 목덜미 쪽으로 손을 대는 것조차 못하게 하길래 입술을 깨물어 살짝 피맛을 봤더니 그 이후로는 키스도 못 하게 했다. 뭐, 그 이상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불만은 남았지만 키스는 원없이 했다는 생각에 그러자 했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물러서는데도 성아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더랬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지금 툴툴대는 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아침의 '과한 키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거였다. 그녀의 행동, 말투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냈다간 또 뭐라 꼬투리를 잡고 투덜댈 것 같아 짐짓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다리가 아니라면... 그럼 어떻게 해줄까요?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됐네요.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3

    한참동안 욕실에서 몸을 식힌 용규는 잠시 부시럭거리더니 어느 새 하나 뿐인 침대에서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이 들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성아는 작게 웃었다. 용규에게 관심 없는 척하려 눈도 돌리지 않고 있었지만 귀를 세워 그의 움직임을 모두 듣고 있던 그녀였다. 그가 잠들었다는 확신이 생기자 마음이 놓이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만 것이었다. 용규에게 말한 대로 성아는 지금 있는 곳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적막함, 방 안에서 새어나오는 스탠드 불빛과 별빛을 제외한다면 완벽하다 할 수 있을 어둠, 나무 냄새가 실린 청량한 바람 끝에 느껴지는 쌀쌀한 기운까지. 지쳐있던 성아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을 주었다. 민영의 권유로 시작한 '대놓고 양다리'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용규의 갑작스러운 스케줄 때문에 형민과는 연달아 세 번의 데이트를 했고, 그 세 번의 데이트를 한 번에 만회할 정도의 여행을 오게 된 것까지. 스코어를 매긴다면 1대 1이라 할 수 있었다. 민영은 마음 놓고 즐기라고 했지만, 성아는 이 상황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형민과 데이트를 할 때에는 용규가 신경 쓰였고, 이렇게 용규와 있다 보니 형민이 생각나서 무턱대고 즐길 수가 없었다. "양다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봐."피식 웃음과 함께 자조 섞인 목소리가 어둠 속에 흩어졌다. 성아는 몸을 일으켰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차가운 산공기에 조금씩 몸이 떨려오는 중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용규가 잠들어 있는 침대와 의자 사이를 몇 번 오갔다. 잠시의 망설임 후, 그녀는 침대로 가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스탠드 불빛에 비친 용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잘생긴 건 여전했다. 한 번 찔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잘못해서 그가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겨우 달래놨는데 들쑤셔서 덤벼들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성아는 쿡쿡 웃으며 용규 옆에 누웠다. 두껍지 않은 이불을 통해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에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2

    욕실로 들어간 성아가 나오길 기다리다 용규는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화장을 지우고 양치를 마친 성아가 욕실에서 나오다 피식 웃었다. 용규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럴 거면서 흑심은 뭐하러 내보였는지. 실랑이할 일은 없겠다 싶어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성아는 창가로 갔다. 산속이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찼다. 잠시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담요와 의자를 끌어와 창가에 자리 잡았다. 이 곳에서 보는 하늘과 서울에서 보는 하늘, 그게 그거고 거기서 거기일 텐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검은 융단같이 부드러운 검은 빛의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가끔 TV에서 그래픽으로 만들어놓은 많은 별들이 나올 때면 코웃음을 쳤더랬다. 아무리 별이 많다 하더라도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이 저렇게 많을 리가 있겠냐며, 어설프게 많이 만드느니 적당하게 만드는 게 현실적이라고 비웃었더랬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인 밤하늘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는 흉내도 못 낼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성아는 그만 매료되어버렸다.어깨에 두른 담요를 가슴 앞에 모아 쥐고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성아는 뒤에서 어깨를 안아오는 팔에 깜짝 놀랐다. 잠들어 있던 용규가 언제 일어났는지 뒤에서 그녀를 안고 목덜미 움푹 파인 곳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아, 일어났어요?""깜빡 잠들었네요. 깨우지 그랬어요.""많이 피곤해 보였어요. 가서 더 자요."용규는 어깨를 안은 팔을 풀어내려 하는 성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꼭 안았다. "성아 씨랑 같이 있는데 잠은 무슨. 다 깼어요."용규는 볼에 닿는 성아의 귓불에 부비적거리며 얼굴을 문질렀다. 보드라운 살결이 주는 감촉이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몇 번 버르적거리던 그녀가 가볍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포기한 듯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는 게 또 마음에 들어 슬며시 웃음지었다."별이 참 많죠?""그러네요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1

    용규의 손이 멈췄다. 이거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는 품에서 성아를 살짝 떼어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 위에 보인 것은 웃음이었다."그렇게 예쁜 사진을 찍는 용규씨가 제일 좋아한다는 그 풍경, 보고 싶다고요."용규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성아는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난 후에야 강원도행을 받아들였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일단 가고 나서 생각하는 거지.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부쩍 짧아진 해가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춘 후에야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팬션 단지에서 조금 더 들어가 고즈넉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펜션이었다.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정원이 제법 넓었고, 불을 밝힌 건물 두 채는 통나무로 지은 2층집이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달라진 공기였다. 맑고 신선할 뿐 아니라 엷게 나무 내음과 풀내음까지 섞여있어 향기롭기까지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을 깊게 들이쉬는 성아를 보며 용규가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나쁘지 않죠? 지금은 어두워서 안 보이는데, 저기 뒤쪽에 산책로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곳이죠. 내일 날 밝으면 같이 가요.""네."이것저것 설명하는 용규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니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 용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가벼운 욕설이 섞이는 걸 보니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그는 성아에게도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강충식입니다. 이 자식 눈이 높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정말 미인이십니다.""아, 안녕하세요, 김성아예요. 제수씨는 아니고요, 여기 굉장히 예쁘네요.""핫핫핫, 제수씨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언제든 놀러오세요. 제수씨 같은 미인이면 언제나 환영입니다."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성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제수씨 아니라 김성아예요.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한데 그 호칭은 다음에 받을게요.""다음에? 아, 아직 아닙니까? 너 이 자식 여태 뭐 한 거야?"조금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0

    그럼 그렇지. 이까짓 거 필요 없어! 확 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바로 옆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는 여자가 둘이었다. 속 좁게 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대범하게 하하 웃으며 받아들어야 했다. 하지만 고맙다는 소리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뭘 이런 걸 다."마지못해 열쇠고리를 받아든 형민을 향해 용규가 씩 웃었다. "뇌물 받으셨으니 청탁도 하나 받으시죠? 10분 일찍 퇴근시켜 주세요."가뜩이나 배알이 꼴린 상황인데 기름을 들이붓는 용규 덕에 형민은 당장 내 병원에서 나가 소리를 지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전에 영화 볼 때, 성아를 놓쳐선 안 되는 거였다. 그날 게임을 클리어 했다면 이 기분 나쁜 꼴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 터였다. 뿐이겠는가. 저 뺀질뺀질한 얼굴이 패배감에 물드는 통쾌한 모습도 볼 수 있었을 게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무엇하겠냐마는, 치솟아 오르는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형민은 성아를 돌아보았다. 여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 속을 뒤집어 탈탈 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김 선생님 업무 마치시면 그리 하시던가요."성아에게 차트 더미를 떠안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심술이 일어 떠안긴 일거리라 좀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무려 10분이나 일찍 그녀를 보낼 뻔하지 않았는가. "일 많이 남았어요?" 형규가 접수대 위로 몸을 기대며 성아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민영에게서 나왔다."어우, 많이 남긴요. 끝났어요, 끝났어. 마무리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데려가요, 용규씨.""그렇다네요, 의사선생님?"용규의 웃는 얼굴이 너무너무 얄미워 한 대 치고 싶었으나, 형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속좁은 짓은 차트더미로도 넘치게 했으니, 이제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뵈어요.""데이트 잘 해요, 김 선생!""다음에 또 뵙겠습니다.""선물 잘 먹고 잘 쓸게요. 고마워요, 용규씨."즐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3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벗어던진 남자가 여자를 향해 몸을 숙였다. 누워있음에도 그 모양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혀를 놀렸다. 효민의 거친 숨소리에 교성이 섞이고, 그녀의 손가락이 용규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본능에 충실해야 할 타이밍이건만, 아무 생각 없어야 할 용규의 머릿속에는 자꾸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섬세하게 반응해오던 육감적인 몸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저 스쳐지나갔던 많은 여자 중에 한 명이라 생각하려 해도, 이렇게 여자를 안을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1

    몽롱한 의식 속으로 톡토톡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성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을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이 맨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은 서늘한 공기가 맨 가슴에 와닿자, 어깨를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가구나 소품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며 찌그러진 맥주 캔들이 눈에 거슬렸다. 낯선 풍경에 지난 밤의 기억을 더듬는데, 옆에서 팔 하나가 성아의 허리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6

    비뇨기과는 상가 건물 3층이었다. 덕분에 용규는 큰 부담 없이 병원 문 앞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이 닫히면서 들리는 경쾌한 종소리에 접수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어 용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용규는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였다.그에게 강렬한 하룻밤의 기억을 남기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아 그저 ‘그녀’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운명이란 게 있다면 정말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를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면 왜

  • 비뇨기과 김 간호사의 '어머!'한 나날들   4

    그에게 살짝 눈을 흘겨주고는 접수대로 돌아가 차트를 정리하는데, 열어 놓은 입구로 20대 초중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성아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더니 거침없이 접수대로 걸어와 그 위에 팔을 올리며 기대왔다.“성함이요?”“박민식이요.”성아가 남자의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하자 진료기록이 떴다. 포경수술 환자구나. 그의 차트를 찾아 형민에게 보내고는 그를 진료실로 들여보냈다.“좀 어떠신가요? 지낼 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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