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내 성유리가 그를 다시 바라보자 침묵하던 박한빈이 입을 뗐다.“그럼 최경언 씨한테 내 연락처 추가하라고 해.”“왜요?”“네가 최경언 씨 누나면 나는 매형 아닌가? 그러니까 나도 책임져야지.”박한빈이 그렇게 말하자 성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한빈 씨 연락처 경언 씨에게 넘길게요.”“그래. 별로 급한 일도 아니니까.”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가자. 나랑 같이 샤워하자.”“싫어요. 저 이미 샤워했다고요!”성유리는 박한빈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번쩍 안아 올렸다.그러나 욕실로 들어서고는 성유리를 그대로 욕조에 내려놓았다.아직 잠옷을 입고 있던 성유리는 욕조에 닿자마자 머리까지 금세 다 젖어버렸다.“박한빈 씨!!”“응. 왔어.”박한빈은 대답하며 자신의 셔츠를 벗었고 욕조에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자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물은 넘쳐 욕조 밖으로 흘러내렸고 박한빈의 뒤에서 성유리를 꽉 끌어안았다.성유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냥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있잖아요. 그때 도한시에서도 최경언 씨를 만났었는데... 진짜 모든 게 다 우연일까요?”“음, 모르겠는데.”“그리고 방해준 씨가 새 애인을 만났다는 것도 엄청 빨리 알았잖아요, 좀 지나친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침묵할 뿐이었다.이내 그녀가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성유리, 너 지금 나한테만 집중해.”그러자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내일 출판사에 가야 돼요. 제 목은 물지 마...”성유리가 말을 마치자 박한빈의 입술이 정확히 그 자리에 떨어졌다.생각보다 센 힘에 그녀는 통증을 느꼈지만 가만히 있었다....“다 당신 때문이에요!”다음 날, 성유리는 목에 남은 자국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어제 입으려던 옷을 박한빈에게 던지며 외쳤다.“
며칠 후, 성유리는 방해준이 또 다른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사람은 찻집에서 다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으로 차를 끓이는 기술이 뛰어나고 심지어 피파를 칠 줄도 안다고 했다.그리고 나이도 최경언보다 두 살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그 사람들 참 웃기지 않습니까? 그렇게 결혼기념일을 크게 축하할 계획이라며 떠들더니...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니까요?]최경언이 성유리에게 보낸 메시지였다.[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도 품위 있고 사랑하는 척하는 걸 보면 전 그냥 토할 것 같다고요!]성유리는 화면에 나타난 글을 보며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몰랐다.사실 이 업계에선 대부분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말을 해줘야 할까?하지만 최경언은 분명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할 것이다.혹은 그냥 자기 현재의 삶을 잘 살아가라고 말해야 할까?그렇지만 최경언의 부모님인데 그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게다가 만약 최경언이 계속 연락을 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게 임종연에게 들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박한빈이 침실로 들어오며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성유리에게 물었다.“최경언 씨가 보낸 문자예요.”성유리가 빠르게 대답하자 원래 욕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다시 돌아봤다.그날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성유리가 다 말해주었고 최경언을 친구로 추가한 일도 애기해 줬었다.최경언은 그때 성유리에게 돈을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연락을 했으니 박한빈은 나중에 몰래 그를 삭제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최경언이 자신보다 어리긴 해도 성유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그런 자신감 정도는 있었다.게다가 성유리도 그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니 그 자체로 성유리와 최경언 사이엔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최경언은 분명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박한빈은 최경언이
“저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습니다.”최경언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꺼냈다.성유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도... 괜찮아요. 절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친구의 도움이라고 생각해요.”그 말을 들은 최경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라 해도 전 유리 누나 도움을 공짜로 받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며칠 내로 일자리를 찾을 테니까. 그때 방값은 꼭 돌려드리겠습니다.”성유리는 처음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최경언의 진지한 표정에 그만 말을 삼켰다.결국 그녀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그에게 건넸다.“고마워요.”그러자 최경언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그럼 더는 방해하지 않도록 할게요. 먼저 갈게요.”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자 최경언은 뒤돌아 떠나려 했다.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걸었다.“혹시 평소에 이런 만화 좋아하세요?”예상치 못한 질문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랐다.그리고 바로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방금 실수로 눌렀어요.”최경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번에는 술자리에서의 그 무겁고 침묵이 아닌 깨끗하고 밝은 웃음이었다.성유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처럼.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최경언은 이미 전혀 다른 기분으로 전환하듯 전속력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남겨진 성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한참 동안 바라보다 다시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런데 이번에는 계속 읽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박한빈이 문을 열고 나왔다.그는 아직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표정이 다소 굳어 있었다.성유리를 보고 나서야 그제야 표정을 바꿨고 급히 걸어와서 조용히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기사한테 먼저 집에 데려다주라고 하지 않았나?”박한빈의 질문에 성유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냥 기다리고 있었어요. 회의는 다 끝났어요?”그녀는 물으며
“경언 씨가 왜 여기 계세요?”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최경언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하지만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거나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마 방해준이 무슨 말을 한 모양이었다.게다가 최경언이 소지한 체크카드마저 정지된 상태라 호텔 입구에 서 있어도 방 하나조차 예약할 수 없었다.그래서일까, 성유리를 본 순간 최경언의 표정이 살짝 변했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박한빈 씨가 여기서 일 좀 보고 있어서 저도 같이 왔어요. 방금 위에서 경언 씨 같은 사람이 보이길래 착각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요.”성유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이 시간까지 왜 밖에 계세요? 집엔 안 들어가요?”그 말에 최경언은 고개를 홱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전 이제 성인이에요.”사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자기는 이제 정해진 시간에 귀가해야 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거였다.게다가 집이라는 곳에 딱히 돌아갈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렇지만 막상 입 밖으로 뱉어낸 건 고작 그 한마디뿐이었다.당황한 성유리는 잠깐 멈칫하더니 곧 사과했다.“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최경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그는 얇은 코트 한 벌만 걸치고 있는 바람에 귀는 빨갛게 얼어 있었고 호텔 앞에 한참을 서 있었음에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눈치챘다.그래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호텔 로비로 다시 들어갔다.“사모님, 뭐 필요하세요?”성유리를 본 로비 매니저가 재빨리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아니면 대표님께서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아니요. 그런 건 없고요.”성유리는 손으로 호텔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제 친구가 있는데 방 하나 잡아주세요. 비용은 박한빈 씨 이름으로 처리하면 돼요.”“네. 알겠습니다!”매니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고 성유리가 엘리베이터로 향한 뒤에야 밖으로 나가 최경언에게 다가갔다.“손님,
최경언의 웃음소리는 작지 않았다.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똑똑히 들었고 방해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성유리가 빠르게 청첩장을 받으며 말했다.“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꼭 참석할게요.”“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방해준 가족의 차량이 먼저 도착했고 몇 마디 인사를 더 나눈 뒤, 그들은 차에 올라탔다.최경언은 조수석에, 임종연과 방해준은 뒷좌석에 탔다.차 문이 닫히기 직전,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최경언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봤다.무언가 말을 꺼낼 듯한 표정이었지만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문을 닫았다.남아있던 성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청첩장을 들여다보고 있어 최경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너 임종연 씨랑 잘 지내는 것 같더라?”갑작스러운 말에 성유리는 순간 멈칫했고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냥 인사치레 한 건데 왜 그러세요?”박한빈이 여전히 대답이 없자 성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다시 물었다.“뭐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아니.”그는 말없이 성유리 손에 들려 있던 청첩장을 가져가더니 바로 쓰레기통에 던지려 했다.“다음 달 나 바빠. 그리고 너도 원래 이런 데 가기 싫어하잖아. 가지 말자.”성유리는 급히 박한빈의 팔을 붙잡았다.“가지도 못할 거면 그냥 조용히 두면 되잖아요. 버리긴 왜 버려요? 여기 CCTV도 있는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민망해요.”“누가 본다고?”“방해준 씨랑 여사님이요.”“그 외엔?”“네?”의아해하던 성유리는 문득 뭔가 깨달은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설마...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아니거든.”그는 단박에 부정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더 크게 터뜨렸다.“괜찮아요. 당신 바쁘면 저 혼자 다녀올게요.”“뭐라고?”“아무래도 정식으로 초대한 자리인데 괜히 빠지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렇죠?”성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
“아이고, 박 대표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별말씀을요. 저희도 방금 도착했습니다.”“박 대표님처럼 바쁘신 분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죄송해서 어쩌죠.”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 안에서 두 남자는 만나자마자 격식을 갖춰 인사를 주고받았다.한편, 임종연은 성유리 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아주 친근한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사모님, 또 뵙네요.”성유리도 억지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다! 제가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어요.”임종연이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봤고 순간, 그녀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어라, 이 녀석 어디 갔지?”방해준 역시 누군가의 빈자리를 눈치채고는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아마 밖에 있을 거예요. 제가 불러올게요.”임종연이 급히 말하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성유리는 그 상황에 별 반응 없이 앉아 있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 뇌리를 스치듯 떠올랐다.그러나 그 실마리를 붙잡기도 전, 임종연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소개해 드릴게요. 제 아들 최경언이에요.”임종연은 웃으며 말했다.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마주하니 성유리는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반면 최경언은 훨씬 담담했다.임종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성유리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려던 찰나, 박한빈이 먼저 나서서 최경언의 손을 덥석 잡았다.“안녕하세요.”표정 하나 없이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눈빛이 자신을 슬쩍 스쳐 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다들 앉으시죠.”방해준이 웃으며 말하자 박한빈이 손을 놓고 성유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최경언은 성유리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딱 봐도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내내 말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방해준이 그를 언급해도 겨우 시선만 들 뿐, 대답 한마디 없이 무심하게 고개만 돌렸다.그 모습은 성유리가 도한시에 있을 때 봤던 밝고 싱그러운 청년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