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바라보는 심은호의 별처럼 반짝이는 깊은 눈동자엔 늘 그녀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강민아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회의실 쪽으로 곧장 걸어가면서 뒤따라오는 센트럴 이노베이션 사람들에게 지시했다.“3분 안에 모든 임원들을 회의실로 모이게 하세요.”그녀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제각기 임원들을 붙잡아 회의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당신들 누구야?”“이 손 안 놓으면 경찰을 부를 거야!”몇몇 임원들은 언쟁을 벌이며 얼굴까지 빨개졌다.회의실로 끌려간 그들은 타원형 회의 테이블의 맨 상석에 앉아 있는 강민아를 발견했다.가녀린 체구에 부드러운 눈매를 가졌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모두를 뒤흔들었다.임원들은 모두 강민아를 알아봤고 그중 몇 명은 강민아의 친척이기도 했다.“민아야, 네가 우리한테 이렇게 하라고 시켰니?”“민아야, 이건 무례한 행동이지.”강민아는 손을 들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회의 시간인데 다들 지각했으니 보너스 30% 삭감할게요.”“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보너스를 깎아?”강씨 성을 가진 한 임원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 그때 강성진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그는 씩씩거리며 강민아를 보자마자 다그쳐 물었다.“지금 반항하는 거냐?”강민아는 부드럽게 말했다.“아버지, 아버지께서 직접 저를 부사장으로 임명하고 인수 프로젝트 담당자로 선정했잖아요. 제 일에 협조해 주세요.”강성진은 강민아를 세 살짜리 어린애 취급하듯 무시하며 비웃었다.“그래, 이참에 기어오른다 이거지? 언제까지 시건방 떨 수 있는지 두고 보자.”말을 마친 강성진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심은호가 있는 걸 눈여겨보고 강민아와 얘기를 나누면서 캐비닛으로 걸어가더니 거기서 시가 한 상자를 꺼냈다.그러고는 심은호에게 시가를 건네며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도련님, 바쁠 텐데 웬일로 시간을 내서 제 딸과 함께 오셨어요?”심은호는 섬섬옥수로 시가를 집어 들며 조용히 콧방귀를 뀌었다.“강
“또 다른 회사는 심은호 씨가 소유한 파워 테크인데 4천억으로 저희 강승 테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하며 강승 테크가 새로운 기점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기존 부서와 직원을 모두 남겨두겠다고 말했습니다.”파워 테크의 인수 제안서를 가장 먼저 받아 든 강성진은 몇 페이지를 넘기더니 작게 중얼거렸다.“4천억? 도련님께선 왜 우리 강승 테크에 이렇듯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거죠?”심은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느긋한 자세로 말했다.“미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 민아 씨한테 주는 선물이죠.”강성진의 의아한 시선이 강민아와 심은호를 번갈아 보았다.심은호가 말했다.“여자 친구인 민아 씨가 좋다는데 제가 마다할 이유가 있나요?”강성진은 충격에 빠진 채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너랑 심은호 씨...”강성진은 원래 나이 많은 이혼한 사업가 몇 명을 물색해서 얼른 강민아를 시집보내 강씨 가문에 돌아올 이득을 취하려 했다.하지만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던 큰딸이 이렇게 큰 선물을 가져다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민아야, 잘했어!” 그는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턱을 어루만지며 칭찬했다.자리에 있던 다른 임원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심은호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좋아해서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낸 거라니!강성진은 파워 테크의 인수 제안서를 들고 올라간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기뻐했다.“4천억이라니, 역시 도련님, 대단하세요.”심은호는 솔직하게 말했다.“전 민아 씨를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이제 드디어 저를 만나주겠다는데 당연히 원하는 액수로 맞춰줄 거예요.”이내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강 대표님도 거절하지 않으시겠죠?”그가 눈앞에 놓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지만 잔에 담긴 물은 한 방울도 테이블 위로 흐르지 않았다.그는 손끝으로 잔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거절하면 좀 주제넘은 것 같은데.”피식 웃는 그의 검은 동공에서 서늘한 빛이 번뜩였다.“농담이에요. 제가 어떻게 장인어른을 협박하겠어요.”강성진은 그의 거만하고 거침없는 눈빛에 소
이내 우경아가 귀국했다는 소식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인터넷 전체가 떠들썩했다.[축 여왕의 귀환!][여왕님이 돌아오셨으니 서경 재벌가에 피바람이 불겠네.][우경아가 누구야? 유명한 사람이야?][어린 사람들은 우경아가 누구인지 모르겠네.]나이든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설명을 이어갔다.우영 그룹, 우씨 가문은 긴 역사를 자랑하며 건국 후 중앙은행 초대 총재가 우씨 가문 사람이었다. 올해 47세인 우경아는 그 우씨 가문의 양딸이다.25년 전 그녀와 우씨 가문 셋째 아들의 연애사는 기나긴 이야기로 엮을 만큼 파란만장했고, 결국 우경아가 사랑을 포기한 채 우영 그룹을 물려받았다. 그녀의 세 오빠는 불구가 되거나, 미쳐버리거나, 출가했다.25년 전 세간의 주목을 받을 만큼 대단한 여자였던 우경아가 등장하면서 언론에서는 여자 사업가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대대적인 보도를 했었다.지금 그녀는 자식도 없고 결혼한 적도 없지만 전 세계에서 수많은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세계 각국의 유명 인사로 키웠다....서경 국제 공항.강성진, 강기성 부자는 VIP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성진은 붉은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든 채 긴 목을 빼 들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강기성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씹던 껌으로 풍선을 만들고 있었는데 풍선이 톡톡 경쾌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강성진은 비명을 질렀다.“어휴, 조용히 좀 있어. 경아 데리러 왔는데 네가 왜 따라와?”강기성의 가는 눈매에 웃음기가 넘쳐흘렀다.“아버지가 그렇게 그리워하는 첫사랑이 우리 엄마는 아닐까 해서 보러 왔죠.”강성진이 입을 열려고 할 때 검은색 짧은 정장 치마를 입은 여자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드리우고 붉은 입술에 선글라스를 벗자 꽃처럼 화사한 얼굴이 드러났다.그녀만 세월을 피해 간 듯 얼굴에 나이 든 흔적 하나 없이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자랑하며 눈빛에는 성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족히 10센티가 넘는 하이힐을 신은 채 여자가 모델처럼 요염하게 걸어
강성진이 몸을 흠칫 떨었다.“나를 위해서?”우경아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손을 시트에 올려놓고 몸을 지탱했다. 목이 낮은 정장을 입고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가 살짝 몸을 숙이자 강성진의 시선이 그녀의 옷깃 사이로 향하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눈앞의 풍만하고 매혹적인 여성의 자태에 강성진은 넋을 잃고 우경아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강승 테크를 인수하고 싶어.”강성진은 다시 한번 놀랐다.“뭐라고?”여자가 가는 손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성진 씨, 그렇게 해줘. 응?”강성진은 콧구멍에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몸이 경직되고 입도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그래...”우경아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기성이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아버지, 제가 알기론 민아에게 인수 프로젝트 권한을 넘겨줬잖아요.”“민아?” 우경아가 의아한 듯 묻자 강성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강기성을 흘겨보았다.“민아는 내 딸이야. 경아 너도 걔에 관한 뉴스 봤지?”우경아는 고개를 저었다.“난 해외에 있어서 국내 소식은 잘 몰라.”강성진은 제법 자랑스럽게 말했다.“내 딸이 ALI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해 금상을 땄어. 국내에서 유명한 카레이서 루나도 내 딸이야. 이번에 국제 레이싱 대회 시범경기에서 얼굴을 공개했어. 7년 동안 가정주부로 살았는데도 지금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대단하지 않아?”우경아는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가정주부가 대회에서 금상을 탔다니, 부정행위라도 한 것 아니야?”강성진이 발끈했다.“내 딸은 14살에 고연대 영재반에 입학한 천재야!”우경아가 강성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하지만 ALI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주부에게 금상을 주면 고생해서 공부한 대학원생과 박사에게 공평할까? 언젠가는 다시 주부로 돌아갈 텐데.”“음, 그건...”강성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우경아가 다시 물었다.“7년 동안 주부로 살다가 다시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면 다른
강나현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차갑고 냉담한 표정이었다.“너 때문에 민이의 남은 인생이 망가질 뻔했어. 감옥에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봐준 거잖아?”그의 목소리는 강나현의 온몸을 차갑게 만들었다.강나현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하준 씨, 나 감옥 가기 싫어! 유하도 내가 감옥 가는 걸 절대 보고 싶지 않을 거야! 전에 내가 구치소에 들어가면 유하가 제일 먼저 꺼내줬는데...”남자가 무자비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그건 내가 아니라 유하니까! 난 민이 아빠야!”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고 민이를 기어코 오토바이에 태운 강나현에겐 비난조차 하기 싫었다.강나현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뻔하다. 민이가 그녀를 따르고 좋아하면 아무리 큰 사고를 쳐도 그가 수습해 줄 거라고 믿었겠지.반유하와 그녀의 사이를 생각해서 반하준은 몇 번이고 그녀를 참아주었다.하지만 강나현 때문에 아들이 중환자실로 직행하니 반하준은 도저히 이 여자가 한 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강나현은 남자에게서 풍기는 기세에 충격을 받아 눈이 붉게 물들고 어깨가 떨렸다.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오늘 유하가 널 챙겨달라고 한 말 때문에 온 거야.”반하준은 짐 가방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구치소에서 명절 잘 보내.”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일어나 자리를 떠났고 강나현은 꼿꼿한 남자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내 방 화장대 두 번째 서랍에 오래된 휴대폰이 있는데 그 안에 유하의 마지막 통화 메시지가 녹음돼 있어.”강나현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잠시 멈칫했고, 강나현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원래는 그 녹음파일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했어. 하준 씨, 유하를 죽인 범인은 아직 법의 처벌을 안 받았어.”반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강렬한 섬광처럼 그녀를 압박했다.“내가 그 범인을 얘기할 수 없었던 건...”반하준의 시선에 강나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우리 집에 가서 유하의 마지막 목소리를
창백한 햇살이 반하준을 비추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윙윙거리는 파리 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정오, 강민아와 심은호는 함께 식사하러 나갔고 남자는 강민아를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심은호가 메뉴판을 내려다보는 동안 강민아는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반하준과 젊은 여성을 보았다.참 재수도 없다. 반하준이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구역질이 났다.“민아 씨, 뭐 먹을래요?”심은호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강민아는 홱 시선을 거두었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여친님, 벌써 한눈파는 건가요?”강민아는 냅킨이라도 집어 들고 자기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그 자식 봤어요.”그녀의 뺨이 살짝 부풀어 오르더니 심은호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눈앞에 있는 여자의 활발한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심은호는 입술을 끌어올렸다.“내가 식당을 잘못 골랐네요. 자리 바꿀까요?”심은호가 앉은 자리는 마침 병풍으로 가려져 있어 반하준의 각도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강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미 날 봤겠죠.”역시나 반하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창가에 있는 강민아를 보았다.정장 차림의 강민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단정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매일 그와 아이들 주위만 맴돌던 여자가 맞는지 의심했다.그가 강민아를 봤을 때 그녀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는 듯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강민아가 그를 보고 있었던 걸까?이곳은 부신 그룹 건물과 비교적 가까운 곳인데 강민아가 일부러 그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에 이곳에 온 건 아닐까.한낮의 햇살이 강민아의 온몸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리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빛났다.“하준 씨, 내 말 듣고 있어요?”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남자가 생각에 잠겨 넋이 나간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여자는 반하준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그때
심은호는 훤칠한 키에 반듯한 체격, 우월한 외모로 등장만 해도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반하준은 심은호가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준 씨!” 여자가 그를 불렀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제 가요. 혼자 있고 싶네요.”여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래도 재벌 집 아가씨라 그런 반하준의 태도를 견딜 수가 없었다.“쳇!”맞선에 나왔던 여자는 루이비통 가방을 집어 들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식당을 나오면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네, 우 대표님. 전 미션 실패한 것 같아요.”...강민아는 반하준도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두 남자가 동시에 화장실로 가는 건 누가 봐도 이상했기에 휴대폰을 들고 심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장실 칸에서 강민아의 메시지를 받은 심은호는 동공에 휴대폰 화면의 불빛이 반사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달빛이 그를 걱정해 주니 너무 행복했다.심은호는 칸에서 나와 휴대폰을 세면대에 올려놓았다.손을 씻은 그가 휴지를 몇 장 뽑아 손을 닦으며 걸어 나갔다.굳은 표정의 반하준이 안쪽 칸에서 걸어 나오는데 세면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심은호 휴대폰 아닌가?’반하준이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자 휴대폰 화면에 카톡 메시지가 떠 있었다.저장된 상대 이름은 달빛.[개자식도 화장실에 갔어요.]저장된 이름을 본 반하준은 심장이 철렁했고, 강민아가 심은호에게 보낸 메시지를 본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빠득 어금니를 깨물자 얼굴 근육마저 떨려왔다.심은호가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지 않아 바로 열어서 살펴본 그는 숨이 턱 멎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어둠 속에 숨어있는 악귀처럼 강민아와 심은호의 대화 내용을 훔쳐보았다.문득 반하준의 손끝이 멈칫하며 그의 눈에 심은호의 사진이 들어왔다.심은호가 강민아에게 보낸 것인데... 대체 이게 다 뭘까.반하준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휴대
반하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 심은호가 하는 말이 그가 생각하는 그런 뜻일까?그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 속 심은호의 것이 핑크색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생각을 억누르며 화가 잔뜩 난 채 심은호를 노려봤지만, 심은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가슴을 슬쩍 흘겨보았다.반하준의 얼굴 전체가 숯덩이처럼 검게 변했다.심은호는 경쟁에서 이겼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말문이 턱 막힌 반하준은 이런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아 목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했다.“색소침착, 옷감 마찰로 색이 짙어지는 건 정상이야. 너처럼 밝은색이 오히려 비정상이지.”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반하준의 머릿속이 펑 터져버린 뒤였다.심은호에게 코가 꿰인 채 끌려다니며 그가 일부러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반하준이 턱을 치켜들고 심은호를 향해 휴대폰을 던졌지만 심은호는 받지 않았다.휴대폰은 바닥에 떨어져 저 멀리 날아갔다.‘허, 겁을 먹었나?’반하준의 눈동자 사이로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전에 서밋 포럼에서 심은호에게 주먹을 한번 날렸을 뿐인데 그가 피를 토하던 게 떠올랐다. 심은호는 그의 앞에서 조금도 반격하지 못하는 나약한 남자였다.“7년 전부터 열심히 관리했는데 확실히 민아 씨는 핑크색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반하준은 분노가 극에 도달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야. 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 줬는데 네가 나랑 비교가 돼?”반하준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쏟아져 나왔고 그는 지금 이 순간 자기 얼굴이 성난 짐승처럼 일그러졌다는 것을 알았다.부신 그룹 후계자는 항상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심은호의 도발에 쉽게 넘어갈 수 있겠나.하지만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남자의 소유욕이 발동한 걸까.그는 심은호가 무모하게 자신을 도발하고 남자로서 자존심을 짓밟는 게 싫을 뿐이지 강민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심은호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해지며 별처럼 반짝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