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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스며든 아픔

뼛속까지 스며든 아픔

By:  달콤한 곰돌이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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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황자 강도현이 유배되던 해, 아버지는 나와 함께 시체 더미에서 그를 업어 데려왔다. 그제야 아버지가 한때 그의 태부(太傅)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추격을 피하고자 강도현과 나는 시골에 숨어서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갔다. 닭과 물고기를 키우며, 해가 뜨면 함께 밭일했다. 그는 허름한 사철의 보살님 앞에서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서라는 내 유일한 부인이다." "권세도 부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셋이 평안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선황이 승하하시고 나라에 주인이 사라지자, 그는 역심을 품어서 검을 들고 경성으로 쳐들어갔다. 떠나기 전 그는 나를 꼭 끌어안고, 일이 성사되면 반드시 나를 경성으로 데려가 함께 천하를 누리겠다고 약속했다. 두 해가 지나자, 우리 아들 지민도 옹알이를 시작했다. 마침내 나를 경성으로 데려갈 마차가 왔다. 하지만 경성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재상의 딸 백유리가 이미 중궁의 주인이 되어 황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가장 낮은 품계인 답응(答應)에 봉해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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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지민마저 내 품에서 빼앗겨 황후의 손에서 자랐다.

강도현은 내게 온갖 호사를 베풀었지만, 아들만큼은 끝내 내게 보여 주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봉의궁(鳳儀宮)에 문안드리러 갔다. 내 친아들이 백유리의 곁에서 "어마마마"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궁에 들어온 지 다섯 해째 되던 해, 나는 백유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후마마, 부디 은혜를 베푸시어 제가 궁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영남(嶺南)으로 돌아가 설을 보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묘 곁에 묻히고 싶었다.

...

백유리는 높은 자리에 앉아 손톱에 끼운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라야, 대체 왜 이러느냐?"

"이 넓은 후궁에는 우리 둘뿐이잖니?"

"폐하께서도 내 뜻대로 너를 외면하시지 않고 매달 한 번씩 네 처소에 드시지 않느냐?"

"대체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총애는 그저 의례적인 일에 불과하며 시골 아낙인 나에게 베푸는 은혜였다.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피비린 맛을 삼키며 머리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저는 천한 팔자라 궁에서 누리는 복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디 마마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백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고집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했다.

"됐다. 네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면 나도 더는 붙잡지 않겠다."

"내일 밤, 내 곁의 최 상궁에게 너를 경성 밖까지 데려다주라 이르겠다."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출궁패를 받아 나는 별전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자 등불을 밝혀 놓고 마지막 한 땀까지 꿰매 마무리했다.

지민에게 주려고 만든 새 신발 한 켤레였다. 전에 밤을 새워 지어 둔 노란 비단 두루마기까지 갖추니 꼭 한 벌이었다.

다음 날, 궁을 나가기 전 나는 몰래 상서방(尙書房) 밖에서 지민을 기다렸다.

지민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키가 이미 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지민..."

나는 지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나는 황급히 옷과 신발을 내밀며 조심스레 웃어 보였다.

"이 옷감은 반년 동안 받은 월봉을 아껴 마련한 것이다. 내가 직접 지었으니 한번 입어 보고 잘 맞는지 보거라."

지민은 옷을 한 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옷은 진흙탕에 떨어져 엉망이 되었다.

"천한 주제에 내 옷 만들어 줄 자격도 없다."

고작 여덟 살인 지민이 차갑게 얼굴을 굳힌 모습은 강도현을 쏙 빼닮아 있었다.

"나는 네..."

"네가 내 친어머니라고 뭐 어때서?”

지민은 목소리를 높였고, 어린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어마마마는 지금 황후마마다!"

"상서방의 모든 벗이 내가 시골 아낙을 친어미로 두었다고 비웃게 만들 셈이야?"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칼에 찔린 듯 아파 온몸이 떨렸다.

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죽기 전에 지민이 내게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라고 불러 주는 걸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질색한 듯 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서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들었다.

"한서라, 또 지민에게 무슨 짓을 하라고 부추긴 것이냐?"

그때 머리 위에 차갑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등줄기가 굳어지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강도현이 밝은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봉황 무늬 예복을 차려입은 백유리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서늘하게 번뜩이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직도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지 않는 것이냐?"

나는 멍하니 차가운 청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강도현은 몇 걸음 다가와 내가 손수 지은 옷을 그대로 발로 짓밟았다.

"한서라, 내가 지민의 출생을 함부로 밝히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느냐?"

"정녕 네가 친어미라는 이유로 지민이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 셈이냐?"

"황후가 지민을 예의도 바르고 사리도 분명하게 가르쳤잖니?”

"그런데 너는 오히려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는구나!"

"한서라, 설마 지민을 이용해 총애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냐? 똑똑히 일러두마. 지민에게는 절대로 태자의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그에게는 아들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도 총애를 탐하는 일이었고, 친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조차 권력을 탐하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지워 버리고 싶은 오점이 되어 버렸다.

백유리가 때맞춰 강도현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폐하,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서라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 방법을 잘못 택했을 뿐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강도현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고, 눈빛이 순식간에 다정해졌다.

다시 나를 바라볼 때는 뼛속까지 시린 냉정함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분수나 지키고 조용히 살 것이지!"

"짐의 명을 전하거라. 오늘부터 한 답응을 별전에 가두고, 내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거라!"

"앞으로는 황후에게 문안드릴 필요도 없다. 눈에 거슬리니!"

나는 궁인들에게 거칠게 끌려 일어났다.

백유리가 내 곁을 지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걱정 마. 네가 궁을 나가는 일은 내가 알아서 마련해 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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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지민마저 내 품에서 빼앗겨 황후의 손에서 자랐다.강도현은 내게 온갖 호사를 베풀었지만, 아들만큼은 끝내 내게 보여 주지 않았다.나는 날마다 봉의궁(鳳儀宮)에 문안드리러 갔다. 내 친아들이 백유리의 곁에서 "어마마마"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궁에 들어온 지 다섯 해째 되던 해, 나는 백유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황후마마, 부디 은혜를 베푸시어 제가 궁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영남(嶺南)으로 돌아가 설을 보내고 싶었다.아버지의 묘 곁에 묻히고 싶었다....백유리는 높은 자리에 앉아 손톱에 끼운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서라야, 대체 왜 이러느냐?""이 넓은 후궁에는 우리 둘뿐이잖니?""폐하께서도 내 뜻대로 너를 외면하시지 않고 매달 한 번씩 네 처소에 드시지 않느냐?""대체 무엇이 그리 불만이냐?"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총애는 그저 의례적인 일에 불과하며 시골 아낙인 나에게 베푸는 은혜였다.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피비린 맛을 삼키며 머리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저는 천한 팔자라 궁에서 누리는 복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디 마마께서 허락해 주십시오."나는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백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고집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했다."됐다. 네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면 나도 더는 붙잡지 않겠다.""내일 밤, 내 곁의 최 상궁에게 너를 경성 밖까지 데려다주라 이르겠다.""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출궁패를 받아 나는 별전으로 돌아왔다.밤이 되자 등불을 밝혀 놓고 마지막 한 땀까지 꿰매 마무리했다.지민에게 주려고 만든 새 신발 한 켤레였다. 전에 밤을 새워 지어 둔 노란 비단 두루마기까지 갖추니 꼭 한 벌이었다.다음 날, 궁을 나가기 전 나는 몰래 상서방(尙書房) 밖에서 지민을 기다렸다.지민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키가 이미 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지민..."나는 지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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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밤중, 별전의 문이 몰래 열렸다.최 상궁이 도둑처럼 슬그머니 들어와 내게 거친 베로 만든 내시 옷 한 벌을 건넸다."한 답응, 어서 갈아입으십시오. 마차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나는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궁문을 나서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나는 최 상궁에게 황급히 떠밀려 허름한 마차에 올라탔다.마차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멈춰 섰다.마차 휘장이 거칠게 젖혀지며 독한 싸구려 술 냄새가 확 끼쳐 왔다.마부는 음흉한 낯빛으로 손을 비비며 내게 달려들었다!"최 상궁이 널 내게 넘겼으니 오늘 내가 제대로 예뻐해 주마!"나는 매우 놀라 안색이 변한 채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네가 감히! 당장 꺼지거라!"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비녀를 뽑아 그를 찔렀다.그는 아픔에 몸을 움찔하더니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쫙 소리와 함께 내 겉옷이 찢어졌다."살려주시오!" 나는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며 소리쳤다.바로 그때 골목 어귀에 수많은 횃불이 갑자기 밝혀지며 칠흑 같은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여봐라! 간통이다!""한 답응이 궁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사내와 눈이 맞아 도망치려 합니다!"병사들이 순식간에 마차를 빈틈없이 에워쌌다.나는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마차에서 끌려 내려와 헌 누더기처럼 바닥에 내던져졌다.사람들이 길을 비키자, 강도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한서라, 네가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냐?"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눈물이 입가의 피와 뒤섞여 흘러내렸다."사내와 눈이 맞은 게 아닙니다! 황후마마께서 저를 궁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저 마부가 저를 겁탈하려 한 것입니다! 정말 아닙니다!"그런데 강도현이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래서 나의 귀가 윙윙 울리고 눈앞이 핑 돌더니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천한 것! 감히 황후마마께 죄를 뒤집어씌우느냐?""황후는 어질고 자애로워 짐에게 네 처소에 자주 들르라고까지 하셨다. 그런데 너는 어떠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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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찰형을 당한 뒤 나는 다시 별전으로 내쳐졌다.두 손은 완전히 망가져 퉁퉁 부었고,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가슴이 찢어질 듯 기침을 쏟아 냈다.토해 낸 피는 어느새 선홍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강도현은 왕 태의를 한 번 보내 진맥하게 했다.하지만 그는 백유리의 사람이었다.그는 싸구려 지혈약 한 봉지만 내던지고 말았다.돌아가서는 강도현에게 내 상처는 그저 찰과상일 뿐이며, 일부러 아픈 척하며 동정을 사려 한다고 보고했다.나는 사흘 내내 누워 있으며 고열에 시달렸다.어렴풋이 별전의 문이 걷어차이며 활짝 열리는 것을 보았다.나는 강도현인 줄 알고 힘겹게 눈을 떴는데 아들이 보였다.지민은 화려한 비단 옷을 차려입고 손에 채찍을 든 채, 차갑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이 방탕한 년아, 왜 아직도 죽지 않았어?"그의 첫마디에 나는 그대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나는 떨리는 망가진 두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지민아... 그런 게 아니다... 어머니는 누명을 쓴 거..."휙! 지민이 채찍으로 내 침상을 후려쳤고,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닥쳐! 내 어머니라고 하지 마!"여덟 살 어린아이의 눈에는 매서운 노기가 가득했다."네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탓에 어제 아바마마께서 크게 노하셔서 어마마마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꾸짖으시고, 불경을 백 번 베껴 쓰라고 벌까지 내리셨어!""내 어마마마는 너 때문에 손목까지 퉁퉁 부으셨다고!""이 천한 것, 대체 왜 아직도 살아서 우리 모자를 괴롭히는 거지?"내 열 손가락은 모조리 부러져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지만, 그는 보지도 못했다.백유리가 불경을 몇 번 베껴 쓴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 아파하며 내게 채찍을 휘둘렀다."지민아..."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나는 목숨까지 걸고서야 너를 낳았다.""그때 영남에서 큰 눈이 내려 산길이 모두 막혔을 때, 네가 고열에 시달려서 내가 너를 품에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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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 온몸에 눈이 쌓이고 뼛속까지 시렸다.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정신이 흐릿해지며 다시 영남으로 돌아간 듯했다.그해 섣달그믐날, 아버지는 술에 취했고, 강도현은 서툰 손길로 부엌에서 내게 만두를 빚어 주었다.코끝에 밀가루를 묻힌 모습이 꼭 얼룩 고양이 같았다.그는 나를 품에 안고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서라, 나중에 살림이 나아지면 네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를 마당에 가득 심어 주마.""정말 좋았는데..."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나는 집에 가고 싶었다.한 걸음, 두 걸음.나는 눈밭에서 기어가며 긴 핏자국을 남겼다.궁을 나가야 한다. 남쪽으로 가야 한다. 영남으로 돌아가야 한다.눈은 점점 거세게 내려 나를 집어삼킬 듯했다.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태화전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강도현,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아버지가 너를 구하게 두지 않겠다.’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가슴을 파고들던 익숙한 통증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태화전 안의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강도현은 조금 취한 채 곁의 단정하고 현숙한 백유리를 바라보며 마음이 흡족했다.그런데도 왠지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답답하고 어수선했다.그는 전각 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한 답응도 이제는 잘못을 깨달았겠지?’"가거라."강도현이 곁에 있던 내시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밖에 나가서 한 답응을 살펴보거라.""잘못을 뉘우쳤다면 별전으로 데려가 태의에게 살펴보게 하고 몸을 잘 추스르게 하거라."내시가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백유리의 눈에 순간 어두운 빛이 스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폐하는 역시 마음이 어지십니다.""서라가 큰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폐하를 모셨던 사람이니, 저도 서라가 잘못을 뉘우치길 바랍니다."강도현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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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는 죽었다.하지만 내 영혼은 흩어지지 않고 가볍게 태화전 허공에 떠 있었다.나는 내시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훙거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자, 전각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강도현의 손에 가지던 백옥 술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냉소를 흘렸다."넌 언제부터 한 답응의 총애를 다투는 데까지 나서게 됐느냐?""사내와 붙어먹는 짓까지 한 년이 이제는 죽음으로 짐을 협박하는 것이냐?""고육책은 짐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계속 무릎 꿇고 있으라고 전하거라!"내시는 벌벌 떨며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조아렸다."폐하, 소인이 어찌 감히 속이겠나이까? 한 답응께서... 정말 숨이 끊어졌옵니다!""시신까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강도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는 앞에 놓인 상을 거칠게 걷어차고 전각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백유리의 안색이 변하더니 황급히 뒤를 따랐다."폐하, 밖에 눈보라가 거셉니다..."강도현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는 걸음을 재촉하더니 이내 거의 뛰다시피 했다.눈이 하염없이 쏟아졌다.나는 그가 새하얀 눈에 뒤덮인 시신 앞에 멈춰 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건 바로 나였다.나는 버려진 낡은 자루처럼 웅크리고 있었다."한서라."강도현은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일어나거라. 짐이 명했으니 당장 일어나거라!"바닥에 쓰러진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강도현은 드디어 다급해져 몸을 낮추고 내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나를 덥석 품에 안았다."어쩌면 이렇게 가볍지..."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말 가벼웠다.지난 오 년 동안 나는 날마다 피를 토했고, 배불리 먹어 본 적도 없어서 진작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내 굳어 버린 손을 만졌다.열 손가락이 모조리 부러져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뼈가 드러난 손이었다."태의! 어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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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지민도 그 소란에 놀라 달려왔다.그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채 눈보라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강도현의 품에 안긴 나를 보며 어린 얼굴에 잠시 망연자실한 기색이 스쳤다."아바마마... 죽은 겁니까?"강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지민이 한 걸음씩 다가오더니 내 가슴께를 바라보았다.거기에는 무언가가 꼭 간직하여 있었다.강도현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꺼냈다.진흙탕에 짓밟혔다가 내가 정성껏 깨끗이 빨아 둔 황금색 비단 두루마기였다.옷에는 아직 내가 토해 낸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그것이 내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물건이었다.지민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저건... 제게 준..."지민이 눈밭에 털썩 엎드려 강도현의 품에서 내 손을 붙잡으려 했다.피범벅이 된 내 손을 보자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어머니!""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제가 입을게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옷, 입을게요!""죽지 마세요. 다시는 어머니를 욕하지 않을게요. 일어나세요!"그가 마침내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다.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나는 그가 눈밭에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작은 몸이 후회에 사무쳐 심하게 떨리는 모습도 지켜보았다.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그저 여덟 살인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백유리에게 세뇌당했고, 강도현에게 권력을 다투는 도구로 이용당했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는 친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게 되었다.강도현의 시선은 곁에 있던 왕 태의에게 매섭게 꽂혔다."말하거라! 누가 네게 병세를 속여 보고하라고 시켰느냐?"왕 태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무심코 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강도현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여봐라! 왕 태의를 끌고 가 능지처참하거라!""한 답응이 궁을 나가던 날 당직을 섰던 자들은 모조리 끌고 가 혹독하게 문초하거라!""짐이 기어이 밝혀내고 말겠다. 대체 누가 한 답응을 해친 것이냐?"백유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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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강도현은 백유리를 죽이지 않았다.백유리의 아버지는 조정의 재상이었고, 조정 곳곳에 그의 문하와 옛 부하들이 포진해 있었다.조정에서는 압박이 거셌고, 후궁에는 회임한 백유리가 있었다.강도현은 어쩔 수 없이 백유리를 봉의궁에 가두어 두었다.하지만 그는 미친 사람처럼 그날 밤의 일에 연루된 궁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전각 밖에 쌓인 눈이 피로 물들어 검붉은색으로 되었다.그는 내 시신을 안아서 침상으로 옮겼다.가장 귀한 잠사로 내 상처를 꿰매고, 천금으로도 구하기 힘든 불로약을 내 입에 넣어 시신이 썩지 않게 했다.그는 밤낮으로 내 곁을 지켰다.조정에도 나가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서라, 보거라. 짐이 네게 새 옷을 마련했다. 네가 입던 것보다 훨씬 예쁘지 않으냐?""네가 깨어나면 짐이 너를 영남으로 데려가마. 어떠냐?"그는 시신을 앞에 두고 혼잣말을 늘어놓았다.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가엾고 딱하다는 생각만 들었다.지민의 처지도 달라졌다.백유리는 봉의궁에 갇힌 뒤 모든 원망을 지민에게 퍼부었다."네 그 천한 어미가 죽었는데 너는 어째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느냐?"백유리가 지민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너는 내가 거둬 기른 개 한 마리에 불과하다. 이제 내 친자식까지 생겼으니, 네가 뭔데?"지민은 울지 않았다.그는 백유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음침한 기색이 눈빛에 서려 있었다.내가 죽은 뒤로 그는 다시는 웃지 않았다.그는 한밤중이면 홀로 신무문 밖의 그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가곤 했다.그곳에서 그는 그날 최 상궁이 돌 틈에 떨어뜨린 반쪽짜리 출궁패를 찾아냈다.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자기 손으로 친어머니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원수를 부모님으로 여겼던 것이었다.여덟 살 아이는 하룻밤 사이에 철이 들었다.그는 감정을 숨기고 참는 법을 배웠다.그는 더 이상 백유리의 매질과 욕설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공손하게 굴었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우가 태어날 때까지 어마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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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는 백유리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가장 충직한 개와 같았다.하지만 허공에 떠 있던 나는 그 소매 안의 피가 배어 나올 만큼 꽉 움켜쥔 두 주먹을 똑똑히 보았다.내 아들 지민의 마음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백유리에 대한 증오, 강도현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증오까지 있다.열 달 뒤, 백유리가 사내아기를 낳았다.강도현은 아이에게 강빈욱이라는 이름을 내렸다.황자가 태어나자, 전국에 대사면이 베풀어졌다.재상 일파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앞다투어 강빈욱을 태자로 책봉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강도현은 그것을 허락했다.책봉 대례가 열린 날, 지민은 사람들 맨 뒤에 서 있었다.사람들의 환호 속에 주인공처럼 둘러싸인 강빈욱을 바라보았다.그는 몸을 돌려 쓸쓸한 별전으로 향했다.그곳에는 내 위패가 놓여 있었다."어머니."지민은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너무나 빨아서 바래 버린 데다 길이도 한 뼘이나 짧아진 두루마기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다들 축하하러 갔습니다. 아무도 어머니를 기억하지 않습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머니의 것을 전부 되찾아 드리겠습니다."그는 차갑고 딱딱한 벽돌 바닥에 머리를 힘껏 조아렸다.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내 위패 앞에 떨어졌다.강도현은 갈수록 이성을 잃었다.그는 어화원에 있는 모란을 모조리 뽑아 버리고 매화를 가득 심으라고 명을 내렸다.내가 매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때문이었다.그는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을 불러 나와 꼭 닮은 크기의 나무 조각상을 만들게 했다.심지어 자기 피로 조각상에 불경을 한 글자 한 글자씩 베껴 쓰기까지 했다."서라, 태부께서 예전에 내게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응한다고 하셨다.""내 피를 전부 네게 줄 테니, 한 번만이라도 돌아와 나를 봐주면 안 되겠느냐?"그는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야위었고, 곤룡포는 몸에 헐렁하게 걸려 있었다.밤이면 그는 자주 피를 토했다.그 피의 빛깔은 내가 죽기 전 토했던 피와 똑같았다.나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정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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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십 년, 나는 궁에서 꼬박 십 년이나 떠돌았다.그 십 년 동안 나는 백유리의 적자 강빈욱이 막무가내인 망나니로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남을 짓밟고 제멋대로 굴었다.상서방에서 동반 학동들을 말처럼 타고 괴롭히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채찍질했다.그중에서도 지민은 그가 가장 괴롭히기 좋아하는 상대였다."강지민, 너는 고작 사생아일 뿐이니 어서 엎드려 내 말이 되어라!"열두 살인 강빈욱은 거들먹거리며 지민의 무릎을 걷어찼다.지민은 아무 표정도 없이 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꿇었다.강빈욱이 등에 올라타 말채찍을 휘두르게 내버려두었다."이랴! 사생아, 빨리 달려라!"지민의 두 손은 거친 바닥에 닳아 피가 배어 나왔다.하지만 그는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다만 내리깔린 눈동자에는 짙은 살기가 들끓고 있었다.강도현도 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마치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는 매일 조회에 나가는 것 말고는 매화 정원에서 내 조각상만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백유리는 몹시 의기양양했다.자신이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했다.지민의 기개는 이미 꺾였고,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겼다.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몰랐다.한밤중이면 지민은 온몸의 진흙을 씻어 내고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그는 모든 암중 호위들의 눈을 피해 소리 없이 전조 중신들의 저택에 잠입했다.지난 십 년 동안 그는 끝까지 참고 견디며 백씨 외척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충신들의 지지를 얻어 냈다.그는 직접 군영으로 찾아가 백씨 가문에 억눌려 지내던 한미한 집안 출신의 장수들과 의형제를 맺었다.그는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독사와 같았다.평소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한번 나서면 반드시 적을 단숨에 쓰러뜨렸다.열여덟 살이 된 지민은 훤칠한 키에 서늘한 인상을 지닌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눈매와 이목구비는 강도현을 닮았지만, 눈빛만큼은 그보다 훨씬 매섭고 차가웠다."어머니."내 생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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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변고가 일어난 것은 선제의 기일이었다.백 재상은 군권을 틀어쥐고 세력을 키우며 금군 통솔자와 손잡고 강도현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태자 강빈욱을 서둘러 즉위시키려 했다.대군이 황궁을 에워쌌다.태화전 안에는 백유리는 화려한 황후 예복을 차려입고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폐하, 병환으로 고생하신 지도 오래되었으니 이제 그만 쉬셔야 합니다.""양위 조서는 제가 이미 써 두었습니다. 옥새만 찍으시면 됩니다."강도현은 용상에 앉아 심하게 기침했다.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백유리를 차갑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그러면 아니겠습니까?"백유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밖의 금군은 모두 제 아버지의 사람입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그때 전각 밖에서 하늘을 뒤흔드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대문이 굉음과 함께 활짝 열렸다.은색 갑옷을 걸친 지민이 피 묻은 장검을 들고 전각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그 뒤에는 폐하를 구하러 온 군사들이 물밀듯이 따라 들어왔다."역적을 잡아라!"지민이 명을 내렸다.백유리가 경악했다."강지민! 지금 무슨 짓이냐? 내가 네 어마마마다!""어마마마?"지민이 차갑게 비웃더니 손에 든 검을 재빠르게 휘돌리더니 백유리의 어깨를 꿰뚫었다."악!"백유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지민은 그녀의 상처를 발로 짓밟고 힘껏 짓눌렀다."이 독한 년아, 네가 감히 그 말을 입에 올리다니!""그때 네가 계략을 꾸며 내 친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억지로 원수를 어머니라 부르게 했지.""지난 십 년 동안 날 날마다 짓밟아 놓고도, 정말 내가 물지 않는 개라고 생각했느냐?"강빈욱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빌었다."형님,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지민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을 뒤집어 검을 휘둘렀다.강빈욱의 손발 힘줄을 단숨에 끊어 버렸다."그 손으로 나를 때리고 그 발로 나를 걷어찼지.""오늘 그대로 돌려주마."강빈욱은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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