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여사님인가요? 천사 엔터 실장 전이한입니다. 조금 전 현장에서 따님 공연을 봤는데 혹시 따님을 키즈 모델로 데뷔시킬 의향이 있으신지 궁금해서요. 원래 학교에서 직접 만나서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전이한은 반진경, 장기명, 반연주가 반씨 가문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반진경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야 했다.반진경은 양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갑자기 온몸을 똑바로 세웠다.“천사 엔터 알아요. 내 딸을 눈여겨본 거예요?”순식간에 반진경의 가슴이 두근거렸다.반연주를 대외적으로 공개해서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할 생각도 했지만 영상을 찍을 줄 몰랐고 먼저 자존심을 굽히며 회사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반씨 가문 사람으로서 먼저 엔터 회사를 찾아가 반연주를 연예계에 들여보내면 집안 어른들이 뭐라고 할 게 분명하다.하지만 연예인이 돈을 많이 벌고 반연주가 유명해지면 그녀도 그 덕에 유명세를 치를 거라는 걸 잘 알았다.반진경은 이미 ‘유명 아역 스타’ 반연주의 엄마가 되어 인터뷰하는 상상까지 했다.“좋아요. 내일 딸 데리고 가서 오디션 볼게요.”반진경은 전화를 끊은 뒤 가방에서 파우더 콤팩트를 꺼내 퍼프를 들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장기명이 물었다.“무슨 오디션?”반진경은 파우더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장기명을 바라보았다.“국내 최대 아역 스타 육성 회사 천사 엔터라고 알아?”장기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들어본 적 없어.”반진경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거기 실장한테 연락이 와서 연주와 계약하고 싶다네.”장기명의 눈빛이 반짝였다.“우리 연주 연예인 되는 거야?”그는 흥분했다.“그럼 연주 앞으로 돈도 많이 벌겠네!”반진경은 입꼬리가 올라가며 으쓱해졌다 “허시연에게 돈을 찔러주고 연수를 센터 시키길 잘했어. 덕분에 천사 엔터의 눈에 띄었잖아.”반진경은 화장품을 치우며 반연주에게 손을 내밀었다.“엄마 품으로 와.”그래도 엄마에게 의지하는 아이라 반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진경 쪽
반석현의 몸통이 작은 모래주머니처럼 바닥으로 툭 쓰러졌다.두 눈을 감은 채 얼굴은 창백하고 서리 맞은 잔디처럼 생기를 잃었다.방은 고요했고, 막대기를 잡은 민이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그의 얼굴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과 차가움이 번쩍였다.그의 뼛속에는 반씨 가문 사람들의 타고난 이기심과 무관심이 있었다.바닥에 쓰러진 반석현은 마치 시간의 틈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아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했다.하지만 민이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연 같았고, 생각 없는 어린아이처럼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민이는 막대기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반석현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예전에 반석현과 친했을 때 반석현이 민이에게 비밀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시계에는 위치 추적기가 있는데 화가 나거나 짜증 날 때면 다른 사람이 찾는 게 싫어서 시계를 개조했다는 거다.민이는 반석현이 알려준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반씨 가문의 경호원들은 위성을 통해 반석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민이는 시계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기절한 반석현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밧줄을 꺼내 아주 힘들게 반석현을 묶었다.의식을 잃은 반석현을 바라보는 민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핏기 없는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자신이 반석현을 다치게 했다는 것도,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잘 알기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우리 엄마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꼭 자신에게 되뇌는 말 같았다.“난 이미 엄마를 한 번 잃었어. 엄마를 잃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빼앗아 가!”민이는 힘겹게 움직이며 반석현을 캐비닛 안으로 밀어 넣었다.다친 다리와 발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무릎뼈에 녹슨 못이 박힌 것처럼 어정쩡하게 걸었다.몸의 통증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제 조금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걸으
“화재 경보음이야!”“불이야? 어딘가에 불이 났어?”“냄새가 나! 타는 냄새가 난다고!”부모들은 입과 코를 막고 자리에 있던 선생님들이 외쳤다.“친구들, 당황하지 마요. 다들 줄 서서 얼른 여기서 나가요!”선생님들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경보음이 재촉하듯 울렸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내달렸다.강당에는 의자가 마구 쓰러지고 아이들은 공포와 혼란 속에서 울부짖었다.위층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던 아이들은 넘어지기도 했다.반씨 가문 경호원은 본능적으로 넘어진 아이를 안았고, 한 경호원이 휴대폰을 든 채 말했다.“도련님 위치가 휴대폰에서 사라졌어.”“이미 나갔을지도 몰라. 윤정 아가씨를 만나고 방해받기 싫어서 끈 건 아닐까?”몇몇 경호원들은 난감한 듯 자리에 서 있었다. 강당에 불이 났는데 반석현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이 위험한 곳을 나갈 수가 없었다.“도련님은 똑똑하니까 이런 상황에서 분명 강당을 나갔을 거야. 위험에 빠질 때까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경호원들은 이렇게 합리화하며 아직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강당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료들에게 연락해 반석현을 계속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밤이 짙어 강당의 창가로 불이 번뜩이지만 계속 쏟아져 나오는 연기와 어둠에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겨울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운전석에 앉아 차를 돌리려던 육성민은 코를 움찔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평소 냄새에 예민했던 그는 타는 냄새를 맡았다.‘왜 학교에서 탄내가 나지?’이미 주차장 입구까지 가서 커다란 SUV를 세우자 창가에 앉아있던 강민아는 난간 앞에 서 있는 반하준을 발견했다.서둘러 달려온 비서가 반하준을 불렀다.“대표님, 큰일 났어요. 강당에 불이 났어요!”잠시 멈칫한 반하준은 학교 강당 방향을 바라보며 강당 위층 창문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반현민은?”그가 묻자 비서는 절망하며 말했다.“현민 도련님은... 아직 안에...”반하준은 살벌한
강민아는 딸아이와 함께 서둘러 호텔에 도착했다. 아들의 다섯 번째 생일 파티가 이미 시작되었다.반하준이 아들 곁을 지키고 있었고 촛불의 따스한 빛이 아이의 앳된 얼굴을 비추었다.반현민이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나현 이모가 제 새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그 시각 강민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딸과 생일 케이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몸으로 막은 바람에 몸 절반이 흠뻑 젖어버렸다.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옷이 온몸에 찰싹 달라붙었다.강나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모 말고 형이라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나랑 네 아빠는 형제 같은 친구라서 작은 아빠밖에 못 해.”그녀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나현의 남사친들이었다. 그들도 함께 웃긴 했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반하준에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은 강나현뿐이었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잘 보이려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환하게 웃었다. 강나현이 반현민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민이는 왜 갑자기 새엄마가 갖고 싶어졌어?”그러자 반현민이 재빨리 반하준의 눈치를 살폈다.“아빠가 현이 형을 좋아하니까요.”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강나현은 반현민을 무릎에 앉히고 반하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반하준에게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랑했다.“역시 민이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반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애들 말은 그냥 흘려 들어.”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반하준과 강나현이 죽마고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강나현이 항상 남자들과 어울려 다녀 반하준의 부모님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강민아가 18살이 되던 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왔는데 친정의 희망과 반하준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길렀다.방 안의 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이는 엄마랑 더 친해? 현이 형이랑 더 친해?”“현이 형이
강나현이 반하준을 돌아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가 또 오해했네. 내가 가서 잘 설명할게.”“설명할 것도 없어. 쟤가 너무 예민한 거야.”반하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강민아가 두고 간 생일 케이크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말에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민아가 화를 내면서 가버린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형수 지금 화가 나서 저런 거니까 하준이가 가서 잘 달래면 돼.”“맞아. 형수가 하준이랑 이혼할 리가 없잖아. 하준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어쩌면 나가자마자 후회했을지도 몰라.”“자, 케이크나 먹자. 하준이가 집에 가면 강민아 씨가 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반하준도 그제야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벌써 강민아가 주눅이 든 채 문 앞에 서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반현민은 강나현이 사 온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크림이 입안 가득 퍼져 혀가 얼얼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엄마가 간섭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생일 파티가 끝난 후 반하준은 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창밖의 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가 다시 꺼지곤 했다.“아빠, 몸이 가려워요.”반현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눈을 번쩍 뜨고 조명을 켰다. 반현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손으로 계속 몸을 긁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재빨리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살펴보니 목에 붉은 반점이 가득 돋아있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반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어 입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그의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애가 알레르기가 생겼는데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반하준이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빨리 집으로 가.”그는 반현민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현관 쪽을 바라봤지만
사실 오소정더러 강민아에게 전화하라고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한발 물러선 반하준이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했어요.”“콜록콜록.”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오소정이 뭔가 눈치채고 물었다.“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반하준의 호통에 주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겁에 질린 오소정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반하준이 손에 든 머그컵을 꽉 쥐었다.‘안 돌아올 리가 없는데? 지금쯤이면 점심에 회사로 가져올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예전에 그가 화를 낼 때면 강민아는 직접 회사로 도시락을 가져와 화해를 청하곤 했었다....식탁에 앉은 반우정이 아침상을 보고 두 눈을 번쩍 떴다.“와. 닭죽이다.”닭죽을 좋아하는 반우정과 달리 반현민은 닭죽만 보면 헛구역질을 했다.반하준과 반현민 모두 죽을 좋아하지 않아 반씨 저택에 있을 땐 죽을 거의 끓이지 않았다.연진숙은 죽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했었다. 쌀이 부족해서 죽으로 끓여 먹는 거라고 말이다. 반씨 가문 사람들은 삼시 세끼를 과학적인 영양 균형에 맞춰 섭취했다.강민아는 죽도 영양아가 있고 아이들에게 먹이면 소화가 더 잘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에 닭고기와 야채 등을 넣으면 음식쓰레기 같다면서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그리고 반현민에게 먹이려고 야채죽을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반현민이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 다시는 죽을 끓이지 않았다.반현민에게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혼내자 반현민이 화를 내면서 따졌다.“이건 돼지들이나 먹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먹일 수 있어요? 역시 엄마는 촌뜨기라니까요.”옛 생각에 강민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우정은 벌써 닭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그러고는 트림하면서 설거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그릇을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할머니 집에 와야만 닭죽을 먹을 수 있는 거예요?”강민
휴대폰 너머의 반하준은 진작 전화를 끊어버렸다.강민아는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검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도로 양쪽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은색 볼보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번개처럼 달려갔다.강민아는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차를 이렇게 빨리 몰아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계기판의 수치와 함께 아드레날린도 폭발했다.현란한 색상의 스포츠카 세 대를 연속 추월하자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대박. 저 사람 누구야?”다른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부하에게 지시했다.“저 차 번호판 좀 조회해봐.”강민아는 개조된 스포츠카들을 가볍게 제쳤고 커버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몇몇 재벌 집 자제들이 낀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습니다. 강씨 가문의 차입니다.”누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강씨 가문? 그럼 운전자가 강나현인가?”“강나현이 운전 저렇게 잘한다고? 그럼 전에 우리랑 레이싱할 때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은색 볼보가 산길을 따라 뱅글뱅글 올라갔고 뒤에 검은색 페라리가 바짝 따라붙었다.심은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눈썹 앞으로 툭 내려왔다.그는 한때 카리스마가 넘쳤던 강민아를 본 적이 있었다.강민아는 14살에 고연대학교 영재반에 입학하여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3년 연속 우승한 천재였다. 19살에는 자동차 경주 연맹에 지원하여 레이싱 면허를 취득한 후 월드 랠리 챔피언십에서 10위 안에 들었다.그녀의 인생은 꽃길이었고 항상 꽃과 박수갈채가 함께했다.그런데 박사 공부를 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학업을 포기하더니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재벌가 전업주부가 되었다.그 후로 그녀의 차에는 카시트가 설치되었고 시속이 70㎞를 넘은 적이 없었다.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면서 귀를 째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때 강민아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심은호의 페라리가 그
강나현이 비닐봉지를 들고 개조된 오토바이에서 내렸다.딱 붙는 요가 바지를 입은 여자를 본 경비원의 표정이 거의 넋이 나갔다.강나현은 풀어헤친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미리 반현민의 반을 알아본 그녀는 담임 선생님을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갔다.“안녕하세요. 민이한테 왁스 병 캔디를 주러 왔어요. 듣자 하니 다른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다면서요?”담임 선생님이 강나현을 훑어보며 물었다.“혹시 현민이한테 왁스 병 캔디를 준 게 당신이에요?”강나현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네. 제 친구가 만든 건데 최고급 식용 왁스로...”“당신이었군요. 당신 때문에 우리 아들이 질식할 뻔한 거 알아요?”그녀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강나현이 돌아서자마자 찰진 소리와 함께 뺨 한 대를 얻어맞았는데 그 순간 눈앞이 다 캄캄해졌다.“왜 때려요?”“당신 때문에 우리 애가 죽을 뻔했다고요.”남에게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강나현이 아니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핥더니 몇몇 학부모들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어린이집 하원 시간, 반우정은 데리러 온 강민아에게 강나현이 얻어맞던 광경을 아주 실감 나게 묘사했다.강나현이 얻어맞는 걸 보고 반현민이 도와주려 하자 반우정이 반현민의 옷깃을 붙잡고 끌고 갔다고 했다.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든 강나현은 반현민을 데리고 선생님에게 조퇴를 신청했다.다른 어머니들도 강나현을 알아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이 무슨 욕을 하는지 반우정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험한 욕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반우정이 카시트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을 바라봤다.“엄마,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아이의 반짝이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강민아가 대답했다.“마지막이야.”...“사모님, 아가씨, 드디어 오셨군요.”오소정은 강민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민아가 집을 나간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택의 도우미들은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녀가 대답했다.“
“화재 경보음이야!”“불이야? 어딘가에 불이 났어?”“냄새가 나! 타는 냄새가 난다고!”부모들은 입과 코를 막고 자리에 있던 선생님들이 외쳤다.“친구들, 당황하지 마요. 다들 줄 서서 얼른 여기서 나가요!”선생님들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경보음이 재촉하듯 울렸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내달렸다.강당에는 의자가 마구 쓰러지고 아이들은 공포와 혼란 속에서 울부짖었다.위층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던 아이들은 넘어지기도 했다.반씨 가문 경호원은 본능적으로 넘어진 아이를 안았고, 한 경호원이 휴대폰을 든 채 말했다.“도련님 위치가 휴대폰에서 사라졌어.”“이미 나갔을지도 몰라. 윤정 아가씨를 만나고 방해받기 싫어서 끈 건 아닐까?”몇몇 경호원들은 난감한 듯 자리에 서 있었다. 강당에 불이 났는데 반석현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이 위험한 곳을 나갈 수가 없었다.“도련님은 똑똑하니까 이런 상황에서 분명 강당을 나갔을 거야. 위험에 빠질 때까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경호원들은 이렇게 합리화하며 아직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강당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료들에게 연락해 반석현을 계속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밤이 짙어 강당의 창가로 불이 번뜩이지만 계속 쏟아져 나오는 연기와 어둠에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겨울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운전석에 앉아 차를 돌리려던 육성민은 코를 움찔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평소 냄새에 예민했던 그는 타는 냄새를 맡았다.‘왜 학교에서 탄내가 나지?’이미 주차장 입구까지 가서 커다란 SUV를 세우자 창가에 앉아있던 강민아는 난간 앞에 서 있는 반하준을 발견했다.서둘러 달려온 비서가 반하준을 불렀다.“대표님, 큰일 났어요. 강당에 불이 났어요!”잠시 멈칫한 반하준은 학교 강당 방향을 바라보며 강당 위층 창문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반현민은?”그가 묻자 비서는 절망하며 말했다.“현민 도련님은... 아직 안에...”반하준은 살벌한
반석현의 몸통이 작은 모래주머니처럼 바닥으로 툭 쓰러졌다.두 눈을 감은 채 얼굴은 창백하고 서리 맞은 잔디처럼 생기를 잃었다.방은 고요했고, 막대기를 잡은 민이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그의 얼굴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과 차가움이 번쩍였다.그의 뼛속에는 반씨 가문 사람들의 타고난 이기심과 무관심이 있었다.바닥에 쓰러진 반석현은 마치 시간의 틈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아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했다.하지만 민이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연 같았고, 생각 없는 어린아이처럼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민이는 막대기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반석현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예전에 반석현과 친했을 때 반석현이 민이에게 비밀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시계에는 위치 추적기가 있는데 화가 나거나 짜증 날 때면 다른 사람이 찾는 게 싫어서 시계를 개조했다는 거다.민이는 반석현이 알려준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반씨 가문의 경호원들은 위성을 통해 반석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민이는 시계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기절한 반석현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밧줄을 꺼내 아주 힘들게 반석현을 묶었다.의식을 잃은 반석현을 바라보는 민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핏기 없는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자신이 반석현을 다치게 했다는 것도, 그 대가가 무엇인지도 잘 알기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우리 엄마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꼭 자신에게 되뇌는 말 같았다.“난 이미 엄마를 한 번 잃었어. 엄마를 잃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빼앗아 가!”민이는 힘겹게 움직이며 반석현을 캐비닛 안으로 밀어 넣었다.다친 다리와 발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무릎뼈에 녹슨 못이 박힌 것처럼 어정쩡하게 걸었다.몸의 통증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제 조금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걸으
“반 여사님인가요? 천사 엔터 실장 전이한입니다. 조금 전 현장에서 따님 공연을 봤는데 혹시 따님을 키즈 모델로 데뷔시킬 의향이 있으신지 궁금해서요. 원래 학교에서 직접 만나서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전이한은 반진경, 장기명, 반연주가 반씨 가문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반진경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야 했다.반진경은 양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갑자기 온몸을 똑바로 세웠다.“천사 엔터 알아요. 내 딸을 눈여겨본 거예요?”순식간에 반진경의 가슴이 두근거렸다.반연주를 대외적으로 공개해서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할 생각도 했지만 영상을 찍을 줄 몰랐고 먼저 자존심을 굽히며 회사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반씨 가문 사람으로서 먼저 엔터 회사를 찾아가 반연주를 연예계에 들여보내면 집안 어른들이 뭐라고 할 게 분명하다.하지만 연예인이 돈을 많이 벌고 반연주가 유명해지면 그녀도 그 덕에 유명세를 치를 거라는 걸 잘 알았다.반진경은 이미 ‘유명 아역 스타’ 반연주의 엄마가 되어 인터뷰하는 상상까지 했다.“좋아요. 내일 딸 데리고 가서 오디션 볼게요.”반진경은 전화를 끊은 뒤 가방에서 파우더 콤팩트를 꺼내 퍼프를 들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장기명이 물었다.“무슨 오디션?”반진경은 파우더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장기명을 바라보았다.“국내 최대 아역 스타 육성 회사 천사 엔터라고 알아?”장기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들어본 적 없어.”반진경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거기 실장한테 연락이 와서 연주와 계약하고 싶다네.”장기명의 눈빛이 반짝였다.“우리 연주 연예인 되는 거야?”그는 흥분했다.“그럼 연주 앞으로 돈도 많이 벌겠네!”반진경은 입꼬리가 올라가며 으쓱해졌다 “허시연에게 돈을 찔러주고 연수를 센터 시키길 잘했어. 덕분에 천사 엔터의 눈에 띄었잖아.”반진경은 화장품을 치우며 반연주에게 손을 내밀었다.“엄마 품으로 와.”그래도 엄마에게 의지하는 아이라 반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진경 쪽
하지만 오늘 강당에서 웃음거리가 된 건 반진경과 장기명이었다.“민아 씨!”여러 명의 학부모가 다가와 강민아를 둘러쌌다.“우린 만장일치로 반진경을 학부모회장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고 다들 민아 씨가 회장이 되길 바라는데 어떻게 생각해요?”강민아를 찾아온 학부모들은 평소 강민아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었고, 반진경과 자주 어울리던 무리의 사람들을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말씀은 고맙지만 전 제 딸을 돌보기도 바빠서요.”강민아는 정중히 거절했다.정이와 민이가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강민아는 능력을 발휘해 정이와 민이를 챙겨주려고 학부모회장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었다.하지만 자신만만하게 발표를 준비하고 있을 때 연진숙은 반진경이 회장이 되길 바란다며 반하준이 말을 전했다.“그 피피티는 누나한테 줘.”“왜? 나도 반진경 씨만큼 할 수 있는데.”그녀의 말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고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남자의 짜증을 느끼며 그녀는 숨이 턱 막혔다.“당신은 부신 그룹 후계자 엄마야. 현민이 키우는 데만 집중하면 돼! 학부모회장까지 할 여유가 어디 있어?”그런데 이젠 남들이 그 자리를 내밀어도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회장은 선거로 뽑는 거죠?”정고은이 조용히 묻자 다른 학부모가 답했다.“네, 그런데 지금 반진경 씨가 갑자기 교체되어서 저희도...”학교에서 반진경의 평판이 무너지긴 했어도 그녀 대신 다음 회장이 되면 반진경의 눈엣가시가 되기에 모두 꺼리고 있었다.많은 사람 중 강민아만 그녀와 맞설 수 있어서 그들도 자연스럽게 이를 강민아에게 떠넘기려 한 것이었다.정고은이 훨씬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저... 제가 해봐도 될까요?”동그란 두 눈에 의욕이 담기자 학부모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이번 축제에서 정고은이 보조 교사로 아이들 춤 연습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의 존재도 잊을 뻔했다.“설윤 어머님, 학부모회장 하시려고요?”다른 학부모들은 그녀의 성격상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걱정하고 있었다.“만약 고은 씨가 하겠다면 제가
오늘 강당에서 벌어진 일로 동료들이 한동안 그녀를 비웃기에 충분했다.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히려 안도했다.학교로 돌아가 다시 수업한다면 그녀는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을 거다.하지만 학교에서 해고된 게 내키지만은 않았다. 허시연은 정고은을 쏘아보았다.“정고은 씨,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 없을 테니까 그동안 참아왔던 말 전부 다 해야겠어요. 난 당신이 미워요!”허시연은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정고은은 의아한 표정을 드러냈다. 처음 허시연을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알 수 없는 적대감을 드러냈었다.이내 허시연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임신하고 애를 낳을 거면 왜 플라워 무용 콩쿠르에 나가서 국내 모든 상을 다 가져갔어요? 당신에게 진 사람들은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받은 상이 없어서 더 좋은 배역을 따내지 못하고 더 좋은 극단에 들어가지 못한 거예요. 멍청하게 사랑에 빠진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망가졌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플라워 무용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다면 학교에서 어린이반 아이들에게 춤이나 가르치는 게 아니라 더 큰 무대에 섰을 거예요!”말하면서도 화가 난 허시연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두 눈은 붉어지고 볼은 부풀어진 채 은상을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갑작스러운 정고은의 등장으로 서경의 무용수들은 모두 그녀의 들러리가 되었다.정고은은 전성기에 은퇴했고, 그녀와 함께 수백 번의 카바레 공연을 함께했던 B급 단원들은 다시는 A급 단원으로 활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녀에게 버림받았다.정고은은 고개를 낮게 숙이고 온몸을 감싸는 어둠에 휩싸였다. 앞으로 맞잡은 손의 손톱이 여린 살갗을 파고들었다.“미안해요...”그녀가 미약한 소리로 말하는데 문득 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고개를 들자 옆에 있던 강민아였다.“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어요.”강민아는 고개를 돌려 허시연에게 차분
정고은의 속눈썹이 펄럭이며 깃털 같은 검은색 속눈썹이 눈물로 젖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들어갈 건가요?”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정이가 알아서 하겠죠. 설윤이도 도와주잖아요.”강민아와 정고은은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다.정고은은 걸음을 멈춘 채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전 민아 씨가 부러워요.”강민아가 고개를 돌리자 정고은이 물기 어린 부드러운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원래도 천재였는데 단지 어둠에 가려진 것뿐이잖아요. 반씨 가문을 떠나도 여전히 잘살고 있고... 사모님이란 타이틀이 없어도 강승 테크 부사장에 심은호 씨 여자 친구에... 하지만 많은 여자들은 집을 떠나면 아무것도 없게 돼요.”강민아가 이룬 것들을 말하며 정고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강민아의 미래가 그녀에겐 영영 닿을 수 없는 곳 같았다.강민아와 정고은은 깊은 사이가 아니었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상대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곤 했다.그들은 혹시나 과거의 후회와 아쉬움을 불러일으킬까 봐 서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그래서 학교에서 만날 때도 그저 가볍게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정고은은 수없이 여러 번 강민아와의 카톡 대화창을 열고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녀를 방해하기 싫었고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포기했다.강민아가 그녀에게 말해주었다.“고은 씨는 16살에 서경 예술대학에 입학한 천재이자 서경 예술 극단의 수석 무용수잖아요. 매번 공연하면 티켓이 전부 매진인데...”“출산 후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됐어요.”무용수는 젊음을 먹고 사는 직업인데, 임신하자 진심으로 그녀를 위하는 많은 사람이 낙태를 권유했지만 그녀는 무대와 영원히 작별하는 길을 택했다.정고은이 시선을 내리자 눈가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난 그쪽처럼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어요. 이제 난 아무리 노력해도 열일곱, 열여덟 살의 젊은 나를 따라잡을 수 없어요!”강민아는 그녀를 쳐다보지 못한 채 말을
정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귤 사탕을 꺼내며 실망한 듯 말했다.“대상만 받으면 여사님이 연주가 사탕 먹는 거 동의할 줄 알았어요.”강민아가 딸을 다독였다.“연주에게 사탕 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정이는 작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엄마, 저 사람 찾아가도 돼요?”강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원수가 아니잖아.”정이는 반하준에게 걸어가 두 손을 펼쳐 손바닥에 놓인 사탕 한 알을 보여주면서 팔을 들었다.반하준은 마음이 들뜨며 깊은 눈동자가 동요했다.“나한테 주는 거야?”“아저씨, 저 대신 이 사탕 연주에게 좀 전해주세요.”반하준의 반짝이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기꺼이 도움을 청하는 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이의 손에서 사탕을 가져갔다.“그래, 내가 사탕 연주에게 전해줄게.”정이는 두 손을 다리 옆에 딱 붙인 채 반하준을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아저씨!”다시 한번 반하준을 마주할 때 정이는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었다.그동안 그녀에게 반하준은 늘 거대하고 낯선 나무 같은 존재였다. 정이는 아빠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고 반하준도 늘 무심하게 대했다.기억 속 반하준은 한 번도 정이를 안아준 적이 없어 한번은 강민아에게 물어보기도 했다.“제가 어렸을 때 아빠가 안아준 적 있어요?”“있지...”강민아가 멈칫하며 눈가에 담긴 슬픔을 감췄지만 정이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걸 예리하게 알아차렸다.이제 그녀는 더 이상 반우정이 아니기에 반하준을 태연하게 마주하며 그에게 말을 걸 용기도 생겼다.정이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폴짝폴짝 강민아를 향해 달려갔다.강민아는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고개를 숙인 백강훈이 휴대폰을 확인하자 조금 전 연락을 보냈던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다.[저 꼬마를 만나보고 싶네요. 내가 찾던 인재인 것 같아요.]백강훈은 그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강민아와의 관계를 오해했다는 생각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글을 입력했다.[기회 되면 만남을 주선해 보죠.]백강훈 옆에
갑자기 강한 힘이 반진경의 팔을 움켜쥐고 온몸을 뒤로 끌어당겼다.“악!”반진경이 소리를 지르며 격분해 고개를 돌려보니 장기명이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그만해!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지 알아? 창피하지도 않아!”장기명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자 반진경의 분노는 더욱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어떻게 감히 나한테 뭐라고 해?”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장기명이 낮게 윽박질렀다.“창피한 짓 그만해. 정말 강윤정을 때리면 반씨 가문에서의 처지도 난감해지고 연주와 나까지 너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 거야!”화가 난 반진경과 달리 장기명은 그녀보다 침착했다.반하준이 강민아를 위해 나서서 반진경을 막는 것을 보고 강민아가 아무리 반하준과 이혼했어도 반진경이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또한 반진경이 꿈에서도 강민아를 짓밟으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호화로운 정원에 야생 동물이 침입하면 정원의 주인이 외래종을 쫓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반진경은 강민아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났지만 지금 이런 행동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건 잘 안다. 장기명은 지금 그녀를 막지 못하면 자신도 덩달아 심연으로 떨어질 것임을 알았다.장기명은 큰 손으로 반진경의 뒤통수를 잡고 억지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게 했다.“제가 진경이를 대신해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요즘 기력이 없고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런 거니까 다들 이해해 주세요.”이윽고 장기명은 반진경의 어깨를 힘껏 잡고 정이와 마주 보게 했다.그는 반진경의 머리 뒤쪽을 꽉 쥐고 누르려고 했지만 반진경의 목은 마치 철근이 박힌 것처럼 그의 힘에 저항하고 있었다.장기명은 반진경 대신 이렇게 말했다.“윤정아, 아저씨가 고모 대신 사과할게.”그는 웃으며 강민아에게도 말했다.“진경이가 성질 더러운 거 알잖아요. 내가 잘 얘기할게요.”“아저씨, 그럼 연주는...”“당연히 너희랑 같이 간식 먹어도 돼. 워낙 위가 안 좋고 고기 냄새를 못 맡아서 채식을 먹게 한 거야
정이의 시선이 단상 아래 학부모들을 지나 장기명 옆에 서 있는 소심한 반연주에게 향했다.뜨거운 열기가 마음에 밀려오며 강민아가 왜 반진경과 내기할 때 반연주도 언급했는지 알 것 같았다.엄마는 그녀가 무대에 올라서서 용기를 내 반진경의 행위를 폭로할 때 고작 다섯살밖에 안 됐지만 줄곧 인정할 수 없었던 일도 말하길 바랐던 것이었다.“제가 아는 연주는 줄곧 채식주의자였고 고기나 우유, 계란도 먹을 수 없었어요. 우리와 함께 점심이나 디저트도 먹지 못했고 늘 배가 고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연주가 자꾸만 이유 없이 기절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반 여사님이 약속한 대로 연주가 우리와 함께 학교에서 점심과 디저트를 먹는 걸 허락해 주길 바라요. 만약 반 여사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우린 미워할 거예요!”무대 아래에서 아이들이 소리치자 다른 아이들도 거들었다.“약속 안 지키는 사람 학교에서 보기 싫어요!”“반 여사님은 학부모회장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반장이나 조장이 되면 약속을 꼭 지켜야 해요!”“연주가 자꾸만 쓰러지는데 이건 딸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아이들의 솔직한 말에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이 수군거렸다.“반진경은 임신했을 때부터 채식했어. 애도 같이 채식해야 복을 받는다고.”“전에 우리도 말렸잖아. 연주가 어려서 풀만 먹이면 안 된다고. 어려서부터 채식해야 아들을 낳는다고 했어. 연주는 남동생의 복을 쌓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반진경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학부모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이 백강훈은 고개를 내밀고 객석을 바라보다가 교장에게 물었다.“연주란 아이가 조금 전 백조의 호수 센터인가요?”“네, 맞습니다.”교장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사이 백강훈이 말했다.“등장할 때 더 어린 학생인 줄 알았네요. 또래 친구들보다 발달 격차가 너무 커서 앞으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에서 책임져야 할 것 같은데요.”교장도 어쩔 수가 없었다.“반연주 학부모가 채식주의자라 학교에서도 부모의 육아