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은 충격을 받았다.그는 진료실 문 앞에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차로 돌아온 그는 곧장 해커에게 연락해 비뇨기과 컴퓨터에서 심은호의 치료 기록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그들이 가는 곳은 개인 병원이고 그곳에선 환자의 개인 정보를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에 해커는 오늘 하루 심은호의 진료 기록만 얻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해커가 보낸 파일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몇 초 후 그의 목구멍에서 경멸 섞인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심은호는 남자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며칠 후, 은색 슈퍼카가 강승 테크가 있는 건물 지하 1층으로 들어섰다.강민아가 막 안전벨트를 푸는데 기사 역할을 해주던 심은호가 이미 차에서 내려 차 앞쪽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차 밖에서 고가의 정장을 입은 채 반듯하게 서 있는 남자는 클래식한 영국 신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지하 주차장 백열등 불빛이 심은호를 비추었고, 그는 온화한 눈빛으로 강민아만 바라보고 있었다.강민아의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 매일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보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두 사람이 대외적으로 연인 사이라고 발표한 이후 심은호는 매일 강민아의 출퇴근을 함께 했다.남들의 눈엔 실제로 사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다정했다.“고마워요.”강민아가 시선을 살짝 내렸다. 매일 심은호가 출근길에 태워다주길 기대하며 그를 기다리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그녀는 오늘 심플한 흰색 셔츠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발에는 메리제인 플랫슈즈를 신은 채 차에서 내렸다.강민아가 체크무늬 정장을 팔에 걸고 앞으로 가려는데 남자가 팔을 붙잡았다.“잠깐만요.”강민아가 잠시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닫힌 차 문에 등이 닿았다.훤칠한 남자가 몸을 숙인 채 한 손으로 창문을 지탱하니 잘생긴 얼굴이 점점 강민아의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마치 강민아에게 작별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남자의 숨결과 함께 상쾌한 우드 향이 콧속을 파고들
재계에서는 심은호가 한 여자를 위해 무턱대고 돈을 버릴 사람이 아니라며, 그와 강민아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열애를 발표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심은호와 눈이 마주친 강민아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에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쿵쿵쿵!겉으로 드러난 살갗마저 진동하고 피가 끓어오르며 격렬한 심장 박동 소리를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차창에 바짝 등을 댄 채 심은호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었다.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심은호의 눈가에 상실감이 별똥별처럼 스쳐 지나갔다.“미안해요.”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강민아와 완전히 거리를 두었다.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정한 모습을 연기한다는 건 서로 잘 알지만 무의식적인 몸의 반응은 속일 수 없었다.강민아의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난 괜찮아요...”심은호는 아마 그녀가 불쑥 다가온 남자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신의 격렬한 심장 박동이 남자에게 들릴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남자의 시선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로 향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엘리베이터 도착했어요.”강민아는 남자에게서 황급히 멀어졌다.“저 먼저 갈게요.”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고개를 돌리자 심은호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강민아는 목구멍마저 심장 따라 야단법석을 떨며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강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며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았다.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어린 소녀처럼 설레는 표정을 지을 줄이야....심은호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나타난 수자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차장 한구석을 돌아보았다.그의 깊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뜩였다.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맹수처럼 모퉁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심은호는 차를 몰고
심은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데 전화기 너머로 의사가 물었다.“경찰에 신고할까?”“내가 비뇨기과에서 수술받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의사는 전화기 너머로 능글맞은 웃음을 터뜨렸다.“이미 해커가 네 기록 가져갔으니 머지않아 우리 도련님께서 남자구실 못한다는 소문이 서경 전체에 퍼질 거야.”남자는 길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백미러에 비친 마이바흐 차량을 바라보았다.“오늘 치료는 예정대로 진행해.”전화기 너머 상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걱정도 안 돼?”심은호는 액셀을 밟고 차를 돌렸다.“이걸 우리는 유인이라고 하지.”심은호가 차를 몰고 떠나는 걸 지켜보던 반하준이 차에서 내렸다.값비싼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얼굴은 차가웠고, 깊은 동공은 어두운 밤에 고인 웅덩이처럼 속내를 알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그는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섰다.동시에 주차장에서 강민아의 신변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사복 경호원 여러 명이 밖으로 나왔다.그들의 눈에는 반하준이 가장 위험한 존재였기에 경호원 중 한 명이 육성민에게 연락했다.“대표님, 반하준이 우강 그룹에 왔습니다.”...화창한 햇살이 비추는 대표 사무실에서 강민아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에 올려놓으니 몇 가닥 잔머리가 그녀의 얼굴에 붙어있었다.툭 떨어지는 흰색 셔츠의 옷깃이 살짝 벌어져 가느다란 목 아래로 예쁜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똑똑.새로 뽑은 대표 비서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와서 그녀에게 보고했다.“부사장님, 강나현 씨가 만나고 싶답니다.”강민아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바쁘다고 해요. 소란 피우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세요.”강민아의 취임식에서 강승 테크 직원들은 강나현이 강성진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강성진이 더 이상 강나현을 딸로 대하지 않으니 그들도 강씨 가문 아가씨로 대접할 이유가 없었다.강씨 가문 아가씨라고 강나현을 떠받들면 오히려 강민아에
강나현은 거들먹거리며 비웃었다.“난 강씨 가문 둘째 딸이야!”비서는 주름진 옷을 털었다. 대표 비서 자리를 얻기 위해 무려 수백만 원 주고 맞춤 제작한 정장이었다.“부사장님께서 비서면 비서답게 행동하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출근 시간이니까 예전처럼 회사에서 멋대로 돌아다니지 마요.”강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감히 그녀와 맞서는 비서를 노려보았다.그러더니 홱 뒤돌아 복도에 놓인 의자를 걷어차자 꽃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강나현은 살벌한 표정으로 여비서를 노려보았다.“너도 이 꽃병처럼 되고 싶어?”강나현이 말하며 벽으로 차버리자 꽃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그녀는 더더욱 오만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비서는 강나현의 기세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듯 침착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부사장님께서 난동을 부리고 기물 파손하면 3배로 배상해야 한다고 했어요. 물건 3개 이상 망가뜨리면 신고할 거예요. 이제 막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번에 또 들어가면 처벌이 가볍지 않을 거예요. 부사장님께서 또 이런 말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과연 이번에 또 들어가도 반하준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줄지 모르겠다고요.”강나현은 심장에 총을 맞은 기분이었다. 강민아는 진작 그녀의 행동을 예측하였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격하게 들썩거렸다. 강민아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이런 조롱을 당했다.“나한테 배상하라고? 허, 경고하는데 이 회사 우리 집안 거야! 내가 우리 집 꽃병 좀 깨뜨린 게 뭐 어때서?”비서는 차분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부사장님께서 3배로 배상하는 것을 거부하면 대표님 계좌에서 돈을 꺼낼 거라고 하셨어요. 회사 전체가 그쪽 집안 거니까 강나현 씨가 4천만원짜리 꽃병을 깨뜨렸으면 대표님이 1억 2천만원 배상하시면 되겠네요.”강나현은 지금 누군가 강성진을 언급하는 게 제일 두려웠다. 며칠 전 클럽에서 놀다가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강 대표님 본 것 같은데.”그 한마디에 강나현은 겁에 질려 바로
강민아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짓는데 강성진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하준이가 6천억을 제시했어!”강성진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승이 부신 그룹에 인수되면 나도 너와 함께 부신 그룹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이는 심은호가 인수 문제와 관련해 강씨 가문 측에 약속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이건 하준이가 직접 작성한 인수 계획서인데 한번 봐.”강성진은 강민아에게 두툼한 계획서 한 권을 건넸다.반하준이 제시한 가격과 거래 조건은 그를 매우 흥분하게 만들었다.강민아는 계획서를 건네받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첫 페이지를 찢어 자동 파쇄기에 넣었다.곧바로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도 찢어버리며 강민아는 느긋하게 종이를 파쇄기에 넣었다.반하준이 밤새워 작성한 계획서였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강성진이 고함을 질렀다.“강민아, 뭐 하는 거야!”서늘한 얼음이 반하준의 얼굴을 뒤덮었다.“나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알겠지만 6천억짜리 인수 계획서를 들여다보지도 않는 건 너무 감정적인 행동 같은데?”반하준은 강민아의 행동을 지켜보며 말했다.“6천억이 부족해서 그래? 1조로 강승 인수할게.”강성진은 가슴이 떨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이 제시한 가격은 심은호보다 두 배, 아니, 두 배 이상 높은 금액이었다.“하준아, 정말 그 가격에 살 의향이 있다면 내가 강승 테크 대표로...”“아빠, 이제 아빠는 결정권이 없어요.”강민아는 한 마디로 강성진을 의자에 다시 앉게 만들었다.강승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잃은 것을 생각하니 강성진은 강나현을 더욱 원망하며 이렇게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민아야, 우리 우강 그룹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하준이랑 일하는 게 뭐가 문제야? 하준이랑 7년 동안 부부로 지냈으니 섭섭지 않게 널 챙겨줄 거야.”강민아는 반쯤 찢어진 계획서를 책상 위에 던졌고 반하준은 의자에 앉아 강민아를 올려다봤다.그는 강민아의 얼굴에서 또다시 자신을 가두었을 때 강민아가 몸을 짓밟으면서 드러냈
이보다 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건 없었다.분명 한때는 그의 소유였는데 소중히 여기지 않다가 다 잃은 뒤에야 그리워하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그는 진지하게 강민아를 향해 물었다.“정말 심은호를 선택할 거야?”강민아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이미 태산 그룹과 인수에 관련된 모든 프로젝트 계약을 마무리했고, 다음 주에 공식적인 인수 계약식을 진행할 거야.”강민아는 남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무심하고 덤덤하게 말했다.“반 대표님은 너무 늦게 오셨네요. 반년 전에 우강 그룹 인수를 제안했으면 경쟁자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받아줄 수가 없네요. 진짜 말 안 바꾸고 변덕 부리지 않아도 당신이 내미는 돈은 1조가 됐든 2조가 됐든 안 받아요.”그가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와서 손을 내밀어도 소용없었다.감정이란 게 원래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 어려운 거니까.마치 수백만 개의 차가운 바늘이 반하준의 몸을 찌르는 듯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남자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심은호를 선택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강민아는 그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빠, 손님 배웅하세요. 반 대표님이 알아서 떠나지 않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반하준은 의자에 앉아서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그는 강민아를 위해 한발짝 물러섰다.“우강 그룹 입찰에선 손을 떼겠지만 조건이 있어. 지금 당장 심은호와 헤어져!”강민아는 우습기만 했다.“당신이 뭔데? 이 지구의 주인이라 온 세상이 당신 말을 들어야 하나?”반하준이 서류봉투를 내밀었다.“이것 좀 봐.”강민아는 볼 생각이 없었고, 결국 반하준이 서류봉투의 포장을 풀고 안에 든 서류를 꺼내 강민아 앞에 내놓았다.심은호의 이름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심은호 씨 진료 기록?’강성진과 다른 임원들도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심은호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강민아는 곧장 서류를 집어 들었다.대충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화가 난 듯 반하준을 노려보았다.“미쳤
반하준은 마치 전쟁터에 발을 들여 보이지 않는 연기가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육성민의 깊은 동공은 맹수처럼 사나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찰나의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더니 육성민이 매섭게 소리쳤다.“민아 내려놔!”육성민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있으니 반하준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강민아를 내려놓았다.강민아는 가슴을 움켜쥔 채 반하준의 몸에 토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메스꺼움이 다시 내려갔다.육성민은 손을 뻗어 강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반하준, 꺼지라는 말 몰라?”육성민은 속으로 살인은 범죄라는 걸 무수히 되뇌고 나서야 반하준의 머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반하준은 떠날 생각이 없었고, 서류봉투를 꺼내 육성민에게 건넸다.“한번 보시죠.”육성민은 반하준이 건네는 것을 받고 싶지 않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그러자 강민아가 말했다.“고작 비뇨기과 진료 기록 하나가 나와 심은호 씨 협업 관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반하준은 예리하게 무언가를 감지하고 곧바로 되물었다.“너 진짜 심은호랑 만나는 거 아니지? 연애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강민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하준은 계속 물었다.“정말 좋아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비뇨기과에 다니는 데 전혀 신경 안 쓸 수 있겠어?”강민아의 표정은 싸늘했다. 이혼까지 한 상황에서 반하준과 굳이 좋게 얘기할 생각도, 그럴 인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연인이라는 사실을 반하준이 퍼뜨린다면 또다시 인수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게 참 비열하다. 하지만 당신은 원래 역겨운 사람이었지. 이미 그 사람이 비뇨기과에 간 걸 봤다니까 그냥 얘기할게. 우리가 하도 격정적으로 놀다가 다쳐서 간 거야.”반하준의 귓가에 스피커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강민아를 바라보았다.
심은호는 반하준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은 채 그를 무시했다.그의 시선이 반하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강민아에게 향했다.순간 심은호의 눈빛이 허공에서 멈칫했다.달빛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강민아는 심은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았다.남자는 시선을 내린 채 강민아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며 풍성한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려 심은호에게 말했다.“비뇨기과에 간 거 알아요.”그녀를 바라보는 심은호의 검은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키며 말을 꺼내려는데 강민아가 새끼를 지키는 어미 암탉처럼 그를 자기 뒤로 보냈다.“반하준, 우리 일에 참견하지 마!”동시에 두 남자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심은호는 입꼬리를 피식 올렸고 반하준의 얼굴은 극도로 어두워졌다.태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강민아가 심은호와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전남편인 그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반하준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그는 무기력하게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무언가를 참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를 깊이 사랑했던 강민아는 그의 의식주와 관련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메모해 두었다.앞으로 심은호한테도 그렇게 해줄까?반하준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우리에 갇힌 맹수가 된 기분이었다.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그래도 애써 내면의 감정을 무시한 채 이 불편한 고통을 날카로운 말로 바꾸어 입밖에 내뱉었다.“나랑 만났던 네가 그쪽으로 하자 있는 놈을 만날 리가 없잖아!”차갑게 웃는 반하준의 두 눈은 어느새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둘은 진짜로 사귀는 게 아니야.”분노에 찬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단지 계약 관계일 뿐이겠지.”강민아는 입술을 다물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반하준은 심은호가 비뇨기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져 그가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걸 방해할 생각인 것 같다.하지만 절대 그의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강기성이 들어왔다.강성진이 베개로 강나현의 얼굴을 누르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달려가 강성진을 몸으로 밀어냈다.얼떨결에 밀려나 침대 옆 탁자에 부딪힌 강성진은 여전히 양손에 베개를 움켜쥐고 있었다.“뭐 하는 거야!”강성진은 강기성을 보고 그가 강나현을 혼내는 것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고함을 질렀다.강기성은 강나현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얼굴이 파래진 채 입을 벌리고 있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다.강기성은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강나현에게 가슴 압박을 했고 그제야 강나현은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강성진은 강기성에게 베개를 내리쳤다.“감히 날 밀쳐?”강기성은 돌아서서 낮게 윽박질렀다.“사람 죽일 뻔했어요!”강성진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내 체면만 구긴 게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서경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어!”강기성은 한 발짝 물러서며 비웃었다.“그럼 죽여요.”본능적으로 사람을 살리긴 했어도 강나현을 구한 뒤 곧바로 후회했다.그가 서둘러 달려오지 않고 강나현이 정말 강성진의 손에 죽었다면 그는 감옥에 갔을 테니까!하지만 그가 나서서 강나현을 구했기 때문에 기회는 사라졌다.강성진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농담이지. 정말 죽이기야 하겠어? 기성아, 네가 나 대신 쟤 다리 좀 부러뜨려! 안 그러면 또 강씨 가문에 민폐를 끼칠 것 같으니까.”강나현은 벌벌 떨었다. 어릴 때부터 강성진을 무서워했는데 조금 전 강성진이 베개로 얼굴을 가렸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몇 초만 지나면 정말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두려움에 강나현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고 두 다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침대에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바지에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강기성과 강성진 모두 고약한 냄새를 맡았고 강성진이 욕설을 내뱉자 강기성이 말했다.“정상적인 생리현상이니까 가서 옷 갈아입어.”강나현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문 너머로 강성진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민이가 목 놓아 울면서 무기력하게 소리를 질렀다.“난 엄마를 원해요. 아빠, 난 엄마를 원한다고요!”반하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으며 그는 민이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아이 방을 나갔다.방 문이 닫히자 민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온 반하준은 적막한 방안에서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차가운 기운이 발바닥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모든 서랍을 열어젖히고 넥타이, 손목시계, 브로치 장신구를 모두 꺼냈다.‘이게 강민아가 준 선물이던가? 이게 사준 건가?’전부 잊어버렸다.대체 어떤 게 강민아가 사준 것이고 어떤 게 담당 코디가 매치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재계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이 준 선물은 다 기억나는데 뒤늦게 강민아가 줬던 선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그녀가 준 게 어떤 것인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반하준은 휴대폰을 꺼내 뒤적거리던 액세서리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코디에게 보내 그가 산 게 어느 것인지 구분하도록 했다.깊은 밤, 코디는 서둘러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반하준은 마침내 강민아가 선물한 넥타이와 브로치를 찾아냈다.그는 손을 뻗어 넥타이의 무늬와 브로치에 반짝이는 보석을 쓰다듬었다.강민아가 그에게 준 건 이렇게 많은데 심은호는 딱 하나만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전용 사물함에 넣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안주인의 침실로 들어가 텅 빈 방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강민아가 살았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옷장을 열자 안에는 강민아의 옷이 가득했다.그에게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까.반하준은 강민아가 늘 입던 잠옷 중 하나를 꺼내어 코끝에 대고 천에 밴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이게 강민아의 체취였나?’이젠 강민아의 체취가 어땠는지도 잊어버렸다.강민아가 누웠던 침대에 누워 그에겐 다소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몸을 돌려 강민아의 잠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미간은 찡그리고
침대에 누운 민이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흰자위만 조금 남아 희미한 불빛 속에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하준은 입을 벌렸지만 누군가 자기 목구멍으로 종이 뭉치를 밀어 넣은 듯한 느낌에 목이 메었고, 민이는 갈망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민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이미 이혼했는데...”어떻게 강민아와 재결합하겠나.그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강민아와 이혼 서류에 사인할 땐 돌아와서 애원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며, 정식으로 이혼하러 갈 땐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강민아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민이를 위해서 최대한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네 엄마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면 생각해 볼게.”스스로 되뇌듯 말하며 반하준은 주먹을 말아쥐었다.그런데 민이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는 나도, 아빠도 버렸는데 어떻게 아빠한테 와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요?”아이는 반하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아빠, 엄마한테 가서 빌어요. 네? 용서해 달라고, 돌아오라고 빌어요!”민이의 눈에 반하준은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이 강민아를 붙잡지 못해도 반하준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아빠가 용서해달라고 말만 하면 엄마가 재혼해 줄 거예요!”반하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뭘 잘못했길래 네 엄마한테 용서를 빌어야 해?”민이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는 아빠가 현이 형한테 잘해줘서 떠난 거예요.”반하준은 목구멍으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강나현과 난 아무런 가능성도 없고 선을 넘은 적도 없어. 그 여자가 괜히 날 의심하는 거야!”민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아빠가 잘못했어요! 엄마 속상하게 했잖아요!”아이가 울부짖었다.“으아앙!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엄마가 재워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가고 며칠째 밤에 깨는데 엄마가 날 버린 것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엄마가
“서경에 소문 다 났어. 네가 우강 그룹에서 강나현이랑 약을 먹고 뒹굴었다고. 이것 봐! 내가 있는 모든 단톡방에서 너랑 강나현 영상과 사진이 퍼지고 있어!”연진숙은 반하준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반하준은 모든 단톡방에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진 사진과 영상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문 앞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몰래 찍은 것이 분명했다.그들 역시 재계에서 입지가 있는 인물들이라 보낸 사진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그리고 지금 사진과 영상이 하도 여러 곳에 퍼져 출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화면 속 대부분은 강나현이 차지하고 있고 일부 영상에서 반하준의 흐릿한 모습이 포착되었다.반하준은 연진숙에게 전화를 다시 건넸다.“저랑 강나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밝힐 거예요.”연진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남자 같은 애랑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서경에서 우리 집 며느리가 되겠다는 재벌가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허, 강씨 가문 사람들은 발바닥도 못 미치지!”반하준은 계단을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연진숙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어머니, 다시는 강씨 가문 헐뜯지 마세요!”연진숙은 당황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반하준, 너 지금 뭐라고 했어?”반하준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목의 상처는 이미 꿰매고 의사 선생님이 거즈로 감쌌지만 손에 조금만 힘을 주자 다시 희미하게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반하준이 옷을 갈아입은 탓에 연진숙은 그의 몸에서 희미한 소독수 냄새만 맡았을 뿐 손목을 다쳤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강민아는 민이 엄마예요. 할머니가 돼서 강씨 가문 깎아내리는 소리 다신 귀에 안 들리게 하세요.”말하며 반하준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강나현과 강성진은 욕해도 되지만 강씨 가문을 욕하는 건 안 돼요. 그건 강민아를 욕하는 거니까.”연진숙이 불쑥 말했다.“강민아를 욕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홱 몸을 돌린
“내일부터 정식으로 대시해도 돼요? 언젠간 당당하게 민아 씨 사람이 되고 싶어요.”어둠이 강민아의 표정을 가렸고,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강민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심은호의 눈동자가 보였다.심은호는 강민아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싫다는 건가?’그녀의 머리 옆에서 지탱하던 손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이 튀어나와 강민아의 얼굴과 심은호의 시야를 환하게 비췄다.그리고 남자는 벽에 기대어 있던 강민아가 입꼬리를 올린 채 눈가에 번진 미소를 볼 수 있었다.심은호의 성격상 절대 먼저 헤어지자고 할 리가 없는데, 역시나 남자는 적극적으로 다가올 생각이었다.계약 커플은 영원히 한 자리에 머무는 관계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심은호는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림자가 힘차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개를 돌리자 심은호의 팔에 갇힌 강민아의 얼굴이 보였고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이봐!”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심은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뭐요? 남친이 여친한테 키스하는 거 안 보여요?”육성민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당장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베어버릴 기세였다.“당신이랑 민아는 계약 관계일 뿐이잖아!”심은호가 피식 웃었다.“내일부터는 아니거든요.”육성민이 멈칫하는 사이 심은호가 강민아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헤집으며 고개를 숙여 차가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에 진득한 입맞춤을 했다.“잘 자요. 내 여친.”깊은 눈동자가 꼭 바다 같아서 한 번만 봐도 깊숙이 빠져들어 빠져나오기 힘들 것만 같았다.심은호는 한 발짝 물러났다.“형님, 같이 가죠?”육성민은 늦게 귀가하는 강민아를 위해 정이를 챙기느라 이곳에 있었던 거다.게다가 최근 정이의 연습도 도와주면서 두 사람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조금 전 위에서 심은호의 차가 멈춰서는 걸 보고 또 강민
강민아는 황급히 대답했다.“안녕히 주무세요.”전화기 반대편에서 반용화가 전화를 끊자 강민아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심은호를 바라보다가 남자의 볼에 손을 뻗어 꼬집었다.의외로 심은호의 피부가 너무 탱글탱글해서 아무리 시도해도 뺨의 살을 꼬집을 수 없었다.심은호가 얼굴을 뒤로 젖히자 강민아의 손이 그의 턱을 잡게 되었다.꼭 선한 남자를 희롱하는 것 같았다.“내가 무슨 어르신을 학대해요? 그리고 선생님이 그쪽보다 나이가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선생님이 어르신이면 그쪽은 뭔데요?”심은호는 강민아의 가느다란 하얀 손목을 붙잡고 알아서 얼굴을 갖다대 비비적거렸다.“나는 젊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죠. 반용화 씨는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있는데 그게 학대가 아니고 뭐에요?”말을 마친 그가 두 눈을 반짝이나 마치 탐스러운 포도알 같았다.“연구원님이랑 통화하는 거 방해했어요? 미안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냥 민아 씨랑 대화하고 싶어서...”강민아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질투하지 마요. 그냥 선생님일 뿐이니까.”“알겠어요. 여친님!”심은호는 흔쾌히 답했다.“그렇게 할게요.”강민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밀폐된 차 안에서 산소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기사가 아파트 건물 아래에 차를 세우고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보니 그녀는 어느새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인 채 좌석 뒤편에 기대어 있었다.“민아 씨, 도착했어요.”차마 강민아를 깨울 수 없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네.”강민아는 어눌하게 답했지만 취기와 졸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심은호는 차 문을 열고 손을 뻗어 강민아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부축했다.강민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뜨며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더니 하품했다.“이제 우강 그룹 일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 잠이나 푹 자고 싶어요.”“네.”강민아는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여기까지 데려다주면 돼요.”심은호는 계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