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우경아를 만나러 가기 전 육성민에게 이를 알렸다.그녀 혼자 우경아를 만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육성민은 경호원 몇 명을 시켜 그림자 속에서 강민아를 보호하도록 했다.그때 주차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타더니 곧바로 검은색 리무진이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마스크를 쓴 남자가 의식을 잃은 강민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검은색 리무진이 차에 던져진 강민아를 태운 채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다.“강민아 씨가 납치되었다. 지원 바람!”경호원이 무전기를 통해 다른 동료들에게 외쳤다.그들 중 한 명이 차를 몰고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달려와 길을 막더니 순식간에 검은색 리무진은 도로 위 차량 사이로 사라졌다.정장을 차려입고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반하준은 굳은 표정이었다.시트에 쓰러진 강민아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고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시선을 아래로 떨군 반하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검은 눈동자는 기나긴 밤과 닮아 있었다.손을 뻗은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제지했다....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다소 추운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와 있었다.벽은 새하얗고 불빛은 어두웠으며 반하준은 그녀와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남자는 몸을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강민아가 몸을 움직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하준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무릎을 꿇고 두 손이 위로 묶인 강민아는 발에 우경아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가 신겼을까.’강민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속박당하는 게 싫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첫 양부
강민아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반유하를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뭔데?”반하준의 음침한 동공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죽을 줄은 몰랐겠지. 항상 널 괴롭혔으니까 그냥 한번 골려주고 싶었겠지.”강민아가 우아하게 눈을 흘기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네가 인정 안 할 줄 알았어. 이 녹취록만 가지고는 절대 널 감옥에 보낼 수는 없겠지.”남자의 시선이 그의 손에 붙잡혀 억지로 고개를 든 강민아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그에게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시절도 잠시,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그녀는 온갖 수작을 부리며 그를 챙기지 않았다.“강민아, 난 너한테 뭐야? 네가 사는 집, 네가 타는 차, 매달 수억 원의 생활비까지 줬잖아. 근데 넌 나한테 쓰레기 음식이나 먹이고 싸구려 도시락을 회사에 가져왔어. 그러곤 내가 배탈이 날까 봐 끓인 차에 위장약을 탔지. 사모님 노릇 한번 편하게 하네.”눈을 깜박이던 강민아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반하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 어떤 당황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맑은 눈동자는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세 번째 아이를 잃고 난 뒤엔 당신을 인간 취급도 하기 싫었어. 집안 음식과 살림은 내가 책임지는데 약으로 대머리를 만들 순 없잖아? 어르신이 민이를 정식 후계자로 삼을 때까지 몇 년만 참으려고 했어.”나른하게 흘러나오는 강민아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워 깃털처럼 날렸지만, 그게 반하준의 신경을 자극하며 사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그의 손끝이 미끄러져 강민아의 목을 움켜쥐었다.웃는 그의 선홍빛 얇은 입술이 어두운 밤의 뱀파이어처럼 광기를 띠었다.너무 똑똑한 여자는 독이 든 꽃과 같아서 쉽게 끌리지만 한번 건드리면 역으로 공격당한다.강민아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할아버지 반영식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적절한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다.“저는 정략결혼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진심으로 나만 사랑하는 여자를 원해요.
반하준이 고개를 돌리자 문 밖의 하얀 빛이 휠체어에 앉은 남자의 실루엣을 비추었다.성큼성큼 들어오는 육성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를 집어삼켰다.반하준이 이제 막 몸을 일으키는데 육성민이 주먹을 휘둘렀고, 손을 들어 저항했지만 육성민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반하준은 프로 격투기를 배웠어도 힘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자랑하는 육성민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육성민이 반하준의 복부를 펀치로 가격했고 반하준은 바닥에 쓰러졌다.바닥에 엎드린 그가 입을 벌리며 울컥 무언가를 뱉어냈다.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들자 육성민이 열쇠를 들고 강민아의 손목에 묶인 수갑을 풀고 있었다.반하준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아픈 복부를 감쌌다.고개를 드니 휠체어를 탄 반용화가 눈앞에 와 있었다.남자는 찢어진 입술을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반용화, 이래도 저 여자한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용화는 검은색 지팡이를 들고 반하준의 얼굴을 때렸다.5년 동안 반용화가 지팡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반하준을 때리려고 꺼내든 것이다.휘두르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지만 단단한 나무 지팡이가 반하준의 얼굴에 얼음처럼 차갑게 부딪혔다.퍽!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하준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어올랐다.반용화는 발밑에 엎드린 개미를 바라보듯 그를 내려다보았다.“괜찮아?”반하준의 뒤에서 육성민의 걱정 어린 물음이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육성민의 훤칠하고 건장한 몸이 강민아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육성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민아를 향한 그의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당시 육성민은 풋풋했고 군대 훈련도 받고 작전에도 참여했지만, 고귀한 재벌가 후계자에 비하면 밑바닥부터 한 걸음씩 올라온 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육성민이 강민아에게 남매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반하준은 적을 만났을 때
그러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고 정이만 데리고 나왔을 때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강민아는 손을 움직이며 육성민이 반하준에게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봤다.반하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순백의 벽에 끔찍한 흔적을 남겼다.강민아는 반용화에게 물었다.“선생님, 저 어떻게 찾았어요?”“여기 스프링 가든이야. 반하준이 네 집 맞은편에 집을 샀어.”강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집을 언제 샀는데요?”“3일 전에.”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울컥 역겨움이 밀려왔다.강나현에게서 반유하의 녹취록을 얻은 후 일부러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마음먹은 거다.그녀를 스프링 가든에 가둠으로써 마치 그녀가 집을 나가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 눈을 속이려고 했다.만약 그녀가 육성민의 경호원 없이 ‘시크릿’에 갔다면 그녀가 감금된 후 반하준은 육성민에게도 손을 써서 정이를 데려갔을 거다.반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경찰에 신고했어.”이제 그는 자기 조카에 대한 혐오밖에 남지 않았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다시 바닥에 쓰러져 턱을 따라 흐르는 피가 비싼 와이셔츠를 더럽히는 것을 보았다.사파이어 브로치는 진작 2, 3미터 떨어진 곳에 날아갔고 남자의 얼굴은 붉고 멍이 든 흔적이 가득했다.그는 볼품없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오만하게 눈을 치켜뜬 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강민아가 반용화에게 물었다.“저를 납치한 지 얼마나 됐죠?”“두 시간.”“네.” 강민아가 대답했다.“사태가 심각하지 않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니 구치소에 들어가도 귀한 대접만 받겠네요.”오히려 육성민이 반하준을 적지 않게 다치게 했다.반하준은 바닥에 앉아 한 쪽 팔을 구부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경찰서로 보내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깟 법 하나 모를까.강민아는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떠올라 반용화에게 물었다
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고 경호원들이 강민아의 지시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들은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고 사방에서 반하준을 향해 카메라를 조준했다.짜악!강민아가 죽도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뺨에 붉은 자국이 순식간에 드러났다.반하준의 몸에서 피가 끓어오르며 그는 혀끝으로 화끈거리는 입 안쪽을 밀어냈다.“강민아!”굴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욕을 내뱉으려던 그가 말을 뚝 멈췄다. 한 번도 이런 각도로 강민아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죽도를 든 여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워져 두 개의 그림자가 눈을 덮고 있었다.전처가 예쁘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지금 이순간 매서운 그녀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칼날같이 오싹한 섬광이 보였다.강민아는 가느다란 죽도를 다시 들어 올렸다.반하준의 눈이 번쩍 뜨이며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죽도로 이렇게 사람을 때리면 손 다쳐.”강민아의 뒤에서 육성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크고 두꺼운 손으로 죽도를 들고 있던 그녀의 손등을 완전히 감쌌다.“팔을 움직여. 팔꿈치를 돌려서 어깨뼈를 펴고 허리 힘으로 팔을 끌어당겨서 이렇게 때리는 거야.”짜악!그렇게 반하준의 어깨를 때리는 순간 통증이 불길처럼 번지며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었다.반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민아 뒤에 서 있는 육성민을 차갑게 바라봤다.그가 바라보는 각도에서는 강민아의 등이 육성민의 가슴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산처럼 여자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강민아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이렇게 때리니까 확실히 손이 흔들리지 않네.”육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그의 따뜻하고 큰 손이 강민아의 손등에서 멀어졌다.반용화는 휠체어에 앉아 육성민의 뒷모습을 깊게 응시했다.퍽!통증이 가슴에 번지며 반하준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이마에서 땀방울이 스며 나왔다.“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어. 못 참겠으면
수치스럽고 괴로워하는 그의 표정이 휴대폰 카메라에 여러 각도로 찍혔다.죽도를 휘두르자 공기 중엔 요란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사람을 때리는 것도 제법 중독성이 있었다.게다가 직접 손으로 때리는 상대가 망할 전남편이면 더더욱 그랬다.“즉석식품이나 길거리 음식을 사다 주는 것도 들킬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어. 당신은 날 업신여겼고 난 당신을 우습게 봤지. 결혼생활 내내 날 무시하는데 제대로 챙겨주고 싶겠어? 반하준, 결국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아파?”짜악!강민아가 죽도를 휘두르며 말했다.“살갗에 난 상처는 며칠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언어적 폭력으로 받은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아!”욕설과 모욕이 가장 큰 상처가 되는 만큼 반하준도 똑같이 느끼길 바랐다.반하준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대포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갈래갈래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의 몸을 관통할수록 아드레날린도 최고조에 달했다.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의 목과 턱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문득 그날 정수산에서 레이싱했을 때의 짜릿함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것 같았다.쾌감?반하준도 혼란스러웠다.몸속에서 자신도 모르고 있던 어떤 페티쉬가 강민아의 손에서 발굴되어 드러난 것 같았다.레이싱 대회가 끝나고 꾸었던 기이하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혹적인 꿈이 반하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지저분하고 더러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자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하이힐 굽이 몸을 짓밟는 힘을 느끼며 반하준은 위험도 도래하고 있음을 직감했다.“빨리... 이거 놔! 강민아, 너...”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붉게 물든 목 위로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강민아의 이름이 봉인을 해제하는 주문이 되었다.그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다다랐고 봉인이 풀리자 그는 몸도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다.검은 하이힐이 바닥을 딛자 주저앉은 반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배터리가 방전되어 벽에 버려진 로봇 같았다.가슴의 들썩거림만이 그가 아직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해일처럼
강민아는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할 작정이었다.“날 풀어줘!”반하준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몸은 아직 조금 전 상황을 되새기는 듯 온몸의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오늘 일은 서로 없던 걸로 해.”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힘겹게 말을 뱉었지만 잠긴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차가운 죽도가 그의 얼굴을 때리며 여자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못난이 주제에 참 아름다운 환상만 가지고 있단 말이지.”강민아는 죽도를 내려놓으며 자기 손목에 멍이 든 것을 확인했다.싸늘한 눈동자엔 매정함만이 남아 있었다.“말했지, 오늘부터 여기서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간다고. 나중에 여기 자동 호출기 설치해 줄 테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나한테 빌어.”강민아는 반하준을 철저히 감금하기 위해 생각한 끝에 경호원에게 지시했다.“전기 충격 목걸이 큰 사이즈로 가져와서 이 사람한테 채워요. 괜히 소리 지르고 난동 부리면 이웃들에게 피해를 줄 테니까. TV도 하나 가져와요. 반 대표님 혼자 계시면 적적할 테니 24시간 내내 틀어놓으세요.”잠도 못 자게 하려는 거다.그는 여기 갇혀서 움직일 수 없는데 24시간 내내 TV를 틀어놓으면 소음과 빛의 방해를 받아 편히 지낼 수 없었다.강민아는 정말 그를 죄수처럼 대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누구한테 배웠어? 이걸 다 누가 가르쳐줬지? 저 사람이야?”반하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반용화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고 턱선은 강철처럼 날카롭고 단단했다.“아니면 저 자식이야?”반하준의 시선이 육성민에게 향했다.“다 당신한테 배운 거야. 아이 울음소리 때문에 깨고 가슴 통증 때문에 잠도 못 잘 때 당신은 어디 있었는데?”그는 밤새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며 그녀 홀로 울부짖는 두 아이와 반씨 가문 사람들을 상대하게 내버려두었다.몸조리하는 동안 쌓였던 원한은 평생 마음에 새겨져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온몸이 스트레스와 공포에 휩
심은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와 맞닿은 체온에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강민아는 경직된 그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우리 여친 무사하니까 됐어요.”온전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강민아를 보자 허공에 매달렸던 그의 심장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갔다.심은호는 이내 팔을 풀었다. 최대한 강민아가 갑작스럽고 불편해하지 않도록 포옹한 시간과 힘을 조절했다.하지만 시선이 강민아의 얼굴에 닿자 그는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심은호가 적절한 타이밍에 몸을 떼어낸 탓에 그의 온기와 특유의 향기가 사라지자 되새기며 아쉬워하는 쪽은 강민아였다.“난 괜찮아요.”심은호가 곧장 물었다.“그 죄인은요? 경찰이 데려갔어요?”소식이 빠른 심은호가 반하준을 욕하는 말에 강민아는 코끝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안에 있어요.”심은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안에요? 경찰이 오길 기다리는 거예요?”강민아가 고개를 저었다.“제가 가둬놨어요.”심은호는 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강민아가 가느다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려놓는데 심은호의 시선은 온통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쏠렸다.“부탁할게요. 비밀 지켜줘요.”“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나보고 비밀 지켜달라는 거죠?”남자가 예쁜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반용화와 육성민이 다 있는 곳에서 강민아는 두 볼이 화끈거렸다.심은호는 그녀를 정말 좋아해서 새 타이틀을 머리에 쓰고 다니며 도처에 자랑하고 싶은 정도였다.그런 심은호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었다.“남친님, 제발 비밀 지켜줘요.”심은호가 반용화를 돌아보았다.“지금 누구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죠? 아, 민아 씨가 나한테 부탁하는 거네요! 반 선생님, 들었어요?”만약 심은호가 공작이었다면 지금쯤 활짝 펼친 깃털 하나하나에 ‘강민아 남자 친구’라고 적은 뒤 반용화 주위를 맴돌며 자랑했을 거다.반용화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심은호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다시 제 소
반진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아니야, 사과는 무슨 사과야! 그런 일은 없었어. 강윤정, 적당히 해!”반진경은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따지려고 다가가는데 반석현이 휴대전화를 꺼내 앱을 실행한 뒤 안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그 순간 축제 콘솔의 디스플레이 화면에 음악 재생 화면이 뜨더니 우렁찬 행진곡이 울려 퍼지며 참석한 어린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음악에 맞춰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강당이 활기를 띠자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스피커에 울려 퍼졌다.“반 여사님 무대에 올라와 주세요!”강민아는 손을 뻗어 반석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석현이 대단하다!”이제 반진경은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사과를 하지 않으면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졌다.강민아의 칭찬을 받은 반석현은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커다란 별들이 반짝이는 듯했다.평소에는 거의 웃지 않던 반석현이 강민아, 정이와 함께 있을 때만 비로소 그 나이에나 있을 법한 해맑은 미소를 보여줬다.뒷줄에 앉아 있던 민이는 강민아와 반석현이 서로를 향해 웃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욱신거렸다.짧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작은 입은 불만스러운 듯 삐죽거렸다.‘반석현 진짜 너무하네!’민이는 순식간에 분노가 차올랐다.아이의 심술은 부리는 것도 돌변하는 것도 빨라서 그동안 반석현과 잘 지냈던 순간은 하얗게 잊어버렸다.아이들의 열띤 박수 속에서 강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학부모들은 반진경을 돌아보았고 장기명이 좌불안석이었다.“그냥 올라가지 그래?”반진경은 이를 갈았다.“내가 뭐 하러 올라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강민아는 어떻게 딸을 시켜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반진경이 일어나서 강민아를 향해 걸어갔다.“네 딸보고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해!”강민아가 되물었다.“전에 정이가 1등을 하면 무대에 올라가서 공개로 사과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사과문은 수정했어요? 무대에 올라가서 망신이나 당하지 마세요.”화가 난 반진경은
진행자는 육성민에게 더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러면 삼촌분은 여자 친구를 사귈 생각이 있나요?”육성민은 더 이상 화제의 중심이 되고 싶지 않은 듯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의 시선은 무대 위 객석을 가로질러 강민아에게 정확하게 향했다.강민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따뜻한 미소를 짓자 그가 주목받는 것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네, 있어요.”육성민은 마치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단상 아래 엄마들은 이미 정신이 다른데 팔려 주변에 육성민에게 소개해 줄 적당한 연령대의 미혼 여성을 생각하고 있었다.강민아도 다소 놀란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육성민이 여자 친구를 만날 생각이 있다는 건 제법 놀라웠다.이윽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한쪽 팔을 꽉 잡아당기며 육성민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왜 그래?”강민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내 달빛을 지켜야지!”강민아는 주위 학부모들이 젊고 잘생긴 육성민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윤세현이 알아차리고 그러는 줄 알았다.육성민이 마침내 여자 친구를 찾겠다고 말했으니 여동생인 그녀도 쉽게 빠져나가긴 힘들 것 같았다.동시에 윤세현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반하준을 노려보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지며 가는 눈매가 한층 짙어졌다.‘육성민이 도발하는 건가?’그가 강민아와 이혼한 후 갑자기 이런 인생 대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니.반하준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차갑게 비웃었다.“형님은 어떤 여자를 좋아해요?”강민아 옆에서 심은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잘 모르겠어요.”심은호는 여우처럼 교활한 눈매를 가늘게 뜨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눈가에 번진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나중에 물어봐야겠어요.”그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한쪽 팔을 무심하게 강민아의 의자 등받이 가장자리에 올려놓았다.심은호는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 능글맞은 표정으로 무대에 서 있는 육성민을 바라보았다....무대에서 선생님은 정이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소감을 말하라고 했다.“혼자서 공연할 수 있게 격
“무슨 헛소리야!”반진경은 불쾌한 듯 장기명의 어깨를 밀치며 질책했다.“팔이 왜 밖으로 굽어? 딸이 잘되길 바라야 하는 것 아니야?”장기명은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말을 바꾸어 반진경을 달랬다.“연주가 1등 할 거야. 심사위원 점수 말고도 공연장에 있는 관객들의 투표도 있으니까 연주가 공연할 때 관중들이 제일 많았어.”반진경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연주가 꼭 1등 할 거야!”이미 많은 학부모에게 언질을 해두었고 그녀가 알기론 반연주에게 투표한 사람만 반수가 넘었다.강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정이의 공연에 체크 표시를 했다.반석현도 덩달아 체크를 그리며 강민아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민이는 두 사람의 대각선 뒤에 앉아 둘의 행동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반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정이한테 투표하지 않는 거야?”민이는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볼을 부풀렸다.“내가 왜 정이한테 투표해요?”“정이를 안 뽑으면 누구를 뽑을 건데?”민이가 공연 리스트를 훑어보다가 반연주에게 체크했다.강민아가 안아주지도 않는데 정이에게 왜 투표를 해주겠나.자리에 있던 관객들은 손에 들고 있던 공연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었다. 10분 후, 심사위원 선생님이 무대에 올라가 수상을 발표했다.“... 1등은 햇님반의 백조의 호수입니다.”반진경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감격의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대표로 무대에 올라 상을 받는 반연주를 보았다.“우리 연주 정말 대단해!”반진경은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말아 올리며 비웃듯 혀를 끌끌 찼다.이윽고 단상에 서 있던 선생님이 말을 이어갔다.“축제 대상 수상자는 햇님반 강윤정 학생의 봄날의 사자입니다.”반진경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금세 얼어붙었고 장기명은 입을 열었다.“대상이 1등보다 더 대단한 것 같은데? 1등은 세 개인데 대상은 강윤정 하나잖아.”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진경이 발끈했다.“왜 쟤가 대상인데?”장기명은 서둘러 반진경의 소매를
민이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목을 움츠리고 소심한 표정을 드러냈다.“올해 축제의 마지막 공연은 어린이반 햇님반 강윤정 친구의 봄날의 사자에요.”강민아는 진행자가 정이의 공연을 말하자 곧바로 반석현과 자세를 고쳐 앉았다.무대 장막이 걷히자 육성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는 너무 눈에 띄었다.워낙 훤칠한 키에 검은색 바지와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풀어헤친 조끼 사이로 탄탄한 복근이 드리웠고, 복근 위로 조명이 비추면서 드리운 그림자가 근육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강당에 앉아서 졸고 있던 부모님들이 무대를 언뜻 보고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동시에 예상치 못한 놀라움과 감탄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육성민이 북을 치자 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육성민의 팔근육과 복근에 쏠렸다.수많은 관객이 휴대폰을 꺼내 육성민이 북을 치는 모습을 촬영했다.“우와, 누구 학부모지?”“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요!”엄마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며 곧이어 작은 분홍색 사자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튀어나와 꽃밭 위로 뛰어올랐다!무대 아래 관객들은 복슬복슬한 작은 사자에게 순식간에 매료되었다.새끼 사자는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꽃밭을 뛰어다니며 북을 밟고 탈을 쓴 채 공중제비를 여러 번 연속으로 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분홍색 사자가 큰 북 위로 뛰어올라 육성민과 함께 춤을 췄다.텅 비어 있던 강당은 순식간에 다시 가득 찼다.“이건 초대 공연인가? 저 사자는 누구지?”“어린이반 햇님반의 강윤정이라는 친구예요.”“햇님반? 그럼 이제 겨우 다섯 살이란 거야? 저렇게 가볍게 움직이다니 너무 대단한데?”백강훈은 승덕 교장과 함께 앉아 휴대폰을 들고 카메라로 정이를 쫓으며 촬영했다.한참을 촬영한 후 그는 카톡으로 친구에게 영상을 보냈다.[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인데 재능이 어때? 키워볼 수 있겠어?]백강훈은 메시지를 보낸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민이의 시선이 정이를 따라 움직였다. 꽃밭 위로 올라가 육성민과 함께 격투도 벌였는데 워낙 빠르게
반하준은 인상을 찌푸렸다.“민이는 네 아들이야. 어떻게 안아주지도 않고 이렇게 차갑게 대해?”강민아가 되물었다.“민이가 날 멀리한다고 했을 때 당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나?”반하준은 그 자리에 멈칫하며 당황한 기색이 눈동자에 번쩍였다.강민아의 목구멍에서 서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잊은 듯했다.부신 그룹의 대표로서 워낙 바쁜 몸이니 집안일은 언제나 뒷전이었다.“아들은 엄마한테 의지하면 안 된다고, 민이는 부신 그룹 후계자가 될 몸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오히려 나한테 감정을 절제하고 엄마가 아니라 선생님이 되어줘야 한다고 했어. 여사님이 애 앞에서 계속 내 욕을 한다니까 그게 어디 욕이냐고, 당신 어머니 말대로 난 그냥 시골 사람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운이 좋아 반씨 가문에 들어온 거라고 했잖아. 그게 아니면 반씨 가문에선 도우미도 나 같은 출신은 안 데려올 거라고 했지.”반하준의 가슴에 수백만 개의 바늘이 꽂히는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혀 답답했다.이 고통은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떨게 했다.그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자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결국 반하준은 이렇게 말했다.“민이는 아직 어리잖아...”강민아의 차분하고 하얀 얼굴엔 감정의 동요 하나 없었다.“그럼 제발 아빠로서 책임지고 애 교육 좀 똑바로 해.”반하준은 입술을 꾹 다물며 형언할 수 없는 둔탁한 고통이 밀려왔다.누군가 전기 충격봉을 들고 가슴에 미세 전류를 흘려보내는 것처럼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강민아가 선사하는 감각에 푹 취해 있었다.“반하준이 널 그렇게 대한 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강민아의 소매를 붙잡는 윤세현이 뜨거운 공기를 뿜으며 씩씩거렸다.“왜 나한테 이런 건 숨겼어!”강민아가 대꾸했다.“너도 그랬잖아. 해외로 가서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말하며 그녀가 더욱 억울한 듯 덧붙였다.“난 네가 날 버린 줄 알았어.”윤세현은 황급히 두 팔을 벌려 강민아를 품에 안았다.“네가 결혼한
윤세현의 옆으로 작은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심은호가 선두로 달려갔다.심은호가 단번에 거리를 벌리자 반하준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그가 욕을 하려는 순간, 윤세현이 입을 열었다.“민아야!”윤세현은 팔을 높이 들고 강민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든 강민아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두 개의 초승달로 변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심은호는 강민아가 윤세현만 본다는 것을 눈치채고 우뚝 걸음이 멈췄다. 바로 그때 윤세현이 그를 지나쳐 강민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다들 비켜!”반하준은 어디선가 휠체어를 끌고 왔고 거기엔 민이가 타고 있었다.그는 휠체어를 이용해 심은호의 앞을 막고 윤세현을 밀어내려 했지만 심은호는 통로에 서서 반하준의 길을 막았다.“통로가 이렇게 좁은데 어떻게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 아들 데리고 가서 앉아!”반하준은 얼굴을 찡그렸다.“옆에 앉으면 우리 아들이 무대를 볼 수가 없잖아. 가운데 앉을 거야.”그렇게 말한 반하준은 직접 민이를 안은 뒤 휠체어를 옆으로 던지고 그대로 좌석 중앙으로 걸어가려 했다.좌석 앞 통로는 좁았고 심은호가 계속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아 그를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착한 개는 주인의 길을 막지 않아, 심은호!”반하준의 불쾌한 어투에는 강한 경고가 담겨 있었지만 심은호는 뒤돌아보지 않고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난 착한 개가 아니라 사냥개거든.”그들이 강민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을 때는 이미 윤세현이 강민아 옆 빈자리에 앉아 있었다.반하준은 윤세현을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심은호는 강민아를 지나 정고은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설윤이가 무대 뒤에서 힘들어하던데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심은호가 딸을 언급하자 정고은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가볼게요.”심은호는 정고은의 인사를 받으며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그도 강민아 옆에 앉게 되었다.반하준은 민이를 안은 채 큰 기둥처럼 옆에 서 있었고 칼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썹이 부자연
반연주는 무대 중앙에 서서 허리를 굽히며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공연장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이미 반진경을 아는 학부모들이 돌아서서 반진경을 칭찬하고 있었다.“연주 엄마, 연주 정말 잘 키우셨어요.”“연주가 춤을 잘 춰요. 보는 눈이 즐겁네요.”같은 반의 다른 학부모들도 뒤이어 거들었다.“강윤정을 빠지게 한 진경 씨의 선택은 정말 현명했어요. 강윤정이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좋은 공연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맞아요. 역시 진경 씨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말하면서 모두 은근슬쩍 강민아 쪽을 바라보았다.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학부모들도 서로 급이 나뉘어 있었는데 강민아의 능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뒷배가 없었다.뒷배가 없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강민아는 서경 최고 학교의 학부모들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그리고 반씨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부모들은 모두 반진경의 편에 서기로 했다.“민아 씨, 진경 씨에게 고마워해야죠. 일부러 그쪽 딸을 저격한 게 아니라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예요. 따님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발레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걸요.”강민아는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무대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제 딸이 혼자 무대에 올라 공연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맙긴 하네요.”강민아의 말이 반진경의 귀에 들리자 그녀는 다리를 꼬며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녀는 오만하고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무대에서 공연할지 망신을 당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무대 위 공연이 하나씩 끝나갈 무렵 자녀들의 공연을 다 본 후 다른 공연에는 관심이 없다며 일어나 자리를 뜨는 부모님들이 꽤 많았다.반석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소매를 살며시 잡았다.강민아가 고개를 숙이자 아이의 여린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단번에 반석현의 마음을 읽은 그녀가 부드럽게 달랬다.“괜찮아. 우린
반진경은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강민아 같은 게 반씨 가문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수준 떨어지게!”명품이 존재하는 이유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빠르게 구분하기 때문이다.평범한 사람들도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를 살 수 있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겠나.강민아가 반씨 가문에 시집 온 이후 반진경은 자신의 수준이 한층 떨어졌다고 느꼈다.이제 그녀가 반씨 가문에서 나갔으니 다시는 재벌 명문가에 발을 들일 기회를 주지 않을 거다.장기명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에게 당부했다.“반씨 가문에서 얘기 좀 잘해서 내가 석현이 선생님이 될 수 있게 해봐.”민이는 몸이 회복되어 집에서 엘리트 수업을 받고 있지만 반석현과 함께 수업하면 늘 반석현이 민이보다 성적이 훨씬 좋았다.장기명은 반씨 가문이 반석현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비록 반용화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에겐 자식이 없고 앞으로 반석현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다.만약 반씨 가문에서 민이가 후계자 역할을 해내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자리는 반석현의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당연히 장기명은 반석현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반진경이 말했다.“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장기명이 던진 건 난제였다. 그녀가 도저히 도와줄 수 없는 난제.반진경과 반용화는 나이가 비슷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반용화를 무서워했다.연못 속의 작은 물고기가 감히 바다의 고래를 넘볼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반용화 앞에서 감히 숨 한 번 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하지만 장기명은 굴하지 않았다.“일단 해봐. 반석현이 정말 반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내가 그 아이의 스승이 된다면 이걸로 반씨 가문의 핵심 인원이 될 수도 있어!”반진경은 장기명의 말에 입술을 달싹였다.당연히 그녀도 반씨 가문에서 그들 부부의 입지가 커지길 바랐다.“알았어. 한번 해볼게.”그녀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공연이 시작되자 무대에는 순백의 조
반진경은 장기명 옆에 앉아서 그가 자꾸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게 눈에 띄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반진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장기명은 순간 몸을 떨며 황급히 고개를 바로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아무것도 안 봤어!”하지만 반진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계속 강민아를 보고 있었잖아! 왜 쳐다봐?”반진경의 두 눈에 불꽃이 튕기자 장기명은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반석현을 안고 있길래 궁금해서 그랬어. 저 애가 강민아와 저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 몰라서.”이어 장기명은 반진경에게 떠들기 시작했다.“강민아가 반석현을 저렇게 챙겨주는데 저러다 하준이 숙모가 될 가능성은 없나?”말하며 장기명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말이면 다인 줄 알아?”반진경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어쨌든 반씨 가문 사람이라 장기명의 말에 그녀는 모욕을 느끼며 발끈했다.반씨 가문 사람으로서 앞으로 서경 상류층에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반용화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강민아가 이혼한 건 둘째 치고 한때 조카며느리였는데 어떻게 쟤랑 결혼하냐고. 이건 상도덕이 아니지!”장기명은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민아는 반하준과 이혼한 후 기댈 곳을 잃었어. 심씨 가문이 있다지만 거기서 강민아를 받아줄까? 내가 볼 땐 불가능해. 반석현에게 잘 보이려는 건 분명 반용화를 노리고 있는 거야.”말하며 장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어린이반에서 가족 캠핑을 하러 갔던 게 떠올랐다.그에게 반용화는 하늘 같은 사람이라 닿을 수가 없는데 강민아와 반석현이 비탈길에서 넘어진 것 때문에 그가 화를 냈다.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 눈에 단지 반석현을 위해 나선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장기명은 강민아 때문에 그가 분노했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본인만이 강민아를 향해 품고 있는 속내를 잘 알기에 본능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만약 반용화가 정말 강민아를 원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조카며느리였던 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