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쫓아낸 걸 후회해요. 엄마가 끓여 준 죽도 먹고 싶고, 엄마가 만들어 준 케이크도 먹고 싶어요.’민이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절뚝거리며 길고양이 무리에게 다가갔다.아이는 고양이를 쫓아내고 바닥에 놓인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집어 들더니 손으로 죽을 떠서 입에 쌀알을 밀어 넣었다.죽은 이미 식었지만 엄마의 손맛이 입안에 감돌았다.민이는 울면서 죽을 먹었다.화가 난 길고양이들이 하악질을 해댔고 어떤 고양이는 민이의 다리에 뛰어올라 그릇에 담긴 음식을 돌려달라고 항의했다.“민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민이를 향해 다가가자 민이는 고개를 돌렸다.그는 밥알과 눈물로 얼룩진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왜 고양이 밥을 뺏고 있어, 너 미쳤어?”민이가 길고양이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걸 지켜보던 반하준은 민이가 그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버리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손을 뻗어 그 안에 있는 밥알을 가져다가 자기 입에 쑤셔 넣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민이는 훌쩍거리며 말했다.“아빠, 이거 엄마가 만든 거예요. 아빠도 엄마가 끓인 죽 안 먹은 지 오래됐죠?”민이는 양손으로 그릇을 들고 그에게 건넸다.“아빠도 좀 먹을래요? 어차피 앞으로는 엄마가 끓여준 죽을 못 먹게 될 텐데.”입을 벙긋하던 반하준은 마치 누군가 모래 한 줌을 움켜쥐고 목구멍에 밀어 넣은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강민아는 이미 오랫동안 그를 위해 죽을 끓여주지 않았고 심지어 평소 그가 먹던 음식도 대부분 그녀가 직접 만든 게 아니었다.그동안 자신과 아이들의 음식이 다른 건 알았지만 강민아가 특별히 그의 입맛을 배려해 따로 만들어 준 거라고 생각했다.CCTV를 본 후에야 반하준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동안 강민아에게 속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하준은 어이없고 우스울 뿐이다.반하준은 무릎을 꿇고 민이의 손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빼앗았다.“먹지 마. 내가 와서 죽 끓여주라고 할게.”잘생긴 얼굴로 고개를 든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광기가 소용돌이
강민아는 잠시 정신이 팔리며 혼란스러운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자 또다시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도민영이 그녀를 팔아넘겼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녀가 처음 만났던 양부모는 그녀를 때리고 욕할 때 출신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도민영은 임신한 채 도망치는 연기를 펼쳤고 한 마을 병원에서 딸을 출산한 뒤에는 하루 종일 한숨만 쉬었다.그러다 간병인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도민영은 남자 집에서 강성진과 만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그래서 아들을 낳아 강씨 가문으로 문제없이 시집갈 수 있기를 바랐는데, 낳고 보니 딸이었고 이제 딸과 함께 강씨 가문에서 몇 년 동안 고생할 생각에 도민영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간병인은 대담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도민영과 거래를 하려는데, 바로 자기 아들과 도민영의 딸을 맞바꾸는 것이었다.도민영도 그 순간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덜컥 동의하고 말았다.간병인의 아들과 함께 떠날 때 그녀는 돈을 주며 딸을 잘 돌봐달라고 말했다.그 간병인이 강민아의 첫 번째 양어머니였고 그녀는 강민아에게 하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도민영이 그들에게 준 돈은 양아버지라는 사람이 다 써버리고 양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듬해 딸을 낳았다.그렇게 3년 연속 딸을 세 명이나 낳았고 집안 형편은 점점 더 나빠졌다.양부모는 강민아를 재앙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데려온 이후로 하씨 가문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말했다.강민아의 기억 속 그녀는 늘 부엌에서 잠을 잤고 양부모가 밥을 주지 않으면 집안의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그러다 다섯 살 때 육지광이 몇 개월 동안 육성민을 데리고 폐지를 주우러 이 동네에 자주 왔는데, 매번 3동 아파트에 올 때마다 여자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남성과 여성의 욕지거리가 들리곤 했다.당시만 해도 구석 동네에선 아이를 때려도 경찰에 신고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그저 집마다 창문을 꼭꼭 닫을 뿐이었다.양부모는 그녀에게 집 안에 모아둔 병과
그녀는 곧바로 강민아의 턱을 잡고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육지광 쪽으로 돌렸다.“그쪽같이 다리 불편한 고물상 아버지를 뒀으면 아들 장가가기엔 그른 것 같은데, 얘를 데려가서 며느리처럼 키워요. 60만원 줘요.”양어머니가 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하자 육지광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저축한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그는 힘없이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아이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양어머니가 또다시 욕을 하며 꺼지라고 말하자 육지광은 굳은 표정으로 육성민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석 달을 더 지냈고, 그 사이 경찰이 집에 찾아와 하씨 가문 사람들의 정보를 등록하고 떠났다.강민아는 양부모가 때리고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며 부엌 싱크대 파이프 옆에 지쳐서 웅크리고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따뜻한 이불 아래에서 자는 자신을 발견했다.한 번도 이불 아래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검은 솜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뒤늦게 그녀가 누워있는 곳이 다리 아래라는 걸 알아차렸고 육지광이 죽을 끓여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은 숟가락으로 죽을 호호 불어서 식힌 뒤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죽을 다 먹은 후엔 육지광이 약을 먹였다.“나도 널 사 온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나와 성민이는 마땅히 지낼 곳도 없으니까.”강민아는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까만 눈동자로 육지광과 육성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육성민이 그녀에게 물었다.“이름이 뭐야?”그녀가 고개를 젓자 육지광이 말했다.“얘는 이제 내 아이이자 네 동생이니까 이제부터 우리랑 같은 성을 쓸 거야. 성은 육, 이름은...”육지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내가 널 하씨 가문에서 데리고 오던 날 밤 넌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어. 네 부모님은 네가 곧 잘못될 줄 알고 20만원으로 가격을 낮췄고, 난 16만원만 던져놓고 널 안은 채 도망쳤어. 그날 밤 달이 무척 밝았는데 꼭 하늘에서 떨어질 것처럼 지붕 위
이어 강민아가 물었다. “그쪽과 손잡으면 전 뭘 얻을 수 있죠?”우경아는 미소를 지으며 강민아에게 태블릿을 건넸다.“여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지분을 가져가요. 강민아 씨는 기술을 투자하고 난 돈을 투자해서 수익금을 똑같이 나눠 갖는 거죠. 똑똑한 강민아 씨라면 이 프로젝트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강민아는 우경아가 건넨 프로젝트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마침 자신도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 중이었는데 기술을 알아내더라도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없어서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이었다.반면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 북은 서경 정부에서 지원하고 부신 그룹이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우경아는 이미 이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이를 가져와서 그녀와 공유한다는 것은 연막작전이거나 기술팀이 곤경에 처했다는 뜻이다.강민아와 반용화 사이를 알고 있으니 아마도 그녀를 통해 반용화 연구팀과 접촉하려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강민아가 이 판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녀는 부신 그룹의 ‘갑’이 되는 셈이다.그녀가 웃었다.“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우경아가 한숨을 쉬었다.“큰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매사 신중하게 움직이기에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기꺼이 적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에요.”“제가 적인가요?” 강민아가 웃자 우경아의 화려한 이목구비에도 덩달아 부드러운 감정이 담겼다.“같은 여자끼리 서로 돕고 살죠.”강민아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저희 아빠와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요.”우경아는 환하게 웃었다.“영원한 친구는 없지만 영원한 이익은 있죠. 강성진을 감옥으로 보내는 게 내게 큰 이득이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락으로 보낼 거예요.”우경아는 술잔 두 개를 집어 들고 그중 하나를 강민아에게 건넸다.“건배해요.”강민아는 술잔을 건네받았다.“그러면 우 대표님은 언젠가 저도 지옥으로 보낼 건가요?”우경아는 유리잔을 입술에
“아악!”장기명이 비명을 지르자 강민아는 뒤로 물러서며 장기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민아 씨, 저예요!”장기명이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강민아는 두 눈에 가득 담긴 역겨움을 덜어냈다.“장 교수님이었군요. 전 변태가 들이대는 줄 알았어요.”장기명은 외국인 한 명과 동행했는데, 그는 강민아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장기명은 맞은 얼굴을 문질렀다.“시크릿 같은 곳에 무슨 변태가 있어요. 그냥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죠.”강민아는 똑같이 상대에게 되물었다.“여기 왜 오셨는데요?”장기명은 옆에 있는 외국인을 바라보며 웃었다.“모임이 있어서요.”외국인은 강민아에게 고개만 끄덕였고, 강민아는 장기명을 돌아보며 말했다.“그럼 전 이만 갈게요.”그녀가 가려는데 장기명이 곧바로 그녀의 앞을 막았다.“민아 씨, 줄곧 강승 테크에 대해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쪽이 강승에 입사한 후 두 곳에서 인수할 의향을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죠?”강민아가 물었다.“강승의 일이 장 교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죠?”말문이 막힌 장기명이 다소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옴 테크에선 민아 씨가 강승 테크 인수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어요. 옴 테크로 가서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고 싶지 않아요?”강민아는 웃었다.“사업에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이 이기죠. 두 회사가 강승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옴에서 정말로 강승을 원한다면 만족할 만한 가격을 제시해야 할 것 같네요.”장기명이 발끈했다.“그건 억지잖아요!”강민아는 속눈썹을 깜빡이며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사실대로 말할게요. 방금 우영 그룹 대표 우경아 씨와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분도 강승을 인수하고 싶어 해요.”장기명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왜 우영 그룹도...”“최저 금액을 제시한 옴 테크를 선택하면 국내 대기업 3곳에 밉보이는 건데, 장 교수님께서 뒷감당하실 건가요?”장기명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죠! 이럴 줄
옆에 서 있던 외국인은 우경아의 고혹적인 외모에 매료되었다.우경아가 앞으로 다가가 장기명의 뺨을 때렸다.“어떤 개가 감히 시크릿을 함부로 돌아다녀? 여기가 아무 데나 똥오줌 싸는 곳인 줄 알아?”장기명이 반응하기도 전에 우경아는 그의 사타구니를 발로 찼다.“아악!”바닥에 털썩 쓰러진 장기명이 아우성을 질렀다.우경아는 칼 모양 케이스를 씌운 태블릿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을 잡고 태블릿을 칼처럼 사용하며 장기명의 머리를 내리쳤다.“감히 내 사람을 희롱해? 사는 게 지긋지긋하지? 이제 조상님 만나러 가.”장기명과 함께 있던 외국인은 나서서 말리고 싶었지만 우경아의 기세에 두 손을 든 채 한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애원하던 장기명은 30초가 지나자 통곡과 비명만 내질렀다.우경아는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의 가장 약한 부위를 세게 발로 찼다.장기명의 몸이 삶은 새우처럼 말리자 우경아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그녀의 행동에 강민아는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다 우경아는 외국인이 휴대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 상대방의 휴대폰 화면 위로 자신의 명함을 올려놓았다.“충고하는데 주제넘은 짓은 하지 마세요.”외국인이 서투른 우리말로 물었다.“우... 대표님?”장기명은 자신을 때린 사람이 우경아라는 말을 듣고 순간 굳어버렸다.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이제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누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우경아는 강민아에게 다가가더니 뒤따라오던 근육질 남자에게 태블릿을 건네고, 상대방의 손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손을 닦았다.“때려서 해결하지 못할 건 없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더 때리면 돼요.”“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강민아는 장기명을 흘깃 쳐다보았다.“하지만 폭력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해요.”우경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근육질 남자에게 명령했다.“신발 바꿔.”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우경아의 한쪽 발을 조심스럽게 들더니 끝이 뾰족한 검은색 하이힐을 신겨
아름다움은 그녀의 무기였고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영 그룹이 곧 그녀의 뒷심이었다.그런 사람과는 적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강민아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우 대표님 감사합니다. 주신 선물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강민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는 장기명을 차갑게 훑어보았다.우경아는 떠나는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녀의 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다. 게다가 강민아는 7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여자가 아니던가.누군가 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겠지.우경아는 떠나기 전 장기명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언감생심 주제도 모르고 어딜 넘봐. 시간 있으면 가서 거울이나 봐.”우경아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외국인은 장기명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강민아라는 여자 반용화와 무슨 사이지?”장기명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도운, 빨리 날 병원에 데려다줘!”도운이 거침없이 장기명의 어깨를 흔들자 그는 고통에 눈을 뒤집었다.“빨리 말해! 방금 당신이 매달리던 여자 반용화와 아는 사이지?”장기명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부신 그룹 대표 전 와이프니까 당연히 반용화를 알겠지. 반용화 추천으로 고연대 영재반에도 들어갔는데.”장기명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내가 이렇게 맞은 건 안중에도 없고?”도운은 장기명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일어서서 강민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냥 낯이 익어서. 5년 전에 빠져나간 사람일 수도 있어.”“빠져나갔다니?”장기명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강민아는 우경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뒤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민아 씨, 밖에서 다른 강아지 키워요?]그는 벽에 기대어 숨은 채 몰래 훔쳐보는 강아지 이모티
강민아는 우경아를 만나러 가기 전 육성민에게 이를 알렸다.그녀 혼자 우경아를 만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육성민은 경호원 몇 명을 시켜 그림자 속에서 강민아를 보호하도록 했다.그때 주차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타더니 곧바로 검은색 리무진이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마스크를 쓴 남자가 의식을 잃은 강민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검은색 리무진이 차에 던져진 강민아를 태운 채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다.“강민아 씨가 납치되었다. 지원 바람!”경호원이 무전기를 통해 다른 동료들에게 외쳤다.그들 중 한 명이 차를 몰고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달려와 길을 막더니 순식간에 검은색 리무진은 도로 위 차량 사이로 사라졌다.정장을 차려입고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반하준은 굳은 표정이었다.시트에 쓰러진 강민아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고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시선을 아래로 떨군 반하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검은 눈동자는 기나긴 밤과 닮아 있었다.손을 뻗은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제지했다....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다소 추운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와 있었다.벽은 새하얗고 불빛은 어두웠으며 반하준은 그녀와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남자는 몸을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강민아가 몸을 움직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하준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무릎을 꿇고 두 손이 위로 묶인 강민아는 발에 우경아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가 신겼을까.’강민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속박당하는 게 싫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첫 양부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