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박한빈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마치 지금 자신이 그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실행할 것만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저 홍지은 씨 싫어해요.”성유리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박한빈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좋아, 그럼...”“하지만 박한빈 씨가 손대는 건 원하지 않아요.”성유리가 이런 말을 덧붙이자 박한빈은 의아해졌지만 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그 말에 박한빈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러자 성유리가 물었다.“안 돼요?”“아니. 그게 아니라... 너 화 안 난 거야?”솔직히 말해, 홍지은이 어떻게 되든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직 성유리의 감정뿐이었다.방금 전까지는 이 일을 잊고 있던 듯한 성유리였는데 다시 언급되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박한빈은 방금 했던 말을 얼른 넘기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 이미 홍지은 씨한테 대답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그리고 다른 일들은 박한빈 씨가 방금 다 설명했잖아요. 게다가 물기까지 했고.”성유리의 말이 끝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그러니까... 과거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은 없다는 거죠.”성유리의 명확한 대답이 떨어지자 박한빈은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었다.꽉 조여 있던 감정이 풀리면서도 성유리를 감싸고 있던 팔에는 오히려 더 힘을 줬다.“숨 막혀요. 좀 놔줘요.”성유리가 숨이 막힌 듯 박한빈을 손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대답 없이 살짝 힘을 뺄 뿐 여전히 그녀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한참을 더 버둥거리다가 결국 포기한 성유리가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아까 제 말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요.”“무슨 말?”“홍지은 씨에 관한 일이요.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
“사모님!”누군가의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홍지은은 순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상대가 점점 가까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상대는 이미 홍지은의 손을 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저를... 왜?”홍지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직됨이 묻어 있었다.솔직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예전 학창 시절에도 이런 일을 수없이 봐왔다.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친절하게’ 누군가를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 뒤, 마음껏 ‘즐기는’ 광경.단지 그때는 자신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뿐 지금처럼 직접 끌려가는 입장은 아니었다.막상 위치가 바뀌니 마음속에 스며드는 건 불안감뿐이었다.사실, 오늘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경매장에서 자신과 성유리에 대한 거짓말이 탄로 난 이후, 며칠 새 단체 채팅방에서도 강제로 쫓겨난 상태였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이건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하지만 결국 홍지은은 오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상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임산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홍지은은 이미 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자 홍지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홍지은 씨 오셨어요?”성유리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몸에는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성유리는 말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홍지은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왜 가만히 서 계세요?”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서 앉으세요.”그 말을 듣고서야 홍지은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다가갔다.이미 누군가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성유리의 옆자리였다.“지난번 경매장에서는 죄송했어요.”
성유리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도도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화에 있어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하나 다 성의 있게 대답했다.누군가 다음번에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자거나 음악회를 들으러 가자고 제안하면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흔쾌히 응했다.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불편해하고 침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홍지은이었다.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그녀는 간단히 양해를 구한 뒤,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세면대 앞에 선 홍지은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 안의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그제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왜 자신을 도와 거짓을 꾸며줬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얼마 전까지 신영지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그녀와 성유리의 관계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남편 측과의 협력도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성유리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했든 간에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남은 건, 성유리를 얼마만큼 이용할 수 있는가 뿐이었다.홍지은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성유리였다.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성유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했다.그러나 홍지은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그 질문에 성유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뭐 하려는 거냐고요?”“왜 나를 도와서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 해준 거냐고.”“전 도와준 적 없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그저 지난번 경매장에서... 너무 죄송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홍지은은 성유리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계속 물었다.“네가 뭐가 미안한데? 지금 박한빈 씨가 온 신경을
성유리는 기사한테 자신을 데리러 오라는 부탁을 마친 상태였다.그런데 뒷좌석에 올라탄 후에야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이미 차에 탄 상황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녀는 굳이 다시 내리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박한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탄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 위를 질주했다.그러다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차가 길가에 멈춰 섰다.“이리 와.”“거의 다 왔잖아요.”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성유리는 결국 차에서 내렸다.원래는 조수석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박한빈이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이내 박한빈은 그녀의 시선이 앞쪽을 향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연정우였다.연정우 역시 예상치 못한 만남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그녀를 향해 다가오려는 것 같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시선을 확실히 끌기 위해 차 문을 일부러 세게 닫았다.쾅!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연정우도 뒤늦게 그를 보았다.연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성유리를 그대로 품에 안아버렸다.한편, 성유리한테 다가가려고 걸음을 옮기던 연정우는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고 그때부터 침묵이 흘렀다.한동안 서로를 지켜보던 끝에, 박한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연 대표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연정우는 그의 말을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 침묵하다가 이내 시선을 천천히 성유리에게 돌렸다.그리고 잠시 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군요.”그러나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옆에 있던 박한빈 역시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제가 연정우랑 무슨 일이라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박한빈의 생각을 간파하며 물었다.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고 평온하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급회전을 하더니 이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성유리는 깜짝 놀랐고 그 탓에 머리를 옆 창문에 부딪쳤다.쿵!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가장 먼저 박한빈의 팔을 세게 내리쳤다.“대체 뭐 하는 거예요! 엄청 아프잖아요.”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주먹으로 툭툭 치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만히 있었다.그러더니 몸을 기울여 성유리의 이마를 유심히 살폈다. 다친 곳은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박한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뭐라고요?”“네가 직접 생각해 봐. 방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너... 연정우 씨랑 무슨 일이라도 있을 생각이야?”그 말에 성유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뭘 멋대로 지어내고 있냐고요?”성유리는 말하며 박한빈의 손을 확 밀쳐냈다.“방금 네 말투가 딱 그런 뉘앙스였잖아.”“제가 말한 건 박한빈 씨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는 거였잖아요. 제가 무슨 일을 벌이겠다는 뜻이 아니라고요.”“그래서 두 사람 예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고?”결국, 박한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사실 요즘 그는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늘이와의 관계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이번 주 금요일에는 하늘이의 유치원 공개 수업에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과거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입 밖에 꺼내지 않게 됐고 이렇게 계속 평온한 날들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더 이상 그 이름을 떠올릴 일도 거의 없었다.그런데 오늘,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고 나니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들이 박한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그 사람과 성유리는 한때 함께였던 사이다.심지어 결혼까지 생각했었고 같은
박한빈이 말했던 대로 연정우는 지금 금성에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업계에서 몸을 담그고 있으니 마주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머리론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막상 눈앞에서 연정우를 본 순간,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런데도 연정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와인잔을 들고 박한빈 쪽으로 다가왔다.“박 대표님.”박한빈은 어디서든 늘 주목받는 사람이었으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방금까지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런데 연정우가 갑자기 불러 세우면서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었고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박한빈은 말을 거는 연정우를 흘깃 본 뒤, 금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시간이 흘렀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연정우의 인사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연정우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며칠 전 길에서 사모님을 뵀었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사모님.그 세 글자에 몇몇 사람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에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어떤 여자를 데리고 조문을 왔던 기억이 났다.그때 함께 온 여자가...“당연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마침내 침묵하던 박한빈이 대답했지만 얼굴에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제 아내니까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굳이 연 대표님께서 걱정할 필요는 없고요.”“그럼 다행이네요. 사실 전부터 걱정했거든요. 예전에 사건이 있었잖아요? 혹시나 사모님께 영향을 미쳤을까 해서요. 지금 보니 다 회복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연정우의 말에 박한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잔뜩 찌푸려졌다.“그 사건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연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참 좋은 사람이었는데...”“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연정우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어요. 너
그래서 그 남자가 다가오는 순간, 연정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식사 대접하겠습니다.”그 말을 남긴 채,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그리고 남겨진 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행사 주최자뿐이었다.박한빈은 술을 마셨기에 운전기사에게 차를 맡겨 집으로 돌아왔다.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는 성유리가 외투를 걸치는 모습을 발견했다.그 시각 성유리는 마침 외출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어디 가려고?”“박한빈 씨? 어떻게 벌써 돌아왔어요?”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순간, 박한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리고 곧바로 성유리를 훑어보았다.연한 색감의 원피스 위에 걸친 깨끗한 흰색 외투.최근 들어 성유리의 안색도 한층 좋아졌다. 덕분에 간단히 립스틱만 발랐을 뿐인데도 더없이 매혹적으로 보였다.하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어디 가려는 거야?”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박한빈 씨가 저보고 데리러 오라고 했잖아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도 떠올렸다.‘아, 맞다.’애초에 그는 이번 술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가 몇 번이나 초대했고 또 그 사람이 나이도 있는 편이라 마지못해 참석한 것이었다.애당초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기에 미리 성유리에게 시간을 맞춰 데리러 오라고 했던 거다.즉, 성유리가 어디 가려던 게 아니라 자신을 데리러 오려던 것뿐이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긴장을 풀고 나지막이 말했다.“재미없어서 그냥 먼저 왔어.”그러면서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성유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술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별거 아냐.”“연정우 만났죠?”정곡을 찌르는 한마디.그 한마디에 박한빈의 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
성유리는 손에 물컵을 들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행동에 그만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순간 멈칫하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힘을 준 것도 아닌데 그 미묘한 감촉에 성유리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컵을 꼭 쥐었고 박한빈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일단 좀 놔보세요.”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계속 이러면 물 다 엎을 거예요.”점점 짜증이 묻어나는 성유리의 목소리였지만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그대로 들이켰다.그리고 텅 빈 컵을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그렇게 컵과 대리석이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성유리의 치맛자락은 허리까지 올라갔고 손가락은 조리대 가장자리를 단단히 움켜쥔 상태였다.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집 안이 워낙 고요했기에 작디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더욱 크게 울렸다.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혹시라도 가정부나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그렇게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할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그 전에 아마 박한빈부터 물어뜯고 싶을 것이다.입술을 너무 세게 깨무는 바람에 상처가 나고 혀끝으로 피 맛이 스며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성유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그 소리를 삼키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대로 입을 맞췄다.박한빈의 입안에서는 아직도 꿀물의 달콤한 향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성유리의 입안에 퍼져있던 은은한 피 맛.두 개의 맛이 섞이며 묘한 감각을 만들어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성유리가 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던 찰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뭐 해? 엄마는?”목소리를 듣는 순간 성유리의 몸이 얼어붙었다.박한빈의 손이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었고 이마에 힘줄이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