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는 딸아이와 함께 서둘러 호텔에 도착했다. 아들의 다섯 번째 생일 파티가 이미 시작되었다.반하준이 아들 곁을 지키고 있었고 촛불의 따스한 빛이 아이의 앳된 얼굴을 비추었다.반현민이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나현 이모가 제 새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그 시각 강민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딸과 생일 케이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몸으로 막은 바람에 몸 절반이 흠뻑 젖어버렸다.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옷이 온몸에 찰싹 달라붙었다.강나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모 말고 형이라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나랑 네 아빠는 형제 같은 친구라서 작은 아빠밖에 못 해.”그녀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나현의 남사친들이었다. 그들도 함께 웃긴 했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반하준에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은 강나현뿐이었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잘 보이려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환하게 웃었다. 강나현이 반현민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민이는 왜 갑자기 새엄마가 갖고 싶어졌어?”그러자 반현민이 재빨리 반하준의 눈치를 살폈다.“아빠가 현이 형을 좋아하니까요.”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강나현은 반현민을 무릎에 앉히고 반하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반하준에게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랑했다.“역시 민이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반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애들 말은 그냥 흘려 들어.”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반하준과 강나현이 죽마고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강나현이 항상 남자들과 어울려 다녀 반하준의 부모님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강민아가 18살이 되던 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왔는데 친정의 희망과 반하준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길렀다.방 안의 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이는 엄마랑 더 친해? 현이 형이랑 더 친해?”“현이 형이
강나현이 반하준을 돌아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가 또 오해했네. 내가 가서 잘 설명할게.”“설명할 것도 없어. 쟤가 너무 예민한 거야.”반하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강민아가 두고 간 생일 케이크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말에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민아가 화를 내면서 가버린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형수 지금 화가 나서 저런 거니까 하준이가 가서 잘 달래면 돼.”“맞아. 형수가 하준이랑 이혼할 리가 없잖아. 하준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어쩌면 나가자마자 후회했을지도 몰라.”“자, 케이크나 먹자. 하준이가 집에 가면 강민아 씨가 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반하준도 그제야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벌써 강민아가 주눅이 든 채 문 앞에 서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반현민은 강나현이 사 온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크림이 입안 가득 퍼져 혀가 얼얼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엄마가 간섭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생일 파티가 끝난 후 반하준은 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창밖의 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가 다시 꺼지곤 했다.“아빠, 몸이 가려워요.”반현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눈을 번쩍 뜨고 조명을 켰다. 반현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손으로 계속 몸을 긁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재빨리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살펴보니 목에 붉은 반점이 가득 돋아있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반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어 입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그의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애가 알레르기가 생겼는데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반하준이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빨리 집으로 가.”그는 반현민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현관 쪽을 바라봤지만
사실 오소정더러 강민아에게 전화하라고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한발 물러선 반하준이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했어요.”“콜록콜록.”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오소정이 뭔가 눈치채고 물었다.“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반하준의 호통에 주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겁에 질린 오소정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반하준이 손에 든 머그컵을 꽉 쥐었다.‘안 돌아올 리가 없는데? 지금쯤이면 점심에 회사로 가져올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예전에 그가 화를 낼 때면 강민아는 직접 회사로 도시락을 가져와 화해를 청하곤 했었다....식탁에 앉은 반우정이 아침상을 보고 두 눈을 번쩍 떴다.“와. 닭죽이다.”닭죽을 좋아하는 반우정과 달리 반현민은 닭죽만 보면 헛구역질을 했다.반하준과 반현민 모두 죽을 좋아하지 않아 반씨 저택에 있을 땐 죽을 거의 끓이지 않았다.연진숙은 죽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했었다. 쌀이 부족해서 죽으로 끓여 먹는 거라고 말이다. 반씨 가문 사람들은 삼시 세끼를 과학적인 영양 균형에 맞춰 섭취했다.강민아는 죽도 영양아가 있고 아이들에게 먹이면 소화가 더 잘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에 닭고기와 야채 등을 넣으면 음식쓰레기 같다면서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그리고 반현민에게 먹이려고 야채죽을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반현민이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 다시는 죽을 끓이지 않았다.반현민에게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혼내자 반현민이 화를 내면서 따졌다.“이건 돼지들이나 먹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먹일 수 있어요? 역시 엄마는 촌뜨기라니까요.”옛 생각에 강민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우정은 벌써 닭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그러고는 트림하면서 설거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그릇을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할머니 집에 와야만 닭죽을 먹을 수 있는 거예요?”강민
휴대폰 너머의 반하준은 진작 전화를 끊어버렸다.강민아는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검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도로 양쪽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은색 볼보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번개처럼 달려갔다.강민아는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차를 이렇게 빨리 몰아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계기판의 수치와 함께 아드레날린도 폭발했다.현란한 색상의 스포츠카 세 대를 연속 추월하자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대박. 저 사람 누구야?”다른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부하에게 지시했다.“저 차 번호판 좀 조회해봐.”강민아는 개조된 스포츠카들을 가볍게 제쳤고 커버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몇몇 재벌 집 자제들이 낀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습니다. 강씨 가문의 차입니다.”누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강씨 가문? 그럼 운전자가 강나현인가?”“강나현이 운전 저렇게 잘한다고? 그럼 전에 우리랑 레이싱할 때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은색 볼보가 산길을 따라 뱅글뱅글 올라갔고 뒤에 검은색 페라리가 바짝 따라붙었다.심은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눈썹 앞으로 툭 내려왔다.그는 한때 카리스마가 넘쳤던 강민아를 본 적이 있었다.강민아는 14살에 고연대학교 영재반에 입학하여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3년 연속 우승한 천재였다. 19살에는 자동차 경주 연맹에 지원하여 레이싱 면허를 취득한 후 월드 랠리 챔피언십에서 10위 안에 들었다.그녀의 인생은 꽃길이었고 항상 꽃과 박수갈채가 함께했다.그런데 박사 공부를 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학업을 포기하더니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재벌가 전업주부가 되었다.그 후로 그녀의 차에는 카시트가 설치되었고 시속이 70㎞를 넘은 적이 없었다.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면서 귀를 째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때 강민아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심은호의 페라리가 그
강나현이 비닐봉지를 들고 개조된 오토바이에서 내렸다.딱 붙는 요가 바지를 입은 여자를 본 경비원의 표정이 거의 넋이 나갔다.강나현은 풀어헤친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미리 반현민의 반을 알아본 그녀는 담임 선생님을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갔다.“안녕하세요. 민이한테 왁스 병 캔디를 주러 왔어요. 듣자 하니 다른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다면서요?”담임 선생님이 강나현을 훑어보며 물었다.“혹시 현민이한테 왁스 병 캔디를 준 게 당신이에요?”강나현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네. 제 친구가 만든 건데 최고급 식용 왁스로...”“당신이었군요. 당신 때문에 우리 아들이 질식할 뻔한 거 알아요?”그녀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강나현이 돌아서자마자 찰진 소리와 함께 뺨 한 대를 얻어맞았는데 그 순간 눈앞이 다 캄캄해졌다.“왜 때려요?”“당신 때문에 우리 애가 죽을 뻔했다고요.”남에게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강나현이 아니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핥더니 몇몇 학부모들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어린이집 하원 시간, 반우정은 데리러 온 강민아에게 강나현이 얻어맞던 광경을 아주 실감 나게 묘사했다.강나현이 얻어맞는 걸 보고 반현민이 도와주려 하자 반우정이 반현민의 옷깃을 붙잡고 끌고 갔다고 했다.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든 강나현은 반현민을 데리고 선생님에게 조퇴를 신청했다.다른 어머니들도 강나현을 알아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이 무슨 욕을 하는지 반우정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험한 욕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반우정이 카시트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을 바라봤다.“엄마,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아이의 반짝이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강민아가 대답했다.“마지막이야.”...“사모님, 아가씨, 드디어 오셨군요.”오소정은 강민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민아가 집을 나간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택의 도우미들은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녀가 대답했다.“
그 순간 강민아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 그녀의 몸을 찢고 분노와 굴욕감을 일으키는 듯했다.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 목걸이를 받았다. 강나현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어느새 조롱할 준비를 마쳤다.반하준은 소파에 기대앉아 시선을 돌렸다.‘어쩜 저렇게 개처럼 굴어? 조금 전까지 그렇게 차갑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니까 바로 꼬리를 흔드는 것 좀 봐.’강민아가 한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들더니 강나현의 목걸이 옆에 가져다 대며 비교했다.“나현아, 네가 한 목걸이 색깔이 더 좋네. 나랑 바꿀래?”만약 가짜라고 대놓고 말한다면 강나현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변명을 늘어놓을 게 뻔했다.‘어디 한번 속으로 끙끙 앓아봐.’가느다란 목걸이였지만 강나현의 목덜미를 조이는 듯했다.강나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는 강민아가 어리석게 가짜 목걸이를 걸고 밖에 나가서 남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짜와 짝퉁을 단번에 구별해냈다.찔리는 구석이 있던 강나현이 반하준의 안색을 살폈다. 이 화해 선물은 그녀가 멋대로 반하준을 대신해 준비한 것이었다. 일부러 가짜 목걸이를 사서 강민아에게 줬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언니가 원하는 거라면 다 줘야지.”그러고는 쿨하게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그녀가 진짜 목걸이를 건넸지만 강민아는 받지 않고 가짜 목걸이를 천천히 강나현의 목에 걸어주었다.“이게 더 잘 어울려.”강나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어울리긴 개뿔. 이 목걸이는 만 원도 안 되는 짝퉁이고 내 진짜 목걸이는 2백만 원이 넘는다고.’강민아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진짜 목걸이를 받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언니, 화나면 나한테 풀 거지, 왜 멀쩡한 목걸이를 버리고 그래?”강민아가 강나현의 말을 가로챘다.“저 목걸이가 아까우면 직접 주워서 다시 해, 그럼.”“언니, 하준 씨랑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말하면서 목에 건 가짜 목걸이를 벗으려 했다. 조금만 더
강민아가 반하준에게 펜을 건넸다.강나현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반하준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한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언니는 너무 약해빠졌어. 난 만약 하준 씨 같은 남편이랑 살면 자다가도 웃었을 텐데.”강민아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강나현을 쳐다보았다.“이젠 한시도 못 참겠어? 너무 티가 나잖아.”반하준이 사인한 이혼 합의서를 강민아에게 던졌다.“억지 부리는 건 그렇다 쳐도 왜 나현이한테 뭐래 그래?”더는 강민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반하준은 목소리를 낮추고 반우정에게 말했다.“집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전화해.”반우정은 반하준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민아의 손을 꽉 잡았다. 강민아를 쳐다보는 반하준의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정이는 내 딸이라서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넌... 쉽지 않을 거야.”반하준이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강민아에게 수를 잘못 뒀으니 언젠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이 집을 떠나서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낭떠러지일지라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반하준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4주 후에 법원에서 만나.”이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이 다 후련했다. 강민아는 반우정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은 후 마지막으로 반현민을 돌아보았다.“민아, 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반현민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냥 빨리 가요. 맨날 아빠 화만 돋우는 엄마가 싫어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나간 후 강나현이 반하준에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언니는 너무 유난스러워. 여자들은 항상 징징거린다니까. 그중에서도 가정주부가 제일 징징거려. 능력도 없고 하는 일도 없어서 이 집을 나가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텐데.”그러고는 반하준에게 속마음을 드러냈다.“난 만약 이혼하게 되면 무조건 빈손으로 나갈 거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했던 사람한
강나현의 꼬드김에 반현민이 고민하기 시작했다.“근데 이렇게 간단한 걸 만들면 칭찬 스티커 못 받는데...”“형이 인터넷에서 칭찬 스티커 왕창 사 줄게. 그럼 우리 민이 칭찬 스티커 부자 되는 거야.”강나현을 쳐다보는 반현민의 눈빛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했다.“현이 형, 평소에 짝퉁만 입고 다녀요?”강나현이 바로 부인했다.“절대 안 입지.”반현민이 목소리를 높였다.“형이 사 준 칭찬 스티커를 어린이집에 가져갔다가 친구들한테 놀림받으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주는 스티커야말로 진짜 칭찬 스티커란 말이에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몰라요?”반현민이 씩씩거리면서 화를 냈다.“그건 자신을 속이는 거잖아요.”다섯 살짜리 어린이에게 혼나자 강나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알았어, 알았어. 건담 로봇 만들어주면 되잖아.”‘강민아도 플라스틱 빨대로 건담 로봇을 만들었는데 내가 못 만들 리가 없지.’10분 후 반현민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90%나 완성된 건담 로봇이 강나현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반현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내... 내 건담 로봇 돌려줘요.”“민아,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네 엄마가 만든 건담 로봇이 튼튼하지 않아서 그래.”반현민이 울먹거리며 말했다.“내일 제출해야 한단 말이에요. 엄마한테 갈래요.”강나현이 반현민을 째깍 붙잡았다.“네 엄마는 널 버렸어. 이젠 숙제 안 도와줄 거야.”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뒤졌다.“다른 사람 불러서 네 엄마가 만든 것보다 훨씬 멋진 건담 로봇을 만들어줄게.”강나현이 아는 이성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반씨 집안에 와서 숙제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건담 로봇은 무슨. 나와서 술이나 마시자. 아가씨들도 몇 명 불러줄게.”강나현이 솔깃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약속 지켜. 난 애기 같은 여자애들이 제일 좋더라.”전화를 끊은 그녀는 숙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결국 중고 거래
심은호가 옆에 앉아 강민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강민아의 눈은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고 옅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문득 무언가 생각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반용화의 시원한 목소리가 귓가에 맑은 샘물처럼 울려 퍼지며 술로 인해 달아오른 열기를 말끔히 씻어주었다.“선생님, 제가 강승을 손에 넣었어요.”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강민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용화에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강민아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심은호의 속눈썹이 살짝 펄럭였다.강민아는 반용화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강민아를 바라봤다.전화기 너머로 계곡물처럼 서늘한 반용화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 반하준이 강승에서 한 짓 다 알아.”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도 덕분에 강나현을 제거했어요. 하지만 절대 용서는 안 해요. 반하준의 타깃은 심은호 씨였거든요.”강민아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심은호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이내 반용화가 말했다.“귀찮으면 내가 걔를 판주 지사로 보낼 수 있어.”강민아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더 놀려먹을 수 있거든요.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를 넘겨받아서 양자 테크가 내 손에 들어왔어요. 부신 그룹은 우영 그룹의 파트너니까 사업에서도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할 거예요.”말하며 강민아의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언젠가 반하준이 판주로 가게 되어도 본인이 원해서 가야 할 거예요.”반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민아는 수화기 너머로 그의 숨소리만 들었다.“선생님?”반용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7년 전의 너로 돌아온 것 같네.”어깨를 움츠리던 강민아의 귓가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가 말했다.“다음 주 승덕 학교에서 축제를 여는데 정이가 공연해요. 석현이가 보겠다고 하면 초대하고 싶은데.”“그래, 말해볼게.”그 순간 심은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민아 씨, 벌써 3분 넘게 날
의아한 건 강민아였다. 반하준은 일부러 이렇게 멍청한 질문만 골라서 하는 걸까.“당신은 부신 그룹 대표니까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과 강나현 중에 누굴 제거하는 게 더 쉬운지는 나도 분간할 수 있어.”반하준이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는 동안 강민아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지금 나서서 반하준과 강나현이 꾸민 짓이라고 하면 그 둘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게 된다.반하준이 강나현을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그의 손을 빌려 강나현을 제거한 뒤 그녀가 쥐 죽은 듯 살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반하준, 또다시 심은호 씨 건드리기만 해.”반하준은 씁쓸하고도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의 소매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강민아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은호를 감싸고 있지만 네 마음은 나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아.”반하준은 본인을 설득하듯 말했고 강민아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 무시해 버렸다.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걱정하지 않는 거고 이 모든 건 반하준이 자초한 거다.그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사이 강민아는 우아하게 눈을 흘기며 쓸데없는 설명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아 씨.”심은호가 강민아 옆으로 다가오자 그를 본 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심은호를 무시한 채 강민아에게 물었다.“우강 그룹을 손에 넣었는데 언제 심은호랑 헤어질 거야?”반하준이 이미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강민아는 잠시 당황했다.심은호는 능글맞게 웃었다.“그쪽 주제 파악이나 하지? 전남편 주제에.”반하준의 한쪽 눈꺼풀이 부자연스럽게 떨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 잘난 척 그만해!”심은호는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아 씨만 잘 나가면 난 계속 잘난 척할 건데?”강민아가 심은호의 팔짱을 끼자 두 사람은 함께 뒤돌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발하며 파티장 전체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비췄다.
친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경 모두가 강나현이 반 대표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데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대로 손을 쓰려고 했네. 반 대표가 체면 때문에 떠들지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겠지. 반 대표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인 것도 모르고.”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멸하듯 말했다.“강나현도 참 멍청해. 반 대표가 마음이 있었으면 강나현 언니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됐겠냐고.”강민아는 우강 그룹 직원 몇 명에게 지시했다.“나현이 아래층으로 데려가요. 지금쯤 구급차가 왔을 테니까.”직원들이 들어와 의식을 잃은 강나현을 들어 올렸다.강나현은 바지와 옷으로 몸을 가린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달콤한 꿈속에 있는 듯했다.손님들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반 대표님.”강민아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반하준은 곧바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단지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두 눈이 금세 반짝이기 시작했다.“그쪽도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쫓아내는 거다.애초에 그녀는 반하준을 강승의 인수식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반하준은 거절했다.“난 강나현과 같은 구급차 안 타!”손님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이어 반하준은 강민아에게 말했다.“부사장님은 이 수갑 풀 열쇠나 좀 찾아주지?”강민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그럼 반 대표님께선 일단 다른 휴게실로 가 계세요.”...반하준이 다른 휴게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강민아의 비서가 들어왔다.“반 대표님, 열쇠를 찾았습니다.”비서는 열쇠로 수갑을 풀었고, 반하준의 손목 상처에 닿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스럽게 수갑을 빼냈다.이어 반하준이 비서에게 말했다.“강민아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비서는 놀란 듯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반 대표님, 손을 그렇게 다쳤는데 안 아프세요?”반하준의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끈적끈적했고 안색은 창백했다.“강민아를 만나야 한다고!”비
심은호의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하준 저 자식이 강민아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있다.조금 전까지 약에 취했어도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심은호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더니, 강민아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심은호는 경멸하듯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반 대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강나현이 왜 기절했지? 옷은 네가 벗긴 거야?”반하준과 강나현 둘이 짠 계략을 반하준의 입으로 직접 말하길 원했다.그들이 먼저 반하준이 한 짓을 밝히면 오히려 반하준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심은호와 강민아는 반하준이 본인이 만든 난장판을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었다.“아니야!”반하준은 곧바로 부인했다.“강나현이 약에 취해 직접 옷을 벗고 여러 번 나를 덮치려고 했어. 난 그저 때려서 기절시킨 것뿐이야!”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아의 눈치를 살폈다.자기 몸이 더럽혀졌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반하준은 수갑에 묶인 두 손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강나현이 나를 묶어두려고 수갑까지 채웠어!”금속 수갑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반하준이 수갑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살갗이 베인 것이다.일부는 살을 파고들어 피와 살이 드러나 끔찍하기까지 했다.손목의 잘린 살점들이 수갑에 뭉쳐있어 하얀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어이쿠!”다친 반하준의 손을 본 손님들은 모두 일제히 충격과 슬픔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이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반하준을 탓할 수가 없었다.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반하준은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도 강나현을 기절시켰는데 강나현의 능력으로 어떻게 반하준의 손에 수갑을 채우겠나.반하준이 직접 손에 수갑을 찬 게 분명했다.심은호도 그녀와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다.단지 모든 책임을 강나현에게 돌리려고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었다.서경에서 강나현을 제일 싸고돌았던 그조차 그녀를 버렸다.아마 오늘 밤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강나현이 반하
강민아는 휴게실로 향했다. 반하준의 계획을 파악하자마자 심은호에게 알리고, 그걸 이용해 반하준과 강나현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선택했다.그녀는 내내 어떻게 두 사람의 계획을 폭로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직접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면 반하준은 오히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며 적반하장으로 굴게 분명하다.이제 심은호가 칼을 건넸으니 그녀는 반하준과 강나현을 폭로하기 위해 휘두르면 그만이다.강민아가 사람을 시켜 열쇠를 가져와 방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콜록!”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뒤로 여러 개의 머리와 크게 뜬 눈이 호기심 가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심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조심해요!”심은호가 선두로 앞장서자 강민아는 그 뒤를 따랐다.그때 강나현이 얼굴에 잔뜩 멍이 든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기절한 듯했다.심은호는 역겨운 듯 고개를 돌렸고, 강민아는 옷을 얇게 입은 강나현의 모습을 보며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 순간, 어두운 구석에서 반하준이 거칠게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강민아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구석에 기대어 앉은 반하준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단추가 여러 개 풀려 있었고 옷깃이 활짝 열린 채 가슴에는 새빨갛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젖은 이마에 붙어 있었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그가 홱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 강민아를 주시했다. 이젠 이 방을 떠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지금 여기서 나가도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아니까.강민아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가운데 낯익은 얼굴 몇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그들은 반하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외쳤다.“반... 반 대표 맞아?”“하준아, 너 어떻게 강나현이랑... 세상에! 남들이
강민아는 태산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반하준과 강나현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일 거다.반하준은 강나현과 짜고 파티에서 심은호의 스캔들을 폭로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필 멍청한 상대와 손을 잡았고 강승 테크 내부를 장악한 강민아의 능력을 간과했다. 반하준은 강승 테크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직원과 접선할 때 그들이 강민아에게 반하준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걸 알릴 줄은 몰랐을 거다.강민아는 그들이 계획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반하준은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매수했다. 그들은 자기가 할 일을 제외하고 남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누구는 휴게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구는 파티에서 심은호에게 술을 건네며, 또 다른 사람은 담당자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주방에서 술에 약을 타는 역할을 했다.그 모든 정보가 강민아의 귀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반하준이 심은호에게 무슨 짓을 할지 전부 파악했다.그리고 강나현은 그중 한 직원에게 약물을 건네는 역할이었다.일부러 디퓨저까지 사서 휴게실에 놓는 걸 강민아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강민아는 강나현과 반하준이 모든 일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디퓨저와 카메라가 있는 방을 바꾸었다.반하준이 심은호의 몸에 와인을 뿌렸을 때 그가 곧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했다.강민아는 오늘 초대된 재벌가 거물급 인사들에게 반하준의 비열한 물밑 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민아 씨!!”갑자기 장내에서 심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심은호가 황급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심은호의 얼굴은 다소 하얗게 질렸고 눈빛에는 의미심장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심 대표, 왜 그래?”누군가 묻자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며 몰려들었다.심은호는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는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방금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옆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들어갔더니 반하준과 강나현이...”심은호는 머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