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든 정이는 연진숙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자 의아한 듯 물었다.“뭘 봐요?”연진숙은 무슨 원수라도 만난 듯 적대적인 표정을 드러냈다.“네가 왜 여기 있어?”연진숙은 반석현이 경호원과 정이를 데리고 병원에 왔다는 말에 민이를 다치게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서둘러 달려오자마자 정이가 보여 크게 화가 난 것이다.연진숙은 반석현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반용화의 양아들이지만 결국 어디까지나 양아들일 뿐, 반씨 가문의 후계자는 항상 반하준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민이가 입원하고 반석현의 후계자 교육이 시작되면서 연진숙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그러다 자기 앞에서 안하무인으로 구는 손녀를 보니 연진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뺨을 내려칠 듯 노려보고 있었다.정이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민이가 며칠째 학교에 안 나오는데 애들도 민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걸 알고 걱정해요. 제가 대표로 민이 병문안 온 거예요.”연진숙이 코웃음 쳤다.“고양이 쥐 생각하네. 무슨 속셈이야!”정이도 화가 났다.“쥐 할머니 길 막지 마요!”연진숙은 정전기라도 일어난 듯 불꽃이 화르르 피어올랐다.“감히 날 욕해?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교양 없는 것!”정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예전엔 한집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수였지만 이젠 마음에 들지 않는 연진숙 앞에서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민이 보고 쥐라고 했으니까 그쪽은 늙은 쥐 아니에요?”“할머니, 너무 시끄러워요!”침대에 누워있던 민이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연진숙은 손자를 아끼는 마음에 병실에 들어서면서도 정이가 원수라도 진 것처럼 노려보았다.“저리 꺼져!”“메롱!” 정이와 반석현은 동시에 연진숙을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연진숙은 울컥 화가 치밀어 간호사에게 물었다.“저 두 애가 내 손자한테 무슨 짓을 했죠?”“여자애가 도련님께 죽을 먹이니까 도련님이 아주 잘 드셨어요.”간호사가 기뻐하며 연진숙에게 말했다.“입원하신 이후로 식욕이 왕성한 건 이번이 처음이
“할머니! 빨리 나 내려줘요!”간호사들도 서둘러 연진숙을 말리기 위해 몰려들었다.“여사님, 얼른 도련님 내려놓으세요!”“여사님이 이러시면 도련님 몸만 더 상해요!”여러 간호사가 힘을 합쳐 연진숙의 손에서 민이를 데려갔다.간호사들에 의해 다시 병상에 눕혀진 민이는 온몸이 불편하기만 했고 숨을 쉴 때마다 등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곧이어 간호사가 연진숙에게 물었다.“멀쩡한 음식을 왜 토하라는 거예요?”“못 들었어요? 더러운 걸 먹었다니까!”“여자애가 죽 먹일 때 저희가 이미 확인했고 아무 이상 없었어요. 손자가 겨우 입맛이 돌아서 죽을 먹는데 어떻게 상처가 있는 아이한테 구토를 유도해요?”연진숙은 민이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달랬다.“네가 배가 고파서 그런 거야. 그 여자가 끓인 죽은 아무 영양도 없고 서민이나 먹는 음식이야. 그게 돼지 사료와 뭐가 달라?”“난 엄마가 끓인 죽이 좋아요!”민이가 연진숙을 향해 빽 소리를 지르자 연진숙은 아이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당황하고 말았다.민이는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할머니는 날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 엄마가 싫어서 그런 거잖아요!”“민이, 난 널 걱정하고 있는 거야!”연진숙이 말하자마자 민이는 배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우욱!”순식간에 조금 전까지 먹었던 죽이 모두 뱃속에서 토해져 나왔다.“민이야!”연진숙의 비명이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집에 있던 강민아는 우경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민아 씨가 낸 아이디어 봤는데 우리 팀에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어요. 선금 20% 줄 테니까 앞으로 우리 팀 이끌고 프로젝트 완성해 줘요.”강민아는 우경아의 일 처리가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낮에 금방 우경아에게 파일을 넘겼는데 저녁에 바로 기술팀을 넘겨줄 줄이야.“우 대표님께서 챙겨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전 저만의 팀을 꾸리고 싶어요.”우경아가 솔직하게 물었다.“내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강민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낙하
그녀가 올린 건 반하준을 밟고 있는 영상이었다.그 부분만 잘라내니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기 쉬웠다.영상에서 그녀와 반하준은 각각 프레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두 손이 묶여있지만 영상에는 수갑이 보이지 않아 반하준이 자발적으로 바닥에 앉아 강민아에게 짓밟히는 것처럼 보였다.또한 강민아는 일부러 영상의 소리를 제거해 보는 사람이 반하준의 옆모습과 강민아에게 밟힌 부분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소리가 없는 영상은 야릇한 상상을 떠올리기 쉬웠다.남자가 흐릿한 눈빛과 살짝 벌린 입술로 어떤 소리를 낼지 영상을 보는 사람은 오직 상상으로만 유추할 수 있다.강나현은 진작 준비해 놓은 메시지를 보냈다.[언니, 내가 굳이 얼쩡거리는 게 아니라 하준 씨가 날 억지로 강승에 보낸 거야. 언니도 알겠지만 난 자유분방해서 언니 비서가 되면 잘 챙겨줘!]메시지를 보낸 강나현이 고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강민아는 지금쯤 화가 나서 휴대폰을 잡은 손마저 덜덜 떨고 있을 거다.강나현이 무심코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했다.서로 삭제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과거엔 종종 게시물을 살펴보며 강민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곤 했었다.강나현은 강민아가 최근에 올린 게시물 하나를 보고 당황했다.[남편과의 달콤한 순간]강나현이 경멸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강민아에게 남편은 무슨.영상을 클릭하자 시야에 들어오는 반하준의 옆모습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믿을 수 없다는 듯 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강나현은 발끈했다.‘강민아와 반하준이 다시 만나는 거야? 말도 안 돼!’분명 인공지능으로 얼굴을 바꾼 거다. 강민아는 아직도 사모님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거다.강나현은 다시 강민아와의 채팅방으로 돌아갔다.“미친 거야?”타이핑하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고, 강나현의 메시지를 확인한 강민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강나현이 하도 멍청해 상대조차 하기 싫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자신조차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무식하게 아
한 방에서 TV의 불빛이 반하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언젠가 자신이 이렇게 굴욕적인 자세로 방에 갇혀 뉴스 방송이나 보고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나.TV에 시간이 나왔기에 그는 꼬박 1박 2일을 이곳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았다.오랫동안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생리적인 욕구는 없었다.하지만 앞서 땀을 많이 흘린 데다 양복바지가 더러워져 반하준은 온몸에 악취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기억 속 그는 한 번도 같은 정장을 다음 날까지 입어본 적이 없었다. 사무실에서 밤낮으로 야근해도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곤 했다.반유하가 죽은 해에 여러 번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어도 그가 소파에 쓰러지면 강민아가 넥타이를 풀고 신발과 양말을 벗긴 뒤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곤 했다.그러고는 침대로 옮겼는데 반하준이 다음날 깨어났을 땐 강민아가 온몸을 닦아준 덕분에 온몸이 뽀송뽀송한 잠옷 차림이었다.반하준은 눈을 감은 채 강민아의 인질이 되었는데도 미친 듯이 그녀가 잘해줬던 걸 떠올렸다.그때 갑자기 방 문이 열리더니 밖에서 강한 빛이 들어왔다.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문밖에서 들어오는 강한 빛이 망막을 자극해 눈을 가늘게 뜨니 여자의 날씬한 몸매가 실루엣을 드러냈다.강민아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반하준 앞에 도착한 그녀는 남자에게 화풀이하듯 발로 세게 몇 번 걷어찼다.피할 곳이 없었던 반하준은 고통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일부러 그를 아프게 하려고 강민아는 끝이 날카로운 하이힐로 바꿔 신었다. 반하준의 정장 바지와 셔츠 아래로 상처가 가득하다는 걸 알지만 수십번을 걷어차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그녀는 비닐봉지를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으며 웃었다.“먹을 것 좀 가져왔어.”산 채로 굶겨 죽일 수는 없었지만 너무 잘 지내게 두기도 싫었다.하루에 묽은 죽 한 그릇만 먹여서 숨만 붙여놓을 생각이다. 몸이 약해지면 의지가 꺾이기 쉬우니까.강민아가 뚜껑을 열자 닭죽 향이 코끝을 스쳤다.아
경악하던 반하준의 시선이 천천히 바닥에 놓인 죽으로 향했다.이 죽을 먹으려면 몸을 숙여야 하는데 그게 개와 다를 게 뭐가 있나.화가 치밀어 오른 반하준이 충혈된 두 눈으로 사나운 분노를 드러냈다.“강민아, 일부러 이러는 거지? 내가 그렇게 미워?”우리에 갇힌 성난 짐승이 차가운 철창을 들이받듯이 쇠사슬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하지만 금세 조용해진 그는 강민아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 미소가 꼭 밤의 정적 속에서 피어나는 하얀 꽃 같았다.“강성진한테 강나현을 강승 테크에 데려와 내 비서로 두라고 했잖아. 당신이 그렇게 역겹게 구는데 나라고 왜 못 하겠어?”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의 목구멍에서 차갑고 서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강민아는 지금 그에게 복수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넌 유하를 죽였어!”남자는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듯 그 말을 내뱉었다.강민아는 반하준의 헛소리에 굳이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무시해 버렸다.문을 여는데 육성민이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남겨두었던 경호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강민아 씨가 이 건물에 들어오는 걸 보고 연진숙이 사람들을 데리고 따라왔습니다.”강민아가 멈칫했다.“반하준을 구하러 온 건가요?”그렇다면 연진숙은 반하준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혹시 반용화가 반씨 가문 사람들에게 들킨 걸까?경호원이 말했다.“반현민이 오늘 윤정 아가씨가 가져다준 죽을 먹고 토한 것 때문에 따지려고 온 것 같습니다.”강민아는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쳤다. 오전에 이미 정이가 보온병에 닭죽을 몰래 넣는 것을 보고 민이에게 가져다줄 것이라고 짐작했다.경호원이 덧붙였다.“강민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연진숙이 그걸 알고 억지로 토하게 해서 반현민이 구토를 한 건데 기어코 강민아 씨에게 덮어씌울 작정인 겁니다. 저희가 이미 연진숙과 반씨 가문 경호원을 엘리베이터에 가둬두었으니 다른 엘리베이터로 가시면 됩니다.”그녀를 경호하던 경호원들은 연진숙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것을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감시 카메라를 바라보며 옆에 있는 수화기를 향해 소리쳤다.“내가 이 죽을 먹으면 어머니를 풀어줘!”그렇게 말한 후 한참을 기다렸지만 강민아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반하준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등을 누르고 구부린 다음 고개를 숙이고 죽 그릇에 다가갔다.자신이 취한 이 자세가 추하다는 건 잘 알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굴욕적으로 보이는지, 그게 고화질 카메라에 얼마나 적나라하게 찍히는지도.그는 혀를 내밀고 죽 그릇을 핥았다.밥알을 삼키는 순간 반하준의 뇌는 통제력을 잃었다.얼굴의 절반을 플라스틱 그릇에 파묻을 기세였고 순식간에 죽은 바닥을 드러냈다.지금 그 모습이 민이가 길고양이 밥을 빼앗아 먹던 것과 뭐가 다를까.반하준은 플라스틱 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들기 싫었다.하루 종일 굶었는데 모질게 구는 강민아 때문에 이 죽 한 그릇으로는 겨우 목숨만 부지할 뿐,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그는 플라스틱 그릇에 남은 마지막 물기까지 깔끔하게 핥았다.그 자세로 죽을 다 먹고 난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입술을 핥았다.옷으로 입을 닦을 수가 없기에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따뜻한 닭죽이 뱃속에 들어가자 속이 훨씬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다시 벽에 기대어 앉았다.음식이 들어가자 졸음이 몰려왔고 무거운 눈꺼풀을 못 이겨 눈을 깜박이던 반하준은 끝내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엘리베이터를 탄 연진숙과 경호원은 올라가다 말고 우뚝 멈춘 것을 발견했다.엘리베이터가 멈춘 채 움직이지 않자 몇 초 후 경호원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엘리베이터가 왜 고장 났죠?”경호원이 손을 뻗어 비상 버튼을 눌렀지만 내부의 통화 장치엔 응답이 없었다.이때 한 경호원이 외쳤다.“휴대폰에 신호가 안 잡히는데요?”다른 경호원들도 차례로 휴대전화를 꺼냈지만 마찬가지로 신호가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엘리베이터의 신호 차단 기능이 대단하네요.”이제 그들은
강나현이 슬쩍 강성진을 돌아보며 입을 놀렸다.“아빠, 언니한테 심은호 데려오라고 할 필요는 없었어요. 언니 난감할 텐데.”강나현은 심은호가 강민아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강성진의 농담이거나 강민아가 강성진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심씨 가문 도련님은 수많은 재벌가 아가씨의 왕자님이며 이상형인데 강민아가 복권에 당첨되어도 심은호 눈에 들었을 가능성은 없었다.강나현은 고고한 심은호가 다른 미혼의 재벌 2세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16, 17살 때부터 그는 흔한 스캔들 하나 없었다.한때 업계에서 심은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가 심은호 측으로부터 고소장을 받았다.그래서 강성진이 강민아와 심은호가 만난다고 했을 때 강나현은 곧바로 이렇게 대꾸했다.“그러다 심은호가 고소장 보내겠어요.”하지만 강성진은 확신에 차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이어 강나현은 강민아와 심은호가 동행하는 사진을 보았고, 사진 속 다정한 두 사람은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훌륭한 미모를 자랑하며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모습을 보였다.강나현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심은호가 어떻게 강민아를 만나?’정말 만난다고 해도 단지 심심풀이로 갖고 노는 거다.그러니 오늘처럼 강성진이 강민아에게 심은호와 함께 입사 파티에 오라고 했어도 강민아가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거겠지.심은호처럼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강민아 곁을 지키겠나.“아가씨 오셨네!”“부사장님 오셨어.”정신을 차린 강나현이 입구 쪽을 돌아보니 강민아는 깔끔한 여성 정장을 입고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채 가느다란 목선과 아름다운 턱선을 자랑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팔짱을 낀 남자는 훤칠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자 주위가 환해지며 자체 발광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그리고 무거운 카메라 장비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여러 기자가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강성진이 물었다.“민아야, 이 사람들은 누구야?”강민아는 참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담을 마구 뽐내고 싶었던 그의 행동에 지유빈은 순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이미 강승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강성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문제를 하나 내볼게요!”“...”확 느껴지는 ‘꼰대’ 기질에 지유빈은 숨이 턱 막혔다.“딸, 기자들 불러서 촬영할 거면 미리 말하지!”도민영은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카메라 렌즈는 그녀에게 흥분제와 다름없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현장에 있던 임원들은 서둘러 자신의 넥타이와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카메라 앞에서 번듯한 모습을 드러냈다.지유빈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저희는 강민아 씨 특집 기사에 쓸 소재를 찍으러 온 것이니 다른 분들은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면 됩니다.”파티장에 대형 카메라 여러 대가 설치되었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나.도민영은 연노랑의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드리운 채 크리스털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그녀가 강민아의 옆으로 다가가 카메라 렌즈 앞에서 몸을 배배 꼬자 카메라맨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여사님, 강민아 씨만 찍을 수 있게 옆으로 비켜주세요.”도민영은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에 바짝 붙인 채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눈을 깜박였다.“누가 엄마고 누가 딸인지 알아요?”“...”한편, 스프링 가든의 희미한 조명이 켜진 방 한구석에는 반하준이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TV 화면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만이 그의 피곤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강민아 씨, 이쪽 봐주세요.”“민아 씨.”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말에 반하준의 눈꺼풀이 떨리며 충혈된 눈을 뜨고 눈앞의 TV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강민아와 심은호가 함께 TV에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그의 눈동자에 강민아의 온화한 얼굴이 비쳤다.그녀는 심은호와 함께 화려한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했다.‘선남선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반하준은 날카로운 가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