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잠시 정신이 팔리며 혼란스러운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자 또다시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도민영이 그녀를 팔아넘겼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녀가 처음 만났던 양부모는 그녀를 때리고 욕할 때 출신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도민영은 임신한 채 도망치는 연기를 펼쳤고 한 마을 병원에서 딸을 출산한 뒤에는 하루 종일 한숨만 쉬었다.그러다 간병인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도민영은 남자 집에서 강성진과 만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그래서 아들을 낳아 강씨 가문으로 문제없이 시집갈 수 있기를 바랐는데, 낳고 보니 딸이었고 이제 딸과 함께 강씨 가문에서 몇 년 동안 고생할 생각에 도민영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간병인은 대담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도민영과 거래를 하려는데, 바로 자기 아들과 도민영의 딸을 맞바꾸는 것이었다.도민영도 그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덜컥 동의하고 말았다.간병인의 아들과 함께 떠날 때 그녀는 돈을 주며 딸을 잘 돌봐달라고 말했다.그 간병인이 강민아의 첫 번째 양어머니였고 그녀는 강민아에게 하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도민영이 그들에게 준 돈은 양아버지라는 사람이 다 써버리고 양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듬해 딸을 낳았다.그렇게 3년 연속 딸을 세 명이나 낳았고 집안 형편은 점점 더 나빠졌다.양부모는 강민아를 재앙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데려온 이후로 하씨 가문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말했다.강민아의 기억 속 그녀는 늘 부엌에서 잠을 잤고 양부모가 밥을 주지 않으면 집안의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그러다 다섯 살 때 육지광이 몇 개월 동안 육성민을 데리고 폐지를 주우러 이 동네에 자주 왔는데, 매번 3동 아파트에 올 때마다 여자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남성과 여성의 욕지거리가 들리곤 했다.당시만 해도 구석 동네에선 아이를 때려도 경찰에 신고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그저 집마다 창문을 꼭꼭 닫을 뿐이었다.양부모는 그녀에게 집 안에 모아둔 병과
그녀는 곧바로 강민아의 턱을 잡고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육지광 쪽으로 돌렸다.“그쪽같이 다리 불편한 고물상 아버지를 뒀으면 아들 장가가기엔 그른 것 같은데, 얘를 데려가서 며느리처럼 키워요. 60만원 줘요.”양어머니가 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하자 육지광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저축한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그는 힘없이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아이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양어머니가 또다시 욕을 하며 꺼지라고 말하자 육지광은 굳은 표정으로 육성민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석 달을 더 지냈고, 그 사이 경찰이 집에 찾아와 하씨 가문 사람들의 정보를 등록하고 떠났다.강민아는 양부모가 때리고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며 부엌 싱크대 파이프 옆에 지쳐서 웅크리고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따뜻한 이불 아래에서 자는 자신을 발견했다.한 번도 이불 아래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검은 솜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뒤늦게 그녀가 누워있는 곳이 다리 아래라는 걸 알아차렸고 육지광이 죽을 끓여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은 숟가락으로 죽을 호호 불어서 식힌 뒤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죽을 다 먹은 후엔 육지광이 약을 먹였다.“나도 널 사 온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나와 성민이는 마땅히 지낼 곳도 없으니까.”강민아는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까만 눈동자로 육지광과 육성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육성민이 그녀에게 물었다.“이름이 뭐야?”그녀가 고개를 젓자 육지광이 말했다.“얘는 이제 내 아이이자 네 동생이니까 이제부터 우리랑 같은 성을 쓸 거야. 성은 육, 이름은...”육지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내가 널 하씨 가문에서 데리고 오던 날 밤 넌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어. 네 부모님은 네가 곧 잘못될 줄 알고 20만원으로 가격을 낮췄고, 난 16만원만 던져놓고 널 안은 채 도망쳤어. 그날 밤 달이 무척 밝았는데 꼭 하늘에서 떨어질 것처럼 지붕 위
이어 강민아가 물었다. “그쪽과 손잡으면 전 뭘 얻을 수 있죠?”우경아는 미소를 지으며 강민아에게 태블릿을 건넸다.“여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지분을 가져가요. 강민아 씨는 기술을 투자하고 난 돈을 투자해서 수익금을 똑같이 나눠 갖는 거죠. 똑똑한 강민아 씨라면 이 프로젝트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강민아는 우경아가 건넨 프로젝트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마침 자신도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 중이었는데 기술을 알아내더라도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없어서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이었다.반면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 북은 서경 정부에서 지원하고 부신 그룹이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우경아는 이미 이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이를 가져와서 그녀와 공유한다는 것은 연막작전이거나 기술팀이 곤경에 처했다는 뜻이다.강민아와 반용화 사이를 알고 있으니 아마도 그녀를 통해 반용화 연구팀과 접촉하려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강민아가 이 판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녀는 부신 그룹의 ‘갑’이 되는 셈이다.그녀가 웃었다.“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우경아가 한숨을 쉬었다.“큰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매사 신중하게 움직이기에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기꺼이 적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에요.”“제가 적인가요?” 강민아가 웃자 우경아의 화려한 이목구비에도 덩달아 부드러운 감정이 담겼다.“같은 여자끼리 서로 돕고 살죠.”강민아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저희 아빠와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요.”우경아는 환하게 웃었다.“영원한 친구는 없지만 영원한 이익은 있죠. 강성진을 감옥으로 보내는 게 내게 큰 이득이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락으로 보낼 거예요.”우경아는 술잔 두 개를 집어 들고 그중 하나를 강민아에게 건넸다.“건배해요.”강민아는 술잔을 건네받았다.“그러면 우 대표님은 언젠가 저도 지옥으로 보낼 건가요?”우경아는 유리잔을 입술에
“아악!”장기명이 비명을 지르자 강민아는 뒤로 물러서며 장기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민아 씨, 저예요!”장기명이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강민아는 두 눈에 가득 담긴 역겨움을 덜어냈다.“장 교수님이었군요. 전 변태가 들이대는 줄 알았어요.”장기명은 외국인 한 명과 동행했는데, 그는 강민아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장기명은 맞은 얼굴을 문질렀다.“시크릿 같은 곳에 무슨 변태가 있어요. 그냥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죠.”강민아는 똑같이 상대에게 되물었다.“여기 왜 오셨는데요?”장기명은 옆에 있는 외국인을 바라보며 웃었다.“모임이 있어서요.”외국인은 강민아에게 고개만 끄덕였고, 강민아는 장기명을 돌아보며 말했다.“그럼 전 이만 갈게요.”그녀가 가려는데 장기명이 곧바로 그녀의 앞을 막았다.“민아 씨, 줄곧 강승 테크에 대해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쪽이 강승에 입사한 후 두 곳에서 인수할 의향을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죠?”강민아가 물었다.“강승의 일이 장 교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죠?”말문이 막힌 장기명이 다소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옴 테크에선 민아 씨가 강승 테크 인수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어요. 옴 테크로 가서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고 싶지 않아요?”강민아는 웃었다.“사업에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이 이기죠. 두 회사가 강승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옴에서 정말로 강승을 원한다면 만족할 만한 가격을 제시해야 할 것 같네요.”장기명이 발끈했다.“그건 억지잖아요!”강민아는 속눈썹을 깜빡이며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사실대로 말할게요. 방금 우영 그룹 대표 우경아 씨와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분도 강승을 인수하고 싶어 해요.”장기명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왜 우영 그룹도...”“최저 금액을 제시한 옴 테크를 선택하면 국내 대기업 3곳에 밉보이는 건데, 장 교수님께서 뒷감당하실 건가요?”장기명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죠! 이럴 줄
옆에 서 있던 외국인은 우경아의 고혹적인 외모에 매료되었다.우경아가 앞으로 다가가 장기명의 뺨을 때렸다.“어떤 개가 감히 시크릿을 함부로 돌아다녀? 여기가 아무 데나 똥오줌 싸는 곳인 줄 알아?”장기명이 반응하기도 전에 우경아는 그의 사타구니를 발로 찼다.“아악!”바닥에 털썩 쓰러진 장기명이 아우성을 질렀다.우경아는 칼 모양 케이스를 씌운 태블릿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을 잡고 태블릿을 칼처럼 사용하며 장기명의 머리를 내리쳤다.“감히 내 사람을 희롱해? 사는 게 지긋지긋하지? 이제 조상님 만나러 가.”장기명과 함께 있던 외국인은 나서서 말리고 싶었지만 우경아의 기세에 두 손을 든 채 한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애원하던 장기명은 30초가 지나자 통곡과 비명만 내질렀다.우경아는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의 가장 약한 부위를 세게 발로 찼다.장기명의 몸이 삶은 새우처럼 말리자 우경아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그녀의 행동에 강민아는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다 우경아는 외국인이 휴대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 상대방의 휴대폰 화면 위로 자신의 명함을 올려놓았다.“충고하는데 주제넘은 짓은 하지 마세요.”외국인이 서투른 우리말로 물었다.“우... 대표님?”장기명은 자신을 때린 사람이 우경아라는 말을 듣고 순간 굳어버렸다.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이제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누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우경아는 강민아에게 다가가더니 뒤따라오던 근육질 남자에게 태블릿을 건네고, 상대방의 손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손을 닦았다.“때려서 해결하지 못할 건 없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더 때리면 돼요.”“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강민아는 장기명을 흘깃 쳐다보았다.“하지만 폭력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해요.”우경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근육질 남자에게 명령했다.“신발 바꿔.”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우경아의 한쪽 발을 조심스럽게 들더니 끝이 뾰족한 검은색 하이힐을 신겨
아름다움은 그녀의 무기였고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영 그룹이 곧 그녀의 뒷심이었다.그런 사람과는 적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강민아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우 대표님 감사합니다. 주신 선물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강민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는 장기명을 차갑게 훑어보았다.우경아는 떠나는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녀의 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다. 게다가 강민아는 7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여자가 아니던가.누군가 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겠지.우경아는 떠나기 전 장기명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언감생심 주제도 모르고 어딜 넘봐. 시간 있으면 가서 거울이나 봐.”우경아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외국인은 장기명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강민아라는 여자 반용화와 무슨 사이지?”장기명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도운, 빨리 날 병원에 데려다줘!”도운이 거침없이 장기명의 어깨를 흔들자 그는 고통에 눈을 뒤집었다.“빨리 말해! 방금 당신이 매달리던 여자 반용화와 아는 사이지?”장기명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부신 그룹 대표 전 와이프니까 당연히 반용화를 알겠지. 반용화 추천으로 고연대 영재반에도 들어갔는데.”장기명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내가 이렇게 맞은 건 안중에도 없고?”도운은 장기명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일어서서 강민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냥 낯이 익어서. 5년 전에 빠져나간 사람일 수도 있어.”“빠져나갔다니?”장기명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강민아는 우경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뒤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민아 씨, 밖에서 다른 강아지 키워요?]그는 벽에 기대어 숨은 채 몰래 훔쳐보는 강아지 이모티
강민아는 우경아를 만나러 가기 전 육성민에게 이를 알렸다.그녀 혼자 우경아를 만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육성민은 경호원 몇 명을 시켜 그림자 속에서 강민아를 보호하도록 했다.그때 주차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타더니 곧바로 검은색 리무진이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마스크를 쓴 남자가 의식을 잃은 강민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검은색 리무진이 차에 던져진 강민아를 태운 채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다.“강민아 씨가 납치되었다. 지원 바람!”경호원이 무전기를 통해 다른 동료들에게 외쳤다.그들 중 한 명이 차를 몰고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달려와 길을 막더니 순식간에 검은색 리무진은 도로 위 차량 사이로 사라졌다.정장을 차려입고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반하준은 굳은 표정이었다.시트에 쓰러진 강민아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고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시선을 아래로 떨군 반하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검은 눈동자는 기나긴 밤과 닮아 있었다.손을 뻗은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제지했다....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다소 추운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와 있었다.벽은 새하얗고 불빛은 어두웠으며 반하준은 그녀와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남자는 몸을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강민아가 몸을 움직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하준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무릎을 꿇고 두 손이 위로 묶인 강민아는 발에 우경아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가 신겼을까.’강민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속박당하는 게 싫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첫 양부
강민아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반유하를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뭔데?”반하준의 음침한 동공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죽을 줄은 몰랐겠지. 항상 널 괴롭혔으니까 그냥 한번 골려주고 싶었겠지.”강민아가 우아하게 눈을 흘기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네가 인정 안 할 줄 알았어. 이 녹취록만 가지고는 절대 널 감옥에 보낼 수는 없겠지.”남자의 시선이 그의 손에 붙잡혀 억지로 고개를 든 강민아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그에게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시절도 잠시,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그녀는 온갖 수작을 부리며 그를 챙기지 않았다.“강민아, 난 너한테 뭐야? 네가 사는 집, 네가 타는 차, 매달 수억 원의 생활비까지 줬잖아. 근데 넌 나한테 쓰레기 음식이나 먹이고 싸구려 도시락을 회사에 가져왔어. 그러곤 내가 배탈이 날까 봐 끓인 차에 위장약을 탔지. 사모님 노릇 한번 편하게 하네.”눈을 깜박이던 강민아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반하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 어떤 당황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맑은 눈동자는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세 번째 아이를 잃고 난 뒤엔 당신을 인간 취급도 하기 싫었어. 집안 음식과 살림은 내가 책임지는데 약으로 대머리를 만들 순 없잖아? 어르신이 민이를 정식 후계자로 삼을 때까지 몇 년만 참으려고 했어.”나른하게 흘러나오는 강민아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워 깃털처럼 날렸지만, 그게 반하준의 신경을 자극하며 사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그의 손끝이 미끄러져 강민아의 목을 움켜쥐었다.웃는 그의 선홍빛 얇은 입술이 어두운 밤의 뱀파이어처럼 광기를 띠었다.너무 똑똑한 여자는 독이 든 꽃과 같아서 쉽게 끌리지만 한번 건드리면 역으로 공격당한다.강민아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할아버지 반영식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적절한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다.“저는 정략결혼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진심으로 나만 사랑하는 여자를 원해요.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강기성이 들어왔다.강성진이 베개로 강나현의 얼굴을 누르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달려가 강성진을 몸으로 밀어냈다.얼떨결에 밀려나 침대 옆 탁자에 부딪힌 강성진은 여전히 양손에 베개를 움켜쥐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강성진은 강기성을 보고 그가 강나현을 혼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강기성은 강나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얼굴이 파래진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강기성은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강나현에게 가슴 압박을 했고 그제야 강나현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베개를 내리쳤다.“감히 날 밀쳐?”강기성은 돌아서서 낮게 윽박질렀다.“사람 죽일 뻔했어요!”강성진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내 체면만 구긴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서경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어!”강기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비웃었다.“그럼 죽여요.”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긴 했어도 강나현을 구한 뒤 곧바로 후회했다.그가 서둘러 달려오지 않고 강나현이 정말 강성진의 손에 죽었다면 그는 감옥에 갔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나서서 강나현을 구했기 때문에 기회는 사라졌다.강성진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농담이지.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기성아, 네가 나 대신 쟤 다리 좀 부러뜨려! 안 그러면 또 강씨 가문에 민폐를 끼칠 것 같으니까.”강나현은 벌벌 떨었다. 어릴 때부터 강성진을 무서워했는데 조금 전 강성진이 베개로 얼굴을 가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몇 초만 지나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두려움에 강나현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고 두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지에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강기성과 강성진 모두 고약한 냄새를 맡았고 강성진이 욕설을 내뱉자 강기성이 말했다.“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어.”강나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문 너머로 강성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민이가 목 놓아 울면서 무기력하게 소리를 질렀다.“난 엄마를 원해요. 아빠, 난 엄마를 원한다고요!”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그는 민이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아이 방을 나갔다.방 문이 닫히자 민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반하준은 적막한 방안에서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차가운 기운이 발바닥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모든 서랍을 열어젖히고 넥타이, 손목시계, 브로치 장신구를 모두 꺼냈다.‘이게 강민아가 준 선물이던가? 이게 사준 건가?’전부 잊어버렸다.대체 어떤 게 강민아가 사준 것이고 어떤 게 담당 코디가 매치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재계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준 선물은 다 기억나는데 뒤늦게 강민아가 줬던 선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그녀가 준 게 어떤 것인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반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액세서리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코디에게 보내 그가 산 게 어느 것인지 구분하도록 했다.깊은 밤, 코디는 서둘러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반하준은 마침내 강민아가 선물한 넥타이와 브로치를 찾아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의 무늬와 브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쓰다듬었다.강민아가 그에게 준 건 이렇게 많은데 심은호는 딱 하나만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전용 사물함에 넣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주인의 침실로 들어가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강민아가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옷장을 열자 안에는 강민아의 옷이 가득했다.그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까.반하준은 강민아가 늘 입던 잠옷 중 하나를 꺼내어 코끝에 대고 천에 밴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이게 강민아의 체취였나?’이젠 강민아의 체취가 어땠는지도 잊어버렸다.강민아가 누웠던 침대에 누워 그에겐 다소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몸을 돌려 강민아의 잠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미간은 찡그리고
침대에 누운 민이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흰자위만 조금 남아 희미한 불빛 속에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하준은 입을 벌렸지만 누군가 자기 목구멍으로 종이 뭉치를 밀어 넣은 듯한 느낌에 목이 메었고, 민이는 갈망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이미 이혼했는데...”어떻게 강민아와 재결합하겠나.그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강민아와 이혼 서류에 사인할 땐 돌아와서 애원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며, 정식으로 이혼하러 갈 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강민아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민이를 위해서 최대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네 엄마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면 생각해 볼게.”스스로 되뇌듯 말하며 반하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그런데 민이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나도, 아빠도 버렸는데 어떻게 아빠한테 와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요?”아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아빠, 엄마한테 가서 빌어요. 네? 용서해 달라고, 돌아오라고 빌어요!”민이의 눈에 반하준은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강민아를 붙잡지 못해도 반하준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아빠가 용서해달라고 말만 하면 엄마가 재혼해 줄 거예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엄마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민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는 아빠가 현이 형한테 잘해줘서 떠난 거예요.”반하준은 목구멍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강나현과 난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선을 넘은 적도 없어. 그 여자가 괜히 날 의심하는 거야!”민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아빠가 잘못했어요! 엄마 속상하게 했잖아요!”아이가 울부짖었다.“으아앙!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엄마가 재워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가고 며칠째 밤에 깨는데 엄마가 날 버린 것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엄마가
“서경에 소문 다 났어. 네가 우강 그룹에서 강나현이랑 약을 먹고 뒹굴었다고. 이것 봐! 내가 있는 모든 단톡방에서 너랑 강나현 영상과 사진이 퍼지고 있어!”연진숙은 반하준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반하준은 모든 단톡방에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진 사진과 영상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문 앞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몰래 찍은 것이 분명했다.그들 역시 재계에서 입지가 있는 인물들이라 보낸 사진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그리고 지금 사진과 영상이 하도 여러 곳에 퍼져 출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화면 속 대부분은 강나현이 차지하고 있고 일부 영상에서 반하준의 흐릿한 모습이 포착되었다.반하준은 연진숙에게 전화를 다시 건넸다.“저랑 강나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밝힐 거예요.”연진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남자 같은 애랑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서경에서 우리 집 며느리가 되겠다는 재벌가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허, 강씨 가문 사람들은 발바닥도 못 미치지!”반하준은 계단을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연진숙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어머니, 다시는 강씨 가문 헐뜯지 마세요!”연진숙은 당황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반하준, 너 지금 뭐라고 했어?”반하준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목의 상처는 이미 꿰매고 의사 선생님이 거즈로 감쌌지만 손에 조금만 힘을 주자 다시 희미하게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반하준이 옷을 갈아입은 탓에 연진숙은 그의 몸에서 희미한 소독수 냄새만 맡았을 뿐 손목을 다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강민아는 민이 엄마예요. 할머니가 돼서 강씨 가문 깎아내리는 소리 다신 귀에 안 들리게 하세요.”말하며 반하준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강나현과 강성진은 욕해도 되지만 강씨 가문을 욕하는 건 안 돼요. 그건 강민아를 욕하는 거니까.”연진숙이 불쑥 말했다.“강민아를 욕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홱 몸을 돌린
“내일부터 정식으로 대시해도 돼요? 언젠간 당당하게 민아 씨 사람이 되고 싶어요.”어둠이 강민아의 표정을 가렸고,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강민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심은호의 눈동자가 보였다.심은호는 강민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싫다는 건가?’그녀의 머리 옆에서 지탱하던 손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이 튀어나와 강민아의 얼굴과 심은호의 시야를 환하게 비췄다.그리고 남자는 벽에 기대어 있던 강민아가 입꼬리를 올린 채 눈가에 번진 미소를 볼 수 있었다.심은호의 성격상 절대 먼저 헤어지자고 할 리가 없는데, 역시나 남자는 적극적으로 다가올 생각이었다.계약 커플은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무는 관계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심은호는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림자가 힘차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자 심은호의 팔에 갇힌 강민아의 얼굴이 보였고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이봐!”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심은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뭐요? 남친이 여친한테 키스하는 거 안 보여요?”육성민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베어버릴 기세였다.“당신이랑 민아는 계약 관계일 뿐이잖아!”심은호가 피식 웃었다.“내일부터는 아니거든요.”육성민이 멈칫하는 사이 심은호가 강민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헤집으며 고개를 숙여 차가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에 진득한 입맞춤을 했다.“잘 자요. 내 여친.”깊은 눈동자가 꼭 바다 같아서 한 번만 봐도 깊숙이 빠져들어 빠져나오기 힘들 것만 같았다.심은호는 한 발짝 물러났다.“형님, 같이 가죠?”육성민은 늦게 귀가하는 강민아를 위해 정이를 챙기느라 이곳에 있었던 거다.게다가 최근 정이의 연습도 도와주면서 두 사람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조금 전 위에서 심은호의 차가 멈춰서는 걸 보고 또 강민
강민아는 황급히 대답했다.“안녕히 주무세요.”전화기 반대편에서 반용화가 전화를 끊자 강민아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심은호를 바라보다가 남자의 볼에 손을 뻗어 꼬집었다.의외로 심은호의 피부가 너무 탱글탱글해서 아무리 시도해도 뺨의 살을 꼬집을 수 없었다.심은호가 얼굴을 뒤로 젖히자 강민아의 손이 그의 턱을 잡게 되었다.꼭 선한 남자를 희롱하는 것 같았다.“내가 무슨 어르신을 학대해요? 그리고 선생님이 그쪽보다 나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선생님이 어르신이면 그쪽은 뭔데요?”심은호는 강민아의 가느다란 하얀 손목을 붙잡고 알아서 얼굴을 갖다대 비비적거렸다.“나는 젊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죠. 반용화 씨는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있는데 그게 학대가 아니고 뭐에요?”말을 마친 그가 두 눈을 반짝이나 마치 탐스러운 포도알 같았다.“연구원님이랑 통화하는 거 방해했어요? 미안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냥 민아 씨랑 대화하고 싶어서...”강민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질투하지 마요. 그냥 선생님일 뿐이니까.”“알겠어요. 여친님!”심은호는 흔쾌히 답했다.“그렇게 할게요.”강민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밀폐된 차 안에서 산소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기사가 아파트 건물 아래에 차를 세우고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보니 그녀는 어느새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인 채 좌석 뒤편에 기대어 있었다.“민아 씨, 도착했어요.”차마 강민아를 깨울 수 없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네.”강민아는 어눌하게 답했지만 취기와 졸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심은호는 차 문을 열고 손을 뻗어 강민아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부축했다.강민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뜨며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더니 하품했다.“이제 우강 그룹 일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잠이나 푹 자고 싶어요.”“네.”강민아는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여기까지 데려다주면 돼요.”심은호는 계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