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진숙도 조금 놀랐다. 평소 같으면 반하준은 그 이름을 거론하지도 않았을 거다.“하준아, 요즘 강민아와 만난 적 있니?”반하준의 얼굴이 다소 어색하게 바뀌며 서늘하고 무심한 표정이 잘생긴 얼굴 위로 드리웠다. 어머니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차가운 모습을 보였다.“아니요.”연진숙 역시 아들이 강민아와 다시 엮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걔는 어쩌다 운 좋게 강승의 임시 대표가 됐어.”연진숙은 누가 봐도 조롱 섞인 어투로 말하며 강민아가 강승의 임시 대표가 된 것을 못마땅해했다.“우리 집에 있을 때 집안 살림도 못하던 애가 무슨 회사를 경영한다고, 허!”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 비웃던 연진숙은 반하준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어차피 강승 테크는 곧 팔릴 거니까 며칠 대표 노릇이나 해보라고 해.”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강민아에 대한 악의에 반하준은 불쾌함을 느꼈다.“어머니, 스프링 가든에 간 적 있어요?”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으러 스프링 가든에 간 건 아닌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가 출장을 갔다고 생각했기에 연진숙도 속았을지 모른다.아들이 스프링 가든을 언급하자 연진숙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날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렸다.출장을 갔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 일에 관해 묻는 걸 보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아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연진숙은 반하준이 자신을 걱정한다고 생각했다.“난 괜찮아. 강민아가 사는 동네가 어찌나 후진지 엘리베이터도 고장이 나더라.”연진숙의 반응을 보며 반하준은 그녀가 자신이 스프링 가든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반하준이 물었다.“거기서 뭐 했어요?”“너한테 문자 보냈는데 못 봤어? 민이가 망할 계집애가 가져온 걸 먹고 토했어.”평소 반하준은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고 회사 일로 바쁘기 때문에 연진숙이 아이 문제로 귀찮게 구는 경우는 드물었다.보통
“근데 걔가 다른 건물로 가더라? 친구 만나러 갔겠지. 그러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얼마 안 돼서 고장이 난 거야. 나랑 경호원들이 밤새 엘리베이터에서...”연진숙은 얼굴을 감싼 채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아들에게 털어놓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연진숙은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반씨 가문으로 돌아온 연진숙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혀 있던 경호원들을 전부 해고했다.그들을 볼 때마다 스프링 가든에서의 굴욕적인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오소정이 닭죽을 끓여서 가져오자 반하준은 한 입 먹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강민아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요리했어요?”반하준이 묻자 오소정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강민아 씨가 알려준 재료들을 1그램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췄어요.”하지만 반씨 가문 도우미들이 아무리 강민아가 적어준 대로 죽을 끓여도 반하준의 기억 속 그 맛을 살리지는 못했다.그래도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는 대신 천천히 죽을 먹기 시작했다.연진숙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이른 아침부터 닭죽을 먹는 건 연진숙의 눈에 공공장소에서 돼지 밥을 먹는 것과 다름없었다.“하준아, 왜 갑자기 죽을 먹어?”남자는 죽이 담긴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오늘부터 우리 집의 모든 음식은 강민아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만드세요.”연진숙이 입을 벙긋했다.“너 왜...”“그 여자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게 익숙해요.”반하준은 조금도 상의할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연진숙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꼭 아들이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반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도 연진숙은 몇초간 식탁 앞에 멍하니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믿을만한 사설 탐정에게 연락했다.“우리 아들이 요즘 강민아와 만난 적이 있는지 알아봐요.”...깊은 밤, 한 클럽 룸 안에서 반하준은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비워진 잔을 테이블 위에 무겁게 내려놓았다.“따라!”
“우와, 세상에!”룸 안의 남자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강나현이 하이힐을 신어? 웃겨 죽겠네. 하하하!”“강나현, 미친 거야? 미쳐서 하이힐을 신고 나왔어?”강나현은 얼굴에 쓰고 있던 검은 마스크를 벗었다. 진하게 화장했으니 흐린 조명 아래에서 아직 붓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들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계속 나보고 여성스럽지 않다고 하는데, 내가 오늘 여성미를 제대로 보여줄게!”“아이고.”자리에 있던 재벌 2세들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며 몇몇은 눈에 눈물까지 삐져나왔다.“강나현, 어디 한번 걸어봐!”“자, 다들 주목! 강나현이 새로 장착한 다리를 보여주겠대. 하하하!”그들은 강나현을 웃음거리로만 대했다.강변대로 교통사고 이후에도 강나현이 여전히 반하준 옆에 나타난다는 건 반하준에게 아들보다 강나현이 중요하단 의미였다.다른 이들도 사실은 반하준의 체면 때문에 강나현을 상대해 주는 것이었다.강나현이 반씨 가문 도련님을 중환자실에 보내고도 용서를 받았으니, 재벌 2세들은 반씨 가문과 얽힌 이익을 위해서라도 여전히 강나현을 반갑게 맞이했다.그리고 강나현도 다시금 그들의 주목을 받으니 꼭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무시당하는 것보다 주목받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그녀는 오늘 고문 도구 같은 하이힐을 신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게 옳은 선택이라고 느꼈다.“하준 씨.”강나현이 반하준에게 다가가 그의 허벅지 옆 소파에 발을 올렸다.반하준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강나현이 신은 검은색 하이힐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강나현은 강민아가 올린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한 끝에, 강민아가 이 하이힐을 신고 반하준의 몸을 밟았을 때 그가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표정을 드러냈다는 걸 발견했다.반하준의 숨겨진 페티쉬를 발견한 강나현은 당시 강민아가 신었던 것과 똑같은 12센티 하이힐을 구입했다.하지만 반하준이 이렇듯 크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아들, 표정이
그녀는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하이힐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벗었어.”반하준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드리운 채 바닥에 놓인 빨간 밑창의 하이힐을 바라보았다.“신발 쓰레기통에 버려!”강나현은 깜짝 놀랐다.“방금 산 거야!”남자의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위험한 짐승처럼 강나현을 노려보며 경고했다.“지금부터 누구도 내 앞에서 이런 하이힐 신지 마.”“하이힐이 마음에 안들어?”강나현이 중얼거렸다.“강민아가 신어서 그런가?”강나현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하필 반하준이 싫어하는 걸 건드려서!’영상 속 반하준을 보고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가 강민아에게 하이힐로 밟히는 것을 즐긴다고 착각한 게 분명하다.생각해 보니 반하준이 촌스러운 강민아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그렇게 밟혔으니 분명 역겹고 싫을 거다.강나현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내 하이힐 버리면 난 뭐 신고 가? 반하준, 아빠 맨발로 집에 가게 할 건 아니지?”반하준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다.“슬리퍼 하나 가져와.”강나현은 불쾌해하며 소리를 질렀다.“왜 나한테 슬리퍼를 줘? 내 신발을 버렸으면 하나 사줘야지!”다른 재벌 2세가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발이 크면 슬리퍼나 신어야지. 빨리 나현 형님께 슬리퍼나 갖다 드려!”“말도 마. 강나현 하이힐 신은 거 보니까 역겨워지려고 그래. 하하하!”강나현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반하준에게 달려들었다.“자, 아빠 업고 신발 사러 가자!”반하준이 강나현을 밀쳐내자 그녀는 그대로 소파에 나동그라지며 대자로 뻗었다.소파에 널브러진 그녀는 충격에 빠진 채 반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 씨, 뭐 하는 거야!”강나현은 남자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온몸이 굳어버렸다.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한 눈빛이었다.“합의서에 사인할 때 내가 제대로 말 안 한 것 같은데.”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게 말하며 경고했다.“지금부터 다신 내 눈에 띄지 마.”강나현은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하... 하준 씨...”
반하준은 즉시 오소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혹시 강민아가 평소 신는 신발 사이즈가 뭔지 압니까?”“네?”오소정은 휴대폰을 들고 혜성이 지구에 떨어진 건 아닌지 의아해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다. 반하준이 강민아가 신는 신발 사이즈를 다 묻고.‘근데 그건 왜 묻지?’오소정은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반하준에게 강민아의 발 사이즈를 알려주었다.반하준이 직원에게 사이즈를 말하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여자 친구분께 사드리는 건가 봐요?”반하준은 멈칫했다.“왜 여자 친구라고 생각하죠?”직원은 남자가 빤히 쳐다보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 아닌가요? 신발 사이즈도 모르시는데.”종이 뭉치가 반하준의 목구멍에 틀어막힌 듯 숨이 턱 멎으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7년 동안 부부로 살았는데 강민아의 생일도 모른다.사실 마음만 먹으면 강민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쉽게 알아낼 수 있었지만 굳이 찾아보기 싫었던 거다.줄곧 그에겐 강민아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반하준은 섬세하게 포장된 신발 상자를 들고 스프링 가든에서 내렸다.아파트에 들어선 그는 집 앞에 서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불을 켜니 그가 사놓은 이 집은 텅 비어 있었다.안으로 들어간 반하준이 수갑이 채워져 있던 곳을 살펴보니 수갑은 사라지고 벽은 페인트칠이 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주위를 둘러본 그는 방에 놓아두었던 도구들도 모두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마치 한 번도 사람이 다녀간 적 없는 공간 같았다.강민아가 그를 감금했던 증거를 모두 없애기 위해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버린 걸까?반하준은 한 발짝 물러서서 휴대전화를 꺼내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가서 쓰레기통 뒤져요. 아니, 쓰레기 처리장으로 가요. 사람 여럿 데려가서 뭐 좀 찾아줘요.”말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대표님, 찾으시는 게 뭔데요?”이기훈이 그에게 묻자 반하준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반하준은 충격을 받았다.그는 진료실 문 앞에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차로 돌아온 그는 곧장 해커에게 연락해 비뇨기과 컴퓨터에서 심은호의 치료 기록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들이 가는 곳은 개인 병원이고 그곳에선 환자의 개인 정보를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에 해커는 오늘 하루 심은호의 진료 기록만 얻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해커가 보낸 파일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몇 초 후 그의 목구멍에서 경멸 섞인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심은호는 남자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며칠 후, 은색 슈퍼카가 강승 테크가 있는 건물 지하 1층으로 들어섰다.강민아가 막 안전벨트를 푸는데 기사 역할을 해주던 심은호가 이미 차에서 내려 차 앞쪽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차 밖에서 고가의 정장을 입은 채 반듯하게 서 있는 남자는 클래식한 영국 신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지하 주차장 백열등 불빛이 심은호를 비추었고, 그는 온화한 눈빛으로 강민아만 바라보고 있었다.강민아의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 매일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보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두 사람이 대외적으로 연인 사이라고 발표한 이후 심은호는 매일 강민아의 출퇴근을 함께 했다.남들의 눈엔 실제로 사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다정했다.“고마워요.”강민아가 시선을 살짝 내렸다. 매일 심은호가 출근길에 태워다주길 기대하며 그를 기다리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오늘 심플한 흰색 셔츠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발에는 메리제인 플랫슈즈를 신은 채 차에서 내렸다.강민아가 체크무늬 정장을 팔에 걸고 앞으로 가려는데 남자가 팔을 붙잡았다.“잠깐만요.”강민아가 잠시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닫힌 차 문에 등이 닿았다.훤칠한 남자가 몸을 숙인 채 한 손으로 창문을 지탱하니 잘생긴 얼굴이 점점 강민아의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마치 강민아에게 작별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남자의 숨결과 함께 상쾌한 우드 향이 콧속을 파고들
재계에서는 심은호가 한 여자를 위해 무턱대고 돈을 버릴 사람이 아니라며, 그와 강민아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열애를 발표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심은호와 눈이 마주친 강민아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에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쿵쿵쿵!겉으로 드러난 살갗마저 진동하고 피가 끓어오르며 격렬한 심장 박동 소리를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차창에 바짝 등을 댄 채 심은호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심은호의 눈가에 상실감이 별똥별처럼 스쳐 지나갔다.“미안해요.”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강민아와 완전히 거리를 두었다.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정한 모습을 연기한다는 건 서로 잘 알지만 무의식적인 몸의 반응은 속일 수 없었다.강민아의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난 괜찮아요...”심은호는 아마 그녀가 불쑥 다가온 남자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신의 격렬한 심장 박동이 남자에게 들릴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남자의 시선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로 향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엘리베이터 도착했어요.”강민아는 남자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저 먼저 갈게요.”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고개를 돌리자 심은호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강민아는 목구멍마저 심장 따라 야단법석을 떨며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강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며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았다.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어린 소녀처럼 설레는 표정을 지을 줄이야....심은호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나타난 수자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차장 한구석을 돌아보았다.그의 깊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맹수처럼 모퉁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심은호는 차를 몰고
심은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데 전화기 너머로 의사가 물었다.“경찰에 신고할까?”“내가 비뇨기과에서 수술받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의사는 전화기 너머로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이미 해커가 네 기록 가져갔으니 머지않아 우리 도련님께서 남자구실 못한다는 소문이 서경 전체에 퍼질 거야.”남자는 길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백미러에 비친 마이바흐 차량을 바라보았다.“오늘 치료는 예정대로 진행해.”전화기 너머 상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걱정도 안 돼?”심은호는 액셀을 밟고 차를 돌렸다.“이걸 우리는 유인이라고 하지.”심은호가 차를 몰고 떠나는 걸 지켜보던 반하준이 차에서 내렸다.값비싼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얼굴은 차가웠고, 깊은 동공은 어두운 밤에 고인 웅덩이처럼 속내를 알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그는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섰다.동시에 주차장에서 강민아의 신변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사복 경호원 여러 명이 밖으로 나왔다.그들의 눈에는 반하준이 가장 위험한 존재였기에 경호원 중 한 명이 육성민에게 연락했다.“대표님, 반하준이 우강 그룹에 왔습니다.”...화창한 햇살이 비추는 대표 사무실에서 강민아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에 올려놓으니 몇 가닥 잔머리가 그녀의 얼굴에 붙어있었다.툭 떨어지는 흰색 셔츠의 옷깃이 살짝 벌어져 가느다란 목 아래로 예쁜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똑똑.새로 뽑은 대표 비서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와서 그녀에게 보고했다.“부사장님, 강나현 씨가 만나고 싶답니다.”강민아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바쁘다고 해요. 소란 피우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세요.”강민아의 취임식에서 강승 테크 직원들은 강나현이 강성진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강성진이 더 이상 강나현을 딸로 대하지 않으니 그들도 강씨 가문 아가씨로 대접할 이유가 없었다.강씨 가문 아가씨라고 강나현을 떠받들면 오히려 강민아에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