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러세요?” 박한빈은 차에 앉아 움직이지 않은 채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성유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녀를 쳐다본 박한빈은 갑자기 차를 돌렸다. 박한빈이 미친 듯한 속도로 운전하기 시작하자 성유리는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단단히 잡은 채 앞만 주시했다. 박한빈은 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가 한바탕 소란으로 뒤덮인 모습이 보였다. 집 안에서는 도우미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던 김난희는 가슴을 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래서 내가 저런 여자를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던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째야? 이젠 우리 박씨 가문 전체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거냐!”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박한빈은 그녀를 뒤로한 채 서둘러 2층으로 뛰어 올라갔고 그의 발걸음은 평소와 달리 아주 다급했다. 그런 모습은 성유리에게도 낯설었다. 곧 의사와 구급차가 도착했고 잠시 후, 박한빈은 피투성이가 된 김서영을 안고 내려왔다. 김서영의 흰색 원피스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메스꺼움에 사로잡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모든 것을 토해냈다. 그날은 입동 날이었다. 금성 사람들에게 입동은 한 해의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 보양식을 먹고 술빚은 경단을 나눠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김서영은 과도로 자신의 복부를 찔렀고 의사는 칼이 20cm 깊이까지 들어갔다고 말했다. 성유리는 그녀가 얼마나 강한 결심을 했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김서영이 찌른 곳은 복부 중에서도 자궁에 가까운 자리였다. 그녀가 방금 전, 성유리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자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잡은 성유리는 그 손이 너무 차가워 깜짝 놀랐다. 마치 한 구의 시신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는 박한빈의 손이 성유리는 믿기지 않았다. 만약 박한빈이 지금 그녀 옆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성유리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마도 성유리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서일까, 박한빈 또한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먼저 가세요. 제가 여기 있으면 되니까.” “아니. 난....”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지만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맞아. 깨어나셔서 먼저 보는 사람이 나라면 또 기분이 언짢아지실 거야. 겨우 살았는데 다시 죽고 싶어질 수도 있을 거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다시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너도 좀 쉬어야지.” “괜찮아요. 여기 있어도 잘 휴식할 수 있어요. 게다가 간병인 한 명만 남겨두고 가면 박한빈 씨도 안심이 안 되시잖아요.” 성유리의 말에 이번엔 박한빈이 침묵했고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됐어요. 이제 그만 가보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전화 드릴게요.” 결국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대로 떠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웬일인지 머릿속이 새하얘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성유리의 말에 움직이는 로봇처럼 박한빈은 앞으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밖을 나오자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뭔가 떠오른 박한빈은 바로 운전대를 잡아 본가로 향했다. 저녁에 그렇게 큰 일이 있었지만 본가는 이미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김난희와 가사도우미들도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다 평화로워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그날 처음으로 그 집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섬뜩한 공간인지 느꼈다. 마치 누구의 생사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요하고 평소와 다른 점이 없이 똑같은 공간이 무서워졌다. 발걸음을 뚝 멈추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다시 안으로 발길
박한빈의 말을 끝으로 방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김난희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는지 손으로 이불을 꽉 잡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김난희는 한참 후에야 피식 웃더니 입을 뗐다. “그래서?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니? 너 이 빌어먹을 놈! 내가 너 같은 새* 하나 처리하는 방법도 없을 것 같아?” “잊었나 본데 지금 박세빈은 지화 그룹에 있어.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걔한테 넘길 수 있다고.” “네. 박세빈도 있죠.”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난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원인은 걔한테 있나요?” “그러기엔 너무 안 맞지 않나요? 전부터 박세빈의 존재를 알고 있었잖아요. 정말 갑자기 박세빈을 집에 들였다 해도 어머니는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만약 박세빈의 신분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면 모를까.” 박한빈은 아주 명확한 사고방식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김난희에게 따졌고 그녀는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역시 내 말이 맞나보네.’ “정말 제 말이 맞나보군요. 근데 길가에 흔히 보이는 잡초 같은 애가 뭐 숨길 게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저 정도로 흥분하신다면 아마 박세빈 친모 때문일 확률이 높겠죠.” 박한빈은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 아버지와 결혼하기 싫었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끝까지 어머니한테 매달렸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 집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홀로 박씨 가문에서 수년간 버티셨고요.” “비록 나중에서야 진성민 씨가 나타나긴 했지만 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동안 혼자 지내셨으니 외로울 만도 하죠.” “깨어나신 뒤에 진성민 씨 사망 소식을 듣고도 아주 침착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한 번에 무너지신 원인도... 아마 박성훈 씨도 어머니를 속이셨기 때문이겠죠.” “그럼, 과연 아버지
김서영의 물음에 성유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침묵했고 때마침 의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성유리는 냉큼 자리를 비켰고 김서영은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의료진들에게 몸을 맡겼다. 무슨 말을 하기도 거부하는 김서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까지 꽉 깨물었다. 그녀의 모습에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야 할 그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성유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박한빈은 통화를 끊더니 직접 앞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깨셨어?” 그의 물음에 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제 그만 가서 푹 쉬어. 내가 가서 얘기 좀 나눌 테니까.” 박한빈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움직였지만 성유리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뭐지?’ 이상한 성유리의 행동에 박한빈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녀의 뜻을 알겠다는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잘 얘기할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성유리는 딱 봐도 박한빈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살짝 어루만지더니 병실 안으로 들어섰고 간병인은 그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박...” 그러나 박한빈은 간병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가보세요.” 김서영은 박한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떨고 있었지만 여전히 자는 척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박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맡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김서영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근데 전 좀 이해가 안 가네요. 어젯밤 일은 미리 계획을 세워두신 겁니까?” “저한테 성유리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대답은 하지 마십시오. 비록 전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유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리 계산을 다 한 거라면 전에 했던 일들은 뭐가 되는 겁니까? 투자자들과 이사회 사람들과 함께 벌인 그 일들은 저와 겨루기 위해 그런 것
성유리는 병원을 떠나지 않았고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박한빈은 병실에서 나오다 여전히 밖에 있는 성유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병실 안만 쳐다보았다. “지금 주무셔.” 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먼저 말해줬다. “괜찮으세요?” 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을 보며 되물었다. “무슨 얘기 하셨는데요?”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대답하세요.” 성유리가 살짝 짜증이 난 말투로 말하자 박한빈은 발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나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 “자고 일어나면 그때 얘기해줄게.” 박한빈은 잠시 동안은 성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주기 싫어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도 물어보기를 포기했고 박한빈은 정말로 그녀와 함께 집에 가 잠만 자려고 했다. 성유리는 자기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연제에 도착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바로 잠들었다. 방안의 커튼은 쳐져 있고 옆에 작은 조명만 켜져 있으니 성유리는 다시 깨어나서도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몰랐다. 성유리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핸드폰을 찾으려 손을 쭉 뻗는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깼어?” 성유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딱 이 시간에 깰 줄 알았어.” 박한빈은 기분이 꽤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좀 끓였어. 내려와서 같이 먹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죠?” “9시쯤일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박한빈은 방안으로 돌아와 커튼을 활짝 펼치더니 성유리에게 다가왔다. “가자.” 성유리는 그의 말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고 준비돼 있는 많은 양의 면을 보고는 인상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맞아.”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응? 사진 속에 적혀있는 날짜와 시간을 보면 모르겠어?”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박성훈 씨, 그러니까 박한빈 씨 아버지와 박세빈 씨 어머니가 먼저 알던 사이었고 김서영 씨와 결혼한 원인도 외모 때문이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박한빈은 아주 담담하게 맞다는 대답을 했지만 성유리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에서 발생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애써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침묵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왜 나랑 박세빈이 그렇게 닮았는지 궁금했어. 알고 보니까 우리 두 사람 엄마가 이렇게 똑같게 생겼더라고.” “박한빈 씨 어머님도... 최근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건가요?”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박한빈에게 물었다. “응. 전에 박성훈 씨가 밖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본인이랑 많이 닮아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여자의 대체품이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봐.” “할머니가 박세빈을 집에 들이기 전에 어머니는 많이 반대하셨대. 근데 그때 할머니가 사실 사진 속 두 사람이 서로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어머니는 박씨 가문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고 말하셨나 봐. 어머님은 아마 본인이 제삼자 같았을 거야. 마치 다른 여자의 삶을 빌려서 쓰는 도둑처럼 느껴졌을 거고.” 박한빈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담담했지만 표정은 굳어있었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화가 나는지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박한빈에게 물었다. “이건... 어머님이 알려주신 건가요?” “응.” “그럼 두 사람...” “화해했다고 할 수 있지.” 박한빈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박한빈이지만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대답을 하기도 전, 이번에는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은근슬쩍 박한빈의 핸드폰을 쳐다봤는데 발신자는 다름 아닌 에릭이었다. 박한빈은 핸드폰과 성유리를 번갈아 보더니 전화를 받으러 뒤를 돌았다. 수화기 너머 에릭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박한빈의 인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성유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말?” 성유리의 귀에 박한빈이 대답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그래서?” “알겠어.” 간단한 대답만 내뱉던 박한빈은 바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에릭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어?” 전화를 끊은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네.” “둘이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졌지?” 그의 말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전화 한 통 한다고 다 친하지는 않아요.” “내일 비행기로 금성에 온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고 너한테 말해줬어. 이래도 안 친한 거야?” 박한빈은 성유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고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걔한테 속지 마.”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사람 같지만 사실은 냉혈하고 매정한 사람이야. 그리고 넌 정말 걔한테 연인이 없다고 생각해?” “절대 그렇지 않아. 에릭 그 새*는 전국 각지에 다 여자가 있다고. 게다가 매번 파티를 벌일 때마다 제일 미친 듯이 노는 사람도 에릭이야. 잊었어? 전에 너도 걔한테 잡혀서 몹쓸 짓을 당할 뻔했잖아. 에릭 같은 사람과는... 절대 가까이하지 마.”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에게 짧은 충고 말들만 하려고 했지만 말하다 보니 격양돼서 친구의 뒷담화만 잔뜩 늘어놓았다. 이런 당당하지 못한 행동은 박한빈 본인마저 민망하게 만들었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성유리의 태도는 박한빈의 안색을 더욱 어두워지게 했다. “걱정마세요.” 이때,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절대 혼자서는 에릭 씨를 만나지 않을 테
박한빈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멱살을 잡은 손을 놓더니 앞쪽으로 걸어갔고 에릭은 금세 따라붙으며 말했다. “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고 내가 어디에 묵는지 물어봐도 돼? 너희 집인가?” “호텔.” 박한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에릭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했다. 오늘 박한빈에게는 다른 일이 있어 에릭을 호텔까지 데려다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차로 이동하려던 찰나, 에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너희 부인도 내가 오늘 도착하는 거 안다더라. 나한테 환영회를 열어준다던데 저녁엔 너도 올 거지?” 박한빈은 고개를 휙 돌려 에릭을 쳐다봤고 그는 씩 웃으며 계속 말했다. “괜찮아. 네가 안 와도 우리 둘만 밥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물론 성유리가 있으니 박한빈이 안 갈 리 없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네가 걔랑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건 도대체 뭐야?” 성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대답했다. “박한빈 씨가 먼저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저녁에 한빈 씨가 초대한다고 해서 제가 온 건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에릭의 계략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릭은 그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고 얼마 안 지나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는 새하얀 양복으로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맸는데 마치 어떤 중요한 연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처럼 근엄했다. 게다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에릭은 마치 북유럽 그림에서 걸어 나온 왕자 같았다. 심지어는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도 에릭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에릭은 항상 사람들 앞에서 품위와 우아함을 유지했고 성유리가 자신의 눈에 깃든 혐오를 알아챘음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는 그의 모습에 주문을 받던 직원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직원이 나가고 나서야 에릭은 성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사모님, 저를 이렇게 대접하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