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그녀의 무기였고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영 그룹이 곧 그녀의 뒷심이었다.그런 사람과는 적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강민아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우 대표님 감사합니다. 주신 선물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강민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는 장기명을 차갑게 훑어보았다.우경아는 떠나는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녀의 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다. 게다가 강민아는 7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여자가 아니던가.누군가 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겠지.우경아는 떠나기 전 장기명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언감생심 주제도 모르고 어딜 넘봐. 시간 있으면 가서 거울이나 봐.”우경아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외국인은 장기명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강민아라는 여자 반용화와 무슨 사이지?”장기명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도운, 빨리 날 병원에 데려다줘!”도운이 거침없이 장기명의 어깨를 흔들자 그는 고통에 눈을 뒤집었다.“빨리 말해! 방금 당신이 매달리던 여자 반용화와 아는 사이지?”장기명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부신 그룹 대표 전 와이프니까 당연히 반용화를 알겠지. 반용화 추천으로 고연대 영재반에도 들어갔는데.”장기명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내가 이렇게 맞은 건 안중에도 없고?”도운은 장기명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일어서서 강민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냥 낯이 익어서. 5년 전에 빠져나간 사람일 수도 있어.”“빠져나갔다니?”장기명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강민아는 우경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뒤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민아 씨, 밖에서 다른 강아지 키워요?]그는 벽에 기대어 숨은 채 몰래 훔쳐보는 강아지 이모티
강민아는 우경아를 만나러 가기 전 육성민에게 이를 알렸다.그녀 혼자 우경아를 만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육성민은 경호원 몇 명을 시켜 그림자 속에서 강민아를 보호하도록 했다.그때 주차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타더니 곧바로 검은색 리무진이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마스크를 쓴 남자가 의식을 잃은 강민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검은색 리무진이 차에 던져진 강민아를 태운 채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다.“강민아 씨가 납치되었다. 지원 바람!”경호원이 무전기를 통해 다른 동료들에게 외쳤다.그들 중 한 명이 차를 몰고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달려와 길을 막더니 순식간에 검은색 리무진은 도로 위 차량 사이로 사라졌다.정장을 차려입고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반하준은 굳은 표정이었다.시트에 쓰러진 강민아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고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시선을 아래로 떨군 반하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검은 눈동자는 기나긴 밤과 닮아 있었다.손을 뻗은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제지했다....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다소 추운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와 있었다.벽은 새하얗고 불빛은 어두웠으며 반하준은 그녀와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남자는 몸을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강민아가 몸을 움직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하준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무릎을 꿇고 두 손이 위로 묶인 강민아는 발에 우경아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가 신겼을까.’강민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속박당하는 게 싫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첫 양부
강민아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반유하를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뭔데?”반하준의 음침한 동공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죽을 줄은 몰랐겠지. 항상 널 괴롭혔으니까 그냥 한번 골려주고 싶었겠지.”강민아가 우아하게 눈을 흘기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네가 인정 안 할 줄 알았어. 이 녹취록만 가지고는 절대 널 감옥에 보낼 수는 없겠지.”남자의 시선이 그의 손에 붙잡혀 억지로 고개를 든 강민아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그에게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시절도 잠시,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그녀는 온갖 수작을 부리며 그를 챙기지 않았다.“강민아, 난 너한테 뭐야? 네가 사는 집, 네가 타는 차, 매달 수억 원의 생활비까지 줬잖아. 근데 넌 나한테 쓰레기 음식이나 먹이고 싸구려 도시락을 회사에 가져왔어. 그러곤 내가 배탈이 날까 봐 끓인 차에 위장약을 탔지. 사모님 노릇 한번 편하게 하네.”눈을 깜박이던 강민아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반하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 어떤 당황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맑은 눈동자는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세 번째 아이를 잃고 난 뒤엔 당신을 인간 취급도 하기 싫었어. 집안 음식과 살림은 내가 책임지는데 약으로 대머리를 만들 순 없잖아? 어르신이 민이를 정식 후계자로 삼을 때까지 몇 년만 참으려고 했어.”나른하게 흘러나오는 강민아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워 깃털처럼 날렸지만, 그게 반하준의 신경을 자극하며 사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그의 손끝이 미끄러져 강민아의 목을 움켜쥐었다.웃는 그의 선홍빛 얇은 입술이 어두운 밤의 뱀파이어처럼 광기를 띠었다.너무 똑똑한 여자는 독이 든 꽃과 같아서 쉽게 끌리지만 한번 건드리면 역으로 공격당한다.강민아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할아버지 반영식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적절한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다.“저는 정략결혼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진심으로 나만 사랑하는 여자를 원해요.
반하준이 고개를 돌리자 문 밖의 하얀 빛이 휠체어에 앉은 남자의 실루엣을 비추었다.성큼성큼 들어오는 육성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를 집어삼켰다.반하준이 이제 막 몸을 일으키는데 육성민이 주먹을 휘둘렀고, 손을 들어 저항했지만 육성민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반하준은 프로 격투기를 배웠어도 힘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자랑하는 육성민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육성민이 반하준의 복부를 펀치로 가격했고 반하준은 바닥에 쓰러졌다.바닥에 엎드린 그가 입을 벌리며 울컥 무언가를 뱉어냈다.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들자 육성민이 열쇠를 들고 강민아의 손목에 묶인 수갑을 풀고 있었다.반하준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아픈 복부를 감쌌다.고개를 드니 휠체어를 탄 반용화가 눈앞에 와 있었다.남자는 찢어진 입술을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반용화, 이래도 저 여자한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용화는 검은색 지팡이를 들고 반하준의 얼굴을 때렸다.5년 동안 반용화가 지팡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반하준을 때리려고 꺼내든 것이다.휘두르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지만 단단한 나무 지팡이가 반하준의 얼굴에 얼음처럼 차갑게 부딪혔다.퍽!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하준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어올랐다.반용화는 발밑에 엎드린 개미를 바라보듯 그를 내려다보았다.“괜찮아?”반하준의 뒤에서 육성민의 걱정 어린 물음이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육성민의 훤칠하고 건장한 몸이 강민아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육성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민아를 향한 그의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당시 육성민은 풋풋했고 군대 훈련도 받고 작전에도 참여했지만, 고귀한 재벌가 후계자에 비하면 밑바닥부터 한 걸음씩 올라온 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육성민이 강민아에게 남매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반하준은 적을 만났을 때
그러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고 정이만 데리고 나왔을 때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강민아는 손을 움직이며 육성민이 반하준에게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봤다.반하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순백의 벽에 끔찍한 흔적을 남겼다.강민아는 반용화에게 물었다.“선생님, 저 어떻게 찾았어요?”“여기 스프링 가든이야. 반하준이 네 집 맞은편에 집을 샀어.”강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집을 언제 샀는데요?”“3일 전에.”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울컥 역겨움이 밀려왔다.강나현에게서 반유하의 녹취록을 얻은 후 일부러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마음먹은 거다.그녀를 스프링 가든에 가둠으로써 마치 그녀가 집을 나가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 눈을 속이려고 했다.만약 그녀가 육성민의 경호원 없이 ‘시크릿’에 갔다면 그녀가 감금된 후 반하준은 육성민에게도 손을 써서 정이를 데려갔을 거다.반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경찰에 신고했어.”이제 그는 자기 조카에 대한 혐오밖에 남지 않았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다시 바닥에 쓰러져 턱을 따라 흐르는 피가 비싼 와이셔츠를 더럽히는 것을 보았다.사파이어 브로치는 진작 2, 3미터 떨어진 곳에 날아갔고 남자의 얼굴은 붉고 멍이 든 흔적이 가득했다.그는 볼품없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오만하게 눈을 치켜뜬 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강민아가 반용화에게 물었다.“저를 납치한 지 얼마나 됐죠?”“두 시간.”“네.” 강민아가 대답했다.“사태가 심각하지 않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니 구치소에 들어가도 귀한 대접만 받겠네요.”오히려 육성민이 반하준을 적지 않게 다치게 했다.반하준은 바닥에 앉아 한 쪽 팔을 구부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경찰서로 보내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깟 법 하나 모를까.강민아는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떠올라 반용화에게 물었다
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고 경호원들이 강민아의 지시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들은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고 사방에서 반하준을 향해 카메라를 조준했다.짜악!강민아가 죽도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뺨에 붉은 자국이 순식간에 드러났다.반하준의 몸에서 피가 끓어오르며 그는 혀끝으로 화끈거리는 입 안쪽을 밀어냈다.“강민아!”굴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욕을 내뱉으려던 그가 말을 뚝 멈췄다. 한 번도 이런 각도로 강민아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죽도를 든 여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워져 두 개의 그림자가 눈을 덮고 있었다.전처가 예쁘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지금 이순간 매서운 그녀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칼날같이 오싹한 섬광이 보였다.강민아는 가느다란 죽도를 다시 들어 올렸다.반하준의 눈이 번쩍 뜨이며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죽도로 이렇게 사람을 때리면 손 다쳐.”강민아의 뒤에서 육성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크고 두꺼운 손으로 죽도를 들고 있던 그녀의 손등을 완전히 감쌌다.“팔을 움직여. 팔꿈치를 돌려서 어깨뼈를 펴고 허리 힘으로 팔을 끌어당겨서 이렇게 때리는 거야.”짜악!그렇게 반하준의 어깨를 때리는 순간 통증이 불길처럼 번지며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었다.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민아 뒤에 서 있는 육성민을 차갑게 바라봤다.그가 바라보는 각도에서는 강민아의 등이 육성민의 가슴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산처럼 여자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강민아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이렇게 때리니까 확실히 손이 흔들리지 않네.”육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그의 따뜻하고 큰 손이 강민아의 손등에서 멀어졌다.반용화는 휠체어에 앉아 육성민의 뒷모습을 깊게 응시했다.퍽!통증이 가슴에 번지며 반하준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이마에서 땀방울이 스며 나왔다.“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어. 못 참겠으면
수치스럽고 괴로워하는 그의 표정이 휴대폰 카메라에 여러 각도로 찍혔다.죽도를 휘두르자 공기 중엔 요란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사람을 때리는 것도 제법 중독성이 있었다.게다가 직접 손으로 때리는 상대가 망할 전남편이면 더더욱 그랬다.“즉석식품이나 길거리 음식을 사다 주는 것도 들킬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어. 당신은 날 업신여겼고 난 당신을 우습게 봤지. 결혼생활 내내 날 무시하는데 제대로 챙겨주고 싶겠어? 반하준, 결국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아파?”짜악!강민아가 죽도를 휘두르며 말했다.“살갗에 난 상처는 며칠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언어적 폭력으로 받은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아!”욕설과 모욕이 가장 큰 상처가 되는 만큼 반하준도 똑같이 느끼길 바랐다.반하준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대포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갈래갈래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의 몸을 관통할수록 아드레날린도 최고조에 달했다.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의 목과 턱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문득 그날 정수산에서 레이싱했을 때의 짜릿함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것 같았다.쾌감?반하준도 혼란스러웠다.몸속에서 자신도 모르고 있던 어떤 페티쉬가 강민아의 손에서 발굴되어 드러난 것 같았다.레이싱 대회가 끝나고 꾸었던 기이하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혹적인 꿈이 반하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지저분하고 더러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자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하이힐 굽이 몸을 짓밟는 힘을 느끼며 반하준은 위험도 도래하고 있음을 직감했다.“빨리... 이거 놔! 강민아, 너...”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붉게 물든 목 위로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강민아의 이름이 봉인을 해제하는 주문이 되었다.그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다다랐고 봉인이 풀리자 그는 몸도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다.검은 하이힐이 바닥을 딛자 주저앉은 반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배터리가 방전되어 벽에 버려진 로봇 같았다.가슴의 들썩거림만이 그가 아직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해일처럼
강민아는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할 작정이었다.“날 풀어줘!”반하준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몸은 아직 조금 전 상황을 되새기는 듯 온몸의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오늘 일은 서로 없던 걸로 해.”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힘겹게 말을 뱉었지만 잠긴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차가운 죽도가 그의 얼굴을 때리며 여자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못난이 주제에 참 아름다운 환상만 가지고 있단 말이지.”강민아는 죽도를 내려놓으며 자기 손목에 멍이 든 것을 확인했다.싸늘한 눈동자엔 매정함만이 남아 있었다.“말했지, 오늘부터 여기서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간다고. 나중에 여기 자동 호출기 설치해 줄 테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나한테 빌어.”강민아는 반하준을 철저히 감금하기 위해 생각한 끝에 경호원에게 지시했다.“전기 충격 목걸이 큰 사이즈로 가져와서 이 사람한테 채워요. 괜히 소리 지르고 난동 부리면 이웃들에게 피해를 줄 테니까. TV도 하나 가져와요. 반 대표님 혼자 계시면 적적할 테니 24시간 내내 틀어놓으세요.”잠도 못 자게 하려는 거다.그는 여기 갇혀서 움직일 수 없는데 24시간 내내 TV를 틀어놓으면 소음과 빛의 방해를 받아 편히 지낼 수 없었다.강민아는 정말 그를 죄수처럼 대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누구한테 배웠어? 이걸 다 누가 가르쳐줬지? 저 사람이야?”반하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반용화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고 턱선은 강철처럼 날카롭고 단단했다.“아니면 저 자식이야?”반하준의 시선이 육성민에게 향했다.“다 당신한테 배운 거야. 아이 울음소리 때문에 깨고 가슴 통증 때문에 잠도 못 잘 때 당신은 어디 있었는데?”그는 밤새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며 그녀 홀로 울부짖는 두 아이와 반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하게 내버려두었다.몸조리하는 동안 쌓였던 원한은 평생 마음에 새겨져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온몸이 스트레스와 공포에 휩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