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태도에 설윤지는 약간 의외라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거실에 서서 한 바퀴 둘러본 뒤 그녀가 물었다.“수호 씨는요? 의논할 게 있으니 불러주세요.”인수인계는 핑계였고 사실 설윤지가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노수호 때문이었다.그는 며칠 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회사 주주 총회에마저 참석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아가씨 도련님과 그의 가족 모두 이곳에 계시지 않아요.”집사는 간단히 이렇게만 알렸다.설윤지는 조금 의아해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맞아요, 전에 노수호 씨가 다쳤다고 했죠?”집사가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설윤지가 다시 물었다.“약간의 외상 정도 아니었나요?”집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련님은 아마 한동안 병원에 더 계셔야 할 것 같아요.”백지환이 실수로 노수호를 찌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아직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중상으로 가장해 백지환의 형량을 무겁게 하려는 것인가?’그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집사의 말에 설윤지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수호 씨가 있는 병원이 어디예요?”집사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그것도 비밀인가요?”“그게 아니라...”“그럼 말해주세요. 수호 씨랑 의논할 일도 있고...”순간 설윤지는 집사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조금 지나 설윤지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뜻이죠?”“아가씨 도련님은 아마 아가씨와 만나지 못할 것 같네요.”집사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도련님은 세상을 떠났어요...”‘세상을 떠나다니?’집사의 충격적인 발언에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지금 저랑 농담하시는 거죠?”‘노수호 씨가 고작 몇 살이라고? 지난번 봤을 때 딸애의 돌잔치 날이었는데...’“그날 본 그 사람의 모습은 특별히 패기 넘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건강해
설윤지가 담담하게 말했다.“아니면 경찰에 신고하세요. 어차피 저희에게는 공문이 있고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노미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설윤지가 곁에 있던 사람을 힐끔 쳐다보자 그 사람은 뜻을 알아차렸다는 듯 노미혜를 에돌아 앞으로 걸어갔다.순간 노미혜가 당황해 소리쳤다.“멈춰! 당장 멈추라고! 너희들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당장 저 사람 못 가게 막아!”노미혜가 높은 목소리로 호통쳤지만 현장에 그녀의 말을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노미혜는 이를 악물고 설윤지를 노려보며 말을 내뱉었다.“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하는 악질 년... 우리 집에 문제만 없었어도 넌 날 절대 이길 수 없어. 내 예측이 맞다면 박한빈 쪽도 네가 먼저 꼬드긴 거 맞지?”그녀는 비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야? 잤어? 너 같은 사람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찰싹!’노미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윤지의 손이 그녀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노미혜가 손사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함부로 날 비방하고 모욕한 대가야.” 설윤지는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다시 함부로 지껄이다간 그땐 뺨 한 대로 절대 끝나지 않을 거야. 명심해.”“설윤지!”노미혜는 화가나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하지만 설윤지는 그녀를 무시한 채 차가운 시선으로 힐끔 쳐다보고는 돌아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노미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네가 잘났다고 착각하지 마. 만약 오빠가 일부러 너에게 양보하지 않았다면 넌 이번 싸움에서 절대 이기지 못했을 거야. 오빠가 너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뭔지, 참 이해가 안 가.”“나한테 잘해준다고?”설윤지는 걸음을 멈추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너 정말 미쳤구나. 오빠가 대체 뭘 나한테 잘해주었다는 거지?”“너는 당연히 모르겠지.”노미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넌 절대 오빠가 너 때문에
해청시, 노씨 저택.노미혜는 거실에서 꼬박 밤을 새웠지만 끝내 아무도 그녀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결국, 불러오는 배를 감싸 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그걸 발견한 집사가 황급히 가로막았다.“아가씨,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병원이요.”노미혜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지금 다들 병원에 있는 거죠? 집으로 안 온다면 제가 직접 가서 만나겠어요.”“아가씨, 도련님이 막 돌아가신 상황입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절대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괜히 상황을 더 어지럽히지 마세요.”“왜요? 왜 저는 만나면 안 되는 건데요?”노미혜는 점점 더 화가 났다.“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처음부터 배신한 건 그쪽이잖아요!”“저는 이제 막 결혼했고 뱃속엔 아이도 있어요! 그런데 제 남편을 감옥에 보내서 절 과부로 만들겠다는 게 말이 돼요?”“도대체 저는 그 사람들한테 어떤 존재였는데요? 제가 이 집 친딸 맞기는 해요?”쏟아내는 울분에 집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지만 몸으로 그녀의 앞을 단단히 막아버렸다.노미혜가 그를 밀쳐내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밖에 손님이 왔습니다.”소리를 먼저 들은 집사는 미간이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이 시간에 손님이요?”“설윤지 씨네요. 도련님 전 부인 되시는 분이죠.”노미혜는 집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아가씨! 안 됩니다!”집사가 붙잡으려 했지만 임신한 몸이라 억지로 막을 수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그대로 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거기에는 설윤지가 서 있었고 옆에는 서류를 들고 있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동행하고 있었다.“노미혜 씨.”설윤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여긴 왜 온 거예요?”노미혜는 턱을 치켜세웠다.“여기가 당신이 올 수 있는 데예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막 찾아오세요?”“노미혜 씨.”설윤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 있던 변호사가 앞으로 나섰다.“선진 그룹의 지분과 자산 변경에 따라
그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서운한 기색까지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결국 두 팔로 박한빈의 목을 감싸며 물었다.“안 피곤해요?”“직접 느껴보면 알 거야.”이런 부분에서 그는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욕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유리의 몸은 다시 땀에 젖어 있었다.아무리 실내에 냉기가 가득해도 끈적임은 가시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녀 위에 엎드린 채, 머리카락을 매만지듯 장난스럽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성유리는 이미 잠이 쏟아져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그런데 귓가에 속삭이는 박한빈의 말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노 대표가 죽었어.”성유리는 단숨에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크게 떴다.“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박한빈은 담담하게 다시 말했다.“노수호 씨가 죽었다고.”“언제요?”“그저께.”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선진 그룹은 지금 엉망진창이야. 그래서 그쪽도 이 소식을 발표하지 못하고 계속 감추고 있지.”성유리는 순간 숨이 막혔다.“설윤지 씨는 알아요?”“알 거야. 이제 정리할 단계인데 노수호 씨 쪽에서 아무 움직임이 없으니 눈치챘겠지.”“그럼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설윤지 씨랑은 끝내 만나지 못한 거네요? 그때 그 일... 아직도 모르는 채로?”“응.”성유리는 침묵했다.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박한빈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그저 묵묵히 성유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때로는 말보다 힘주어 안아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되었다.“그럼 선진 그룹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거의 마무리됐어.”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설윤지 씨는 가장 큰 승자가 됐지. 사실 그것도 노수호 씨가 예상했던 그림이야.”“그럼 백지환 씨는요?”“백지환?”박한빈이 비웃듯 웃으며 계속 말했다.“곧 감옥에 들어가겠지.”“그게 무슨 뜻이에요?”성유리의 정신은 다시 맑아졌다.“노수호 씨가 어떻게 죽은 건지 알아?”“몸이 안 좋았잖아요. 그게 원인 아니었어
성유리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기에 손목이 잡히자마자 곧장 다리를 들어 올려 상대의 하복부를 걷어차려 했다.그러나 상대는 그녀의 동작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무릎으로 막아내며 튕겨냈다.다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뭐야, 잠깐 안 본 사이에 남편을 살해하려는 거야?”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박한빈 씨?”“응.”그 대답이 들리자 성유리는 긴장이 스르르 풀려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진짜 놀랐잖아요! 집에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다고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언제 들어온 거예요? 왜 연락도 안 하셨어요?”성유리가 따지듯 묻자 그는 그녀를 팔에 감싸안았고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묻더니 마치 향과 온기를 빨아들이듯 숨을 고르며 기댔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서프라이즈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어디 있어요!”박한빈은 그저 말없이 성유리를 꼭 끌어안았다.방 안은 어둡고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그럼에도 성유리는 그의 몸에서 묻어나는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밀어내지 않고 조심스레 손을 들어 박한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조금 길어진 머리칼 사이로 여전히 부드러운 피부가 손끝에 느껴졌다.“일이 잘 안 풀려요?”그녀의 부드러운 질문에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묻지 않았지만 계속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잠시 후, 박한빈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시선을 떨구었다.그제야 성유리는 그의 충혈된 눈을 발견했고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많이 힘드시죠? 이렇게 무리해서 돌아올 필요는 없었어요. 어차피 저 혼자서도 아이들이랑 집은 잘 지킬 수 있으니까.”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차분했다.박한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아이와 집.그 단어들이 이렇게도 큰 위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바깥에서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려주
“맞아, 새로 알게 된 동생이 있었어.”“귀여워?”하늘이가 다시 묻자 성노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조금 시끄러워.”그 말에 하늘이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야, 너랑 비교하면 누가 안 시끄럽겠어?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성노을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머릿속에 노예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러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꽤 귀여워.”...성유리는 처음에 박한빈이 해청시에 며칠만 더 머물 줄 알았지만 그 ‘며칠’은 어느새 보름이 넘게 늘어나 있었다.박한빈의 일정은 빡빡했고 그래서 성유리와 영상통화는커녕 제대로 연락할 틈도 없었다.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박한빈이 돌아오는 날을 물어도 성유리는 확답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너무 오래 아빠를 못 본 탓일까, 저녁 무렵에 하늘이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아빠 곧 오시지?”성유리는 요즘 뉴스에서 선진 그룹 관련 소식을 자주 접하고 있었고 일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는 기사도 보였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식사 후, 성유리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지만 역시 답은 오지 않았다.‘아직 바쁘겠지.’성유리는 애써 자기 감정을 추스르고 마음을 억눌렀다.밤은 금세 깊어졌다.하늘이가 오랜만에 집에 온 날이라 성유리는 아이 곁에 오래 앉아 책을 읽어줬다.한참 만에야 하늘이가 만족스레 눈을 감았다.그녀는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오고 잠들기 전, 혹시나 하고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저 잘래요. 일 끝나면 문자만 보내세요. 전화나 영상통화는 하지 마시고요.]그렇게 또 메시지를 남겼지만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성유리는 휴대폰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지만 사실 불안이 덮쳐왔다.그래서 잠도 설치고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화면은 늘 그대로였다.새벽녘, 결국 참지 못하고 박한빈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까 마음먹었을 때였다.문득,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낯선 발걸음 소리와 이어지는 문이 열리는 소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