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성유리가 이우빈에게 식사 약속을 한 것은 그저 형식적인 응대였을 뿐이었다.이미 이우빈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이상 괜히 기회를 줄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며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쥔 채 말했다.“이우빈 씨께서 정성껏 초대해 주셨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디에서 식사할 예정인지 궁금하군요.”박한빈의 말에 유재국의 표정이 순간 딱 굳어졌다.보통 이런 단체 회식은 메운탕 집이나 고깃집 정도에서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수백, 수천 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최고급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그렇지만 박한빈의 신분이 촬영팀의 조명 담당자나 촬영기사들과는 분명 다른 급이었다.부잣집 도련님 같은 그를 고깃집으로 데려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았다.유재국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박 대표님께서는 어떤 음식을 드시고 싶으신가요?”“저는 음식에 별다른 욕심이 없습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유재국은 속으로 안도하며 이제야 회식 장소를 알려주려고 했다.그런데 그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이 근처에 괜찮은 고급 레스토랑이 하나 있더군요. 거기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박한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재국의 표정이 경직되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웃음을 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성유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 정도 돈이 이우빈에게 큰 부담이 되는 건 아니었다.요즘 한창 잘나가는 인기 배우인 그는 하루 출연료만 해도 몇억이 되는 정도였다.하지만 문제는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비용을 무작정 써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촬영팀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다.그러나 그 장소가 1인당 몇백만 원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면?이건 단순히 대인배 이미지 구축을 넘어서 그야말로 지출의 비효율적인 낭비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박한빈이 그렇게 정해버린 이상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의 귀 끝과 뺨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방금 전 차 안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성유리의 얼굴에 남아 있는 열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게다가 그녀의 머리끈도 아까 차 안에서 박한빈이 잡아당겨 풀려버린 터라 긴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얼굴을 가렸다.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었다.반면, 박한빈은 아까까지도 불만 가득한 욕설들을 쏟아냈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이었다.오히려 성유리의 반응이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박한빈의 기분은 한결 나아져 보였다.그래서인지 이우빈이 다가와서 술을 권할 때도 그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이우빈 씨 원래 술 알레르기 있지 않아요?”성유리는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얼마 전, 이우빈이 술을 조금 마셨다가 온몸이 가렵고 붉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때도 결국 성유리가 직접 알레르기 약을 챙겨줬었다.지금도 단순히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박한빈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그 차가운 눈빛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괜찮습니다.”이우빈은 웃으며 대답했다.“성 작가님께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눈앞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한편, 테이블 아래 박한빈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슬쩍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단박에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러자 성유리는 다시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 더욱 단단히 쥐었다.박한빈은 한숨을 쉬듯 성유리의 손을 거칠게 뒤집어 쥔 후, 힘을 주어 꽉 눌렀다.“아!”성유리는 그 힘에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했다.“작가님, 괜찮으세요?”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이우빈이 그
박한빈이 화가 난 채로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게 게 껍질을 내려놓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미처 박한빈이 화가 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성유리는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보세요. 제가 한빈 씨 거 다 발라놨어요! 빨리...”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릇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더니 곧장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다.“나랑 가자.”박한빈의 얼굴은 잿빛처럼 어두워져 있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다.잔뜩 당황한 성유리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러는데요? 무슨...”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몇 걸음 가던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올렸는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성유리가 힘들게 발라놓은 게살이 담긴 그릇을 다시 집어 들더니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웨이터에게 내밀었다.“포장해 주세요.”웨이터는 박한빈의 기세에 놀라 움찔했지만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더 이상 웨이터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성유리를 끌고 나섰다.성유리는 복도로 나오면서 이우빈을 쓱 쳐다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박한빈이 성유리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무슨 일인데요?”성유리는 이제야 벌어진 상황을 퍼즐조각처럼 맞춰 보려 박한빈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한빈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조금 후, 웨이터가 포장한 게살을 들고나오자 박한빈은 차창을 내리고 그것을 받아 들더니 바로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출발.”박한빈의 태도는 마치 이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했다.쌩쌩 달린 차가 일정 거리를 지나고 나서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이우빈 씨가 뭐라고 했어요?”성유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박한빈은 고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처음엔 그녀도 자신처럼 화가 난 줄 알았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너... 울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붙잡으며 무슨 말을 더 하려 했다.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박한빈이 굳어버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너... 지금 웃고 있는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싸늘하게 식었다.사실 성유리도 아주 오랜만에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았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 아니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럼 그 웃음부터 참아봐.”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아직 제대로 해명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앞좌석에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차 세워요.”“아니,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그러자 성유리가 다급히 말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려버렸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미안해요. 제 잘못이에요. 박한빈 씨를 비웃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 이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박한빈의 발걸음은 빨랐다.성유리는 그를 따라가며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 뚝 멈춰 섰고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성유리는 그대로 그의 등에 부딪쳤다.뒤돌아본 박한빈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방금 뭐라고 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우빈 씨조차 한빈 씨를 좋아한다고요. 그만큼 당신 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잖아요? 이건... 좋은 일 아닌가?”처음엔 나름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결
성유리는 입을 삐죽이며 계속 투덜거렸다.“이건 제 잘못도 아닌데 왜 저한테 화를 내는 건데요?”그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화 안 났어.”“그럼 왜 계속 앞만 보고 가고 저랑 말도 안 하세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이우빈 씨가 대체 뭐라고 이러세요?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촬영장에서 내쫓아 버려요. 어차피 지금 이 영화, 박한빈 씨가 최대 투자자인데.”그 말에 박한빈이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이 영화, 이우빈 씨 소속사도 투자한 거라서 교체하려면 복잡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면 이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괜찮아?”“망해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성유리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가라앉았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진짜?”“당연하죠.”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든 박한빈 씨보다 중요한 건 없어.”방금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박한빈의 한마디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던 성유리였다.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박한빈이 그녀와 똑같이 얼굴을 붉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너무 아파 빼내려 했지만 곧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박한빈 씨, 당신 혹시 얼굴 빨개진 거예요?”“아니.”박한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하지만 눈길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티가 났다.그 반응에 성유리는 더욱 확신했고 그녀는 빙글빙글 돌며 박한빈의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맞는 것 같은데? 한빈 씨 지금 얼굴 빨개진 거 맞죠?”“설마... 부끄러운 거예요?”성유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허리를 갑자기 당겼다.그리고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덮쳐버렸다.멍해
성유리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며칠 전 호텔 앞에서 그녀를 붙잡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도 여전히 스태프 복장을 하고 있었다.“너희 촬영팀에서 엑스트라 모집한다고 하길래 나도 지원했어.”여자는 웃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한 번 와봤는데 정말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 너, 지서연 맞지?”“네 말대로 너도 잘못한 거 없잖아. 근데 왜 나만 보면 도망가는 거야?”성유리는 조용히 손을 뺐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여자를 쳐다보았다.“대체 무슨 일이죠?”성유리의 냉랭한 반응에 여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곧 다시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겁먹어? 난 그냥 네가 돌아와서 반가운 거야.”“이렇게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네.”‘거짓말.’성유리는 여자의 말을 단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하지만 뭐라 반박하지도 않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근데 너 이번에 돌아왔으면 고향에도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네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다들 서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전에는...”“제가 왜 거길 가야 하죠?”성유리는 단칼에 여자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거긴 제 고향도, 제 집도 아니에요.”“볼일 없으시면 그냥 가세요. 전 일해야 하니까.”사실, 성유리는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편이 아니었다.실제로 감독이나 스태프들도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배경은 화려하지만 절대 잘난 척하지 않고 누구보다 스태프들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그렇지만 지금 성유리의 안색은 너무 어두웠다.성유리는 더 이상 이 여자와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성유리의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말했다.“하긴... 마침 잘 만났다.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성유리는 여자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다가올 줄 알았으니까.아무
여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직 촬영이 시작되기 전이라 현장은 조용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는 재벌가 사모님이시라면서? 재벌 집안은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과거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들 알게 되면 어떨까? 그때도 지금처럼 네 곁에 있어 줄까?”말을 마친 여자는 성유리를 시험하듯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그 조용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다.마치 자신이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판단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재빨리 입을 열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입을 뗐다.“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그 태연한 반응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그대로 뒤돌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러나 이건 여자의 입장에선 명백한 도발이라고 느껴졌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뭐 하는 거야?”감독이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빨리 자리로 돌아와!”여자는 잠시 멈칫하다 곧장 대꾸했다.“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되는데? 나 안 해!”말을 마친 여자는 곧바로 촬영장을 나와 버렸다.그렇지만 몇 걸음 채 가지도 않아 그녀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그래서 곧장 택시에 올라탔고 그녀가 향한 곳은 박한빈이 머무는 호텔이었다.호텔 앞, 여자는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아,
여자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침묵만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감만으로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여자도 그 기운을 감지한 듯,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처음에는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순간,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좋습니다.”“다만 그 사람은 이쪽에 아직 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저희와 함께 갈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여자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원래 여자는 성유리 이야기를 미끼 삼아 박한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여자 입장에선 성유리가 오든 말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여자가 진짜 원하는 건, 오직 박한빈이 가진 권력이었으니까.지금처럼 성유리를 건너뛰고 박한빈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아까 하신 말씀 중에... 유리랑 이웃사촌이었다고 하셨죠?”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물었다.여자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다 잠시 뒤에야 박한빈이 말한 성유리가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그 이웃임을 떠올렸다.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맞아요! 우리 집이랑 서연이 집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어릴 때는 유리가 아빠한테 자주 맞고 저희 집으로 도망 오기도 했어요! 제가 그럴 때마다 우유랑 빵도 챙겨줬답니다!”물론 이건 전부 여자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였다.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성유리가 없으니 반박할 사람도 없으니 뭐라 말하든 여자의 마음대로였다.박한빈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여자는 그런 박한빈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제 딸도요. 전에 서연이랑 같은 반이었어요! 둘이서 꽤 친하게 지냈다니까요. 근데 서연이는 워낙 특별한 집안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