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강기성은 강성진에게 연락했다.“네, 아버지. 나현이가 졌어요. 네, 꼴찌 했어요. 그것도 앞사람과 격차가 아주 크게.”말하며 강기성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전화기 너머로 강성진의 욕설이 들렸다.“걔는 머리에 물만 들어찬 거 아니냐? 망신당할 짓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서경 전체가 쓸모없는 놈이라는 걸 알겠네.”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강성진이 이마를 부여잡고 말했다.“걔가 강씨 가문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구나!”강기성은 다른 재벌 2세들이 흥분하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대박, 루나가 얼굴을 공개하기로 한 거야?”“세상에, 신비한 여신 루나가 직접 베일을 벗다니.”그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몇은 망원경을 들고 트랙에 있는 루나를 보거나 휴대폰을 들고 카메라를 확대했다. 일부는 쌍안경으로 트랙에 있는 루나를 가리켰고, 다른 친구들은 휴대폰을 꺼내 휴대폰 렌즈를 가까이 가져갔다.무심코 대형 스크린을 올려다본 강기성은 그대로 굳어버리며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툭.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강민아는 한 손에 헬멧을 들고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돌아설 때마다 큰 환호를 불러일으켰다.“루나가 이렇게 어렸어?”“엇, 낯이 익은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지?”“강민아다! 얼마 전 ALI 수학 경시대회 금상 수상했던 천재 주부. 세상에, 그 여자가 루나였어!”“수학 천재 강민아? 그 사람이 루나라고? 세상에, 강민아는 신이야.”루나가 강민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많은 관중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우와, 엄마다!”육성민, 윤세현과 함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정이는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 강민아를 보자마자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난간에 기대어 발끝을 세우더니 잔뜩 들떠서 육성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엄마가 레이싱도 해요! 너무 대단해요!”“너희 엄마가 국내 최고의 여성 카레이서야!”...“우와!”반석현은 유리 벽에 두 손을 갖다 댄 채 두 눈에는 수천
“왜... 왜 그 가식적인 여자가 루나야. 으아앙!”민이의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크게 벌리며 울부짖었다!...털썩.또 다른 VIP 룸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기술자는 결승선에 무사히 도착한 드림을 보자 마치 척추가 몸에서 빠져나간 듯 상반신이 푹 삶은 면처럼 무너졌다.그제야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리며 뒤에 서서 자신의 생사를 좌우할 심은호를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한 채 두 눈에 오로지 강민아만 담았다.심은호의 손은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공예품 같았고 손등에는 흰 피부를 뚫고 나올 듯한 핏줄이 부풀어져 있었다.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유리에 닿아 반복해서 문질렀다.심은호의 각도에서 보면 저기 멀리 스크린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입꼬리가 올라가고 살짝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에는 미소가 번졌다.스크린 속 강민아가 무심코 고개를 들자 그녀의 밝고도 당찬 눈빛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심은호와 마주하는 듯했다.유리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이 흠칫 떨리며 꼭 무모한 장난을 치다가 상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심은호의 심장이 조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겁쟁이라 그저 이런 식으로만 마음속 밝은 달을 어루만지는 걸 상상할 뿐이다....강나현은 헬멧을 들고 차에서 내려 무덤덤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비록 꼴찌를 했지만 어쨌든 아마추어 선수라는 생각에 당당했다.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화제성과 인기를 끌 것이고, 설령 졌다고 해도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해야 했다.취재진이 현장에 들어오자 그녀가 앞장서서 다가가는데 그들이 전부 드림 쪽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강나현은 입을 삐죽거렸다. 반하준이 거금을 들여 루나를 그녀의 코치로 데려와 레이싱 라이선스 취득을 도와주려 한다는 생각에 다가가 인사를 건넬 작정이었다.백미러를 슬쩍 보니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해 아이를 낳은 여자와 함께 서 있으면 분위기나 미모로 절대 루나에게 뒤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오늘 저는 드림과 함께 트랙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당당하게 트랙을 누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액셀을 밟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제 출발해도 늦지 않으니까요.”강나현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입을 벙긋하며 눈을 깜빡였다.“네가 어떻게 루나야!”참 웃긴다.강민아는 지금 루나를 사칭하는 걸까?“루나 맞아.”갑자기 무거운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강나현은 소리를 따라 돌아보고 나서야 말한 사람이 반하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혼란스럽기만 했다.“하준 씨도 혹시 이 여자한테 속아서...”반하준의 움켜쥔 두 주먹 손등에서는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경기가 끝난 지 몇 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허탈함에 빠져 있었다.충격의 파도가 그를 덮쳐서 그의 얼굴을 마구 할퀴며 볼품없는 상태로 만들었다.그리고 이젠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강민아가 루나라는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내가 직접 저 여자가 드림에 올라타 트랙에서 질주하는 걸 봤어. 루나 맞아.”말하는 반하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반하준의 말은 청천벽력처럼 강나현의 멍한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말도 안 돼...”강나현은 여전히 믿지 않으려 했다.“엄마!”정이가 폴짝폴짝 뛰며 강민아에게 달려갔다.“엇!”반석현도 강민아를 향해 달렸다.강민아가 쭈그리고 앉자 반석현과 정이가 딱풀처럼 강민아 품에 쏙 들어갔다.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민이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 발이 땅에 붙은 듯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아이는 레이싱 슈트를 입고 있는 강민아를 바라보는 지금도 루나와 강민아를 연관 짓지 못했다.민이는 삐죽거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왜 나한테 거짓말했어요?”강민아가 아이를 돌아보았고
“애가 대단한 걸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지. 뭐 문제 있어?” 강나현이 민이의 편을 들었다.“더 대단한 엄마를 원하는 게 뭐가 문제야?”강민아는 역겹다는 듯 눈을 흘겼다.“머리에 든 것도 없는 게 어디서 나한테 말을 걸어?”“너!”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강나현은 이미지 때문에 차마 욕설을 내뱉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반하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반하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고 속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햇볕은 따가웠지만 코로 들이마시는 공기는 얼음 칼날처럼 반하준의 폐부를 조각내고 있었다.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결국엔 우리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정체 공개한 것 아니야?”강민아가 차갑게 웃었다.“난 이제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착각 좀 그만할래?”반하준의 얇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면서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강민아가 말을 이어갔다.“내가 레이서 신분을 공개한 건 당신들 부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들 인정이나 받으려고 ALI 수학 경시대회에 출전한 것도 아니야. 난 이제 반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라 강민아로 살 거야.”기자가 강민아에게 마이크를 내밀며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강민아 씨, 전남편과 아들에게 원한이 깊어 보이는데 왜 반씨 가문에서 7년이나 지내고 지금에서야 나온 겁니까?”강민아의 눈빛이 공허해지며 그녀는 심호흡하고 말했다.“제가 엄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아이들이 태어난 후 그녀는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고, 활짝 웃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닦아주고, 작은 몸을 껴안아 주었다.목욕을 시키고, 음식을 만들어주고, 이 닦는 법도 끊임없이 가르쳤다.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그녀와 아이들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했다.그녀는 검은 눈동자로 민이를 바라보았다.“전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
민이가 수없이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강민아가 가장 먼저 달려와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뒤돌아 뒤에 있는 사람이 강나현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흐느낌이 순식간에 멎어버렸다.강나현은 민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민아, 슬퍼하지 마. 나랑 같이 오토바이 타고 바람 쐬러 가자. 저 사람들은 무시해.”민이는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나한테 잘해주는 건 현이 형밖에 없어요.”강나현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네 작은 아빠잖아! 내가 너한테 잘해주지 않으면 누가 잘해주겠어? 가자!”강나현은 민이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가서 민이에게 헬멧을 씌워주고 오토바이를 탔다.강철 짐승 같은 오토바이가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쯤 경찰 몇 명이 강나현을 찾고 있었다.레이싱 슈트로 강나현을 알아본 경찰들은 곧바로 경찰증을 꺼내 들었다.“강나현 씨, 차 세우세요!”강나현이 액셀을 끝까지 밟았고 검은색 대형 오토바이가 주차장 밖으로 돌진했다.“강나현 씨, 어디 가세요!”“강나현 씨!”강나현이 떠나는 것을 본 경찰들은 곧바로 무전기를 눌러 다른 동료들에게 알렸다.“긴급 지원 바랍니다. 안전사고 관련 용의자 여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 중입니다!”“다들 주의하세요. 강변 대로 모든 길목을 막고 가 9898 오토바이를 막으세요.”민이가 가고 기자들은 다시 강민아를 에워쌌다.강민아는 여러 명의 경찰이 경기장에 들어와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반하준이 고개를 돌리니 심은호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소나무처럼 곧게 뻗은 체격에 입고 있던 코트 자락이 거센 바람에 흩날리고,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리며 얇은 입술에는 거침없고 당당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심은호의 뒤에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재킷으로 손을 가린 기술자 한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기술자 뒤에는 경찰관 두 명이 더 있었다.누가 봐도 재킷에 가려진 것은 수갑이 채워진 기술자의 손이었다.한 형사가 반하준 앞에 다가와 경찰증을 보여주었고, 그의 등장에
반하준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만한 눈빛으로 강민아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드림의 수리비는 내가 낼게.”반하준에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이내 강민아가 물었다.“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오토바이를 계속 타는데 걱정도 안 돼?”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넌 무슨 자격으로 내 아들을 걱정해?”강민아가 비웃자 반하준이 덧붙였다.“네가 뭐라고 해서 민이가 도망친 거잖아. 나현이는 위로해 주러 간 거고. 난 나현이 운전 실력 믿어.”이내 그는 말투를 바꿔 한층 싸늘한 어투로 강민아에게 말했다.“그러는 넌 매번 나현이가 사고만 치면 경찰을 부르더라. 꼭 온 세상이 다 알도록 소란을 피워야 속이 시원해?”강민아가 대꾸하려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며 보이지 않는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그녀는 순식간에 팔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며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귀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오자 주위 사람들의 걱정 어린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윤세현이 달려와 강민아의 팔을 부축해 자기 품에 기대게 했다.심은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며 윤세현을 힐끗 쳐다보던 그의 눈가에 다소 서늘한 기색이 담겼다.고개를 돌린 그는 반하준의 표정도 다소 부자연스러운 것을 확인했다.육성민도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대놓고 걱정하는 모습을 드러냈다.“민아야, 괜찮아?”강민아는 윤세현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윤세현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아까 차 안에 있을 때 과부하가 왔나 봐.”이 순간, 날씨는 화창하고 햇빛은 밝았지만 그녀는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오토바이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민이는 강나현의 허리를 껴안고 입으로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거렸다.강나현은 먼저 민이와 함께 반씨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반하준에게 민이가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아들을 위해서라도 반하준이 경찰을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그런
강기성은 다시 전화기를 집어 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아버지, 우리 강씨 가문 체면은 지킬 수 있겠네요. 아버지 딸이 경기에서 1등 해서 사람들 모두가 걔 이름만 외치고 있거든요.”그러자 강성진이 물었다.“방금 나현이가 꼴찌 했다며?”강기성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다른 딸은 1등 했네요.”“뭐라고? 나한테 다른 딸이 어디 있어?”강성진이 불쑥 말을 뱉자 강기성은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강민아요.”강성진은 믿지 않았다.“민아 걔가 무슨 레이싱을 해? 네가 잘못 봤겠지.”강기성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정말이에요. 국내 최고 여성 레이서 루나가 강민아예요.”“뭐? 레이서 루나가 내 딸이라고?”강성진이 루나를 모를 리가 없었다.루나는 국제 레이스 상위 10위에 진입하며 국내 기록을 돌파했다. 국내에서 레이싱이 뒤늦은 붐을 일으켰는데 당시만 해도 여성 레이서는 더더욱 드물었기 때문이다.루나는 그해에 경기할 때마다 국내 신기록을 세웠다.강성진이 특별히 레이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신문의 헤드라인과 뉴스 웹사이트의 알림을 피할 수는 없었다.“... 5년 전 루나의 레이싱카,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수백억에 팔렸어. 그해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고.”이어 강성진이 또다시 욕을 퍼부었다.“걔는 정말 머리 검은 짐승이네. 차를 팔아서 돈을 벌어놓고 그동안 나한테 숨기다니!”강기성은 강성진의 말을 무시한 채 경기장에 모인 수많은 경찰을 포착했다.그때 강나현의 과거 절친인 남궁윤수가 다가와 말하는 게 들렸다.“방금 알아봤는데 강나현 미친 것 같아. 여러 선수 헬멧에 벌레를 넣고 사람을 시켜서 드림의 보닛에 손대게 했어. 증거도 확실해서 경찰이 체포한다고 난리야.”재벌 2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미친 거 아니야?”“그런 멍청한 짓은 걔밖에 못 할 거야.”강기성이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말했다.“아버지, 들었어요? 아버지 딸이 경찰에게 잡혀간대요.”...형사의 휴대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은 그는
연진숙은 응급 수술 안내서를 보는 순간 입이 크게 벌어지고 동공이 움츠러들었다.그녀는 그대로 온몸이 굳어버린 채 뒤로 쓰러졌다.다행히 함께 온 운전기사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고, 성큼성큼 다가온 반하준이 경찰의 손에 쥐어진 응급 수술 안내서를 가져가며 물었다.“어쩌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반하준의 질문에 경찰은 불쾌함이 치솟았다. 그는 강나현이 5살짜리 아이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이 심각하게 다친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강나현 씨는 강변도로에서 시속 100km로 과속을 했는데 그쪽 아들은 이제 겨우 다섯 살입니다. 아버지로서 보호자의 의무는 다하지 않는 겁니까?”“하준 씨!”강나현이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왔다.그녀는 얼굴에 거즈까지 몇 장 붙이고 있었다.“흑흑, 하준 씨. 저 형사들 다 고소해. 다 저 사람들 때문이야. 갑자기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지만 않았어도 나랑 민이는 사고 나지 않았을 거야!”교통경찰은 화가 치밀었다.“강나현 씨, 저희는 갈림길에 장애물을 설치했고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경찰이 속도 줄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한 속도가 60인 도로에서 과속했으니 전적으로 당신 책임입니다!”교통경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연진숙은 달려가 강나현의 뺨을 내리쳤다.뺨 때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공중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아 에르메스 가방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에 내리쳤다.미처 어찌할 틈도 없이 뺨을 맞은 강나현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중심을 잃었다.그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연진숙이 가방을 들고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교통경찰이 달려와 이를 제지했다.“여사님, 진정하세요!”“내 손자가 지금 수술실에 있는데 나보고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예요!”연진숙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강나현,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내 손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도 같이 묻어버릴 거야!”강나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반연주는 무대 중앙에 서서 허리를 굽히며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공연장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이미 반진경을 아는 학부모들이 돌아서서 반진경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주 엄마, 연주 정말 잘 키우셨어요.”“연주가 춤을 잘 춰요. 보는 눈이 즐겁네요.”같은 반의 다른 학부모들도 뒤이어 거들었다.“강윤정을 빠지게 한 진경 씨의 선택은 정말 현명했어요. 강윤정이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좋은 공연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맞아요. 역시 진경 씨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말하면서 모두 은근슬쩍 강민아 쪽을 바라보았다.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학부모들도 서로 급이 나뉘어 있었는데 강민아의 능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뒷배가 없었다.뒷배가 없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강민아는 서경 최고 학교의 학부모들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그리고 반씨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부모들은 모두 반진경의 편에 서기로 했다.“민아 씨, 진경 씨에게 고마워해야죠. 일부러 그쪽 딸을 저격한 게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예요. 따님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발레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걸요.”강민아는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무대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제 딸이 혼자 무대에 올라 공연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맙긴 하네요.”강민아의 말이 반진경의 귀에 들리자 그녀는 다리를 꼬며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녀는 오만하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무대에서 공연할지 망신을 당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무대 위 공연이 하나씩 끝나갈 무렵 자녀들의 공연을 다 본 후 다른 공연에는 관심이 없다며 일어나 자리를 뜨는 부모님들이 꽤 많았다.반석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소매를 살며시 잡았다.강민아가 고개를 숙이자 아이의 여린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단번에 반석현의 마음을 읽은 그녀가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우린
반진경은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강민아 같은 게 반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수준 떨어지게!”명품이 존재하는 이유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빠르게 구분하기 때문이다.평범한 사람들도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를 살 수 있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겠나.강민아가 반씨 가문에 시집 온 이후 반진경은 자신의 수준이 한층 떨어졌다고 느꼈다.이제 그녀가 반씨 가문에서 나갔으니 다시는 재벌 명문가에 발을 들일 기회를 주지 않을 거다.장기명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에게 당부했다.“반씨 가문에서 얘기 좀 잘해서 내가 석현이 선생님이 될 수 있게 해봐.”민이는 몸이 회복되어 집에서 엘리트 수업을 받고 있지만 반석현과 함께 수업하면 늘 반석현이 민이보다 성적이 훨씬 좋았다.장기명은 반씨 가문이 반석현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비록 반용화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에겐 자식이 없고 앞으로 반석현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다.만약 반씨 가문에서 민이가 후계자 역할을 해내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자리는 반석현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당연히 장기명은 반석현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반진경이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장기명이 던진 건 난제였다. 그녀가 도저히 도와줄 수 없는 난제.반진경과 반용화는 나이가 비슷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반용화를 무서워했다.연못 속의 작은 물고기가 감히 바다의 고래를 넘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반용화 앞에서 감히 숨 한 번 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하지만 장기명은 굴하지 않았다.“일단 해봐. 반석현이 정말 반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내가 그 아이의 스승이 된다면 이걸로 반씨 가문의 핵심 인원이 될 수도 있어!”반진경은 장기명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당연히 그녀도 반씨 가문에서 그들 부부의 입지가 커지길 바랐다.“알았어. 한번 해볼게.”그녀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공연이 시작되자 무대에는 순백의 조
반진경은 장기명 옆에 앉아서 그가 자꾸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게 눈에 띄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반진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장기명은 순간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바로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아무것도 안 봤어!”하지만 반진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계속 강민아를 보고 있었잖아! 왜 쳐다봐?”반진경의 두 눈에 불꽃이 튕기자 장기명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반석현을 안고 있길래 궁금해서 그랬어. 저 애가 강민아와 저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 몰라서.”이어 장기명은 반진경에게 떠들기 시작했다.“강민아가 반석현을 저렇게 챙겨주는데 저러다 하준이 숙모가 될 가능성은 없나?”말하며 장기명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반진경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어쨌든 반씨 가문 사람이라 장기명의 말에 그녀는 모욕을 느끼며 발끈했다.반씨 가문 사람으로서 앞으로 서경 상류층에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반용화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강민아가 이혼한 건 둘째 치고 한때 조카며느리였는데 어떻게 쟤랑 결혼하냐고. 이건 상도덕이 아니지!”장기명은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민아는 반하준과 이혼한 후 기댈 곳을 잃었어. 심씨 가문이 있다지만 거기서 강민아를 받아줄까? 내가 볼 땐 불가능해. 반석현에게 잘 보이려는 건 분명 반용화를 노리고 있는 거야.”말하며 장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어린이반에서 가족 캠핑을 하러 갔던 게 떠올랐다.그에게 반용화는 하늘 같은 사람이라 닿을 수가 없는데 강민아와 반석현이 비탈길에서 넘어진 것 때문에 그가 화를 냈다.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 눈에 단지 반석현을 위해 나선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장기명은 강민아 때문에 그가 분노했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본인만이 강민아를 향해 품고 있는 속내를 잘 알기에 본능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만약 반용화가 정말 강민아를 원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조카며느리였던 게 뭐
반석현은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경호원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무대 뒤에는 많은 사람들과 큰 소품들이 있었고 몇몇 아이들은 얼굴에 과장된 화장을 하고 밝은색의 공연 의상을 입고 있었다.반석현은 길가에 내놓은 작은 고양이처럼 주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무서웠다.“석현아!”정이는 그를 발견하고 밝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반석현은 사람들 틈에서 정이와 강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검은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내 아이는 발을 떼고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정이도 반석현을 향해 달려가 그대로 아이를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렸다.반석현은 제자리에서 허공에 들린 채 정이의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를 바라보며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정이는 반석현을 데리고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내려주었다.많이 돌면 그가 어지러울 테니까.“석현아, 나 너무 행복해. 내 공연 보러 왔어?”반석현은 정이를 향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정이가 입은 분홍색 의상을 보며 손을 뻗어 털을 만지더니 생긋 웃었다.마치 의상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 같았다.강민아가 다가가 반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우린 밖에 가서 정이 공연 기다릴까?”반석현의 두 눈이 별을 박은 듯 반짝반짝 빛나며 강민아가 내민 손을 잡았다.그렇게 강민아는 반석현을 데리고 객석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설윤의 어머니 정고은은 강민아가 어린 소년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누구예요?”언뜻 봤을 땐 강민아가 민이를 데리고 오는 줄 알았다.“반석현이라고 승덕 학생은 맞는데 특수 학생이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정규 교육을 받지는 않아요.”강민아의 말에 정고은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특수 학생이니 낯선 것도 당연했다.“석현이 아주 잘생겼네. 안녕? 난 설윤이 엄마야. 설윤이를 아는지 모르겠네.”정고은이 반석현에게 손을 내밀자 반석현은 바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강민아가 말했다.“애가 낯을 많이 가려요.”정고은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석현 곁에 앉는데, 반석
반진경이 입꼬리를 올리며 가식적인 웃음을 드러내더니 경멸하듯 말했다.“네가 뭘 하든 뽑힐 줄 알았어. 아빠가 이사장이잖아.”주변에 서 있던 학부모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고 강민아가 되물었다.“반 여사님, 반하준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아니.”반진경이 불쑥 대꾸했다.“그럼 허위 소문을 퍼뜨리는 건가요? 제 딸은 문화부 선생님의 인정을 받은 건데 그게 반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죠?”반진경은 얼굴을 치켜들며 예리한 눈빛을 번뜩였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한 뒤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꼭 한낱 벌레를 보는 듯했다.“문화부 선생님이 허락한 것도 하준이가 이사장이기 때문이지.”강민아는 그저 웃었다. 트집 잡는 반진경 앞에서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딸이 반하준의 특혜를 받아 무대에 선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쟁할 생각이 없었다.그녀가 되물었다.“반 여사님, 사과문은 준비됐나요?”반진경은 잠시 당황하며 강민아가 그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진작 그녀가 물어볼 건 진작 예상하였다.“당연하지. 근데 네 딸이 사과문을 낭독하게 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네.”강민아는 반진경이 함정에 걸려들자 옅은 웃음을 지으며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우선 사과문부터 보여줘요. 직접 보지 않으면 올라가서 무슨 소리를 할지 누가 알겠어요.”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귀에는 유난히 거슬리게 들렸다.강민아가 워낙 온화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상대가 경계심을 늦추는 것도 한몫했다.반진경은 오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왜, 내가 썼다는 걸 믿지 않는 거야?”강민아가 손을 내밀었다.“가져와요.”반진경이 가방에서 종이 더미를 꺼내자 사과문을 건네받은 강민아가 단번에 허를 찔렀다.“격식도 안 맞고 단어 사용도 부적절하네요. 맞춤법도 안 맞고 문장도 틀렸어요. 반 여사님, 초등학교 국어부터 다시 배우셔야겠네요.”반진경은 얼굴을 붉혔다.“내가 뭘 잘못 썼는데?”강민아는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담임 선생님께 봐달라고 할까요?”담
강나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하준 씨가 왜 그런 말을...”반하준이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건 그녀를 죽이겠다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강성진이 그녀를 죽이려는 것도 당연했다!강나현은 벌벌 떨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강성진이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네 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널 데리고 반씨 가문에 찾아가서 하준이에게 사죄할 거야.”“아빠, 안 돼요! 하준 씨가 거짓말한 거예요. 사실이 아니에요!”강성진이 정말 다리를 부러뜨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벼랑 끝에 내몰린 신세가 되었다.이내 강기성이 말했다.“지금은 반하준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야지. 진실이 어떻든 반하준이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렸다는 건 넌 더 이상 반하준에게 쓸모가 없다는 뜻이야. 이제 넌 희생양일 뿐이라고.”강나현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반하준은 반유하의 유언을 잊은 걸까.어떻게 그녀에게 이럴 수가 있나!“아빠, 전 억울해요!”강나현이 절망에 빠져 중얼거려도 강성진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누명을 썼든 아니든 지금은 네가 반씨 가문에 누를 끼쳤으니 널 반씨 가문에 데리고 가서 사죄해야 해!”강성진에게도 강나현은 이용 가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없애야 강씨 가문의 평판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강나현이 점차 감정을 추슬렀다.“아빠, 날 때리면 안 돼요. 하준 씨랑 잤으니까 그 사람 애를 임신했을지도 몰라요.”강기성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강나현을 바라봤다.강성진 역시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걸음을 멈췄다.그는 충격에 휩싸여 물었다.“뭐라고?”...승덕 어린이반 대강당. 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이는 털이 복슬복슬한 분홍색 사자 옷을 입고 있었다.“정아!”같은 반 아이들이 정이를 보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옷 너무 귀엽다!”“우와, 발이 너무 귀여워!”정이가 신은 신발은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있었는데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강기성이 들어왔다.강성진이 베개로 강나현의 얼굴을 누르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달려가 강성진을 몸으로 밀어냈다.얼떨결에 밀려나 침대 옆 탁자에 부딪힌 강성진은 여전히 양손에 베개를 움켜쥐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강성진은 강기성을 보고 그가 강나현을 혼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강기성은 강나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얼굴이 파래진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강기성은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강나현에게 가슴 압박을 했고 그제야 강나현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베개를 내리쳤다.“감히 날 밀쳐?”강기성은 돌아서서 낮게 윽박질렀다.“사람 죽일 뻔했어요!”강성진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내 체면만 구긴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서경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어!”강기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비웃었다.“그럼 죽여요.”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긴 했어도 강나현을 구한 뒤 곧바로 후회했다.그가 서둘러 달려오지 않고 강나현이 정말 강성진의 손에 죽었다면 그는 감옥에 갔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나서서 강나현을 구했기 때문에 기회는 사라졌다.강성진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농담이지.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기성아, 네가 나 대신 쟤 다리 좀 부러뜨려! 안 그러면 또 강씨 가문에 민폐를 끼칠 것 같으니까.”강나현은 벌벌 떨었다. 어릴 때부터 강성진을 무서워했는데 조금 전 강성진이 베개로 얼굴을 가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몇 초만 지나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두려움에 강나현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고 두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지에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강기성과 강성진 모두 고약한 냄새를 맡았고 강성진이 욕설을 내뱉자 강기성이 말했다.“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어.”강나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문 너머로 강성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민이가 목 놓아 울면서 무기력하게 소리를 질렀다.“난 엄마를 원해요. 아빠, 난 엄마를 원한다고요!”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그는 민이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아이 방을 나갔다.방 문이 닫히자 민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반하준은 적막한 방안에서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차가운 기운이 발바닥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모든 서랍을 열어젖히고 넥타이, 손목시계, 브로치 장신구를 모두 꺼냈다.‘이게 강민아가 준 선물이던가? 이게 사준 건가?’전부 잊어버렸다.대체 어떤 게 강민아가 사준 것이고 어떤 게 담당 코디가 매치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재계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준 선물은 다 기억나는데 뒤늦게 강민아가 줬던 선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그녀가 준 게 어떤 것인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반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액세서리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코디에게 보내 그가 산 게 어느 것인지 구분하도록 했다.깊은 밤, 코디는 서둘러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반하준은 마침내 강민아가 선물한 넥타이와 브로치를 찾아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의 무늬와 브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쓰다듬었다.강민아가 그에게 준 건 이렇게 많은데 심은호는 딱 하나만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전용 사물함에 넣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주인의 침실로 들어가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강민아가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옷장을 열자 안에는 강민아의 옷이 가득했다.그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까.반하준은 강민아가 늘 입던 잠옷 중 하나를 꺼내어 코끝에 대고 천에 밴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이게 강민아의 체취였나?’이젠 강민아의 체취가 어땠는지도 잊어버렸다.강민아가 누웠던 침대에 누워 그에겐 다소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몸을 돌려 강민아의 잠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미간은 찡그리고
침대에 누운 민이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흰자위만 조금 남아 희미한 불빛 속에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하준은 입을 벌렸지만 누군가 자기 목구멍으로 종이 뭉치를 밀어 넣은 듯한 느낌에 목이 메었고, 민이는 갈망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이미 이혼했는데...”어떻게 강민아와 재결합하겠나.그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강민아와 이혼 서류에 사인할 땐 돌아와서 애원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며, 정식으로 이혼하러 갈 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강민아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민이를 위해서 최대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네 엄마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면 생각해 볼게.”스스로 되뇌듯 말하며 반하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그런데 민이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나도, 아빠도 버렸는데 어떻게 아빠한테 와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요?”아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아빠, 엄마한테 가서 빌어요. 네? 용서해 달라고, 돌아오라고 빌어요!”민이의 눈에 반하준은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강민아를 붙잡지 못해도 반하준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아빠가 용서해달라고 말만 하면 엄마가 재혼해 줄 거예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엄마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민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는 아빠가 현이 형한테 잘해줘서 떠난 거예요.”반하준은 목구멍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강나현과 난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선을 넘은 적도 없어. 그 여자가 괜히 날 의심하는 거야!”민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아빠가 잘못했어요! 엄마 속상하게 했잖아요!”아이가 울부짖었다.“으아앙!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엄마가 재워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가고 며칠째 밤에 깨는데 엄마가 날 버린 것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