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보낸 그 눈빛의 의미를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것은 경고였고 또 혐오였다.겉으로 보면 겸손하고 온화해 보이는 박한빈의 겉모습에 가려진 진짜 박한빈은 차갑기 그지없는 냉혈한이었다.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 성유리는 눈을 아래로 해 쓰레기통에 꽂힌 반으로 찢긴 이혼서류를 주시했다.백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건넨 서류였건만 박한빈은 그것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박한빈은 애초에 성유리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성유리의 감정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정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그로부터 이틀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은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전해 들은 소식은 공식회의에 박한빈이 참석했다는 것이었다.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박한빈은 코앞에 들이닥친 카메라 앞에서도 변함없는 미모를 유지했는데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가 있어 마치 영화배우를 연상케 했다.그런 기사를 보고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지금 도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성유리는 달갑지 않은 그 얼굴을 더 보지 않고 자신의 홈페이지로 넘어가 연재를 재촉하는 댓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성유리는 만화가였지만 성유리가 속한 상류사회에서는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직업이었다.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미술을 배웠지만 그들이 접하는 건 국화나 유화지 성유리가 그리고 있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만화는 아니었다.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성유리의 만화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많았기에 성유리는 답글을 좀 달다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그런데 핸드폰을 내려놓기 바쁘게 성유리의 핸드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진무열에게서 온 문자 때문이었다.“내일 진씨 집안에서 저를 위해 파티를 열어준대요, 유리 씨도 올래요?”미간을 한번 찌푸린 성유리가 답장하려고 하는데 진무열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왔다.“올 거죠? 며칠 전에 내가 공항에서 유리 씨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줬는데.”진무열의 말에 타자를 하던 성유리의 손가락이 공중에 머물렀다.이미 데리러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거기서 다섯
시선을 아래로 한 성유리는 신문에 나온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참 교양 없고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고 난 성유리는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성유리는 허리를 숙여 신문을 줍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출발하세요.”성유리의 높낮이 없는 말이 들렸음에도 기사는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창까지 올려버렸다.그러자 박한빈도 매정하게 돌아서서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성유리는 멀어져가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돌아섬으로 성유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니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건 박한빈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성유리만의 몫이었다.하지만 늘 혼자였던 성유리는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파티장은 생각보다 많이 떠들썩했다.오랜 시간 동안 진씨 집안은 진무열이라는 혼외자를 숨기진 않았지만 그를 냉대하며 외국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해 혼외자에 대한 진씨 집안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줬었는데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열어주는 걸 보면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았다.진무열이 알려주지 않으니 성유리는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그것에 대해 묻지도 않았었다.그렇게 소란스러운 곳에 홀로 떨어진 성유리가 진무열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이게 누구야, 너 진짜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그 사람에 의해 성유리의 팔이 잡혀버렸다.“뭘 그렇게 급해 해? 내 말 못 들었어?”원유진이 앙칼진 목소리로 떠들어댈 때 원유진과 함께 다니던 동생들은 성유리의 팔이 잡히자마자 그 앞에 나서며 길을 막아버렸다.학교 다닐 때와 다름없는 모습에 성유리는
성유리의 표정은 전혀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지만 진무열은 그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가자, 이번에 돌아오면서 파티시엘 몇 명 데려왔거든. 디저트들이 딱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야.”말을 마친 진무열은 성유리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진무열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진무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유리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자신이 인정한 좋은 것은 같이 나누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진무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서 성유리도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성유리는 마침내 그걸 받아들고는 말했다.“의도가 너무 눈에 잘 보이잖아.”그 말에 진무열은 눈썹은 꿈틀거리며 물었다.“뭐가?”“내가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잖아.”성유리는 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정말 한참 만에 먹는 케익인 것 같았다.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사는 도연제에도 파티시엘은 있었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에선 별로 환영받지 않는 이렇게 달고 느끼한 케익은 잘 만들지 않았다.그들에게 케익은 그저 특별한 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일 뿐이었다.특별한 날에만 만들고 또 그걸 진짜로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파티시엘들은 당연히 맛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열세 살에 처음 케익을 먹어본 성유리한테는 케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기에 성유리는 지금도 오랜만에 먹어본 달콤한 케익을 천천히 녹이며 음미하고 있었다.은은한 우유 향과 상큼한 과일 향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펴진 성유리의 미간을 주의 깊게 본 진무열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너는 여전히 전이랑 달리진 게 없네.”“그래서 이게 나한테 주는 뇌물이야?”케익을 삼킨 성유리가 묻자 진무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그때 성유리의 눈에 맞은
박한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성유정과 박한빈은 맞추기라도 한 듯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제 삶을 가리고 있던 포장지가 뜯어진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제 뺨을 내려치는 듯 머리가 띵해졌다.그리고 그 뺨을 내리친 사람은 역시나 남편인 박한빈이었다.지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은 아무리 많은 케익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씁쓸함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이상 진무열과 말을 섞지 않고 케익을 내려놓고 뒤 돌아 가려 했는데 그 순간 성유정이 하필 그런 성유리를 봐버리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언니!”그 맑고 높은 목소리를 성유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진무열도 그녀가 도망가게 두지 않고 아예 그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그런 진무열을 따지들 올려보았지만 진무열은 미소를 띠며 박한빈과 악수를 했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박한빈은 다시 한번 저를 마주한 익숙한 뒷모습을 무시하며 진무열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무열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오늘 좀 늦게 나와서 파티에 저만 안 온 줄 알았는데 이 앞에서 형부를 만난 거예요. 다행이죠 진짜.”“근데 언니는 왜 형부랑 같이 안 왔어?”성유정은 교묘하게 제가 박한빈과 함께 들어온 걸 해명하는 듯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던진 질문이었다.그제야 성유리도 뒤돌아서 성유정의 말에 답했다.“별거 아니야.”성유리의 말은 너무나도 간결해 그 말에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성유정조차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지만 성유정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돌렸다.“이 케익은 무열 오빠가 언니를 위해서 준비한 거죠? 근데 언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형부가 언니한테 케익 사주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성유정의 연기는 너무나도 비열해서 그 연기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던 성유리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그 말에 성유정이 같이 가겠다고 말하
성유리가 힘을 주어 다음 손가락을 떼어낼 때 박한빈은 오히려 다른 손으로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에 깜짝 놀란 성유리가 앞으로 조금 다가서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성유리 박한빈에게 안긴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의 잔뜩 어두워진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성유리가 방금 케익을 먹긴 했지만 입에 묻힐 정도로 열심히 먹진 않았을 텐데 박한빈의 행동은 성유리가 자신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미간을 아까보다 더 찌푸린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할 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케익 맛있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가 당황하는 사이 박한빈이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성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갑자기 부딪친 입술에서도 박한빈 특유의 강압적이고 상남자다운 성격이 느껴졌다.맞물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케익의 향기가 퍼져나갔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박한빈은 더 거칠게 성유리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허리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이미 성유리의 허리에는 박한빈의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던 성유리는 그런 걸 헤아릴 새도 없이 박한빈을 밀어내려 그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토록 격렬한 키스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박한빈은 그저 기분이 나빠서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개도 제 밥을 건들면 화를 내는데 박한빈 같은 인간은 오죽할까.이 세상에는 박한빈이 버리는 것만 있지 박한빈이 버려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박한빈이 한 말을 성유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기에 박한빈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두 눈을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성유리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따가운 느낌과 함께 배어
저 스케치북은 성유리가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것이어서 성유리는 그냥 어디 구석에 넣어두고 까먹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왜 원유진 손에서 보게 된 건지 의아했다.그래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스케치북 커버에 성유리 이름까지 적혀있는 성유리의 것이 맞았다.“어머, 성유리!”그에 입이 째지게 웃던 원유진은 성유리를 부르며 말했다.“얼른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네 거지?”“유정이가 너 그림 잘 그린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어?”“일진이 나를 사랑한다고?”원유진이 말을 뱉자마자 주위에 있던 원유진 무리들이 따라 웃었다.성유리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만 뺏으려 했다.지금의 성유리는 스케치북이 어떻게 원유진한테 있는지 따져 물을 용기도 없었다.그리고 그걸 눈치챈 원유진이 성유리가 다가오자 바로 옆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던져주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받은 사람을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며 무슨 릴레이 전달 시합을 하는 것처럼 다들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성유리는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강아지 같았지만 성유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금의 성유리는 그들이 뒤 내용을 읽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건 성유리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건데 거기에는 청춘멜로뿐 아니라 성유리가 박한빈을 혼자 짝사랑하며 끄적인 것들도 적혀있었다.그래서 스케치북이 다시 원유진 손에 들어간 틈을 타 성유리는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원유진은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성유리와 원유진 둘 다 힘을 빼지 않으니 스케치북은 버티지 못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성유리 손에 절반이 들려있었고 원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다른 절반은 원유진에 의해 하늘로 뿌려졌다가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성유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아 스케치북의 다른 절반을 주워들었고 그 소동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원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제가 성유리를 괴롭힌
그래서 진무열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 박한빈의 지금 눈빛은 무언의 경고였다, 더는 성유리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그에 진무열이 옅은 웃음을 흘리자 박한빈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성유리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파티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차에 탄 박한빈은 “펑”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세게 닫았다.그 분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세기에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성유리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지만 손에 든 종잇장들은 어김없이 손을 뻗는 박한빈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그에 성유리는 동공이 확 작아지며 다급히 외쳤다.“돌려줘!”그건 박한빈이 2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지만 성유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봤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성유리는 화가 나 털이 곤두선 고양이마냥 달려들어 손가락을 펼치며 박한빈 손에 들린 종잇장들을 빼앗으려 했다.처음에는 그저 무엇인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 박한빈도 성유리의 태도를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녀에게 종이를 빼앗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제 큰 손을 들어 성유리의 두 손을 고정시켰다.“놓으라고! 그건 내 거야!”박한빈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성유리를 무시하며 종잇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때는 차가 이미 떠난 뒤라 차 안의 어두워진 불빛 때문에 박한빈이 불을 켜려 했다.그런데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 쪽으로 몸을 기울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춰왔다.그 순간 박한빈은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건 박한빈이 기억하건대 성유리가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맞춰온 입이었다.자라온 환경 탓인지 아니면 사람이 원체 보수적인 탓인지 이런 쪽에선 한 번도 주동적인 적이 없던 성유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에 박한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벙찐 그 잠깐의 틈을 타 성유리는 손쉽게 스케치북을 앗아갔고 바로 제 등 뒤로 숨겼다.그제야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한빈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꺼내.”“이건 내 거야.”더 이상 성유리와 실랑이를 하기엔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박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성유리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지금 도연제에 있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전히 평온한 김서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성유리가 대답했다.“네.”“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할머님 아프시단다,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어젯밤 성유정의 인스타를 보니 박한빈과 둘이 같은 곳에 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건 성유리가 굳이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이 성유리는 김서영의 제안도 거절하려 했다.괜히 반기지도 않는 곳에 억지로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김서영 앞에서 거절의 말을 하려니 그것 또한 막막했던 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김서영의 성격은 박한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방금도 그냥 성유리에게 통보를 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성유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끊긴 전화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십 분이 지나고 도연제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김서영은 성유리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뭐라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에 들렸던 걸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이건 내가 사람 시켜서 준비하라고 한 생선 죽이야, 좀 있다가 네가 직접 할머님한테 드려.”“신문에 난 일 할머님도 아셨어. 평소에도 박씨 집안 명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니까 네가 한 일도 너도 다 못마땅하실 거야 지금은. 그러니까 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김서영이 차분히 말을 마치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보며 물었다.“어머님도... 아셨어요?”“신문 헤드라인에 걸렸는데 어떻게 모르겠니.”성유리는 김서형의 반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성유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김서영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원씨 집안 딸도 어릴 때부터 안하무인이었어.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과했던 게 맞아. 네 신분도 생각했어야지. 좀 있다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