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을 치고 있던 육성민은 상의도 입지 않은 채 구릿빛 피부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눈이 부신 햇살에 금속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스틱을 잡은 팔에는 근육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팽팽하게 긴장한 이두박근은 쇠처럼 단단했다.심은호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형님도 정이랑 같이 무대에 서요?” 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둘이 싸우는 장면도 있어서 정이가 준비하는 공연을 오빠랑 같이할 거예요.”심은호는 조용히 콧방귀를 뀌며 육성민이 또 정이를 위해 나서는 모습에 놀리듯 말했다.“형님이 무대에 오르면 분명 팬들이 많이 생길 거예요.”강민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육성민이 뒤돌아 꽃밭에 있는 어린 사자에게 다가갔다.정이가 두 발로 육성민의 가슴을 밟자 육성민은 손을 뻗어 다시 꽃밭 위에 올려주었다.“뛸 때 힘이 들어가는 위치가 잘못됐어. 그러면 동작할 때 떨어질 수가 있어.”육성민은 근엄한 목소리로 정이를 훈련시켰다.“다시!”정이가 다시 점프를 하려고 머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중심을 잃고 종아리가 변두리에 부딪히자 육성민은 제때 아이를 붙잡으며 말했다.“기본기가 부족해. 이 동작은 반복해서 연습해야겠어.”말하며 벤치에서 쉬고 있던 춤 선생님들을 불러냈다.“정이랑 같이 연습하세요.”“아...”몇몇 선생님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침 6시부터 연습했는데 두 사람은 지치지도 않아요?”육성민은 얼굴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정이에겐 시간이 없어요. 동작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최대한 서둘러 연습해야죠.”“정아, 아빠가 연습 도와줄게!”반하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 뒤에는 민이가 있었다.민이는 경호원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들어오자마자 강민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불청객의 등장에 육성민은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나가!”육성민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반하준이 반갑지 않았다.반하준이 슬쩍 강민아가 있는 방향을 흘겨보자 심은호도 거기 있었다.‘둘이 세트로 등장하네.’그는 진지하게 육성민을 향해 말했다.
연습을 시작한 지 1분도 안 됐을 때...“윽!”정이에게 맞아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낮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신경과 연결된 모든 근육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반하준은 금세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더니 사레에 들려 콜록거렸다.정이가 꽃밭 위에 올라서서 물었다.“아저씨, 괜찮아요?”반하준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정이의 발길질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줄은 몰랐다.그가 말하기도 전에 또렷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못하겠어요?”반하준이 홱 고개를 돌리자 강민아 곁에 앉아 벽에 기댄 채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는 심은호가 보였다.심은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반하준이 무슨 속셈으로 갑자기 찾아와 정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는지 안 봐도 뻔했다.강민아와 육성민이 말리지 않았던 건 정이의 연습을 도와준 대가가 어떤 건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반하준만 한때 자기 딸이었던 애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모를 뿐.“아주 멀쩡해!”반하준은 고함을 질렀다. 절대 심은호에게 무시당할 수는 없었다. 정이의 아빠로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보여줄 작정이었다.강민아는 두 사람의 기 싸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놓은 채 정이가 쉬면서 먹을 수 있도록 귤을 까고 있었다.민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작은 몸을 검은색 큰 패딩으로 감고 있어 마치 거대한 담요를 덮은 것처럼 보였다.강민아와 몇 미터 떨어져 있던 아이는 농구장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강민아만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민이는 강민아가 정이를 위해 귤껍질을 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강민아는 귤을 조각조각 떼어내 이쑤시개로 안에 있는 씨까지 골라냈다.뭐든지 잘 먹는 정이는 까탈스러운 민이와 달리 수박을 먹을 때도 씨를 뱉지 않고 사과도 껍질째 먹곤 했다.반면 민이는 수박을 먹을 때는 반드시 씨를 빼고 가운데 부분만 먹었다. 정이는 음식
반하준은 정이와 함께 한 시간 넘게 연습했다. 그의 가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하게 오르내렸고, 거친 헐떡임은 텅 빈 농구 코트에서 선명하게 들렸다.땀은 홍수처럼 그의 머리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흠뻑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하나둘씩 아래로 내려와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덮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전처럼 그렇게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비라도 맞은 듯 땀이 얼굴을 타고 줄줄이 떨어지고 있었다.외투를 벗은 뒤 입고 있던 니트 조끼와 남색 스포츠 상의가 땀에 젖어 짙은 색으로 변했다.반하준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든 의지를 동원해 버티고 있었다.하지만 두 다리는 시멘트에 잠긴 듯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꽃밭에서 뛰어내린 정이는 의상을 입은 채 핑크빛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땀과 함께 이마에 붙어 있었다.아이가 강민아에게 달려가자 그녀는 정이가 사용하는 텀블러를 건넸다.정이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동안 강민아는 작은 수건을 가져와 정이의 옷깃 사이로 손을 넣고 등을 닦아주었다.쪼그리고 앉은 강민아가 다시 정이의 옷 속에 손을 넣어 만져보고는 이렇게 말했다.“옷 다 젖었으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까?”“네.”정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강민아는 정이를 탈의실로 데려갔다. 아이의 연습을 보러 오면서 몇 벌의 옷과 신발, 양말까지 여분으로 챙겨온 것이다.정이가 양말을 벗자 강민아는 자기 양말도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새 신발과 양말을 신긴 뒤 세면대로 데려가 수건을 적셔 아이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었다.그러고는 다시 정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미리 준비해 둔 과일과 기력을 보충해 줄 초코바를 건넸다.정이는 의자에 앉은 채 두 다리를 흔들거렸다.강민아는 민이에게 다가가 귤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건넸다.“먹을래?”민이는 흠칫하며 강민아가 건네준 플라스틱 상자를 황급히 받고는 고개를 숙여보더니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난 하얀 실 싫은데.”그의 말에도 강민아는 아무런 대꾸가 없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통곡이 텅 빈 농구장에 울려 퍼졌다.강민아가 건네준 귤을 움켜쥔 모습이 꼭 버려진 새끼 짐승 같았다.“도련님!”경호원이 당황하며 서둘러 민이를 달랬지만 민이는 도저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반하준이 다가와 물었다.“반현민, 왜 울어?”툭하면 감정을 터뜨리는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5살이나 돼서 왜 자꾸 울어?”강민아가 민이에게 귤 한 통을 건네는 걸 봤다. 그녀가 가자마자 아이가 우니 반하준은 민이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안 돼요!”민이는 비명을 지르며 즉시 몸을 숙여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가져가려는 것을 막았다.마치 그 귤 상자가 자신의 소중한 소유물인 것처럼.반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울지 마!”그는 아이를 달랠 줄도 몰랐고 그저 많은 사람 앞에서 갑자기 우는 민이가 못마땅할 뿐이었다.민이는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빼앗을까 봐 재빨리 손을 뻗어 귤을 입에 넣었다.귤락을 벗기지 않은 귤에서 살짝 쓴맛이 느껴졌지만 민이는 귤의 신맛과 눈물의 쓴맛을 목구멍으로 삼켰다.예전에는 강민아가 귤락을 깨끗이 뜯어내지 않으면 마구 난동을 부렸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을 잃었다.강민아가 귤을 까주는 것도 드문 일이기에 민이는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귤을 모두 꺼내 입에 넣었다.반하준은 민이의 입가에서 즙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볼품없이 먹는 아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경호원에게 휴지를 달라고 부탁한 반하준은 허리를 굽혀 민이의 입을 닦아주었다.민이는 반하준이 강민아가 준 귤을 빼앗아 갈까 봐 얼굴을 돌렸고, 반하준은 민이가 자신을 경계하자 무기력하고도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안 빼앗아!”...일요일, 강승 테크 건물에서는 곧 인수식이 열릴 예정이다.마이바흐 650 폴만의 바퀴가 땅을 밟으며 대문 앞에 멈췄다.제복을 입은 도어맨이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자 심은호가 차에서 내렸다.짙은 회색 스리피스 수트가 187의 큰 키를 돋보이게 하
“심 대표님, 우강 그룹 인수를 축하드립니다.”“우강 그룹을 인수했다는 건 강 부사장과 좋은 소식이 있다는 뜻인가요?”심은호와 강민아가 교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경 전체가 술렁였다.재계 인사들이 이곳에 참석한 것도 직접 현장에서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심은호가 한 손을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자 양복에 주름이 잡혔다.“앞으로 민아 씨와 저에게 좋은 소식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여러분께 알려드리죠.”참석한 사업가들은 심은호와 강민아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채며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잘됐네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부사장님은 남자 복도 많네요.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운이 좋아요.”모두가 심은호와 강민아를 놀리며 열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 목소리가 작아지며 곧이어 심은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심은호가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비서와 함께 나타난 반하준이 보였다.반하준은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심은호를 향해 곧장 걸어왔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두 기운이 서로 부딪힌 듯 주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뒤로 물러서야 했다.살짝 내리깐 반하준의 살벌한 눈빛은 마치 사람의 몸 위를 기어다니는 냉혈한 짐승처럼 보였다.그가 햇빛도 닿지 않는 축축하고 음침한 어둠이라면 심은호는 따스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천사였다.심은호는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당당하게 웃었다. 앞머리가 살짝 흔들리며 반듯하고 윤기 도는 이마를 돋보이게 했다.반하준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는 쉽게 현장 분위기를 장악했다.“반 대표님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길가의 쥐새끼처럼 쫓겨날 거란 걸 모르시나?”반하준은 손에 쥔 초대장을 번쩍 들어 보였다.“나 초대장 있어.”“나랑 민아 씨가 직접 초대장을 써서 사람들에게 나눠줬어. 우리가 네 이름을 쓴 기억은 없는데.반하준의 귀에 ‘우리'라는 단어가 유난히 거슬렸다.그는 점점 더 싸늘한 눈빛으로 심은호를 바라보며 건방지게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채 달 모양의 비녀로 머리카락을 고정하자 비녀에 달린 검은색 술이 머리와 예쁜 조화를 이루었다.몸에는 슬림하게 재단된 회색 정장 재킷에 넓고 편안한 슬랙스를 매치하고 발에는 굽이 낮은 단화를 신은 채 반듯하고 당차게 걸어왔다.강승의 직원들은 이렇듯 반듯한 강민아의 모습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부사장님.”직원들은 강민아를 반갑게 맞이했다.하지만 초대된 다른 재계 인사들은 강승을 손에 넣은 강민아를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멀리서 호시탐탐 강민아를 훑어보았다.“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한 사람이 회사 부사장이 될 줄이야. 반씨 가문에서 7년 동안 사모님으로 지냈는데 강승 주주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누군가 거들었다.“강승에 쓸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망하는 거고.”“강성진이 굳이 자식 중에서 후계자를 고른다면 차라리 강나현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적어도 강성진 곁에서 자란 자식이고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과 친구잖아.”“맞아. 재계에서는 시험 점수가 아니라 인맥이 중요하지. 강나현은 강민아보다 서경에서 아는 사람도 많잖아. 근데 하필 정의감이 넘치는데 머리는 멍청해서 사람들 다 보는 곳에서 제 아빠 스캔들을 퍼뜨릴 줄이야.”누군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듣기론 강나현이 누군가의 계약으로 강성진 스캔들을 퍼뜨렸다던데?”“뭐? 누가 감히 강씨 가문 아가씨를 건드려?”“이번 일에 최대 수혜자가 누구겠어. 강민아가 똑똑한 건 맞지만 그걸 자기 핏줄을 상대하는 데 쓰잖아. 저런 사람은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그들이 귓속말을 나누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휴대폰을 꺼내 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심은호는 자신과 강민아의 초대를 받은 이들 중 강민아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작은 수첩에 그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두고 나중에 하나씩 처리할 거라고 했다.....심은호가 뒤를 돌아보니 강민아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올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는 더 이상 강민아에게 그런 행동을 바라지 않았고, 강민아가 살갑게 다가오는 행동도 거부하기 시작했다.강민아의 상실감에 휩싸인 표정을 뻔히 보면서도 모르는 척했다.한때 그토록 경멸했던 사람을 이젠 소유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가 손수 버린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고개를 숙여 강민아를 향해 환하게 웃는 심은호의 얼굴을 보며 반하준은 가슴 속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블랙홀이 생기는 것 같았다.억지로 시선을 돌리며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었다.그냥 브로치일 뿐이라고.강민아가 그에게도 브로치 여러 개를 선물했으니 전혀 질투가 나지 않는다.이미 그녀가 주는 브로치, 넥타이, 시계를 무수히 받았으니까.하지만 강민아가 건넨 선물을 어디에 뒀는지도 잊어버렸고, 그녀가 어떤 걸 줬는지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으니까.강민아가 잔뜩 기대하며 그에게 물건을 건넸지만 그는 받지도 않고 아내에게 아무 데나 놓으라고 했다.강민아가 준 선물을 열어보고 싫은 소리만 해댔던 게 떠올랐다.그녀가 준 것들은 한 번도 사용하지도, 착용하지도 않았다.반하준은 당장이라도 집에 달려가 강민아가 줬던 모든 걸 착용하고 심은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심은호는 예쁜 눈동자로 교활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예뻐?”자랑하는 거다.“민아 씨 안목이 참 훌륭해.”그는 손을 뻗어 강민아가 직접 달아준 브로치를 만지며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겼다.강민아는 심은호의 팔 안쪽으로 손을 넣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짱을 꼈다.심은호는 시선을 내려 어깨를 나란히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옷 사이로 몸이 맞닿은 채 서로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무시해요.”반하준을 언급하는 강민아의 목소리가 다소 매정하게 들렸다.그녀는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강성진이 직접 반하준에게 초대장을 써서 건넸고, 도어맨이 강성진의 친필 사인을 보고 반하준을 들여보냈다는 걸 알았다.그제야 강성진도 강민아에게 자신이 반하준에게 초대장을 썼다는 메시
강민아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심은호를 올려다보았다.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고, 그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때 심은호가 들고 있던 빈 연설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어떤 못된 사람이 저한테 빈 연설문을 줬네요.”단상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왜 아무것도 없어?”“누가 그런 거야?”“이곳 강승에서 설마 강승 직원이 심은호한테 이런 유치한 짓을 한 거야?”강민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심은호는 탁자 위에 두 손을 얹고 앞으로 몸을 숙여 위에서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반하준을 내려다보았다.“인수식에서 내 발목을 잡아 공개적으로 망신당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분명 태산 그룹이 순조롭게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게 못마땅한 거겠죠.”강민아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빈 연설문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하준에게로 곧장 걸어갔다.“심은호 씨 연설문 내놔.”강민아가 입을 열자마자 반하준의 옆자리는 물론, 뒤편에 앉아있던 재계 거물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반 대표가 심 대표 연설문을 바꿔치기했다고?”“말도 안 돼, 반 대표가 왜 그런 유치한 짓을 해?”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심은호는 자리에 서서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장이 강심제를 주입한 듯 쿵쾅거렸다.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반하준을 향해 도발적인 비웃음을 보냈다.‘이럴 줄은 몰랐지. 네가 연설문 바꿔서 민아 씨가 날 위해 나서주네.’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턱을 들어 올려 앞에 서 있는 강민아를 올려다보았다.반하준은 강민아를 이런 각도로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그녀에게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본인조차 열등한 존재로 전처를 올려다보는 것이 기분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강민아가 그에게 강압적으로 굴수록 그의 몸속 세포는 더욱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반하준은 강민아가 왜 이토록 위압적인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왔는지도 잊을 정도로 두 눈이 흐릿하게 변해갔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반응하지 않는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