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어 담배 두 대를 피고 난 박한빈은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고명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대표님?” 고명도는 그의 전화를 빠르게 받았다. 박한빈은 라이터를 휙 던져버리고는 입을 열었다. “같이 일을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을 다 마쳤습니다. 하지만 고 대표님 쪽의 성의가 어떤지는 저한테 보여주셨으면 하는데.” ... 드림 타운. 성유리가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연정우는 거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는 무선 이어폰을 낀 채로 노트북으로 계속 타자를 했고 성유리는 조심스레 그를 불러보았다. “정우야.” “어. 잠깐만.” 그는 통화를 하던 사람과 양해를 구하고는 성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밤에는 안 돌아갈 거야?” 성유리가 물었다. “응. 아직 집에 문제가 있어서.” 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다음 주에 또 출장이 있는데 유리 네 집에서 며칠만 더 얹혀살면 안 될까?” “그래 그럼. 거실에 있는 물건들은 마음대로 써도 돼.” 말을 마친 성유리가 뒤를 돌아 연정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리야.” “프로겐 끓여서 주방에 뒀어. 가서 조금만 마셔 봐.” 성유리는 이제 감기 기운이 거의 다 나았다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연정우는 이내 업무에 집중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주방으로 향해 프로겐를 마셨다. 맛도 꽤 있는 프로겐를 한잔 다 마신 성유리는 목 상태가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것을 느꼈다. 성유리가 비파고가 담겼던 컵을 씻으려 할 때, 연정우가 거실에서 주방으로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요즘 별일 없었지?” “응.” 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했다가 연정우에게 다시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있겠어?” “그럼 됐어. 다음 달에 외할아버지 생신인데 나랑 같이 갈래?” “그래.” “내가 말한 곳은 금성인데 괜찮아?” 연정우의 물음에 성유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가? 금성은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인가?” “
“성 대표님, 고 대표님이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요.”성유리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비서가 말했다.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제와 달리 고명도는 열성스레 맞이했다.“유리야, 왔어? 어젯밤에 일찍 가는 것 같던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네, 남자친구가 돌아왔어요.”성유리의 대답은 매우 차분했다.이 말에 고명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갑자기 어젯밤 박한빈이 자신에게 걸었던 그 전화를 떠올렸다.‘그런 거였구나.’고명도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말했다.“연 교수님이 돌아오셨어? 이번 출장에 꽤 오래 간 것 같은데?”“네, 한 달 가까이 있었어요.”“이렇게 출장을 자주 가는 것도 장거리 연애지 않아? 두 사람의 감정에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렵지 않아?”고명도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고 대표님과 상관이 없지 않아요? 이런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려고 아침부터 저를 부르셨어요?”“내가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거잖아. 어쨌든, 너 예전에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으니.”성유리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계속 말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명도는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사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인주 프로젝트에 관해 얘기해볼까 해.”“네?”“박 대표님 쪽에서 이미 우리와 협력하기로 동의했어.”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표정은 오히려 눈에 띄게 변했다.“아, 직접 동의한 건 아니고. 우리 제안에 관심이 좀 있다는 얘긴데 계약서 같은 건 당연히 우리가 계속 쟁취해야지. 오늘 밤에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인주처럼 큰 프로젝트에 초기 투자만도 수천억 원이 들었고 지화라 하더라도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데 어떻게 며칠 만에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고명도가 이렇게 말하니 성유리는 오히려 박한빈이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뭐가 그리 급한 걸까?이 인기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이 경쟁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정민재가 그녀의 곁을 따라다녔다.성유리의 지난번 ‘귀띔'을 통해 그는 이제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는 묻지 않지만 길에서 여전히 성유리를 보며 계속 눈빛을 반짝였다.성유리가 그를 향해 눈을 흘긴 후에야 그는 마침내 조용해졌다.성유리의 예상과 달리 오늘 저녁 술자리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고명도는 주동자로서 박한빈과 계속 협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성유리는 옆에서 시간만 보내며 함께 술을 권했다.모든 과정에서 박한빈은 그녀에게 특별히 눈빛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곧 뭔가 깨달았는데 순간 자신이 마지막으로 박한빈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박한빈은 어떤 사람이던가.옷이 더러워져도 두 번 다시 입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계속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단 말인가.그는 그럴 리 없다. 그의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성유리는 숨통이 트였다.마침 이때 그녀의 휴대전화도 울리기 시작했는데 맑은 벨 소리가 룸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성유리는 얼른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죄송해요. 전화 좀 받을게요.”“남자친구지?”고명도는 웃으며 말했다.성유리는 웃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휴대전화를 들고 나갔다.전화를 건 사람은 확실히 연정우였는데 왜 이렇게 늦었는데도 아직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식사 자리가 있어.”“아직 안 끝났어?”“응, 거의 다 됐을 거야.”성유리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상대방은 만족스럽지 못한 듯 한마디 했다.“기침이 아직 낫지 않았어.”“알아. 별로 안 마셨어.”“어디 있어? 내가 데리러 갈게.”괜찮다고 말하려던 성유리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언제 끝날지 아직 몰라. 거의 끝나갈 때 전화할게.”“그래, 그럼 조금만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마.”“알았어.”실제로 담배와 라이터까지 꺼내든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연정우에게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담배와 라이터를 갖다 놓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하
성유리는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그러나 이 어지러움은 그녀에게 너무 익숙했다.게다가 이 순간 룸에 아무도 없다는 것까지...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박한빈 씨,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쓰다니요!”그녀는 눈이 빨개진 채 주먹을 꼭 쥐고 분노에 찬 눈길로 믿기지 않은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팔은 물론 몸 전체가 가볍게 떨었다.박한빈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곧 반응하고 대답했다.“나 아니야.”“당신이 아니면...”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득 한 사람, 즉 고명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어쩐지!오늘 밤 박한빈의 태도를 보면 그들과 100% 협력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오늘 고명도는 그녀 앞에서 매우 자신감을 보였다.그렇다면 그는 오늘 밤 자신을 박한빈에게 선물로 주려는 속셈이었다.하지만 이런 생각에 성유리는 아주 빨리 냉정해졌다.그녀도 그와 계속 논쟁하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의 술잔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고 박한빈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하지만 성유리가 막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을 때 박한빈이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훌쩍 안아 들었다.이 동작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손발은 내저으며 몸부림쳤다.“내려줘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박한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그러던 중 성유리도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단순히 어지러운 게 아니라 이런 느낌은... 전에도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수백 번 욕설을 퍼부으며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휴대전화를 꺼내자마자 박한빈에게 빼앗겼다.약물 때문에 성유리의 사고와 행동도 조금 느려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몇 초 후에야 박한빈의 행동을 알아차렸다.“뭐 하는 거예요? 핸드폰 돌려줘요!”“휴대전화로 뭘 하려고?”박한빈이 가볍게 웃었다.“남자친구에게 알리려고? 그 자식이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져
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하고 진지했다.그런데 문득 미화로에서 그가 진무열을 발로 걷어찼을 때의 진지했던 표정이 떠올랐다.오직 이때에만 성유리는 그의 조용한 눈빛에 감춰진 광기를 읽을 수 있었다.그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곧 차는 호텔 주차장에 세워졌다.박한빈은 다시 다가와 성유리를 안았다.“놔... 놓으라고!”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박한빈 씨,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요. 당신이 스스로 끝이라고 말했잖아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데 그가 예약한 스위트룸은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었다.방문을 닫는 순간 박한빈은 더는 억제하지 않고 성유리를 문에 밀착했다. 그러고는 몸에 걸쳤던 외투를 확 잡아당겼다.“놔요! 박한빈, 이 나쁜 놈!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뭐야? 당신 전에는...”“후회했어.”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말에 성유리는 어리둥절해졌다.“날 뭐로 보는 거예요?”한참 후에야 그녀는 중얼거렸다.“박한빈 씨, 당신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끝내고 싶으면 끝내고 후회한다고 하면 다시 시작해야 해요?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천하게 보여요?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하고 다시 하고 싶으면 다시 시작하고? 박한빈 씨, 계속 나한테 이러면 평생 미워할 거예요.”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녀의 옷을 벗기려던 손이 잠깐 흠칫하더니 눈을 들었다.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젖은 눈동자 속에는... 한이 엿보였다.박한빈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웃더니 한마디 했다.“그래, 미워해.”그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예전에 그녀가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분명히 박한빈이 그녀에게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했었다.그는 그들 사이의 마지막 가능성을 차단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그녀는
선혈은 곧 성유리의 두피와 머리카락을 통해 스며 나왔다.박한빈이라도 지금 이 순간은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한참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곧 성유리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았다.이 기회를 틈타 성유리도 그를 앞으로 힘껏 밀었다.그녀는 더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몸을 가누고 돌아서서 문을 열려 했다.하지만 아직 발을 내디디기도 전에 박한빈이 이미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거 놔! 박한빈, 개자식 이거 놔!”성유리는 황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박한빈이 손을 놓을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여 그의 팔을 덥석 물었다!미쳐버릴 것만 같은 그녀는 마음이 약해질 겨를도 없었다.곧 그녀는 비릿한 피 맛을 느꼈지만 박한빈은 신음조차 하지 않았다.성유리가 계속 물려고 할 때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에 데려다 줄게.”...성유리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병원에 있었는데 연정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옆에 앉아 있었다.하지만 잠에서 깬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황급히 물었다.“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어?”“괜찮아.”“앉을래?”연정우가 또 물었다.“어지러워.”“그래, 그럼 의사가 다 검사해 준 다음에 보자.”연정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고는 다시 물었다.“너... 나한테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얘기하고 싶어?”연정우가 되물었다.성유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푹 쉬어.”“고명도 때리러 갈 거야.”그러자 갑자기 성유리가 말했다.연정우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웃으며 물었다.“이건 좀 아니지 않아?”성유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표정을 짓자 연정우도 웃음을 거두며 대답했다.“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어.”그의 이 생각은 오히려 성유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연정우를 바라
죽을 먹고 난 성유리는 정민재를 보았다.그는 지금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얼굴로 자신이 여기에 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성유리는 그를 쳐다보고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들어오세요.”“성 대표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정민재는 들어오자마자 설명했다.“어젯밤 고 대표님이 억지로 끌고 가시며 성 대표님이 박 대표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더러운 수법을 쓰신 줄 몰랐어요.”정민재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성유리는 정민재를 비난하지 않았다.“고명도에게 전화해서 내가 만나야 한다고 말해요.”“지금요?”“그래요. 지금.”성유리의 말에 정민재는 더는 묻지 못했다.고명도가 찾아오자 그녀는 정민재와 간병인을 모두 내보냈다.고명도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고 심지어 계획이 실패한 것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고 대표님이 내 술에 약을 탔어요?”성유리가 직접 물었다.고명도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어젯밤 병원에 실려 왔는데 건강 상태는 어떤지 의사가 잘 알고 있고 검사 결과도 정확하게 나왔으니 잡아떼지 못할 거에요. 고 대표님이 아니라면... 그럼 박한빈 씨인가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했다.고명도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인주 프로젝트는 제가 노력해 볼게요.”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고 대표님이 인성에서 나갔으면 좋겠어요.”“뭐라고?”“제가 방금 제대로 말하지 못했어요?”성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인주 프로젝트는 전체 그룹의 이익이라고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희생으로 얻은 프로젝트인데 무슨 근거로 고 대표님이 그 몫을 챙기려는 거죠?”“협력이 확인되면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올해 사업 중점으로 추진할 거예요. 하지만 이 작업은 분명히 당신이 필요하지 않으니 고 대표님도 당연히 여기에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어요.”“제가 이러는 건 다 고 대표님이 잘되라는 거예요.”성유리
성유리의 상처는 큰 문제가 없었기에 검사가 끝난 후 다음날 퇴원했다.다만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마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는데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고 했다.성유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레스토랑에 나타나자 오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봤다.성유리는 조용히 그곳에 앉아 유리창 밖 인성의 번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빨간 전조등과 멀리 떨어진 동네에 켜진 불빛, 그리고 길거리에 과일과 다른 음식을 파는 임시 노점이 있어 도시 분위기를 이루었는데 고층 빌딩이 널려 있는 금성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성유리가 넋을 잃고 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레스토랑 로비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발소리였다.그녀는 그를 안지... 몇 년 되었다.성유리는 자신이 언제부터 그를 몰래 지켜봤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그가 블랙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모든 새콤달콤한 음식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어두운색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을 알며 그가 즐겨 매는 넥타이 스타일이 무엇인지 안다.이런 생활 습관들은 그들이 결혼 2년 동안 그녀가 조심스럽게 관찰한 것이고,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그녀 스스로 몰래 지켜본 결과이기도 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원히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이제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젯밤의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그였다.이기적이고 잔인하고 미친 사람 말이다.“오래 기다렸어?”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오늘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재킷 없이 소매를 풀어 위로 걷어 올리자 하얗고 탄탄한 팔뚝이 드러났다.그리고 그 팔뚝에는 또 하나의 또 다른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그 자국은 매우 깊어서 지금도 아래쪽에서 핏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성유리는 자연히 그 이빨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