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에게 뒤통수를 맞은 심한기는 강민아가 정말 장기명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를 줬다고 생각했다.그래서 5년 후 강민아를 다시 만난 심한기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심은호가 물었다.“혹시 논문 초안 아직 가지고 있어요?”강민아는 손을 들어 시큰거리는 눈을 가렸다.“예전에 쓰던 컴퓨터에 우유를 쏟았는데 꺼진 후엔 다시 켜지지 않았어요. 결국 도우미 아주머니가 쓰레기라고 버렸죠...”당시 강민아가 어린 민이를 안고 있을 때 아이가 우유를 노트북 키보드에 쏟았다.강민아는 제일 먼저 아이를 컴퓨터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화상을 입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한참을 달래서야 민이는 겨우 그녀의 품에서 떨어졌다.강민아가 다시 컴퓨터를 닦았을 땐 컴퓨터에 블루스크린이 뜬 것을 발견했다.반하준에게 도움을 청해 반하준이 기술 전문가를 불러 컴퓨터를 복구해 주길 바랐다.“내가 네 컴퓨터 고치라고 기술 인원을 데려온 줄 알아? 알아서 고쳐.”“컴퓨터엔 내 대학 시절 연구 결과들이 전부 들어있어!”“이미 자퇴했잖아. 게다가 본과생이 쓴 걸 어떻게 연구 결과라고 할 수 있어?”술에 취한 남자의 나른하고 무기력한 목소리 뒤로 그의 곁에서 강나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씨, 누구 전화야?”“쓸데없는 전화.”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졌다.강민아는 고장 난 노트북을 들고 수리하는 곳에 찾아갔으나 그녀의 컴퓨터를 살펴본 수리공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한밤중에 네 번째 수리점으로 달려가던 중 전화벨이 울리며 연진숙의 전화가 걸려 왔다.“또 어디로 갔어? 집에서 애들은 안 보고.”“집에 도우미가 있는데...”“민이가 너만 안 보이면 울잖아. 지금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집으로 와!”강민아는 의자에 앉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종아리를 감쌌다.그녀에게 아이는 한때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하지만 이젠 의문만 들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그녀에겐 뭐가 남았을까.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폭포
네티즌들에게 제일 먼저 충격을 안겨준 건 강민아의 외모였다.수많은 사람은 머릿속이 하얘졌고, 강민아를 손가락질하려던 일부 블로거들은 턱을 문지르며 말을 잇지 못했다.어떤 이들은 안경을 쓰고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강민아의 얼굴을 보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는 라이브 블로거도 있었다.5대의 카메라 앵글 속에 잡힌 강민아는 통나무로 만든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비에 젖은 재킷은 미처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잔뜩 붙어 있었다.그녀는 두 손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신 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겉모습은 얼어붙은 눈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강민아가 조직위원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네티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제가 살고 있는 시그니엘에 전기가 나가서 지금 임시로 심한기 교수님 집에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강민아는 심한기 교수의 집에서 문제를 풀고 있다는 사실을 조직위원회 측에도 숨기지 않았다.“강민아 씨, 불가항력적인 특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직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대회에 계속 참가하는 것에 동의했으니 이제 B 지문 문제지를 보내드릴게요. 시험 시간은 이미 3시간이 지났고 재도전 기회는 없습니다. 다른 응시자들과 마찬가지로 5시간 내 답안지를 제출해야 합니다.”“네, 알겠습니다.”강민아는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그녀는 컴퓨터와 산수 종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그동안 ALI 조직위원회 직원이 강민아의 응시 환경을 점검하기 위해 심한기의 집을 방문했다.강민아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카메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컴퓨터 화면 오른쪽 하단을 힐끗 쳐다봤으니 질문에 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거야.”네티즌과 함께 강민아의 부정행위를 살펴보던 블로거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까지도 포착했다.“원래대로면 제시간 안에 문제를 전부 답변하기 힘들죠. 예선 시간은 8시간밖에 되지 않기에 참가자들은 최대한 자신이 잘하는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자신들의 SNS 계정이 네티즌들의 질타와 비난으로 잠식된 것을 발견했다.[그러게 내가 서둘러 사과글 지우지 말자고 했잖아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몇몇 재벌가 사모님들은 긴급 상의에 돌입했다.[강민아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결승에 오를 수 없어요. 예선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점수를 조절해서 강민아가 1등을 했다는 블로거 분석 못 봤어요?][일단 며칠 조용히 있어요. 강민아가 결승에서 명문대 박사들에게 지면 어차피 조롱당할 거예요.]어제 앞다퉈서 강민아와 인터뷰하던 언론사들은 바뀐 여론에 인터뷰 영상을 서둘러 삭제했었다.유명 채널에서 먼저 강민아의 인터뷰 영상을 공개하고 특집 기사로 다뤘다.제작진 측에선 지유빈이 어젯밤 강민아와 통화한 녹취록도 영상에 넣었다.강민아가 경연을 위해 심한기의 집에 간 진짜 이유를 알게 된 네티즌들은 의견이 분분했고 일부 네티즌들은 예선 당일 시그니엘에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강민아 전남편을 프라이팬에 넣어서 기름에 볶아버릴 거야!][짐승만도 못한 인간,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네.][강민아는 어린 나이에 사람인지 개인지 몰랐던 거지.]순식간에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키워드가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네티즌들은 강민아의 전남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의 조상까지 대대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부신 그룹“에취!”반하준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재채기했고, 엄규민은 휴대전화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엄규민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인기 급상승 검색어에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문구가 뜨자 엄규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큰일 났다!그는 황급히 반하준의 까만 뒤통수를 몇 번이고 흘깃 쳐다봤다.반하준은 온라인에서 자신이 한껏 조롱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이걸 어떻게 반하준에게 말해야 할까!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반하준이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로비에 오가는 사람들 속 직원들의 열띤 수다 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렸다.“강민
그 자리에 있던 직원들과 반하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대표님, 감기 걸리셨어요?”“대표님, 병원 안 가보셔도 돼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안색이 어두운 게...”직원들의 걱정에 반하준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엄규민이 나서서 직원들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반하준은 이미 회사 정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엄규민은 서둘러 뒤따라가 반하준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대표님, 로비에서 한가하게 놀던 직원들 전부 기록해 뒀다가 월급 삭감하겠습니다.”차에 탄 반하준은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고개를 들어 엄규민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왜, 내가 강민아의 한심한 전남편이라고 온 세상에 소문내려고?”굵직한 땀방울이 엄규민의 이마에서 뚝뚝 떨어졌다.그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입술만 달달 떨었다.“저...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인터넷에 좋지 않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요.”엄규민은 반하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그제야 반하준은 인기 검색어 1위가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콧방귀를 뀌었다.언젠가 강민아 덕분에 그가 유명해질 줄이야.반하준은 인기 검색어 아래 달린 댓글을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발아래 존재하는 것들에겐 눈길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만약 강민아가 결승에서 좋은 성적을 따낸다면...반하준은 아량을 베풀어 강민아를 회사에 데려와 연봉 수억의 자리를 줘서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할 생각이었다.그 순간 반하준의 휴대폰이 울리고 강나현의 전화임을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하준 씨, 오늘 밤에 정수산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는데 민이 데리고 구경하러 가고 싶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차가웠다.“민이가 갈 곳이 아니야.”“하준 씨, 내가 민이 데리고 산에 오르는 게 걱정되면 하준 씨도 같이 가.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강나현의 말이 반하준을 자극했다. 오늘은 반유하의 생일이다. 과거 반유하가 레이싱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반하준은 정수산 크로스컨트리 대회를 후원했다.“우리가 땅에
강나현 앞에 앉은 민이는 무척 신이 났다.“역시 현이 형밖에 없어요. 예전엔 아빠가 날 데리고 레이싱 경기에 가는 건 꿈도 못 꿨는데.”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그 촌스러운 시골 여자보다 형이 백배, 천배는 나아요!”강나현은 킥킥 웃으며 치솟는 눈썹을 억누르지 못했다.“네 엄마가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욕먹는 거 알아?”민이가 정정했다.“그 여자는 이제 내 엄마가 아니에요!”강나현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민이는 호기심에 물었다.“왜 욕먹는데요?”“민아 언니가 부정행위로 수학 경시대회 예선에서 1등 했거든. 네티즌들이 성적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냈어. 본인 실력으로는 절대 1등 할 수가 없으니까.”말하며 강나현이 SNS를 열어 민이에게 강민아를 욕하는 댓글을 읽어주려는데 인기 검색어가 ‘강민아 전남편’일 줄이야.검색어를 클릭한 강나현은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당황했다.서둘러 강민아에 대한 댓글을 찾아보니 전에 강민아가 부정행위를 했다며 확신에 차서 말했던 블로거가 사과문을 올리고 자신의 오해라며 밝혔다.이후 강민아와 관련된 인기 댓글을 찾아보니 절반은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는 댓글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심한 전 남편을 만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댓글이었다.강나현의 숨이 턱 막히며 휴대폰을 잡은 손이 떨렸다.“현이 형?”민이는 처음 보는 강나현의 무서운 표정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장이라도 휴대전화에 들어가 상대를 때릴 것 같은 사악한 눈빛이었다.번뜩 정신을 차린 강나현이 웃으며 민이에게 물었다.“네가 보기엔 엄마가 예뻐, 내가 예뻐?”민이가 잠시 망설이나 강나현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현이 형이 제일 예쁘죠!”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강나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민이에게 말했다.“그 여자 얘기는 그만하자. 오토바이 운전해 보지 않을래?”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공이 확장되며 설렘을 드러냈다.“정말 운전해도 돼요? 하지만 차가 무거운데...”강나현이 가슴
그동안 강나현은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여러 번 찍어 SNS에 올렸다.계정을 개설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팔로워 수는 2천 명 남짓에 그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멋진 영상을 올리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은 전부 그녀의 오합지졸 친구들이었다.강나현이 처음으로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자신의 계정에 올렸을 때 하룻밤 사이 큰 화젯거리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그 후 자주 민이를 데리고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고, 민이와 함께 찍은 영상은 매번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다.강나현은 SNS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었기에 지난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업데이트를 해왔고, 그녀의 계정은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게 되었다.물론 강나현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강나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자신을 질투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했다.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건 그녀만 할 수 있는 짓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은 이번 주에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다시 올렸을 때 조회수가 20만으로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네티즌들은 이제 이런 종류의 영상에 식상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강나현은 절친한 친구와 의논해 크게 한 건을 준비했다.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섯 살배기 아이가 조종하게 했다.그러더니 갑자기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 오토바이에 앉아서 술을 따랐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와중에도 술잔을 흔들며 느긋함을 보여줬다.그 모습을 찍은 친구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완벽해. 나현, 이 영상에 ‘좋아요’가 최소 십만개는 달릴 거야.”...강민아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았다. 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와 온갖 과제를 연구했다. 대학 시절에 들었던 수업을 그대로 복습하며 강민아는 지난 5년 동안 놓쳤던 지식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저녁에는 정이와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정이를 데리고 심씨 가문으로 향했다.낮에 부딪혔던 문제들을 정리해 심한기에게 직접 가르침을
“이 빌어먹을 놈이 어딜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심한기가 곧장 욕설을 퍼붓자 방연석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교수님!”“망할 놈의 자식, 머리 검은 짐승 같으니라고. 나라에서는 네 얼굴을 가져다 방탄조끼나 만들지 왜 그냥 두는 거냐? 허, 경기에서 물러나라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 자식아! 경고하는데 민아는 절대 대회에서 나갈 리 없어. 민아 능력으론 충분히 금상을 받고도 남아!”방연석은 웃음이 났다.“교수님, 아직 모르시겠지만 많은 참가자들의 청원에 따라 이번 결승전에는 본선 20위 안에 든 참가자들이 서로 질의응답 대결을 펼치는 코너가 하나 더 생겼어요.”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그녀가 망신당하길 기대하는 모습이었다.“교수님 대단한 제자는 대결에서도 이기기 쉽지 않을 텐데, 주부가 금상이라니요. 허, 꿈도 꾸지 마세요.”강민아가 말했다.“방연석, 내가 금상을 받으면 너뿐만 아니라 교수님 일상생활을 방해한 모든 사람이 교수님께 공개로 사과해야 할 거야!”방연석이 팔짱을 꼈다.“웃기는 소리. 네가 정말 이번 대회에서 모두를 이기고 금상을 받으면 내 머리를 비틀어서 너한테 공으로 던져줄게.”강민아가 비웃었다.“현실적으로 가능한 벌칙만 얘기해.”방연석 뒤에 있던 남자가 경멸하듯 말했다.“강민아가 금상 받으면 연석이가 거꾸로 서서 똥 쌀 거야.”그런 저급한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방연석은 친구가 자신을 불구덩이에 떠미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러자 친구가 조용히 대꾸했다.“넌 댄스 동아리 회장이니까 거꾸로 똥 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방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건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런 짓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고할 거다.“난 찬성.”심은호는 거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와서 심한기 옆으로 다가왔다.“아버지, 거꾸로 돌면서 똥 싸는 거 본 적 없죠? 보고 싶지 않으세요?”심한기는 코를 만지며 살짝
‘봉긋하고 하얀...’강민아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쯤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강민아는 순간 현행범으로 잡힌 기분이었다.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게요.”심은호는 내심 무척 신이 났다.강민아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부터 등에 약을 붓는 행동을 반복해서 연습하며 강민아가 그를 발견한 순간 약물을 바지에 쏟았다.강민아는 그의 손에서 약병을 가져가 면봉에 묻힌 뒤 남성의 등 상처에 살며시 발라주었다.상처를 봉합한 의사의 솜씨가 워낙 훌륭해서 상처 표면이 여전히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허리를 다쳤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다.“미안해요.”강민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정이를 구해줬는데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드렸네요.”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웃으며 심은호에게 물었다.“제가 밥 한 끼 대접할까요? 식당에 가기 싫으면 제가 직접 해도 돼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저 요리 금방 배워요.”심은호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네?”남자는 셔츠를 집어 들고 느긋하게 입었다.강민아의 관심을 끌어당긴 그는 말하다 말았고, 그가 고개를 숙여 단추를 잠그자 강민아는 숨이 턱 막히며 방 안의 공기 흐름도 멈추는 것 같았다.심은호의 움직임이 어쩐지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남자가 살짝 몸을 돌리고 있어 강민아는 남자의 튀어나온 가슴 근육과 복부의 선명한 조각들, 바지 속까지 쭉 이어진 치골까지 한눈에 보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강렬한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일부러 이러는 거다!그는 단추를 잠그며 강민아의 시선을 유도해 복부에서 아래로 미끄러지게 했다.강민아가 넋이 나간 사이 심은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순진한 눈빛은 마치 조금 전 느꼈던 유혹이 전부 그녀의 망상처럼 보이게 했다.번뜩 정신을 차린 강민아에게 심은호가 말했다.“오늘 밤 정수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
심은호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과 갈비뼈가 아팠다.지금 강민아에게 온몸을 맡기듯 기대어 있는 저 남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다.그런데 지금 오염된 브로치를 손에 들고 강민아에게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해도 해도 너무했다.“강민아, 저놈한테 속지 마!”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지른 반하준은 입안에 온통 피 맛만 감돌았다.그는 복부를 감싼 채 개미 수만 마리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고 있었다.바닥에 깨진 유리잔을 바라보며 강민아의 동공은 이미 싸늘해졌다.“심은호 씨 몸에 묻은 레드 와인, 당신이 쏟았지?”묻는 게 아닌 반하준의 짓을 단정하는 어투였다.반하준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구멍에서 진동하는 피 맛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실수로 그런 거야.”심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약한 꽃으로 둔갑했다.“그래요. 반하준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나 때문에 화내지 마요.”반하준은 심은호의 그런 모습에 이가 갈렸다.‘저 개자식은 연기를 왜 저렇게 잘해?’남들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민아야, 저 자식이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아까 날 때리는 거 못 봤지? 내 갈비뼈와 손가락을 부러뜨리려고 했어! 콜록콜록.”반하준의 가슴속에는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열기가 여러 가닥으로 뭉쳐서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기침할 때마다 온몸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있는 공작새 모양의 브로치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살짝 붉게 물든 코끝으로 훌쩍이며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그러더니 자신의 소매로 브로치 표면을 살살 닦으며 브로치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아내려 애썼다.반하준은 감시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봤다.젠장!그는 심은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강나현에게 감시카메라를 끄라고 시켰다.카메라가 켜져 있었다면 강민아가 심은호의 본색
“삼촌, 다 됐어요?”육성민은 체육관 밖 공터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 막대기로 타서 재가 돼버린 낙엽을 헤집고 있었다.그는 단열 장갑을 끼고 호일로 감싼 고구마를 불에서 꺼냈다.육성민이 호일을 뜯어내자 뿜어져 나오는 꿀고구마 향에 정이의 입안에는 금세 군침이 돌았다.“빨리 줘요!”정이가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육성민이 말했다.“뜨거워.”그는 쌓아놓은 벽돌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숟가락을 생수로 헹군 뒤 정이에게 건넸다.정이는 숟가락으로 고구마를 파서 호호 불었다.서둘러 한입 베어 물던 아이의 두 눈이 휘어지며 통통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정이가 유난히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육성민의 눈가에도 흐뭇함이 가득했다....강승 테크. 인수식이 끝나고 뒤풀이가 진행될 때, 심은호가 화장실에서 막 나오려던 순간 마주 오던 반하준과 부딪혔다.반하준은 한발 물러서고, 심은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장이 와인으로 얼룩진 게 보였다.장밋빛 붉은 액체가 강민아가 조금 전 선물한 공작 브로치 위로 쏟아졌다.반하준은 자신의 걸작에 감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눈이 없어? 자꾸 안하무인으로 굴면 다음에 더러워지는 건 옷뿐만이 아닐 거야.”반하준은 기세등등하게 손가락을 휙 돌려 잔을 아래로 뒤집었다. 남은 레드 와인이 전부 심은호의 신발 끝으로 쏟아졌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복도 카메라는 고장 났지만 민아한테 찾아가 울면서 일러바쳐도 돼. 너 연약한 척 잘하잖아. 어디 계속해 봐. 미리 말하는데 민아는 단순히 호기심에 널 갖고 노는 거야. 하루 종일 자기 뒤에 숨어서 징징거리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반하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은호는 주먹을 휘둘렀다!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반하준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자기 손을 쓸 줄 몰랐던 반하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손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그대로 심은호의 주먹에 맞고 말았다.그 탓에 반하준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심은호의 공개 고백에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반하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번개와 천둥이 몰아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있었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심은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은 부드러운 얼굴선과 높은 콧대,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마치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천장에서 비추는 조명이 그의 눈가를 비추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고개를 돌려 강민아를 바라보았다.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순간, 호수처럼 맑은 그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강민아를 향해 쌓아온 감정이 가득했다.강민아의 숨결 하나하나가 뜨거웠고, 남자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파도가 밀려와 그녀를 감쌌다.마치 용암이 발밑에 흐르듯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긴장하지 마요.”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강민아를 달랬다.“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미안해요.” 심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아가 말했다.“계속 말해요. 듣기 좋으니까.”강민아의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심은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두 눈이 반짝이며 마음을 다잡은 그가 마이크를 마주한 채 아래에 있는 반하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심은호에게만 있었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민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 겁니다. 결혼하든, 누군가를 떠나든 무엇을 하든지 늘 뒤에서 지키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날 겁니다. 전 앞으로도 여전히 민아 씨의 모든 결정을 지지합니다. 태산 그룹에서 정식으로 강승 테크를 인수했으니 두 회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할 겁니다.”반하준은 입가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갑자기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처럼 동시에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마치 그의
“설마 심은호가 부사장이 반씨 가문 사모님일 때부터 좋아한 건 아니겠지?”“왜 그렇게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냈나 했더니, 남의 아내를 탐낸 거였어?”가십거리에 사람들은 흥분하며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설마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어쩐지 둘이 그렇게 빨리 만나더라니.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시그널 주고받은 거 아니야?”“설마 반 대표가 바람피우는 걸 알고 강민아와 이혼한 건가? 세상에!”다들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파격적인 소문에 재벌가 인사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하준의 어두운 눈동자에 살기가 번뜩였다.심은호가 그의 평판을 망칠 작정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심은호를 끌고 갈 것이다!‘심은호, 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감히 내 여자를 노렸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봐.’지유빈은 반하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아 씨 말로는 대표님께서 적극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데요. 왜 이혼하고 나서는 강민아 씨가 누굴 만나는지 이렇게 신경 쓰는 거죠?”강민아는 반하준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고, 반하준은 지유빈을 우습게 여겼다.“기자로서 아직도 모르겠어? 심은호가 내 아내를 오랫동안 탐냈다고! 5년 전부터 내 아내를 지켜봤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이혼까지 했는데도 왜 계속 아내라고 말하는 거죠? 그 결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대표님 혼자인 것 같은데요.”거대한 스피커가 반하준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듯 그의 심장을 뒤흔들고 오장육부에 고통을 선사했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강민아가 이혼한 뒤 지유빈은 기자로서 업무 때문에 줄곧 강민아를 지켜봤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세 사람의 가십거리에 집중하는 동안 지유빈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반하준의 눈동자를 보며 남자가 단순히 강민아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시하고 싶었지만 지유빈의 말에 궁지로 몰린 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가 구세주처럼
심은호가 헤어지겠다는 말에 반하준은 악랄한 눈빛을 드러냈다.비록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놓고 어떻게 수습할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심은호, 이미 말했으면 지켜야지.”반하준은 심은호에게 강민아와 헤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었다.“난 심은호 씨랑 헤어질 생각 없어.”강민아가 말하며 심은호의 큰 손을 감싸더니 반하준에게 경고하듯 말했다.“당신이 우리 사이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심은호 씨와 안 헤어져.”반하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심장이 저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듯했다.“민아 씨...”심은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자 강민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두 집안 인수식에서 소란을 피운 건 이 사람이에요. 나가도 그쪽이 아니라 반하준이 나가야 한다고요!”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렸고, 반하준은 누군가 몽둥이로 세게 내리치듯 심장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심은호는 강민아의 말에 위로받았는지 두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민아 씨는 나한테 참 잘해주네요.”강민아의 단호한 말 한마디면 그는 만족할 것 같았다.강민아가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내 남자 친구니까요.”“강민아!”보다 못한 반하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여기 있는데!’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강민아와 심은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맞닿은 두 사람의 시선이 끈적했다.“민아 씨, 아직 말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어요.”심은호는 큰 결심을 한 듯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예쁜 두 눈에는 슬픈 기색이 묻어났다.“반하준이 우리 둘을 헤어지게 하려고 병원 시스템을 해킹해 내 진료기록을 훔쳐 갔어요. 내가 병원에 다니는 걸 알고 병이라도 있을까 봐 내 진료기록으로 나한테 헤어지라고 협박했어요!”강민아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먼저 심은호에게 반하준이 한 어리석은 짓을 널리 알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지금 심은호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십거리를 직감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심은호의
강나현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쳤다.“나 저 사람 알아! 강승 직원이야!”그녀는 연설문이 바뀐 것이 반하준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연설문을 바꾼 사람이 복도에서 반하준과 단둘이 만나는 게 보였다.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혔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강나현은 표정이 확 바뀌며 말문이 막힌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반하준을 돌아보았다.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게 정말 반하준과 관련이 있을 줄이야.하지만 반하준이 했다기엔 너무 저급한 수작이 아닌가.강승의 직원을 시켜서 연설문을 바꾼 것도 모자라 감히 회사 안에서 직원과 따로 만나다니.그런 짓을 하면서도 반하준은 카메라를 피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강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반하준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다 들키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마치 대형 스크린에서 강승 직원과 공모한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강민아는 시치미를 떼는 반하준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그럼 저 직원에게 반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물어보죠.”카메라에 찍힌 직원은 당황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에 띄게 두 다리를 덜덜 떨었다.“부사장님, 반 대표님이 저한테 시켰어요! 저한테 2천만원 줬는데 이 돈 다 드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경악하며 말했다.“정말 반하준이 한 짓이야? 심은호를 노리는 건가?”“심은호와 강민아가 만나니까 전남편이 질투가 나는 건 당연하지. 근데 너무 비열하다.”강민아에게 공개적으로 폭로 당한 반하준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너한테 들킬 줄 알았어. 그냥 네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심은호의 연설문이 바뀐 걸 알고도 아무 말 안 하길래 난 네가...”반하준은 말을 꺼내며 입에서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그는 수치심도 모르는 듯 이렇게 물었다.“그래, 내가 시켰어. 그게 뭐? 강민아, 심은호 때문에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